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 강림과 사랑의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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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본문 해설

사도행전 2:42–47 NKRV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성령강림사건 직후에 예루살렘 교회를 보라.
그들은 일찍이 아무도 경험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믿는 사람들은 일체의 이기심을 버리고 “모든 물건을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었습니다”(행 2:43-45).
그들은 성전에 모이고 집에서 떡을 떼는 일에 있어서도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였습니다”(행 2: 46).
공동체 안에서 생겨난 이러한 마음의 하나됨은 곧 동시에 모든 사람들이 한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서 온 리따스 사랑의 결과였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모두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는 것은 곧 아가페 사랑의 충만함을 받았다는 말과 같은 표현이다(행 2:4; 롬5:5).

II.성령 강림과 사랑의 공동체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은 사랑의 공동체를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이시고 삼위 하나님께서 서로 사랑하셔서 넘치는 사랑이 창조로 나타났습니다.
비록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이 좌절된 듯 하였으나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그 뜻이 계속 이루어져 왔습니다.
오늘은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과 사랑의 사회를 만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 사이의 관계를 살피고자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 후에 있었던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과 짝을 이루는 구속사에 있어서 획기적인 사건입니다.
이로 인하여 신약시대의 성도들은 구약의 성도들의 꿈도 꾸지 못하던 사랑의 사회를 현실적으로 누리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사건 예루살렘 교회는 인간의 타락 이후로 지상에 나타난 모든 교회들 중에서 하나님께서 세우시고자 했던 사랑의 사회에 가장 근접한 모델이었습니다.

A. 성령님의 강림

성령 강림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선제적 경험
그들이 경험한 초대 교회 캐리그마들 중 진수는 구약성경으로부터 지금 자신들이 경험한 성령 강림 사건까지를 관통하고 이후 종말에 이르기까지 전개될 구속 사역사에 대한 선제적 경험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뱃속에서 우러난 체험적인 의미를 목숨을 걸고 외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때 예루살렘 공동체 구성원들의 관심사는 오직 거룩하신 하나님을 찬미하는 것과 사도들로부터 말씀의 가르침을 받는 것과 서로 사랑하는 것과 자기들의 경험한 복음적 사실들을 전파하여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받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성령강림 사건으로 말미암아 나타나 놀라운 기사 표적들이 나타나고 온 백성들 가운데 나타나 사람마다 두려워하게 만든 것은 성령 강림 사건이 종말에 있을 하나님의 통치가 현재적으로 침투되어 들어온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과 성령 강림 사건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였습니다.
구약보다 탁월한 신약 사랑의 공동체
그것은 아직 범세계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완전히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때의 구원받은 신자만 볼 수 있는 교회의 일치와 사람들 사이에 있는 순수한 사랑,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인류 구원의 축복 등을 미리 앞당겨 맛보는 것과 같은 경험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신약 교회의 공동체로 사랑의 사회를 이루는 데 있어서 구약의 언약 공동체와 비교 될 수 없이 탁월한 위치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와 관련해서 신약시대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함께 영적 이스라엘 교회가 누리게 될 계시의 축복성과 사랑의 현실성에 관하여 예수님께서 하신 놀라운 말씀을 기억합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례 요한을 지극히 높이시며 그이보다 큰 사람이 없다고 말씀하시면서 그러나 천국에서는 어떤 사람보다도 더 작은 사람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엄밀히 말해서 세례 요한이 신약의 사람이 아니라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이심을 밝히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선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마 11:11).
여기서 천국은 세계 종말 이후에 이루어지는 나라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임하게 된 하나님의 나라를 가리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오순절 강림 사건 후에 임하게 될 하나님의 통치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때 사람들이 누리게 될 계시의 풍성함과 사랑의 부유함이 구약시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보편적이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과 함께 이루어질 천국은 성령이 친히 우리 안에 계셔서 은혜로 통치하시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성령강림으로 시작된 신약 교회
이러한 성령의 특별한 임재로 말미암아 그들은 이전의 성도들이 깨닫지 못했던 구약의 진리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특히 예수가 메시아이심을 증거하는 사실에 대해 체험적으로 알게 되었기에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이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선구자인 세례 요한이 알고 있었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능가하는 신령한 지식과 하나님의 사랑의 복을 누리게 될 것이란 것입니다.
그렇다. 오늘날로 우리에게 잇달아 찾아오는 시련과 환란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아프고 힘들 때 신령한 복을 부어주셔서 평화를 누리게 하시는 은혜는 성령의 선물입니다.
또한 우리는 비록 연약해도 고난 속에서 모든 상황을 극복하고 이길 수 있게 해 주시는 놀라운 위로도 성령의 선물입니다.
폭풍과 같은 고통 속에서도 가슴이 저미도록 밀려오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현재적 경험과 파도처럼 밀려오는 긍휼히 여기심의 체험도 모두 성령의 역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신약 교회의 출연의 시작을 성령 강림 사건으로 보아야 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때에 나타났던 이미지인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나 “불의 혀” 등도 모두 하나님의 사랑에 특별한 부으심과 관련된 것입니다(행 2:2-3).

