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름 5장
게으름과 친숙한 그대에게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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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 울타리로 이어진 길:게으름의 결과/고통
가시 울타리로 이어진 길:게으름의 결과/고통
게으른 자의 길은 가시 울타리 같으나 정직한 자의 길은 대로니라
가시울타리로 이어진 길.
가시울타리로 이어진 길.
게으름은 우리들이 평생 싸워야 할 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게을렀던 것에 대하여 가슴을 치며 회개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게으름은 더 위험합니다.
본문 말씀은 이 게으름의 또 다른 특징을 “게으른 자의 길은 가시울타리 같으나 정직한 자의 길은 대로니라” 라는 말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히브리 문학에서 자주 등장하는 평행법인데 특이하게도 여기에서 쓰인 평행법은 원칙에 맞지 않는 것입니다. 원칙적으로는 게으른 자가 나왔으면 부지런한 자가 나와야 하는데 난데없이 정직한 자가 등장하는 부분이 그렇습니다. 이것은 본문이 해석이 가미된 상태에서 평행법을 적용하였기 때문에 생긴 현상입니다. 또한 길이라는 말이 두 번 나오는데 여기에 사용된 단어가 서로 다릅니다. 게으른 자의 길에서의 ‘길’은 히브리 말로 ‘데레크’라는 단어이고 정직한 자의 길에서의 길은 ‘오라흐’라는 단어인데 ‘데레크’는 정식으로 난 큰 길(way)이고 ‘오라흐’는 통행로(path) 정도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두 단어에 이어 ‘대로’를 나타내는 단어 ‘세룰라’가 나오는데 이것은 ‘높이다’라는 의미를 가진 ‘사랄’이라는 동사에서 유래된 명사입니다. 창세기에서 야곱이 본 하늘에 맞닿은 사닥다리가 히브리어로 ‘술람’인데 그 단어 역시 여기서 유래된 것 같습니다. 창세기 28장 12절 그 뜻은 ‘큰 도로’(highway)입니다. 따라서 본문에 나오는 대로의 정확한 의미는 ‘넓게 만들어져 하늘까지 닿도록 쭉 뻗어 있는 고속도로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쉽게 말해 게으른 자의 길은 큰길이고 정식 도로였는데 한참 걸어갔더니, 가시 울타리가 나왔고 정직한 자의 길은 처음에는 통행로 같은 작은 길이었는데. 조금 들어가 보니 하늘에 맞닿아 있는 고속도로처럼 곧게 뻗은 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럼 우선 그 내용을 풀어 이해해 봅시다. ‘게으른 자의 길은 가시울타리 같으나’라고 했는데 ‘게으른 자의 길은 가시울타리다’가 아니라 ‘가시울타리 같다’는 것입니다. 즉 게으른 자가 들어서는 길은 처음에는 큰길이지만 가다 보면 그의 인생 길이 가시밭 길과 같아지고 정직한 자, 올바른 자의 길은 처음에는 작은 통행로 같지만 한참 걸어가면 누군가에 의해 하늘에까지 닿도록 만들어진 고속도로 같아진다는 것입니다.
게으른 자의 선택
게으른 자의 선택
이 성경 본문을 통해 우리는 게으른 자들의 선택은 눈에 보기 좋고 쉬운 많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인생 길임을 알게 됩니다. 실제로 구약성경에서 히브리어로 ‘데레크’라는 말은 ‘인생 길’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대체 왜 게으른 자들은 쉬운 것만 선택할까요? 이것은 게으른 사람에게는 특별히 그 자신을 사로잡는 절실한 꿈이 없기 때문입니다. 꿈이 있어도 그것을 실현할 구체적인 생활의 목표가 서 있지 않으면 그것은 한낱 희망사항일 뿐입니다.
