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세의 특징, 자기 중심적인 삶(딤후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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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입 예화: 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기계]
[도입 예화: 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기계]
제가 언젠가 흥미로운 기사를 읽었습니다. 오늘날 세상에서 가장 발전한 인공지능 기계를 개발한 과학자에게, '당신이 만든 이 기계가 무엇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가?'라고 물었더니, 그가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제가 만든 최고의 기계는, 세상의 모든 정보를 끌어모아, 오직 한 가지 일에만 집중하도록 설계되어야 합니다. 바로, ‘나’에게 봉사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의 연결이나, 더 큰 진리를 탐구하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철저히 ‘나’의 만족, ‘나’의 안위, ‘나’의 편리함만을 위해 작동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너무나도 발달했지만, 동시에 지독하게 고립되어버린 이 기계의 모습이,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말세'의 특징과 너무 닮아있지 않습니까? 겉으로는 모든 것이 연결되고, 정보가 넘쳐나지만, 실상은 그 모든 기술과 정보의 종착점이 결국 '자기 자신'으로 수렴되는 시대.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경고했던 ‘고통하는 때’의 본질입니다.
오늘 디모데후서 3장 1절에서 9절 말씀을 통해, 이 말세의 특징인 **'자기 중심적인 삶'**이 우리의 신앙과 공동체를 어떻게 병들게 하는지 깊이 묵상해보고, 그 유혹에서 벗어나 진리 위에 굳건히 서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1. A: '자기 사랑'이라는 말세의 증상 (3:1-5)
1. A: '자기 사랑'이라는 말세의 증상 (3:1-5)
성경은 3장 1절에서 단도직입적으로 말합니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이어서 바울은 2절과 3절에 걸쳐 열아홉 가지의 죄악을 나열합니다. 이 목록을 천천히 읽어보면, 그 끝이 보이지 않는 절망감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죄악의 뿌리는 단 하나, 2절의 첫머리에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여러분,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왜 죄입니까? 우리는 '나 자신을 사랑하라'고 배우지 않았습니까?
성경이 경고하는 '자기 사랑'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할 자리에 나를 올려놓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신데, 그 보좌에 내가 앉아 '나의 뜻', '나의 유익', '나의 감정'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는 것입니다.
이 자기 사랑이라는 바이러스가 감염되면 어떤 증상이 나타납니까?
돈을 사랑하며 (탐심): 나의 만족을 위해 물질을 신으로 삼습니다.
자긍하며, 교만하며 (자만): 다른 이들을 무시하고 나를 과시합니다.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관계 파괴): 나를 기준으로 모든 관계를 재단하며, 당연한 은혜에 감사할 줄 모릅니다.
특별히 5절을 보십시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이것은 세상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자기 중심적인 신자'의 모습입니다. 겉모습은 주일 성수, 봉사, 헌금을 하지만, 삶의 가장 깊은 자리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나 성령의 능력이 아닌, 나의 이성과 나의 감정만을 따르는 것입니다. 능력 있는 경건이 없으니, 죄악의 목록을 그대로 따라가면서도 스스로는 경건하다고 착각하는 비극적인 상태인 것입니다.
2. B: '진리를 거스르는' 자기 중심성의 본질 (3:6-9)
2. B: '진리를 거스르는' 자기 중심성의 본질 (3:6-9)
우리는 이제 '자기 사랑'의 증상을 넘어, 그 본질적인 작동 방식, 즉 '속임수'의 영역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6절부터 9절은 이 자기 중심적인 태도가 어떻게 교묘하게 사람들을 미혹하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들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 바 되” (3:6)
여러분, 여기서 '어리석은 여자'는 단순히 특정 부류의 여성을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분별력이 없고, 자신의 욕심(자기 사랑)에 이끌려 죄를 짐처럼 지고 있는 모든 사람을 상징합니다.
진정한 진리는 때로 나를 불편하게 하고, 나의 욕심을 꺾으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나 자기 중심적인 사람은 자신이 듣고 싶어 하는 말만 들으려 합니다. 바로 이때, '진리를 거스르는 자들'(6절)이 나타나 그들의 욕심을 채워주는 달콤한 복음을 속삭입니다.
바울은 이 속이는 자들의 특징을 7절에서 이렇게 묘사합니다.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
지식이 부족해서 진리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배우고 또 배우지만, 그 모든 지식과 정보를 자기 중심적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진리의 핵심, 즉 '자기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라'는 그 말씀에는 끝내 이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모세를 대적했던 얀네와 얌브레처럼(8절), 진리를 대적하고 거스릅니다. 얀네와 얌브레는 애굽의 마술사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날 때, 똑같이 흉내 내어 사람들을 속이려 했습니다. 자기 중심적인 신앙은 겉으로는 기독교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교회 활동을 모방하지만, 그 안에는 진정한 순종과 회개가 없습니다. 결국, 9절 말씀처럼 **“그들의 어리석음이 드러날 것”**입니다.
3. A': '말씀의 닻' 위에 굳건히 서는 삶 (3:10-17)
3. A': '말씀의 닻' 위에 굳건히 서는 삶 (3:10-1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는 이 혼란하고 자기 중심적인 말세의 조류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다시 첫 번째 부분(A)에서 다루었던 증상들을 기억하며, 이제 **A'**로 나아가 그 해결책을 붙잡아야 합니다.
말세의 '자기 사랑' 증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강력한 항생제로만 치료될 수 있습니다. 그 복음의 핵심은 **'자기 부인'**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도전합니다. “나의 교훈과 행실과 의향과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와 박해를 받음과 고난과… 이것을 네가 본받으라.” (3:10-11, 참고 구절)
우리가 자기 사랑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으로 돌아갈 때, 비로소 경건의 능력이 회복됩니다. 그 능력은 어디에서 옵니까?
