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권력 : 세상의 지혜
Notes
Transcript
(찬양) 주님은 산 같아서
(엑스포지멘터리)
다니엘은 이스라엘이 지향하는 지혜의 표본이다. 또한 그의 기도(18절)와 비전(19절)과 찬양(19-23절)과 간증(27-28절)과 겸손(30절)과 확신(45절)은 여호와 종교가 지향하는 믿음의 모델이기도 하다(Goldingay). 본문의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는 세상의 모든 비밀을 알고 계신 분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의문) 왜 느부갓네살은 자기 꿈의 내용을 지혜자들에게 알려주기를 꺼려했을까?
(2:14-23) 다니엘의 하나님에 대한 두 가지 진리가 이 기도의 핵심이다. 또한 이 두 가지 진리는 다니엘서의 신학적 핵심이기도 하다. 첫째, 하나님은 능력이다. 둘째, 하나님은 지혜로우시다.
(조영민 목사) 불안에 떠는 세상, 답이 되는 성도 (2장)
리처드 니버의 책 ‘그리스도와 문화’ : 니버는 다섯번째, ‘문화를 변혁하는 그리스도’를 가장 바른 입장으로 제시한다. 세상과 문화를 무조건 악하거나 선하다고 판단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시켜 가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ㅂ아식을, 바벨론의 포로가 된 다니엘의 삶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2장에 등장하는 이야기)를 통해 무슨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어떤 부분을 우리 삶에 적용할 수 있을까?
1 꿈을 반복해서 꾼 느브갓네살의 반응 : (단 2:1) 마음이 번민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고, 지혜자들의 요구에 격분하고 있다. (단 2:5)
느부갓네살은 절대 권력을 가졌다. 수많은 전쟁을 치르면서 승리를 하였고, 여러 나라에서 많은 포로를 데리고 왔다. 당대 가장 강력한 힘과 능력을 가진자였다. 그러나 꿈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번민이 가득해 어찌할 줄 모른다. 분별력을 잃은 채 분노하고 슬퍼하며 잔혹한 명령을 내린다. 왜 그럴까? 내일을 알 수 없어 불안하기 때문이다. 느부갓네살의 모습에서 이 세상의 힘을 가진 사람들의 중심을 엿볼 수가 있다. (성경에서 드러내는 절대 권력을 가진 세상 왕의 모습) 세상 전부를 움직이는 것 같으나 자신의 마음에 생긴 번민조차 해결할 능력이 없는 상태이다.
2 지혜자들의 반응 : 왕의 꿈을 밝히고 해몽하는 ㅁ누제 앞에서 그들은 철저히 무능했다. 지혜자들의 모습에서 이 세상에서 지혜를 가진 이들, 세상을 움직이고 있는 이들의 사상을 엿볼 수 있다. 앞으로 펼쳐질 상황을 예측했지만, 그 예측이 빗나가는 일들을 경험하고 있다. 답을 찾기 위해 애쓰지만 답을 내놓지 못하는 상황이다. 오늘도 세상의 권위자들은 이런저런 대안을 제시한다. 그러나 그들의 지식과 경험을 뒤어넘는 문제 앞에 그들 역시 무능하다.
<성도가 가는 길이 세상의 길이 되다> 이 세상과 우리의 삶은 아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세상이 죽으면 성도도 죽는다. 세상 지혜자들의 운명과 다니엘과 세 친구의 운명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던 상황과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 속에서 세상을 섬기는 자로 살아야 한다. 세상은 울이ㅘ 결코 부리될 수 없는 운명 공동체이다.
다니엘은 이 상황에서 세 친구를 찾아가 함꼐 기도하자고 요청한다. 이것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 백성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세상과 다른 방식이다. 세상은 기도가 필요하지 않다. 하나님께 묻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함께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지혜를 구한다. 그리고 세상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와 상황 속으로 들어가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위로하고 길을 제시한다. 성도는 세상을 사랑한다. 세상이 주는 유익 때문에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명 때문에 세상을 사랑한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오랜 시간 생각했을 것이다. ‘왜 파일 우리에게 이런 기회가 주어진 것일까? 유다에서 끌려온 많은 포로 중에서 우리가 선택되어 바벨론에서 교육을 받고, 지위를 얻게 되었을까?’ 그들이 해야 할 일은 세상 한복판에서 하나님의 뜻 안에서 섬기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백성은 선으로 악을 이기는 자들이다. 성도는 늘 세상을 변화시켰다. 성도는 선으로 세상을 섬겼다. 진심으로 세상을 사랑하고 섬겼다. 성도가 할 수 있는 최선이 세상을 변화시켰다. 오늘날 이 시대 교회도 바로 그 선을 행하기를, 세상을 원하고 있다.