B. 제자들의 변화

성령강림으로 확장된 선교
그런데 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 다 도망갔던 제자들이 180도 달라졌을까?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성령에 의한 그 사랑의 부어짐이 역사 속에서 선교의 확장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 2:4)
다시 말해서 그들이 하늘로부터 부어지는 사랑의 충만함을 받게 되자 그것은 곧 그 사랑에 대한 자기만족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가운데 행하신 위대한 일 곧 “하나님의 큰 일”(행 2:11)을 선포하지 않을 수 없는 아가페 사랑의 강제력을 경험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신적인 사랑의 강제력은 일차적으로 곧 잃어버린 영혼들을 향하여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 사도들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 사명은 마치 자신의 숙명처럼 느끼게 된 것이었습니다.

a. 제자들의 예

동굴의 비유를 통해 이해하는 제자들의 변화
이것은 우리에게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BC428-348)이 자신의 책 『국가론』 제7권 519d~520e의 “동굴의 비유”에 나오는 내용을 상기하게 합니다.
동굴에서 나와 태양 아래서 사물들의 진정한 실재와 선의 이데아를 본 사람들은 거기서 태양빛을 향해 상승의 길을 오른 사람들이다.
김남준 목사님 코멘트
플라톤이 설명을 하는데 그게 뭐냐면 동굴이 있어. 동굴의 죄수들이 다 이렇게 갇혀 있어. 그리고 여기에 이렇게 촛불이 있고 촛불 앞에 이렇게 그림자가 있는 어떤 물체 같은 모형이 있는 거야. 그러면 그게 동굴 벽에 이렇게 새겨지는 거야. 그래서 사람들은 뒤를 보면서 이게 뭔지를 잘 맞히는 사람들은 음식도 좀 먹고 세상 말로 출세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거야.
그런데 계속 그걸 쳐다보던 사람이 그중에 어떤 한 사람이 눈에 보이는 저거는 어디서 왔을까? 그리고 생각하면서 뒤를 이렇게 돌아다보게 되는 거예요. 보니까 저기 있는 커다란 건데 여기는 요만한 무슨 나무때기 같은 거를 가지고 있고 그 뒤에는 불꽃이 피어 있는 거야. 그런데 이제 그거를 그렇게 뒤돌아본 사람이 거의 없었던 거야. 다 거기에 몰두하고 이렇게 사니까.
그러니까 이게 그걸 갖다가 해석을 하면 이게 뭐냐 하면 인간들이 이렇게 눈에 보이는 세계를 세계에 보이잖아. 눈에 보이는 세계를 보면서 돈을 가지고 커피도 사 먹고 커피도 마시고 밥도 사 먹고 친구를 만나러 갈 때 좋은 옷도 사 입고 이렇게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는 거야. 이렇게 이게 전부인 줄 아는 거야.
그런데 그거는 사실은 그보다도 더 중요한 어떤 모형이 있기 때문에 그게 생겨난 거라는 거야. 그러니까 그걸 이렇게 뒤를 돌아보게 하는 힘이 무엇이냐에 대해서 철학자들, 플라톤을 전공하는 사람들도 그거는 답을 못 해.
나는 그것이 진리의 힘이라고 보는 거야. 진리의 힘에 의해서 뒤로 돌아보는 거야. 그리고 딱 보니까 저쪽으로 환한 빛이 들어오는 계단이 보이는 거야. 그래 가지고 거기를 걸어 나간 거야. 나갔더니, 여기서 그림자로 봤던 수많은 새, 사슴, 그다음에 나무, 들판, 사람. 그런데 실질적으로 그게 보이는 거야.
그런데 그렇게 보기 위해서 올라간 거를 아나바시스라고 이야기하고 아나바시스 아나바이노에서 온 거야. 아나는 위라는 뜻이고 바이노는 걸어가다잖아. 그러니까 아나바시스라고 부르고 그런데 그거를 본 사람들은 모두 똑같이 누구를 생각하겠어?
그 동굴 속에서 아직도 그걸 쳐다보고 그게 인생의 전부인 줄 알고 그거 몇 개 맞췄다고 서로 자랑하고 몇 개 맞힌 사람들은 또 못 맞힌 사람 핍박하고 그러면서 살아가는 그 사람들을 보면서 할 수 없이 이 속에서 뭔가 아주 깊은 책임감과 사명감을 느껴.
자기는 진짜 가기 싫은데 그 사람들이 그렇게 허무하게 인생을 보내는 것을 두고 볼 수가 없어서 다시 그리로 내려가는 그게 카타가시스라는 카타가시스로 다시 내려가
그리고 어떻게 그 사람의 운명은 어떻게 되게 그래 가지고 너희들이 보는 게 전부 다가 아니다. 이 뒤에는 모형이 있고 저 동굴을 지나가면 실재가 있는데, 그 실재는 여기 그림자하고 비교도 안 된다고 외치면은 핍박당하고 거기서 죽는 거야.
그러니까 이게 내가 플라톤의 플라톤 국가론을 1년을 읽었거든. 1년을 같이 과외 선생하고 공부하면서 읽었는데 그거를 읽을 때 등골이 오싹해지더라고요.
이게 어떻게 기독교의 사명과 복음 전파에 대한 그 사명과 어떻게 이렇게 똑같을까? 그러니깐 여러분들이 만약에 잘 들어요. 이게 여러분들의 목회만이 아니라 신앙에 대해 답을 주는 거야.
내가 왜 열정이 없을까? 여러분들이 아직 모형만 보고 있기 때문이야. 최소한 그림자만 보고 있기 때문이야. 최소한 그 모형을 보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지상으로 상승해서 그 선의 실재화 이데아를 봐야 된다.
그게 우리 종교적으로 기독교적으로 표현하자면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는 거예요.
로이드 존스의 『목사와 설교』 책이 어떻게 해서 쓰여졌냐면 돌아가시기 몇 년 전에 Westerminster 신학교에서 무엇이라도 좋으니까 오셔서 일주일만 우리에게 가르쳐 달라고 할 때 가서 인제 목사와 설교와 설교자라는 제목으로 특강을 하셔. 일주일 동안을 그걸 모아놓은 게 목사와 설교야. 거기에 그 제가 한 줄로 요약하면 뭔지 알어? 하나님을 깊이 만나지 않고는 결코 당신은 설교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게 결론이에요. 그러니까 사생결단을 하고 하나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간절히 매달려야 되는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은 삶의 중심축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거예요. 흔들리게 됩니다. 똑같은 이야기를 이제 그 얘기를 하는 거죠.
제자들의 변화 정리
그리고 그것을 경험한 사람들은 마땅히 태양빛 아래서 자신이 본 사물들 안에 있는 선의 실재와 이데아에 대해 증거하기 위해 아직 동굴 안에 남아있는 죄수들을 자기들처럼 해방시키기 위하여 자신들이 올라온 길을 따라 다시 내려가면서 하강하여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들의 의무이자 숙명 같은 것이었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경험한 사람들은 왜 의무고 이게 왜 숙명 같은 것인가?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진리를 깨닫지 못한 사람에 대해서 그 빚진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김남준 목사님 코멘트
이렇게 그게 진리를 깨닫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비참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게 목회자의 소명이야. 그게 설교자의 소명이야.
그러니까 소명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뭘 해야 되겠다. 해서 계산을 해서 나온 게 아니라 이렇게 진리에 사로잡혀서 내가 이 길이 아니면 안 되겠다라고 하는 그럴 때 숙명, 아낭케라고 하는데 그리스어로 그런 아낭케를 느끼게 되는 거예요.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경험한 사람들은 자신이 캐리그마의 실재와 이데아를 경험하자마자 이러한 복음 전파의 사명을 자신의 의무이자 숙명으로 느꼈던 것입니다.

