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랴 6: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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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꿈꾸는 것은

숨 가쁘게 8개의 환상을 지나왔습니다. 환상은 일종의 이미지죠. 그래서 오랫동안 기억이 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이미지만 기억되고 어떤 내용인지 잘 모르는 것도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환상이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임팩트가 있는 큰 두루마리 형태나 에바라고 하는 곡식을 담고 측량하는 도구에 여인이 들어앉은 장면과 여인을 악이라고 했던 장면이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스가랴서에 이런 환상이 있었다. 그래서 스가랴서가 의미하는 바가 나름 중요하다 정도만 기억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오늘 짧은 구절에는 앞에서 등장했던 ‘싹’ 이라는 용어와 함께 ‘면류관’이라는 특별하게 제작된 왕관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지금 재건 중인 성전과 달리 싹이 등장해서 성전을 건축한다는 이야기가 자세한 설명없이 간략하게 정의적으로 등장합니다.
먼저 내용을 살펴보면
8개의 환상이 끝났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선지자 스가랴에게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는 장면으로 전환됩니다. 그리고 스가랴에게 직접 지시합니다. 이름을 언급하며 포로에서 돌아온 사람에게 은과 금을 받아 면류관을 만들어서 대.여에게 씌우라고 말이죠. 화려한 왕관을 특정인에게 씌운다면 보는 사람들은 어떠하겠습니까. 최근 경주에서 있었던 ‘2025년 경주 APEC’ 에서 우리 대통령이 미국 트럼프 대통령에게 선물했던 신라의 대표적인 왕관을 본떠 만든 왕관에 모든 이목이 쏠린 것처럼 말입니다. 이 사람이 통치자 또는 왕의 대관식과 같은 생각을 하겠죠. 그런데 왕관을 씌우면서 ‘이제 다스린다. 이분이 왕이다. 지도자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12절에 ‘보라 싹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고 합니다. 화법이 지금 사람들 앞에서 한 사람을 세워 놓고 관을 씌우고 말하는 내용은 다른 사람을 향하는 것처럼 들리는 것이죠. 자세한 내용은 뒤에 살펴보기로 하고 그렇게 세워진 ‘싹’이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고 영광도 얻고 다스리기까지 한다는 선포입니다.
듣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의아해하지 않을까요? 왜냐하면 지금 대제사장에게 다스린다는 표현을 썼기 때문이죠. 이들은 왕의 시대에 그리고 몰락을 경험한 자들입니다. 이런 생각을 할 만합니다. 아니, 다시 대제사장이 다스리는 시대인가?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어서 ‘또 제사장이 자기 자리에 있고 이 둘 사이에 평화의 의논이 있다’는 선포는 그대로 읽으면 ‘이 둘 사이’라고 했으니 다스리는 자와 제사장이 따로 있는 것이 분명하고 둘의 관계는 ‘평화의 의논’이 있는 관계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사용된 면류관은 14절에 ‘기념하기 위하여 여호와의 전 안에 두라’고 명령합니다. 그리고 15절에 먼 데 사람들이 와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는데 그때에야 너희가 만군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과연 ‘나는’ 누구일까요. 그러면서 ‘너희가 만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듣는다면/순종한다면 이 일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마무리가 됩니다.