그 꿈이 단지 희망사항이 아니라 비전이 된 사람들의 특징은 그 꿈을 현실화하는 구체적인 삶의 소목표들이 설정되어 있다는 것과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꿈을 꾸는 것은 아무런 희생도 요구하지 않지만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세운 목표는 우리에게 피와 땀과 눈물을 요구합니다. 그러므로, 게으른 사람은 목표를 세우려 하지 않고 설령 목표를 세웠다 하더라도 갖가지 핑계를 동원하여 그것을 실천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이렇게 하자라고 설득하면 그는 여러 가지로 변명을 늘어놓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속내는 하나입니다. 나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보다 힘 안 드는 것이 더 좋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를 성경적 표현으로 풀이하면 “나의 하나님은 내 배다”입니다. 빌립보서를 보면” 저희의 신은 배요”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빌립보서 3장 19절 배는 원어적 의미로 “창자”입니다. 창자는 히브리식 사유에 따르면 “인간의 욕망의 좌소”입니다. 따라서 이 성경 구절의 뜻은 ‘저희 하나님은 저희가 하고 싶은 대로 싶어하는 욕망이요.’ 인 것입니다.
게으른 자의 길은 처음에는 쉽습니다. 자고 싶은 대로 자고 쉬고 싶은 대로 쉬며 마음 내키는 대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쉬운 길은 죄로 이어지는 길입니다. 따라서 계속 따라가면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어려움과 고난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게으름의 폐해를 깨닫고 이러면 안 되겠다고 마음먹었다면 이제 필요한 것은 구체적으로 목표를 세우는 일입니다. 깨달은 것만으로는 부지런히 살 수 없습니다. 정말로 게으름을 떨치고 일어나기 위해서는 스스로 무엇을 할 것인지 구체적으로 말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내일 새벽 기도를 나오겠습니다. 도와주십시오. 아니면 잠을 하루 여섯 시간 이하로 줄이겠습니다. 건강을 주십시오. 시간을 낭비하게 만든 쓸데없는 일들을 나의 삶에서 몰아내겠습니다. 그것을 버릴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하며 구체적으로 기도할 때 삶의 변화가 동반됩니다. 구체적인 목표 없이 부지런히 살고 싶으니 도와주세요. 라고 해서는 아무것도 나아질 것이 없습니다.
삶을 고치기 위해서는 분명한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실천적으로 좇으며 살아야 합니다. 자신이 게으르게 살았다고 생각한다면, 정확히 어떤 부분이 게을렀는지를 찾아 고쳐야 합니다.
잠이 너무 많아서 문제라면 잠을 줄이고 TV 앞에서 보는 시간이 너무 많다면 TV를 치워 버리십시오. 육체적으로는 게을렀다고 말할 수 없지만, 영적으로는 몹시 게을렀다고 생각한다면, 자기의 영적 게으름을 타개하는 일에 마음을 써야 합니다. 이처럼 자신의 게으름을 파악하고 그 게으름의 단절을 위한 구체적인 목표를 세우는 것은 게으름의 위험을 깨닫는 일만큼이나 중요한 일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분명한 목표를 세우고 살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신을 도우셨는지가 분명해지고, 자신이 그 목표대로 잘 살았는지 그러지 못했는지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따라서 감사든 회개든 선명해지며 회복도 분명하고 성화의 진전도 뚜렷해집니다.
그런데 목표 없이 막연하게 부지런히 살아야겠다고 생각한다면, 아무리 눈물 흘리며 기도했다고 하더라도 TV프로그램 한 편 보고 나면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맙니다. 돼지가 깨끗이 씻고 나서도 더러운 구덩이로 다시 돌아가고 개가 자신이 토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처럼 게으른 옛 삶을 다시 반복해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2장 22절
기억하십시오. 삶을 고치지 않은 채 계속해서 듣기만 하는 것은 단지 설교를 즐기는 일입니다. 신자가 은혜를 받고도 삶이 그 말씀에 부응하지 않으면 말씀의 미각은 곧 상실됩니다. 삶의 미끄러짐, 마음의 미끄러짐이 말씀의 미각에서 미끄러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급기야 그 말씀에 대해 반감을 갖게 만듭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면 안 되겠다는 자극이 오면 구체적으로 결단해야 합니다. 게을렀던 것을 회개했다면, 무엇이 게을렀는지 정확히 파악하고 그것을 어떻게 고칠 것인지 구체적인 작정을 해야 합니다.