(노진준 목사) 절망적인 세상에서
1) 이 고통이 하나님꼐로부터 온 것인가요? 사람들은 고난을 당하면 두 가지 마음이 공존하는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그 고난이 하나님께서 보낸 것이 아니기를 바라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차라리 그 고난이 하나님이 보내신 것이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생각할 때는 그 고난이 하나님이 보내신 것이 아니기를 바라고, 하나님의 전지하심을 생각할 때는 그 고난이 하나님이 보내신 것이었으면 싶습니다.
2) 느부갓네살의 꿈과 그의 분노
갑질의 극치 : 다른 사람이 꾼 꿈을 어떻게 맞출 수 있단 말입니까? 말도 안되는 요구입니다. 하지만 느부갓네살의 분노가 어느 정도 이해가 됩니다. 왕은 운명을 미리 알기 위해, 그 운명을 바꿔서라도 자기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공을 들여 술사와 점쟁이를 세웠고, 그들을 뒷바라지했습니다. 그들의 학문과 기술을 통해 모든 재앙과 위험으로부터 자신과 자신의 나라를 지키려고 그 사람들을 그렇게 높이고 대접해 주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왕이 키운 점성가와 술사에게는 애초부터 왕의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왕을 설득하는 일 밖에 없습니다. 아마 느부갓네살도 자기가 얼마나 무모한 요구를 하는지 알고 있었을 겁니다. 불안과 두려움이 그를 미치게 만들어서 이런 무모한 요구를 하고 있을 뿐입니다. 마침내 왕은 모든 지혜자를 죽이라고 명을 내립니다. 바벨론에 있는 모든 지혜자를 죽이라는 불호령에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에게도 위험이 닥쳤습니다. 피할 수 없는 위협이었습니다.
3) 아무것도 모르는 다니엘이 한 가지 아는 것
그 때 다니엘은 자신을 왕에게 데려다 주면 왕의 꿈을 해석해주겠다고 합니다. 이건 믿음이 아니라 임기웅변입니다. 다니엘이 취한 행동은 해결할 방법도 없으면서 시간을 좀 더 벌려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불안과 두렴이 너무 컸던 느부갓네살은 조금 더 시간을 주었습니다. 이것도 기적이 틀림없는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그리고 다니엘은 세 친구를 찾아가서 말합니다. (단 2:18) 다니엘은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죽인다면 죽겠다는 각오는 되어 있었지만, 포로로 잡혀올 때부터 목숨을 하나님의 손에 맡겼지만, 그도 두려웠을 것입니다. 친구들을 찾아자 기도하자고 했을 때도 불안과 공포로 떨었을 것입니다.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말입니다.
하지만 다니엘이 분명히 알고 있는 것 하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도, 그들의 미래도, 느부갓네살의 꿈 내용도 아무것도 몰랐지만 하나는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이 문제는 느부갓네살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로부터 온 것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물론 이 사실을 안다고 해도 불안과 두려움으로부터 자유하진 못하지만, 그로 하여금 절망하지 않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리게 하기에는 충분했던 것입니다.
4) 우리에게 있는 희망
왜 하나님이 그렇게 힘든 일을 주시는지 이해되지 않아서 힘들고 답답하지만 그 일이 하나님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느부갓네살의 손에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절망이 아니겠습니까? 저와 여러분이 경험한 모든 일은 그것이 고난이고 고통스런 일이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으로부터 온 일이었어야 합니다. 그래야 답이 있습니다. 그래야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의 상대가 잔인하고 무정하기 이를 데 없는 이 세상이라면, 아무런 희망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위협도, 그 위기도, 그 아픔도 하나님꼐서 다 아는 일이었고, 하나님의 눈 아래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면 왜인지는 몰라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 한 소망이 있습니다. 그 고통과 아픔에도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꼐서 그 선하신 뜻을 드러내실 날이 있다는 말입니다.
왜 우리가 고난 중에 기도해야 하는 꺠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도는 이 일이 느부갓네살이라는 감당할 수 없는 대적에게서 비롯된 일이기 때문에 그를 물리치기 위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이 모든 일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아와 그분의 자비와 선하심을 구하는 행위가 기도입니다. 그래서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이 반드시 해야 할 것이 기도인 것입니다. 단순히 사정하고 설득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며 하나님을 경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해야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의 뜻을 잘 모를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느부갓네살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면해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할 수 밖에 없습니다. 모든 일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믿는다면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은 느부갓네살의 손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우리가 받은 고난의 칼자루는 느부갓네살이 아닌 우리의 하난미이 쥐고 계셨습니다. 절망의 끝자락에서도 우리에게 소망과 위로가 되는 것은 느부갓네살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다는 확신입니다. “잘될 겁니다. 괜찮을 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