여기에서 명령으로 시작된다는 것이 중요한데 10절과 11절에 나오는 ‘받아’ 로 된 말은 ‘취하다’는 동사인데 원문에는 두 문장 제일 앞에 있습니다. (부정사 절대형) 그들에게 가서 받아 오라는 명령의 형태로 사용된 것입니다. 내 것을 당연히 받아 오는 것처럼 말이죠. 복음서 네 곳 모두 등장하는 내용 중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장면에 나귀 새끼를 취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나귀 주인이 왜 가져가느냐 하니까 요한복음을 제외한 복음서에서 모두 ‘주가 쓰시겠다’ 라고 말합니다. 주인이 있는데 다시 ‘주’가 있다는 매우 중요한 의도가 드러나는 장면입니다. 바로 주님의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스가랴에게 ‘취하라’는 것입니다. 특히 스가랴 9:9 “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는 표현이 스가랴서에 등장하는데 상당한 연관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0절 초반부에 ‘사로잡힌 자 가운데 바벨론에서부터 돌아온’ 이라고 할 때 특정 인물을 거론합니다. 사실 그들이 누구인지는 다른 정보가 없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1차로 돌아온 이들 후에 다시 돌아온 일부의 자들로 보이고 그들이 돌아올 때 은과 금을 가지고 돌아온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1차로 돌아와서 성전 기초를 놓을 때가 2년이 지나고 다시 16년이라는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성전을 짓는다는 소식이 여전히 남아 있는 바벨론에 충분히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도 이사야서에 예언된 내용의 성취인데 이사야 60:4–5 “4 네 눈을 들어 사방을 보라 무리가 다 모여 네게로 오느니라 네 아들들은 먼 곳에서 오겠고 네 딸들은 안기어 올 것이라 5 그 때에 네가 보고 기쁜 빛을 내며 네 마음이 놀라고 또 화창하리니 이는 바다의 부가 네게로 돌아오며 이방 나라들의 재물이 네게로 옴이라”
그런 재물을 가지고 ‘면류관’을 만들었습니다. 번역은 면류관으로 되어 있는데 우리가 금관하면 신라의 왕이 쓰는 왕관을 떠 올리는데, 여기에서 사용된 단어 aTA.ROT는 대제사장이 쓰는 관인 ‘미츠네페트’나 제사장이 쓰는 ‘미그바아’ 가 아니라 왕관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제사장들은 앞서도 스가랴 3:5 “5 내가 말하되 정결한 관을 그의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결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천사는 곁에 섰더라” 여기에 ‘관’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여호와께 성결’이라는 금패를 부착합니다.
이걸 누구에게 씌우냐면 대.여에게 씌웁니다. 일종에 대관식이 진행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질문은 그를 세워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이 중요합니까 아니면 전하는 내용이 중요한 것일까요? 여기에서 생각보다 이게 잘 안됩니다. 왜냐하면 보이는 게 강력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와 이제 여호수아가 왕이네’하지 않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비유할 일은 많습니다. 교회에 오면 말씀을 듣는 게 제일 중요한 건 아는데 그러면서 보이는 여러 필요에 눈이 갑니다. 주객이 전도되었다는 말이죠. 그렇게 하나님 말씀을 듣는다는 의미는 내가 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입니다.
아무튼 당연히 영향이 있는 상징적인 행동을 통해서 더 중요한 내용에 우리는 차분하게 집중해야 합니다. 12절에 ‘보라 싹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어떻게 등장하냐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조금 쉽게 말씀드리면 옮겨 심은 것도 아니고 자연스럽게 거기에서 나는 것처럼 말입니다. 산에서 볏잎이 나온다 그럼 이상하다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논에서 볏잎이 나온다 하면 당연한 것처럼 ‘자기 곳에서’입니다. 이걸 성경적으로 풀어보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신약에 마태와 누가에 족보가 나옵니다. 마치 당연한 것처럼 그렇게 오실 것이라는 것의 당연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걸 자꾸 간과합니다. 우리는 산에서 볏잎이 자라길 기도하고 바라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죠. 물이 있는 곳에서 물을 댈 수 있는 곳에서 경작하는 것입니다.
시편 104:10–11 “10 여호와께서 샘을 골짜기에서 솟아나게 하시고 산 사이에 흐르게 하사 11 각종 들짐승에게 마시게 하시니 들나귀들도 해갈하며” 14절 ‘주님은 들짐승들이 뜯을 풀이 자라게 하시고 사람드이 밭갈이로 채소를 얻게 하시고 땅에서 먹거리를 얻게 하셨습니다’ 15절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포도주를 주시고 얼굴에 윤기가 나게 하는 기름을 주시고 사람의 힘을 북돋아(레바브) 주는 먹거리도 주셨습니다. 계속해서 보면 밤에는 동물들이 먹을 걸 찾고 낮이 되면 사람들이 나와서 활동한다고 시편 기자는 기도합니다. 이것을 후반부에 ‘주님께서 지혜로 만드셨다. 땅에 주님이 지으신 것으로 가득하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신자들이 이런 훈련이 잘 안되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는 미소를 짓다가도 집에 가면 썩은 표정을 하고 ‘너 때문에 시험에 든다’고 막말을 하는 앞뒤가 다른 신자들이 넘쳐나는 것입니다.