게으른 삶의 결과
게으른 삶의 결과
게으른 자는 넓은 길을 택합니다. 넓은 길이 걸어가기 쉽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7장 13절 그 길은 자기와의 씨름도 죄 죽임의 고뇌도 없이 편안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안일하게 걸어가는 동안 게으른 자들은 온갖 위험에 노출됩니다. 그리고 그 위험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현실로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육체적인 차원에서는 게으르면 많이 먹고 운동을 안 하기 때문에 몸이 심각하게 비대해지기 시작하고 그러면서 각종 신체적 이상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영적인 차원에서도 게으르면 지,정,의가 망가집니다. 게으른 사람의 의지는 매우 나약하게 되어 어떤 일을 시도해도 그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하는 것이 아니라 하기 싫어질 때까지만 하려 합니다. 또한 정서는 부패하게 되어 자기만을 위하려는 적극적인 죄에 대한 욕망을 갖게 됩니다. 지성 역시 망가져 그 사람으로 하여금 논리를 버리고 무조건 편한 것만 택하게 만듭니다. 이처럼 게으름은 인격의 3요소인 의지와 정서와 지성에 영향을 주어 그의 자기 발전을 저해하고 그의 전체적인 인격이 불결해지게 만듭니다.
더구나 영적으로 보았을 때 게으른 자의 영혼은 부패해져 있으므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많이 손상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일수록 죄가 들어오기 용이한 마음의 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게으른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열매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여기에 나오는 가시 울타리와 같은 삶입니다.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게으르게 살다가 어느 순간 스스로를 돌아보니 육체는 다 망가져 있고 영혼은 너무나 피폐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삶의 구체적인 목표를 가지고 신실하게 살아가는 영적으로 살아 있는 사람들과는 융화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참된 성도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과 교제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자기와 비슷한 사람을 만나 교제하기 시작합니다. 이러면서 게으른 사람은 참된 성도들의 회중으로부터 이탈되고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소외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육체도, 인격도, 영혼도 관계도 모두 망가지는 것이 바로 가시 울타리로 묘사된 게으름의 결과입니다. 이처럼 게으른 자에게는 반드시 그동안 게으르게 살면서 뿌린 악한 씨앗들을 거두어 들여야 하는 때가 오는 것입니다.
게으름의 그늘에 깃들이는 악
게으름의 그늘에 깃들이는 악
본문에서 ‘정직한 자’라는 표현은 ‘올곧은’, ‘똑바른’, ‘옳은’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히브리어 동사 “야사르”에서 온 단어입니다. 따라서 정직한 자로 의미를 한정하기보다는 의로운 자, 올바른 자 등의 포괄적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이 문맥을 살피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런데 게으른 자와 상반된 의미를 나타내는 단어로 이 “야사르”가 쓰인 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한 가지를 시사합니다. 바로 게으름의 그늘에는 불법, 편법, 바르지 못함, 부정직한 것들이 깃들이기 쉽다는 사실입니다.
게으른 사람들은 대부분 요령을 피우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게으른 사람 중에서 정직하고 올곧은 사람을 찾기란 불가능합니다. 게으름을 피우면서도 남들만큼 살기 위해서는 게으름을 피우느라 남보다 뒤처진 부분을 보충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편법을 쓰며 살아야 할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불법한 방식으로 살아야만 게으름을 피우면서도 다른 사람하고 비슷하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게으름을 악으로 보는 것이 타당함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좁은 길로 가는 사람
좁은 길로 가는 사람
정직한 자의 길을 나타내는 히브리어 단어 ‘오라흐’는 작은 길이나 통행로를 뜻합니다. 이 길은 가시 울타리로 이어지는 게으른 자의 길과는 달리 하늘로 쭉 뻗은 대로로 이어지는 길로 들어가는 길은 작으나 들어가 보면 큰 길이 나오는 것입니다.