디모데후서 3장 14절부터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오직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말세의 자기 중심적인 속임수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말씀의 닻'**을 내리는 것입니다.
세상은 '나의 감정'을 따르라고 속삭이지만, 우리는 말씀에 기록된 진리를 따라야 합니다.
세상은 '나의 유익'이 최우선이라고 가르치지만, 우리는 말씀이 요구하는 희생과 사랑을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돌아봅시다. 혹시 우리가 경건의 모양만 붙잡고, 능력인 말씀의 순종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봉사가, 우리의 헌신이, 결국 '나'를 드러내고 '나'를 만족시키기 위한 자기 중심적인 행동은 아니었습니까?
우리 모두, 이찬수 목사님이 늘 강조하시는 것처럼, 가장 낮은 자리에서, 나의 약함을 인정하고, 오직 말씀 앞에 엎드립시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얀네와 얌브레처럼 헛된 지식과 욕심에 이끌리는 것이 아니라, 진리이신 그리스도께 뿌리를 박고, 그분의 능력을 힘입어 이 고통하는 말세의 때를 이겨나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태어나는 순간, 세상은 우리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듯 보입니다. 울면 어머니가 달려오고, 울면 따뜻한 품이 다가옵니다. 그때 우리는 인생의 첫 법칙을 배웁니다. “세상은 내 울음에 반응한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면, 그 법칙은 조용히 깨집니다. 아무리 울어도 이제는 “네가 알아서 해”라는 말이 돌아옵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혼란스럽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마음 깊은 곳에는 이미 “나는 세상의 중심이다”라는 프로그램이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의 원인을 밖에서 찾는 사람들! 어릴 적, 우리가 넘어졌을 때 어른들은 탁자 모서리를 때리며 말했습니다. “이 나쁜 놈!” 그때 아이는 잠시 위로받았지만, 그 순간 마음속 깊이 새겨진 믿음이 있습니다. “문제는 나 바깥에 있다.” 이 신념은 성인이 되어서도 우리를 지배합니다. 문이 열리지 않으면, 밀어보기도 전에 세상을 탓합니다. “왜 이렇게 세상이 불친절한가?” 그렇게 우리는 점점 하나님이 아닌 세상을 향해 원망의 화살을 쏩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너희 속에 있는 죄가 문제다.” 진짜 문을 막고 있는 것은 세상이 아니라 우리 안의 교만과 자기중심성입니다. 세상에 휘둘리는 ‘나 중심의 신앙’ SNS 시대의 사람들은 여전히 자기 중심의 우주 속에서 삽니다. 누가 내 글을 봤는지, 누가 ‘좋아요’를 눌렀는지가 내 기분을 결정합니다. 이것이 현대판 ‘천동설 인간’의 모습입니다. 모든 것이 나를 중심으로 돈다고 믿는 사람, 하나님마저 나의 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좋아요’ 버튼을 눌러주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가 ‘좋아요’를 받을 필요가 없을 만큼 자기 자신 안에서 자유한 존재로 서길 원하십니다. 예수님, 진정한 지동설의 인간, 예수님은 자기 중심의 우주에서 벗어난 분이셨습니다. 그분은 세상이 자기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문을 부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무릎 꿇고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 한마디가 인간의 천동설을 무너뜨렸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이 자신의 의지에 복종하기를 바라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자신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켰습니다. 그 안에서 진정한 자유를 얻으셨습니다. 이것이 자기부인의 길, 하나님 중심의 삶이요, 영적 지동설의 시작입니다. “나를 위해 울지 말라”의 깊은 초대!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며 하신 말씀, “나를 위하여 울지 말라” 이 말은 단지 위대한 유언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초대입니다. “이제 너의 중심에서 벗어나라. 나를 바라보라. 그리고 참된 생명으로 살아나라.”
우리가 울어야 한다면, 그것은 세상이 나를 몰라줘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여전히 ‘살지 못한 나’를 위해 울어야 할 때입니다.진짜 멋진 삶은 ‘좋아요’가 아니라 ‘아멘’ 세상이 칭찬하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이 “잘하였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하실 그 한마디가 우리 삶의 유일한 상급이어야 합니다. ‘좋아요’가 많은 인생보다, 하나님께 ‘아멘’으로 순종한 하루가 더 값집니다. 죽음 앞에서도 미소 지을 수 있는 사람, 그는 이미 하루하루 ‘다 이루었다’는 마음으로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의 삶에는 후회도, 미련도 없습니다.
삶의 균형, 십자가의 중심! 신앙의 깊이는 죽음의 순간에만 드러나지 않습니다. 삶의 순간마다 십자가를 붙드는 사람이 죽음의 순간에도 평안을 누립니다. 태어남과 죽음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음을 아는 사람은인생을 가볍게, 그러나 진지하게 삽니다.
오늘의 결론 “오늘 나를 위해 울지 말라. 대신 오늘을 위해 기꺼이 웃자.” 이것은 단순한 긍정의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겠다는 고백입니다. 나를 내려놓고, 하나님을 높이는 삶. 그 삶을 사는 사람만이, 세상이 흔들려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렇게 살다 보면, 우리도 언젠가 조용히 미소 지으며 주님 앞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 이제 저는 제 길을 다 걸었습니다. 다 이루었습니다. 이제 당신의 품으로 돌아갑니다.”
기도합시다. 주님, 우리 안에 있는 자기 사랑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경건의 모양만을 붙잡고 진리의 능력은 부인했던 우리의 어리석음을 고백합니다. 이제 말씀의 닻을 내리게 하시고, 나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