‘자기 곳에서’ 싹이 나옵니다. 앞서 3장에서 여호와의 천사 앞에 선 여호수아의 더러운 옷을 벗기며 죄악을 제거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스가랴 3:7 “7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만일 내 도를 행하며 내 규례를 지키면 네가 내 집을 다스릴 것이요 내 뜰을 지킬 것이며 내가 또 너로 여기 섰는 자들 가운데에 왕래하게 하리라” 고 하신 다음에 8절에서 ‘내가 내 종 싹을 나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런 길을 따라 갈 때 ‘자기 곳에서’ 싹이 나오는 것입니다. 미래적인 표현이죠.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말씀을 따라 사는 ‘당연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왕관을 대.여에게 씌워 놓고 하는 말은 미래적인 상황으로 지금 재건 중인 성전과 연결 됩니다. 이미 이들은 성전을 재건 중인데 싹이 돋아나서 하는 일이 12절 후반부에 ‘여호와의 전을 건축 한다’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13절에 건축하고, 영광도 얻고, 그 자리에 앉아서 다스릴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지금 유다의 백성은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터를 짓고도 16년을 재건 하지 못하면서 시기상조를 외치고 있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주변이 준비가 되어서 막상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설교 본문을 다양한 상황에 맞게 하는 훈련을 했습니다. 매주 2년을 넘게 A4 한 장을 쓰며 문장을 다듬고, 학교에 다닐 때도 한 번에 길게 설교하는 훈련과 수요일에 복음서를 강해하는 훈련도 병행했습니다. 2주전에 다른 교회에서 설교할 기회가 있을 때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평을 듣고 지금까지 훈련하는 길이 그렇게 잘못된 방향은 아니구나 하는 자신의 평가도 하게 되었습니다.
만일 여기에 다른 사람들이 찾아 와 예배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움직이시겠습니까? 예상할 수 있는 건 봐도 못 본 척, 관심 없는 척할 가능성이 크고 어쩌면 심하게 여기 왜 왔지 하는 표정으로 상대를 난감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너무 과도한 친절 역시 불편하게 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처음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또는 ‘다음에 또 뵙기를 바랍니다’나 ‘필요한 것이 있으면 저에게 말씀해주세요’라는 안내를 누가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준비되지 못한 것을 하나님께서는 일깨우고 계시고 그런 일이 그저 ‘나 하나쯤’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비전 속에서 매우 중요하게 일어나고 있다고 지금 성전 재건을 하고 있는 백성들 앞에서 대.여에게 눈에 확 띄는 왕관을 씌우면서 ‘각자의 일’이 미래와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지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약은 이보다 더 합니다. 에베소서 2:21–22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아예 우리를 성전의 일부처럼 각자를 성전의 주체로써 아예 연결된다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3:16 “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이런 표현들이 이렇게 학개와 스가랴서를 통해야만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것이죠.
저와 여러분이 그저 가족이라는 작은 공동체를 넘어서 각자가 하나님 나라의 일원으로 지어져 가는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보지 못하면 어쩌면 교회는 정신을 수양하는 곳이나 마치 적당하게 누가 나를 좀 혼내주는 오 박사님이나, 이혼숙려 캠프의 변호사의 쓴 소리를 기대하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자연스럽게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중 하나가 예수께서 제사장이시며 왕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출발입니다. 다스리시는 왕의 모티프는 그냥 나오는게 아닙니다. 성전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자 유다 백성의 정체성이죠. 그들은 어쩌면 다시 다윗 왕이 통치한 나라를 꿈 꿀지 모릅니다. 하지만 유다가 예루살렘 성을 중심으로 군비를 확장하고 다시 왕을 세우고 하면 주변국에서 그냥 둘리가 만무하지 않겠습니까?