사실 게으름을 버리고 부지런하게 정도를 따라 사는 일은 많은 희생을 요구합니다. 세상에 휩쓸려 살아가는 것보다 훨씬 어렵고 자신을 비난하는 악의에 찬 사람들도 많이 만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정직한 자, 의로운 자의 길을 넓고 좋은 길이 아니라 작은 통행로로 묘사합니다. 작은 통행로에는 예상치 못한 난관이 있기 마련입니다. 진흙탕을 만나기도 하고 돌짝밭을 피곤하게 걸어야 하기도 할 것입니다. 작은 길에는 늘 부대낌과 시련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정직하고 올바르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게으른 사람들과 달리 항상 긴장 상태에 있습니다. 항상 자기를 관리하기에 힘쓰고 자신의 삶을 가로막거나 마음을 더럽힐 수 있는 위험한 것들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은 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바르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언제나 땀이 흐릅니다. 게으른 사람들에게는 쉬는 시간이 대부분이고 일하는 시간이 가끔이지만, 성실한 사람들에게는 일하는 시간이 대부분이고 쉬는 시간은 가끔이기 때문입니다.
악보에 비유하자면, 게으른 사람의 인생악보에는 쉼표만 가득하고 올바르게 살아가는 사람의 인생악보에는 음표가 가득한 것입니다. 그래서 게으른 사람의 인생은 한가해도 아름다운 멜로디가 없지만, 성실한 사람의 인생은 힘들어도 아름다운 노래가 있습니다. 어떤 인생이 하나님 들으시기에 더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할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정직한 자에게 열리는 고속도로
정직한 자에게 열리는 고속도로
정직하고 곱게 살아가는 것은 자기 안에 있는 게으르고자 하는 부패성과 끊임없이 싸워야 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정말로 쉬운 일이 아닙니다. 좁은 통행로를 걸어가는 것처럼 힘든 일이며 미래에 어떤 보장도 없을 것 같이 느껴지는 위험한 모험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길이 지금은 좁은 것 같으나 한참 가다 보면 훤히 뚫린 고속도로로 들어서게 되리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사실 원칙은 은혜의 세계뿐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서도 잘 들어맞습니다.
당장은 부지런히 사는 것이 어려워 보이고 잔 꾀를 부리며 게으르게 사는 것이 쉬워 보여도 시간이 흐르면 성공은 부지런히 노력한 자를 향해 미소 짓고 있는 것을 볼 것입니다. 이 원칙이 이렇게 일반적인 삶에 있어서도 잘 맞는데 하물며 영적인 삶에 있어서는 얼마나 잘 맞겠습니까?
물론 부지런히 사는 동기가 나중에 받을 축복 때문이어서는 곤란합니다. 사실 대가를 바라는 마음으로 정직한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이라면 하늘에 맞닿은 고속도로를 만나기 전에 자신이 먼저 지쳐 버릴 것이지만 말입니다. 신자가 정직한 자의 길을 가는 진정한 동기는 그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부지런하고 정직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곧 자신의 기쁨인 것입니다. 그들은 육신의 소욕을 쫓아 사는 대신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며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의 뜻을 따릅니다. 당장 그것 때문에 금시발복하는 축복이 주어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의 관심은 축복이 아니라 거룩입니다.
또한 그는 하나님께서 쏟아 주실 물질보다 올바른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되는 것을 더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몸부림치며 거룩한 생활을 위한 자기의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는 가운데 처음 들어선 작은 통행로는 상상할 수 없이 넓은 길이 되어서 후에는 정말 보람 있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합니다.
