예수님이 꿈꾸시는 사랑의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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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본문 해설

마태복음 6:11–12 NKRV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는 지난 주일의 설교를 통해서 넓게는 삶으로서의 예배와 좁게는 형식으로서의 예배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그리고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형제를 용서하지 못하게 가로막아 화목하지 못하게 하는가를 탐구해 보았다. 또한 실제적으로 우리 마음 안에서 형제를 용서하려면 어떤 과정을 따라야 하는지에 대해도 알아보았다.
오늘 이 시간에는 같은 본문을 토대로 형제를 미워하고 화목하지 못한 것이 왜 그렇게 큰 죄인지를 하나님의 사랑의 계획이라는 넓은 틀 안에서 살펴보려고 한다.

II. 예수님이 꿈꾸시는 사랑의 공동체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은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좌절된 것 같았던 하나님의 계획을 이 세상에 하나의 계획을 이 세상에 실행하시기 위함이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의 계획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온 인류로 하여금 서로가 서로를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이 계획은 원래 처음 조상들을 창조하실 때부터 하나님의 마음 안에 있었던 것인데 그들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잠시 좌절된 듯 보였다.
그리하여 죄가 들어오고 인간은 서로를 자신의 몸처럼 소중하게 여겨 사랑하기보다는 미워하고 원망하게 되었다(창 3:12). 급기야 작은 시기심 때문에 형제가 형제를 살해하기까지 이르렀다(창 4:8). 아주 작은 손해에 대해 커다란 복수를 꿈꾸고 실제로 그렇게 행하면서 살았다(창 4:24). 그래서 하나님은 타락한 죄인들을 구원하실 계획을 선포하셨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그 계획 안에서 모든 인류를 자기의 몸과 같이 사랑하게 하고자 하셨다.

