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114 금요심야 기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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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2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음이러라
3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4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5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6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7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8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9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시니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가 오천 명쯤 되더라
11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12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13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14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15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오병이어의 사건입니다.
요한복음 6장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나의 거대한 '시험 문제'를 제시하시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본문의 배경은 완벽한 '위기'입니다.
시간은 저물어가는 저녁입니다. 장소는 사람이 살지 않는 '빈들'입니다.
그리고 앞에는 굶주린 '큰 무리', 장정만 오천 명입니다.
여자와 아이들까지 합치면 만 명, 어쩌면 이만 명에 가까운 거대한 인파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눈으로 볼 때 완벽한 '불가능', 그 자체입니다.
바로 이 절망적인 상황의 한가운데서, 예수님께서 제자 빌립에게 질문을 던지십니다.
5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이 5절은 다른 공관복음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은 내용입니다. 예수님이 빌립에게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 하는게 좋겠는지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빌립에게 물으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이 해결 할 수 없는 문제이기에 제자들의 도움이 필요하셨던 것 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 다음절에 그 이유가 나옵니다. 6절입니다.
6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예수님은 답을 몰라서 물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해결책이 없어서 조언을 구하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자신이 하실 일을 정확히, '친히'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말 성경에서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빌립이 어떻게 하나 보시려고 이렇게 질문하신 것일 뿐, 사실 자기가 하실 일을 미리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빌립이 이 상황과 환경에서 어떻게 하는지가 궁금하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은 우리가 어떤 상황에 놓여있는지 보다, 그 상황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선택할지에 대해 훨씬 더 깊은 관심을 가지십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이만 명을 어떻게 먹일까?'라는 '상황'에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빌립이 이 상황과 환경가운데 무엇을 선택할까?'라는 '반응'에 있었습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 삶에 놓인 수많은 문제들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선택하고 있으며, 하나님은 우리의 어떤 선택을 기다리고 계시는지, 오늘 말씀을 통해 깨닫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 2. 첫 번째 선택: 빌립의 '계산' (약 10분)
📖 2. 첫 번째 선택: 빌립의 '계산' (약 10분)
예수님의 시험 문제를 받아 든 빌립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7절 입니다.
7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빌립은 벳새다 출신입니다. 그 말은 지금 있는 지역에 지리에 밝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빌립은 매우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대답을 합니다.
예수님의 질문이 떨어지자마자, 그는 즉시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동원해 머릿속에서 계산기를 두드렸습니다.
그리고 나온 대답은 “이 모든 사람을 먹이려면 이백 데나리온으로도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당시 1데나리온이 노동자의 하루 일당이었습니다. 그러기에 200데나리온은 노동자가 7개월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해서 번 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야 하는 큰 돈 입니다.
빌립의 대답은 그 큰돈인 200 데나리온으로도 이 사람들을 먹이기에 부족하다였습니다. 다시말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빌립의 계산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정확했습니다. 그리고 현실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인정하기는 싫지만,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우리는 입술로는 "전능하신 하나님!",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부족함이 없습니다!"라고 뜨겁게 찬양하지만,
삶의 문제, 돈 문제, 건강 문제가 닥치면 누구보다 빠르게 머릿속에서 자신만의 계산기를 두드립니다.
통장 잔고를 확인하고, 내 인맥을 뒤져보고, 병원 진단서를 확인하고, 내 자녀의 성적표를 확인합니다.
그리고 빌립처럼 빠르게 결론 내립니다.
"안되겠다. 돈도 없고 시간도 없다.”고 결정 내리지는 않으십니까?
예수님은 지금 빌립의 '생활력'이나 '계산 능력'을 테스트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지금 빌립의 ‘믿음'을 테스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빌립아, 돈 계산 좀 해봐라" 하고 물으신 것이 아니라, "빌립아, 너는 지금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를 물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빌립은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현실'을 바라봤습니다.
빌립은 예수님의 능력을 선택하지 않고 자신의 경험과 지식과 지헤를 선택했습니다.
빌립의 치명적인 오류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빌립의 계산 속에서 '예수님’이 빠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계산'을 선택한 사람의 비극입니다.
상황과 환경에 압도되어, 그 상황과 환경을 창조하신 주님을 보지 못합니다.
이때 안드레가 등장합니다. 본문 8-9절 입니다.
8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9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그래도 안드레는 빌립보다는 나았습니다. 최소한 무언가를 '찾아서',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안드레의 결론 역시 '계산'이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서 이렇게 기록되었습니.”