게으름과 영적 침체
게으름과 영적 침체
정직한 자는 또한 말씀을 깊이 사모합니다. 그것이 그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지혜를 가르쳐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게으른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깨달으려고도 말씀을 탐구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이 좋기에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되어라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탐탁지 않은 것입니다. 게으른 사람은 “하나님께서 무언가 하시려고 해도 내 맘에 안 드는 건 아무리 하나님이시라도 맘대로 못 하십니다”라는 태도로 자기 자신을 중심에 놓고 하나님을 멸시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다가도 말씀을 통해 강한 자극이 오면 충격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게으른 사람에게는 은혜가 부어져도 단발적인 충격으로 끝납니다. 무엇인가 충격을 받았으면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자신의 안일한 삶을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옳은데 그 충격은 사람에게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그냥 며칠 머물다 사라집니다. 결국 그것은 충격도 아니고 일시적으로 그의 영적 수면을 방해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여름 수련회나 사경회를 오가며 은혜를 받으면 뭐합니까? 실천적으로 하나님 앞에 나와서 간절히 기도하며 자신을 고쳐가는 일들을 하지 않는 이상 그 은혜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옮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냥 잠시 눈을 떴다가 ‘내년 여름 수련회 때 다시 깨워줘’ 하고 다시 잠들어 버리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이 신자로 하여금 이렇게 한심한 삶을 반복하게 하는 것입니까? 바로 게으름입니다.
왜 살아있느냐? 물으시거든.
왜 살아있느냐? 물으시거든.
게으른 사람은 늘 넓은 길을 택하는데 이는 쉬운 길로 가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게으른 사람은 영적으로 늘 죽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예수님의 생애와 그분을 인격적으로 만났던 사람들의 생애를 생각해 보십시오. 사도행전에서 성령 강림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을 제대로 만난 사도들 속에서 게으름을 볼 수 있습니까? 나태와 안일로 인한 부주의와 우유부단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오히려 그들은 세상을 미워했고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나태와 안일을 악마처럼 미워했습니다. 조지 휘필드는 “나는 썩어서 죽느니 달아서 죽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마음 아프게 하고 그분의 영광을 훼방하며 하나님의 나라에 누를 끼치는 장애물로 살아온 것은 지금까지의 삶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이제는 정말 우리 모두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보람을 느끼실 수 있도록 살아야 합니다.
며칠 전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얘야, 내가 왜 널 계속 살려줘야 하니?’ 라고 물으시면 나는 뭐라고 대답할까? 이러이러한 이유 때문에 아직은 꼭 살아있어야 합니다 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하고 말입니다.
여러분에게도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에게는 꼭 살아있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아직 애들이 너무 어려서, 아직 결혼도 못 해봤는데, 사업을 이렇게 벌여 놓아서’ 같은 대답들 말고 하나님께서 들으시고는 그래 네가 이 세상에 살아 있어야 하지만 이 세상도 좀 더 내가 기뻐하는 모습으로 돌아오겠구나 하실 만한 이유가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가 즐거우려고 이 세상에 살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까지가 될지 모르지만 우리를 사랑하사 이렇게 당신 앞에서 살아가게 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의 모든 것을 쏟아붓고자 여기 있는 것입니다.
시간을 붙들어 맬 수는 없습니다.
시간을 붙들어 맬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좁은 길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길에서 최선을 다해서 우리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절반밖에 안 되는 수를 누리셨지만 그분은 게으름과는 거리가 먼 분이셨기에 이 세상의 어느 인간보다도 많은 일들을 이루셨습니다.
그분은 일체의 성실함과 부지런함으로 비가 올 때나 바람이 불 때나 사람들이 당신의 말씀을 기뻐할 때나 대적할 때나 올곧게 진리를 따라 사셨습니다. 그리고 사시는 대로 가르치셨고 가르치신 대로 몸소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여러분, 시간은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그 누구도 시간을 붙들어 놓을 수는 없습니다. 돌아보면 정말 많은 날 동안 우리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은혜를 그분으로부터 받았습니다. 우리의 영혼을 흔들어 깨우며 찾아오시는 주님으로 인해 감격했고 그분이 가르쳐 주시는 복음의 진리로 인해 말할 수 없는 기쁨에 사로잡혔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께 기쁨이 되었던 시간들은 너무나 짧습니다.