A. 예수가 꿈꾸던 공동체.

첫째로, 우리가 먼저 예수가 꿈꾸던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어떠한 것이었는지에 대해서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죄 때문에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공동체를 어떻게 사랑의 공동체로 만들 수 있는지 그리고 그 대안이라고 할 수 있는 상호 용서가 얼마나 어려우면서도 중요한 일인지에 대해 살펴보아야 한다.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둘로 나누는 최초의 분기점은 그분이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것이다. 원래 세례는 죄를 싣는 상징적 의미였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예수는 결코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예수는 절대적으로 무죄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구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왜 그러셨을까?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다른 인간들처럼 죄를 씻는 징표로서 받으신 것이 아니었다. 예수께서 메시아로서 취임하시는 것을 공식적으로 선포하는 의미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것이었다. 이때 삼위일체 하나님은 당신의 임재를 보여주셨다. 이로써 예수의 사생애는 끝나고 공생애가 시작되었다.
우리는 먼저 예수께서 지상에 세워지길 바라셨던 공동체가 바로 사랑의 공동체였다는 사실을 기억하여야 한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세우고자 하셨던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이상은 그분이 제자들에게 가르켜주신 기도 곧 주기도문에 가장 잘 나타났다. 그리고 그 구성원, 곧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의 그들의 인격과 생활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산상수훈의 가르침 속에 나타났다. 우리는 여기서 산상수훈과 주기도문 그리고 나머지 신약 성경의 교훈과 가르침의 관계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산상수훈은 주기도문에 나타난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 대한 이상을 더 상세하게 해설한 것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다른 교훈과 그분을 뒤이은 사도들의 가르침, 곧 신약 성경 전체는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확장한 것이다.
김남준 목사님 코멘트
이렇게 세 개의 원을 생각하면 돼요. 제일 중심에. 있어 그러니까 이건 예수 이 기도는 예수님이 가르쳐줘야 되겠다고 즉석에서 생각해내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평소 하셨던 기도의 패턴을 보여줘요. 패턴. 그거보다 더 자세하게 아시듯이 그런데 그 패턴은 크게 7개의 간구로 이루어져 있다. 이거야. 마지막에 영광이 영원히 싸움 나이다라는 그거는 후대에 첨가된 거예요. 원래 주기도문이 아니야. 그 7개가 있었는데, 그 7개의 기도가 뭐냐면 예수님이 이 땅에 세우시기를 원했던 정확하게 말하면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이 있고 난 후에 세워질 그런 미래의 공동체에 대한 예수님의 이상을 보여준 거예요. 이런. 그런데 간구했다는 거는 뭘 의미해? 선제적으로 그렇게 안 됐다는 거잖아. 공기를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교인은 없잖아. 그러니까 없으니까 달라고 그러는 거 아니야. 그런데 그 7가지 기도 제목이 다 이루어진 사회가 예수께서 꿈꾸시던 사회인데 잘 들어요. 그 사회 속에 있는 구성원들이 어떤 사람 됨과 다시 말하면 인격과 성품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것은 그 7개의 간구를 확장한 거야. 그게 마태복음 5, 6, 7장이야. 그리고 나머지 신약성경은 그 5, 6, 7장을 더 상세하게 설명한 거예요. 주기도문이 얼마나 중요한가. 알 수 있겠지. 그렇죠? 그래서 칼빈 시절에는 말이야. 교인이 새로 오잖아. 그러면은 주기도문만 1년을 가르쳤어요. 새가족 과정을 마치는 데 3년이 걸렸습니다. 3년. 그래서 주기도문 1년, 사도신경 1년, 십계명 1년. 그런데 지금 요즘에 주기도문이라고 쓴 책들을 보면은 말이야. 이렇게 말하면 내가 또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너무 내용이 없는 책들이 돌아다닌다 이거예요. 그러니까는 저 책 주기도문 하나만 공부를 해도 기독교 신앙 전체를 꿰뚫는 말하자면은 체계가 생긴다. 체계가 가르쳐야 돼. 그렇게 용사들이 문제 중에 그다음
그러면 예수의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 용서와 화목에 관한 교훈은 무엇이고 그것들은 당시 그들의 신앙에서 어떤 위치를 갖는가 우리는 이 설교에서 그 질문에 집중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볼 것이다. 주기도문에 나타난 용서와 화목의 교훈은 7개 간구 중 다섯 번째 나타나 있다.
마태복음 6:12 NKRV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예수께서는 자신이 지상에 세우고자 하는 기독교 공동체가 완전하고 순수한 공동체이기를 바라셨으나 그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셨다. 그것은 크게 세 가지 때문이었다.
첫째로는 세상의 불완전성 때문이었다. 비록 당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구원이 전파될 것이지만 세상에는 여전히 불신자들의 죄악이 있을 것임을 아셨다. 그리고 그런 세상은 그분이 꿈꾸시던 공동체의 삶의 환경이 되어 신자들에게 영향을 끼칠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둘째로는 아직도 완전히 끝나지 않은 사탄의 역사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서 사탄의 머리와 등뼈를 박살 내버려 무력화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의 역사가 여전히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신자라면 언제든지 믿음으로 그것을 대적하여 이길 수 있다. 그러나 믿음이 연약한 자들은 미혹을 받아 속임을 당하기도 한다.
셋째로는 구원 받은 공동체 구성원들 자신도 자기의 마음 안에 잔존하는 죄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예수가 꿈꾸셨던 지상의 공동체는 완전한 사랑의 공동체였다. 그러나 앞에서 설명한이유들 때문에 현실적으로 그 공동체가 완전하지 않을 것을 아셨다.
그래서 그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셨는데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자들이 서로 자신들에게 죄를 지은 자를 피차 용서하고 화목하게 하시게 하시는 것이었다. 화목하게 지내게 하시는 것이었다.