“여기 한 소년이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그게 얼마나 소용이 있겠습니까?”
빌립과 안드레, 두 사람 모두 '현실'이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믿음'을 선택하지 못했습니다.
📖 3. 믿음의 본질: '크기'가 아니라 '대상'입니다 (약 10분)
📖 3. 믿음의 본질: '크기'가 아니라 '대상'입니다 (약 10분)
그렇다면 이들의 믿음이 작아서 이처럼 문제가 된 것입니까?
사실 언밀히 말하면 믿음에 작은 믿음과 큰 믿음은 없습니다.
믿음에는 믿고 안믿고가 있는 것이지 큰 믿음 작은 믿음은 없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7장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회개하면 용서하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제자들 입장에서 도저히 지킬 수 없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다시말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에 불가능하다고 여긴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일곱번은 정말 일곱번이라는 횟수를 이야기 하는 것이라기 보다, 숫자 7은 완전수이기 때문에 죄를 짓고 회개하면 그때마다 완벽하게, 항상, 한계 없이 용서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같은 문제로 7번 잘못을 하면 그것을 온전히 다 용서하는 것도 사실은 쉽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겼습니다. 자신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다고 여겨 예수님께 이렇게 구합니다.
5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이 요청이 얼마나 경건해 보입니까?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주님께 더 큰 믿음을 구하는 모습이 믿음 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대답은 "그래, 기특하게 너희 믿음이 부족함을 깨달았구나. 내가 믿음을 더 주겠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6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이것은 제자들을 책망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것은 믿음에 대한 제자들의 생각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기에 바로잡아 주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생각했습니다: "믿음이 '커야' 순종할 수 있다." 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믿음의 양을 구한 것입니다. (믿음의 양, Quantity)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믿음의 '대상'이 누구인지가 중요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의 대상, Object)
믿음은 그 자체로 어떤 힘을 가진 '에너지'가 아닙니다.
믿음은, 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겨자씨'일지라도, 그 믿음이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대상에 연결되어 있기만 하다면, 뽕나무를 뽑아 바다에 심는 능력을 발휘하는 '통로'가 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믿음의 '크기'가 아니라, 우리의 믿음이 지금 '어디에' 연결되어 있느냐는 것입니다.
더욱더 큰 믿음을 구할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누구를 믿고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빌립과 안드레가 실패한 이유는 그들의 믿음이 '작아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믿음의 '대상'이 예수님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여전히 '200데나리온'과 '물고기 2마리와 5개의 떡’ 이라는 '자원'을 바라보며 계산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내가 할 수 있다'는 나의 긍정적인 확신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나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이 하실 것이다'라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태도'입니다.
📖 4. 선택의 본질: 걸림돌인가, 디딤돌인가 (약 15분)
📖 4. 선택의 본질: 걸림돌인가, 디딤돌인가 (약 15분)
오늘 본문6절에서 예수님은 빌립을 '시험'하신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시험이라고 번역된 원어는 두 가지 뜻을 동시에 가집니다.
하나는 우리를 죄에 빠뜨려 넘어지게 만드는 **'유혹(Temptation)'**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우리의 믿음을 단련시켜 성장하게 만드는 **'시련(Trial)'**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에게 닥친 '어려움,’ 상황과 환경’ 그 자체는 중립적이라는 것입니다.
같은 어려움이라도, 그것이 나를 넘어뜨리는 '유혹'이 될지, 나를 성장시키는 '시련'이 될지는 전적으로 그것을 대하는 '나의 반응'과 '나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길을 가다가 커다란 돌멩이를 만났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 돌에 발이 걸려 넘어진 후에, "왜 하필 내 길에 이런 돌이 있느냐!" 원망하고 불평하며 주저앉아 버린다면, 그 돌은 나를 방해하는 **'걸림돌'**이 됩니다.
하지만 똑같은 돌을 만났을 때, 조심스럽게 그 돌을 밟고 일어서서 더 높은 곳을 향해 나아간다면, 그 돌은 나를 더 높은 곳으로 이끄는 **'디딤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문제는 돌 자체가 아닙니다. 그 돌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입니다.
빌립에게 '5천 명의 굶주림'이라는 돌은 빌립을 절망시킨 '걸림돌'이었습니다.