그러나 아직 우리에게는 기회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아직 그분을 위해 살 수 있는 인생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매일매일의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안다면 절대 안일하게 살지 못할 것입니다. 절대 함부로 시간을 낭비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매 순간 하나님 앞에서 온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해 주님을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남겨진 시간을 우리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데에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앞에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대로로 통하는 좁은 길과 가시밭길로 이어지는 넓은 길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길로 가시겠습니까? 잠시 편안하게 살다가 가시 울타리를 만나서 하나님 앞에 좌절하는 삶을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지금은 비록 좁은 골짜기를 걸어가는 것 같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늘 가는 밝은 길로 이어지는 거룩한 무리들이 지나갔던 영광스러운 대로에 사시겠습니까?
삶을 통한 입증
삶을 통한 입증
부지런히 살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나 게으른 삶을 사는 것은 매우 쉽습니다. 따라서 조금만 방심해도 우리의 삶은 게으름의 손짓을 따라 움직이고 맙니다.
우리는 게으름이 유혹하는 쉽고 편한 길을 바라보는 대신 예수님께서 걸어가셨던 좁고 험한 길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은 겨우 33년을 사셨을 뿐이지만 3300년을 산 사람이라 있다고 할지라도 이룰 수 없는 일들을 이루고 가셨습니다.
외로움이 그분의 친구였고 고단함이 그분의 동반자였지만 그분에게는 꿈이 있었습니다. 그 꿈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수많은 영혼들을 아버지의 사람으로 돌이키는 것이었습니다.
그 일을 위해서 그분은 구체적인 계획과 목표를 세우셨고 사람의 몸을 잇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30년을 준비하시고 3년간 불꽃처럼 사역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도 쉬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쉼은 게으른 사람의 휴식과 달랐습니다. 게으른 사람의 휴식은 휴식 속에서 즐거움을 맛보기 위한 것이었지만 예수님의 휴식은 다시 일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힘은 예수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육체를 가진 인간이지 무한정 일하도록 만들어진 기계가 아닙니다. 기계도 계속 무리하게 작동을 하면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연약한 욕심과 정신을 가진 인간이야 더 더욱 쉼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적절한 쉼은 우리의 육체에 새 힘을 주고 영혼에 선한 욕구를 불러일으키지만 부적절한 쉼은 육체를 게으르게 하고 영혼을 싫증에 떨어지게 합니다.
여기서 적절한 쉼이라고 하는 것은 적어도 두 가지 요소를 구비한 쉼입니다. 첫째는 육체의 원리에 맞는 노동으로부터의 쉼입니다.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천지를 창조하시고 제 7일에 쉬신 것도 바로 이러한 안식의 피로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둘째는 영혼의 원리에 맞는 쉼입니다. 육체가 과중한 노동으로 장시간 피곤하게 되면 특별히 예외적인 경우가 아닌 이상 영혼의 선한 목표를 향한 집중력도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갖게 된 선한 목표를 위해 살기 위해서는 육체도 부지런하게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하지만 영혼도 그 일이 가진 선한 가치에 대하여 싫증을 느끼지 않을 수 있는 열렬함을 유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그냥 육체를 노동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만으로는 쉼을 통하여 다시 일할 수 있는 에너지를 회복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육체를 노동으로부터 벗어나 쉼을 갖게 할 때에는 영혼을 선한 가치에 대하여 집중시켜야 합니다. 육체는 노동의 의무를 벗어버림으로써 쉼을 얻지만 영혼은 오히려 하나님께 집중함으로 새 힘을 얻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오직 여우와를 악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간 것 같을 것이요. 다른 박질하여도 권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이사야 40장 31절.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쉼에로 초청하셨고 마태복음 11장 28절 제자들에게 쉬도록 명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6장 45절, 마가복음 6장 31절, 마가복음 14장 41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쉼은 언제나 쉼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새롭게 일하시기 위한 쉼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쉼이 육체를 의무에서 벗어나게 하므로 마음을 무절제한 휴식의 방탕에 흐르도록 내버려 두는 그런 종류의 쉼이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쉼까지도 예수님의 그것을 본받아야 합니다.