B. 불완전한 공동체에 대한 대안.

두 번째로는 예수께서 그렇게 불완전한 공동체에 대한 대안을 세워 놓으셨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꿈꾸시던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 대한 이상이 단번에 완전한 공동체를 창조하시고 모든 것을 종료하시는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 나라 사이의 긴장 관계 속에서 불완전한 공동체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세상 끝날까지 점진적으로 온전하게 되어 가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그 공동체의 완전한 이상과 현실적 위치는 종말에 이르기까지 유보되었다는 사실을 아셨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불완전한 세상으로부터 받을 죄의 영향과 사탄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방법 그리고 교회 공동체가 세상과 구별되도록 순전함을 유지하는 방법을 강구해 놓으셨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들 사이에 용서를 통한 화해와 일치가 이루어지게 하시는 것이었다. 이기심, 교만 그리고 영혼에 대한 무관심 때문에 미움이라는 죄가 현실적인 교회 공동체 안에서 피할 수 없이 일어날 것이 분명하였다.
그러하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어려움들을 해결하고 교회의 신자들이 서로 화해와 일치를 이루는 방법을 준비하셨다. 그것이 바로 형제들이 서로를 용서하는 것이었다.
주기도문에서 이 용서의 간구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고 한 네 번째 간구 바로 뒤에 나온다. 정확히 말해서 간구가 한 문장 안에 들어있다.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께서 이 땅에 세우시고자 했던 초기 기독교 공동체뿐만 아니라 오고오는 세대의 모든 교회 구성원들에게 현실적으로 닥치게 될 필요와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육체를 위한 양식의 나눔과 영혼을 위한 용서의 베품이었다. 현실적으로 교회 공동체 안팎에는 언제나 가난한 사람들이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 중 상당수의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자선을 통해서 양식을 공급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더욱이 이 양식의 문제를 예수 당시의 사회적 맥락에서 본다면 그러한 일은 더욱더 불가피하고 현실적인 것이었을 것이다.
주 1세기 로마 제국의 국민 전체 평균 수명은 25-35세 정도였고 5세 이하 유아 사망률은 50% 정도였고 10세 이전에 사망하는 비율이 60%에 달했다. 65세 이상 생존자는 인구 전체의 4.7%에 불과했다. 팔레스타인 지역은 기본적으로 농업 기반 사회였으나 로마 정부는 막대한 양의 세금을 현물, 주로 곡물로 징수했다. 따라서 수확량이 적을 경우 심각한 빈곤과 기근으로 이어졌다.
교회가 고아와 과부들을 돌보는 일은 깊은 관심을 가질 뿐만 아니라 그들을 돕는 것이 곧 경건이라고 가르쳤던 것도 바로 이와 같은 시대적 배경 때문이었다.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기적을 통해 그들에게 양식을 공급하는 사건들이 중요하게 부각된 것도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마 6:32, 막 8:8).
이처럼 예수께서 주기도문에서 일용할 양식을 하나님께 간구하도록 가르친 것은 그 당시 사회의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너무나 자연스럽고 절실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나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셨고” 라고 가르치는 대신에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라고 가르치셨다(마 6:11).
이는 예수께서 세우고자 하셨던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먹고사는 문제를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의 문제로 보고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양식의 문제를 공동체, 즉 좁게는 교회, 넓게는 인류 공동체 차원에서 생각하기를 바라셨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잠 25:21, 마 15:32, 롬 12:20).
그런데 육체가 양식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영혼을 위해 교회 공동체가 함께 가져야 할 중요한 관심사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용서였다. 따라서 나눔(sharing)과 용서(forgiving)는 예수께서 꿈꾸셨던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생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면서도 일상적이어야 할 덕목이었다.
그들에게 “나눔”이 육체를 위한 자선이었다면 “용서”는 영혼을 위한 자선이었다. 이 두 가지 일이 모두 아가페 사랑에서 비롯되는 것이 분명한데 “나눔(sharing)”은 양식을 독점하려는 이기심을 비워야 가능하고 “용서(forgiving)”는 여전히 자신의 상처를 붙들고 있는 빗나간 자기 사랑을 극복해야 가능한 것이었다.
예수께서 이 지상에 세우고자 했던 초기 신앙 공동체에 있어서 형제들이 서로를 용서하는 것은 양식을 서로 나누는 것보다 더욱 절실히 필요하였다. 왜냐하면, 만약 그들이 서로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공동체의 인간관계는 미움과 상처 그리고 복수와 그 복수에 대한 복수가 꼬리를 물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그리스도의 교회는 타락하고 악한 세상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초대 교회에서는 자신에게 잘못한 형제를 용서하고 포용하는 것은 가장 우선적으로 훈련받는 덕목이었을 것이다.