그래서 빌립은 “200데나리온이 있어도 부족합니다” 라며 주저앉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또하나 기억해야 할 것이 있는데
이 '걸림돌'은 꼭 외부적인 환경으로만 오지 않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도저히 '아멘' 할 수 없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우리에게 거대한 '걸림돌'로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지금은 은퇴하신 유기성 목사님이 이런 간증을 하셨습니다.
하루는 큐티를 하는데 도저히 아멘이 안되는 본문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바로 고린도전서 1:27-29 말씀입니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에 도저히 아멘을 할 수 없겠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정말 진리라고 믿어지십니까? 만약 이 말씀이 정말 진리라면, 우리 자녀가 학교에서 꼴찌를 하면 기뻐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택한 아이다! 멸시받는 자를 택하신다!" 반대로 1등을 하면 좌절하고 금식기도 해야 합니다. "하나님, 우리 아이는 버리셨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정말 그럽니까? 입술로는 '아멘' 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그래도 하나님은 실력 있고 뛰어난 자를 크게 쓰신다'고 계산하고 있지 않습니까?
어느 교회 주일예배 설교 때 목사님이 이렇게 설교 하셨습니다. 세상의 스팩은 필요 없습니다. 그것보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헌신이 중요합니다. 많은 성도들이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렇게 은혜롭게 예배를 마치는데 고아고시간에 새로 부임하는 목사님을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오늘 부임한 부목사님은 정말 훌륭한 목사님 이십니다. 미국에서 공부하시고 이런 저런 박사학위까지 가지고 계신 아주 훌륭하신 목사님이 우리교회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빌립의 계산과 무엇이 다릅니까? "예수님은 믿지만, 현실은 200데나리온이 필요합니다"라는 것과 "하나님 말씀은 믿지만, 현실은 1등이 필요합니다"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같은 '세상의 계산'입니다.
유기성 목사님이 고린도전서의 말씀이 적용되지 않아 3일을 씨름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라는 '걸림돌' 앞에서 끙끙 앓았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이것은 믿어지고 안 믿어지고의 문제가 아니라 이것은 ‘선택’의 문제라는 것이 깨달아 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고백하셨답니다. "하나님,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겠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안고 엎드려 우는데, 유기성 목사님의 어깨를 누르던 무거운 멍에가 꺾이는 것을 느꼈는데 그것은 세상의 계산법에서 비롯된 '열등감의 멍에'였다고 간증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걸림돌' 앞에서, 나의 '계산'을 버리고 '믿음'을 선택했을 때, 그 걸림돌은 멍에를 부수는 '디딤돌'이 된 것입니다.
몇번 나누었던 이야기 입니다.
한국 코미디계의 대부였던 故 김경태 장로님의 이야기입니다.
김경태 장로님은 많은 분들이 아실텐데’웃으면 복이와요’을 만들었고 코메디 전망대 사회도 보았던 유명한 연출가였습니다.
그런데 김경태 장로님이 간암 말기 판정을 받았습니다.
의사도 포기한 절망적인 상황, 그의 인생길에 '암'이라는 거대한 돌이 놓였습니다. 그때 그는 그 돌을 어떻게 해석하고 무엇을 '선택'했는지 아십니까?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때를 맞추어 그 사람에게 가장 적합한 시험 문제를 내시나 봅니다. 시험관 되신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런 논술 주제를 주셨어요. '간암에 대한 장로의 자세를 논하라.'나는 출제자이신 하나님의 마음에 딱 맞게 백점짜리 정답을 써 내려갈 작정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선택입니다! 그는 간암이라는 상황을 원망의 '걸림돌'로 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하나님께 100점짜리 믿음의 답안지를 제출할 '디딤돌'로 '선택'했습니다.
그는 마지막 유언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항상 나를 최선의 길로 인도하셨으니, 오늘 내가 죽는 것도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최선의 사건임을 믿습니다. ...설령 고통이 제거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주님 앞에 감사하며 눈을 감고 싶습니다."
어떻게 이런 고백이 가능합니까? 그에게 있어서 믿음의 '대상'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암세포'를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시험관 되신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죽음의 고통을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죽음조차 '최선의 사건'으로 만드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했습니다.
📖 5. 믿음의 증거: 순종이라는 행동 (약 10-12분)
📖 5. 믿음의 증거: 순종이라는 행동 (약 10-12분)
그렇다면, 이 '믿음의 선택'은 어떻게 나타나야 합니까? 마음속의 결심으로 끝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진짜 믿음은, 반드시 '순종'이라는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빌립의 '계산'과 안드레의 '불완전한 믿음'이 드러난 후, 예수님께서 드디어 '정답'을 위한 행동을 명령하십니다.