제가 전도사 시절의 일입니다. 교육자 회의를 하던 중 한 교육자가 심방을 안 하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연로하신 담임 목사님은 낮은 어조이지만 침통한 목소리로 ‘그렇게 하면 되겠습니까?’ 라고 그 교역자를 나무랐습니다. 이윽고 교역자 회의가 끝나고 모두들 자리를 떠나는데 담임 목사님만이 유독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가만히 살펴보니 그분은 슬픈 기색으로 이렇게 혼잣말을 하고 계셨습니다. “저렇게 게으르게 살다가 주님을 어떻게 만날꼬 저렇게 나태하게 일하다가 무슨 면목으로 우리 주님을 뵈 오려고” 가슴 아픈 표정으로 고개를 드신 그분의 눈가에는 이슬이 맺혀 있었습니다.
저는 그것이 주님의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게 살다가 어떻게 주님을 배우려고 그러십니까? 여러분이 게으름을 고수하는 한 여러분이 꿈꾸는 모든 선한 것들은 꿈속에서 사라질 것입니다. 죄에 대한 승리, 고독한 생활, 진실한 신자의 꿈을 꿈꾸지만 결국 사라져 갈 것입니다. 지금은 게으른 삶이 편안한 것 같고, 아무 목표 없이 살아가는 삶이 쉬운 것 같지만 그렇게 살다가는 얼마 지나지 않아 가시 울타리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환란을 만날 때 내 안에 붙들어야 할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가슴 치며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다시 구체적인 목표를 세우십시오. 그리고 싸우십시오. 삶을 통해 여러분이 게으르지 않고 어찌하든지 주님을 섬기며 살고자 하는 존재임을 입증하십시오. 여러분의 게으름을 가슴 아파하시는 그분 앞에
가시 울타리로 이어진 길: 게으름의 결과와 고통
가시 울타리로 이어진 길: 게으름의 결과와 고통
1. 오늘의 말씀과 두 가지 길의 역설
1. 오늘의 말씀과 두 가지 길의 역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잠언 15장 19절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두 가지 길, 즉 게으른 자의 길과 정직한 자의 길에 대해 깊이 묵상하고자 합니다.
“게으른 자의 길은 가시 울타리 같으나 정직한 자의 길은 대로니라” (잠언 15:19)
이 구절에는 놀라운 역설이 담겨 있습니다.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게으른 자의 길은 '데레크'로, 본래 넓고 잘 포장된 '큰 길'을 의미합니다. 반면, 정직한 자의 길은 '오라흐'로, 처음에는 좁고 작은 '통행로'나 오솔길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입니다.
게으른 자의 길 (넓고 쉬운 길) → 가시 울타리 (고통과 막힘)
정직한 자의 길 (좁고 힘든 길) → 대로 (하늘로 뻗은 고속도로)
2. 게으른 자의 선택: 넓은 길의 종착지
2. 게으른 자의 선택: 넓은 길의 종착지
게으른 자는 눈앞의 편안함, 즉 '희생'(피, 땀, 눈물)을 거부합니다. 그들은 절실한 꿈과 구체적인 목표 없이 '편안함' 자체를 인생의 최우선 가치로 선택합니다. 성경은 이런 삶을 가리켜 "저희의 신은 배요" (빌 3:19)라고 말합니다. 이는 자신의 욕망을 따르는 것입니다.
겉보기에는 쉽고 유혹적인 이 넓은 길은 결국 죄와 고난으로 이어집니다. 그 종착지가 바로 **'가시 울타리'**입니다.