C. 용서하는 일의 어려움

세 번째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미워하는 사람을 용서하는 일은 여전히 매우 어려웠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특히 자선이라는 나눔보다 자신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는 일이 더욱 어렵다는 사실은 예수께서는 너무나 잘 알고 계셨다. 이러한 사실은 마태복음에서 주기도문을 가르치신 바로 직후에 용서라는 주제만 따로 뽑아서 그것에 관한 강론을 다시 펼치신 것을 보아서도 잘 알 수 있다.
마치 예수께서 실제적으로 용서가 얼마나 실천하기 어려운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교회가 공동체 생활을 영위해 가는 데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강조하시려는 것처럼 보인다(마 6:14-15).
김남준 목사님 코멘트
굉장히 특이하지. 그지? 주기도문에서 가르치셨잖아. 7개 간구를 가르치셨는데 그중에서 딱 하나를 다시 뽑아. 그게 용서에 관한 거야. 그러면서 우리가 지난 시간부터 살펴보는 마태복음 5장 21절에서 24절의 이야기를 확장해 나가시는 거야. 그러니까 그게 그 7개의 간구 중에서 5번째 간구가 얼마나 교회에 치명적인 것이며 또 얼마나 그것이 실제적으로 무시되기 쉽고 실천하기 어려운가 하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쐐기를 박듯이 다시 한번 상세하게 설명하십니다. 그거를 너희의 하나님의 백성된 표로 삼아라. 쐐기를 박으시는 거예요. 계속해서
예수께서는 용서와 화목에 대한 반복되는 가르침에서 미움의 심각성을 진지하고 간곡하게 말씀하신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더욱이 용서에 관한 반복된 교훈에서는 형제를 용서하지 않는 것의 심각성을 하나님의 심판과 관련하여 강력하게 경고하셨다.
그것은 살인과 미움이 사실상 같은 뿌리며 특히 이것을 언어로서 바깥으로 쏟아놓는 행위, 곧 형제에 대해 분노하거나 욕을 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지옥 불에 들어갈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주기도문의 일곱 간구 중 이렇게 즉시 반복해서 경계하며 가르치는 것은 용서가 유일하다.
이는 예수께서 꿈꾸시던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조차 영혼을 위한 구제인 “용서(forgiving, remmisio)”가 육체를 위한 구제인 “나눔(sharing, eleemosyna)”보다 더욱 실천하기 어려운 일이었음을 보여준다.
김남준 목사님 코멘트
주기도문의 엘레모시나라고 나오잖아. 그게 원래 그리스어야 그런데 이게 얼마나 자주 쓰였는지 그냥 이게 라틴어가 돼버렸어. 그러니까 초대 교회 때 이제 오늘은 지금 용서만 하는데 나중에 나눔에 대해서 살펴보아도 이렇게 나오는 거야. 이런 구도 속에서 나는 오죽했으면 헬라워가 그냥 라틴어가 돼버렸어요. 그래서 그다음 그다음 사람
주기도문에 나오는 용서를 위한 간구는 당시 널리 시행되던 채권, 채무관계, 법적 효력에 관한 예에서 사용해 온 것이었다. 그래서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마 6:12). 이것을 그리스어 원문에서 직역하면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를 탕감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빚을 탕감하여 주시옵고”가 된다.
초대 교회의 위대한 교부 어거스틴은 자신의 설교집 351번 8장 11절 고린도전서 4장 7절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할 때 그의 죄를 자신의 기억으로부터 떼어내지 않는다면 그는 진정으로 자신의 죄를 용서받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받은 상처를 마음에서 떼어냄 없이 진정한 용서는 없다는 사실을 사실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여기서 어거스틴이 상처에 대한 기억을 떼어놓는다고 하는 것은 진정한 용서가 상처에 대한 기억을 머릿속에서 사라지도록 지우는 것을 의미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그 상처에 대한 기억이 더 이상 형제를 미워하도록 마음에서 악하게 작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죄를 지어 남에게 입힌 상처에 대한 기억은 흐르는 물 위에 쓴 글씨처럼 쉽게 잊혀지지만 자기에게 죄를 지은 사람으로부터 받은 우리의 상처는 돌에 새겨진 글씨처럼 결코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참으로 형제를 용서하기 위해서는 그 상처와 상처에 대한 기억이 더 이상 형제를 미워하거나 복수를 꾀하지 못하도록 마음에 떼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이러한 일을 실천으로 옮기려고 하면 그것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지 그때에 용서하려는 사람은 마치 자신의 생살을 베어내는 것처럼 큰 고통을 경험한다.
따라서 예수께서 강조하신 바 형제에 대한 용서는 단지 그가 베푸는 도덕적 시여나 윤리적 도움이 아니라 우리가 형제를 용서하는 것은 우리의 영혼의 생명과 직결된 문제임을 보여준다. 형제를 용서하지 않고 미워하면 성령을 크게 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영혼의 활기를 빼앗아갈 뿐 아니라 교회를 분열시키려고 애쓰는 사탄의 도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처럼 형제를 용서하는 것이 구원받은 신자의 중요한 의무이기도 하지만 용서를 가르치신 예수 그리스도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것을 능가한다.
다시 말해서 용서는 그것보다 더욱 큰 목표를 지향하는데 그것은 바로 형제와 화목함으로써 공동체 전체가 사랑의 사회가 되는 것이었다. 바로 여기에 미움의 심각이 있다.
예수께서 용서를 가르치신 것은 그것이 형제와의 화목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교회의 지체들은 서로 용서하고 용서받으므로 불완전한 구성원들이 완전한 공동체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일이 생각나거든”. 이는 누구의 잘못인지에 상관없이 “형제 사랑의 관계가 깨어져서 누군가의 원망을 사는 관계가 되었다면” 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누구인지는 우리가 속한 공동체를 보면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를 더 많이 닮을수록 형제들을 더 많이 용서하고 화목한 공동체가 되어 있음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지 못할수록 공동체는 미움과 원망으로 분열된 공동체가 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III. 결론 및 적용