10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시니..."
이것이 얼마나 비합리적인 명령입니까? 지금 먹을 것은 물고기 2마리와 떡 5덩이가 끝인데, 굶주린 수많은 사람들은 잔디밭에 앉히라고 하십니다. 만약 앉혀놓고 먹을 것을 주지 못하면 폭동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이때 만약에 제자들이 계속 '계산'을 선택했다면, 그들은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예수님, 안 됩니다. 지금 앉히면 큰일 납니다. 먹을 것 부터 구하고 앉혀야 합니다."
그러나 제자들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가 오천 명쯤 되더라."
그들은 자신들의 계산을 멈추고, 이해할 수 없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행동'입니다!
기적은 제자들의 계산(200데나리온)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제자들의 순종(사람들을 앉게 함)을 통해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ㄴ느 아브라함이 있습니다.
제자들은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이해할 수 없는' 정도가 아니라, 이것은 도무지 순종할 수 없을 명령을 받았습니다.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이 명령 앞에서 아브라함이 '계산'을 선택했다면 어땠을까요?
아마도 빌립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하나님 불가능합니다"라고 외쳐야 했습니다.
'하나님, 이 아들은 100세에 주신 '약속의 아들'입니다.' '이삭을 통해 하늘의 별과 같이 자손을 주신다고 약속하지 않으셨습니까?' '이삭을 죽이면 하나님의 약속은 파기됩니다. 이것은 모순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것은 하나님이 금하신 죄악 아닙니까?' 라고 외쳐야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모든 '합리적 계산'이 하나님의 명령에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무엇을 '선택'했습니까? 성경은 그가 '계산했다, 고민했다, 기도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3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그는 즉시 '순종'을 선택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계산'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능력'을 신뢰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19절은 아브라함의 마음을 이렇게 증거합니다.
19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아브라함은 ‘어떻게' 될지는 몰랐습니다.
하지만 '누구'를 믿어야 하는지는 분명히 알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이해가 자신의 경험과 자신의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선택'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요한복음 6장 29절의 의미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유일한 '일'(Work)은, 200데나리온을 벌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유일한 일은, 내 계산과 이해를 뛰어넘어, 순종하는 '믿음의 선택'입니다.
📖 6. 결론: 오늘, 당신의 선택은 무엇입니까 (약 5-7분)
📖 6. 결론: 오늘, 당신의 선택은 무엇입니까 (약 5-7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모두 각자의 빈들에 서 있습니다. 누군가는 200데나리온이 부족한 재정의 빈들일 수 있고, 누군가는 치료가 필요한 건강의 빈들일 수 있고, 누군가는 관계의 문제의 빈들 일 수 있습니다. 또 자녀, 가정, 직장의 문제로 빈들에 서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모두 각자의 빈들에 서 있습니다. 누군가는 200데나리온이 부족한 재정의 빈들일 수 있고, 누군가는 치료가 필요한 건강의 빈들일 수 있고, 누군가는 관계의 문제의 빈들 일 수 있습니다. 또 자녀, 가정, 직장의 문제로 빈들에 서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의 상황을 보고 계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 상황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는지 보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전히 빌립처럼, 나의 '걸림돌' 앞에서 '계산'을 선택하고 "불가능합니다"라고 주저앉아 있습니까?
아니면 안드레처럼, 비록 의심은 들지만 나의 작은 '오병이어'라도 주님께 가져오는 '행동'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또 여전히 "1등이 아니면 안 돼"라는 세상의 계산에 묶여, 하나님의 말씀을 '걸림돌'로 여기고 있습니까?
아니면 오늘 이 시간, "하나님, 이해되지 않아도 믿겠습니다!"라고 '믿음'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오늘 주님이 우리에게 "앉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용서하라"고 하실지 모릅니다. "네 가장 소중한 이삭을 내놓으라"고 하실지 모릅니다.
그럴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그것이 내 계산과 맞지 않아도, 도저히 이해 할 수 없어도 그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의 행동'을 선택하시길 바랍니다.
그때야 비로서, 우리를 절망시키던 '걸림돌'이 우리를 일으켜 세우는 '디딤돌'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계산이 끝나는 그곳에서, 우리가 계산하기를 포기하는 그때에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위해 일 하시는 주님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누리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