대제사장인 여호수가가 등장해서 왕관을 씌우는 상징 행위는 결국 딴짓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산에서 볏잎을 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앞서 총독이었던 스룹바벨이 여기서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가 총독으로 전체를 통치하는 실질적인 ‘통치’를 행위를 할 뿐만 아니라 다윗의 자손으로 족보를 잇는 자임에도 불구하고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역사는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세워진 성전을 예수께서 오신 시대에 헤롯대왕이 무려 46년을 증축하면서 성전의 영광을 이용해 헤롯은 왕권을 실현해 가는 무대에 예수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예수는 예루살렘에 더 거대하게 드러난 성전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2:19–21 “1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20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21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저자인 사도 요한은 얼마나 답답했는지 자기의 말을 넣습니다. 이를 방백이라고 하죠. 요한복음 2:22 “22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그들이 학개와 스가랴를 모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거대한 성전이 결국 말씀을 믿지 못한 것입니다. 지금 성전 재건에 열심인 그들에게 너 지금하고 있는 일에 의미를 알아? 아마도 그들은 옛날의 다윗의 영광처럼 다시 이스라엘 나라가 우뚝 서는 거잖아요! / 하지만, 정신 차려라 그게 아니야. 미래에 도래할 나라는 지금처럼 치고 박고 싸우는 나라가 아니라 나중에는 ‘저 먼데 사람들도 와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거야’ 좀 심하게 말하면 욕을 하면서 ‘x 소리 하네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전을 16년이나 못 짓던 이유가 사마리아 사람들, 유프라데 근처에 살던 ‘먼 데 사람들’ 때문이죠. 이런 분위기라는 겁니다. 그리고 요한 사도처럼 이렇게 말합니다. ‘그 때에야 너희가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는 것을 알게 될 거야’라고 말입니다. 이런 구조가 이해가 되시나요? 그렇다면 ‘나’는 누구입니까? 말하는 화자인 스가랴처럼 보일 것입니다. 후대의 사람들이 예언처럼 왜 스가랴가 그런 예언을 했잖아 하는 식이죠. 하지만 스가랴가 어디 하늘에 뚝 떨어진 사람도 아니고 그들과 함께 있었던 사람으로 ‘너희에게 보내진 존재’라고 보기에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기에 앞서 말한 ‘싹’이고 ‘싹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낸 것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알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죠. //
무엇을 다 다룰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자유롭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는 그 자체가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따라 백성들을 심판하시기도 하시고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시는 회복도 하시고 그렇게 회복은 일시적이면서도 영구하고 완전한 회복을 성전을 재건하는 이들의 마음에 일으키셔서 바라 보는 즉 소망을 갖게 하시고 그런 소망의 결실이 싹으로 나타나고 싹인 예수께서 언약의 성취를 따라 성전을 재건하시는 가운데 우리와 앞서 에베소서나 고린도전서의 말씀처럼 연결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입에 침도 안 바르고 술술 이야기할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미 이사야도 예언을 했습니다 이사야 4:2 “2 그 날에 여호와의 싹이 아름답고 영화로울 것이요 그 땅의 소산은 이스라엘의 피난한 자를 위하여 영화롭고 아름다울 것이며” 예레미야 23:5–6 “5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 6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받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살 것이며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우리의 공의 얼마나 놀라운 표현입니까. 문제는 신자들이 여기까지 못 가요. 왜요. 공의는 하늘의 뜻과 의미가 땅에서 실현된다는 의미예요. 흔히들 공공성..하잔하요. 앞에 공이 공의를 말하는 것이고 뒤에 공이 함께 한다는 의미죠. 15절 다시 ‘먼데 사람들이 와서’ 함께 하는 거에 담긴 의미입니다. 미가서에서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 함께 하나님께 나오는 걸 기억하면 그들이 그냥 나오는게 아니라 우리의 공의를 경험했기 때문에 나온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시라는 거예요. 누가 찾아온다면, 어른이 찾아온다면, 아이가 찾아온다면, 상처받은 이가 온다면, 어떻게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 일컬음을 받게’할지 말입니다. 그것이 우리 교회를 세우신 이유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지막으로 ‘너희가 만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대로 순종하면’ 그렇게 생각해보고 우리의 태도를 바꿔 ‘공의의 길’을 따라간다면 ‘이 일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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