M.L. 스테드먼, “바다 사이 등대”라는 장편 소설이 있습니다.
소설은 오스트레일리아 남서부에 위치한 파르타죄즈라는 마을에 야누스라는 가상의 섬을 배경으로 합니다.
때는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시점부터 2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시점까지입니다.
이곳은 태평양과 인도양이 만나는 지점으로 양극단의 바다를 마주하는 야누스 섬의 등대를 통해 인물들의 양극단적인 모습을 엿볼수 있습니다.
전역 군인 톰이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고자 등대지기로 지원합니다.
그 과정에서 톰을 눈여겨보던 이자벨과의 사랑이 싹트고 가정을 이룹니다.
행복한 가정을 꿈꾸지만 두 아이를 유산하여 매우 힘든 삶을 이어갑니다.
한편 해나와 프랭크라는 부부도 등장합니다.
프랭크는 독일인으로서 그곳에 살면서 사람들로부터 차별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1차세계대전 중에 많은 가족들을 독일군에 의해서 잃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프랭크는 언제나 밝습니다.
부인 해나는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묻습니다.
프랭크는 용서는 한 번만 하면 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누굴 증오(미워)하려면 하루 종일, 매일, 평생 해야 한다.
나쁜 생각들을 계속 떠올리면서 그것이 더 힘들다.
그러나 치명적으로 사람들의 혐오에 의해 프랭크와 그의 딸 그레이스는 도망가다가 보트를 타고 도망갑니다.
하지만 프랭크는 평소 심장이 약하던 터에 그 일을 당해 그만 보트에서 심장마비로 죽고 딸만 남겨집니다.
그 배가 톰과 이자벨이 있는 섬에 표류하다가 도착합니다.
그때가 톰과 이자벨이 둘째 아이를 유산하고 힘들어하던 때였습니다.
이자벨은 하나님이 보내신 아이라 여기고 죽은 아버지 프랭크는 묻고 그레이스라는 아이를 자식으로 키웁니다.
톰은 이 과정에서 정상적 절차를 밟자고 하였으나 이자벨의 강력한 요구에 수긍합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흘러 해나와 프랭크, 부부사이의 일과 그 아이 그레이스에 대한 일을 듣게 됩니다.
자신들에게 온 아이가 누구인지 알게 된 톰은 그레이스를 돌려주는 일을 하면서 자신이 모든 죄를 담당하려고 합니다.
이 과정에서 해나는 두 부부를 위해 선처를 법에 요구합니다.
해나는 자신의 남편 프랭크에게 받은 용서의 메시지를 실천합니다.
여러분, 삼위 일체 하나님께서 사랑으로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공동체가 창조된 세상과 사람들을 통해 이루어지기를 원하셨습니다.
비록 죄로 인해 망가진 세상과 사람들의 관계가 되었지만 예수님께서 이 일을 이루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꿈꾸시는 사랑의 공동체를 가정과 교회를 통하여 이루기를 원하십니다.
이 부르심 앞에 우리도 믿음으로 응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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