'가시 울타리'의 실체: 총체적 붕괴
'가시 울타리'의 실체: 총체적 붕괴
게으름이 만드는 가시 울타리는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을 포위하여 붕괴시킵니다.
육체적 붕괴: 운동 부족, 비만, 각종 신체적 이상을 초래합니다.
인격적 붕괴 (지, 정, 의): 의지는 나약해지고, 감정은 통제력을 잃고 부패하며, 지성은 편한 것만 좇아 사유 능력을 잃게 됩니다.
관계적 붕괴: 하나님과의 관계가 손상되고, 진정한 성도들과의 교제가 끊어지며, 스스로 고립됩니다.
영적 붕괴: 게으름은 필연적으로 요령, 편법, 부정직을 낳으며, 이는 악으로 깊어지기 쉽습니다. 게으름은 단순한 나태가 아닌, 악입니다.
3. 정직한 자의 길: 좁은 길의 영광
3. 정직한 자의 길: 좁은 길의 영광
반면, 정직한 자의 길인 '오라흐'(좁은 통행로)는 희생과 난관을 요구합니다. 이는 세상과 싸우는 '긴장'과 '자기 관리'의 삶이며, 우리의 인생 악보에 쉼표가 아닌 '음표'가 가득 찬 삶입니다. 땀과 노력을 요구하는 힘든 길이지만, 결국 아름다운 멜로디를 만들어냅니다.
좁은 길을 걷는 참된 동기: '거룩'과 '기쁨'
좁은 길을 걷는 참된 동기: '거룩'과 '기쁨'
신자가 이 좁은 길을 가는 진정한 동기는 무엇입니까? 단지 '대가'나 '축복'을 받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만약 축복이 목적이라면, 우리는 곧 지쳐 넘어질 것입니다.
진정한 동기는 바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관심은 '축복'이 아니라 '거룩'에 있습니다. 그분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되는 것, 물질보다 '올바른 길'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 좁은 길을 걷는 힘입니다.
4. 게으름의 유일한 해독제와 결단
4. 게으름의 유일한 해독제와 결단
우리는 어떻게 이 게으름의 가시 울타리를 부수고 정직한 자의 대로로 들어설 수 있을까요? 막연한 깨달음과 "부지런히 살게 해달라"는 추상적인 기도만으로는 우리의 삶을 고칠 수 없습니다.
해독제: 구체적인 목표와 실천
해독제: 구체적인 목표와 실천
게으름의 유일한 해독제는 구체적인 목표와 실천입니다. 정확히 어떤 부분이 게을렀는지 파악하고 고쳐야 합니다.
“내일 새벽 기도를 나오겠습니다.”
“잠을 6시간 이하로 줄이겠습니다.”
“TV나 스마트폰 사용 시간을 정하겠습니다.”
이러한 구체적인 목표와 실천이 우리의 감사와 회개, 그리고 성화를 선명하게 만듭니다.
우리의 모범: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모범: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이야말로 좁은 길의 모범이셨습니다. 그분은 33년의 삶과 3년의 사역으로 영혼을 돌이키는 꿈을 이루셨습니다. 그분도 쉬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쉼은 게으른 자의 '휴식을 위한 휴식'이 아니라 '다시 일하기 위한' 쉼이었습니다. 육체는 쉬되, 영혼은 하나님께 집중함으로 새 힘을 얻으셨습니다. (사 40:31)
최종 결단 촉구
최종 결단 촉구
위대한 전도자 조지 휘필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썩어서 죽느니 닳아서 죽겠다."
우리는 우리가 즐겁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신 보람을 느끼실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쏟아붓기 위해 이 땅에 존재합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다시 구체적인 목표를 세우십시오.
그리고 싸우십시오. 삶을 통해 여러분이 게으르지 않고 주님을 섬기고자 하는 존재임을 입증하십시오. 우리의 선택이 가시 울타리가 아닌, 영광의 대로로 이어지기를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