b. 사도 바울의 예

사도 바울의 변화
바울의 사도직의 기원을 설명해 줄 수 있는 토대인 다메섹의 경험 역시 사울에게 오순절 성령 강림의 축소판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후일에 비범한 전도자가 된 그 사람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커다란 성령의 능력으로 경험했습니다.
그리고는 예루살렘 교회에 오순절 성령 강림 때 있었던 사람들과 똑같은 경험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닌 이방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전파 해야 함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마치 동굴에서 올라와 태양빛 아래서 선의 실재와 이데아를 본 사람들이 아직도 동굴 속에 있는 죄수를 향해 느꼈던 것과 동일한 하강의 의무와 숙명을 온몸과 마음으로 느꼈습니다.
따라서 그가 남긴 생생한 선교의 고백 곧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전 9:16).”에 대한 고백이나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롬 1:14)고 한 고백을 생각하여 보라.
김남준 목사님 코멘트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도 바울에게 복음을 전해라. 안 전하면 내가 너를 가만 안 내버려두리라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지 않아요. 그냥 당신의 사랑만을 보여준 거야. 그런데 거기에서 말하자면, 완전한 선의 실재와 이데아를 본 거야. 그다음에는 이제 나머지 것들은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아요.
그 가치를 따라 사는 것은 사실 그것도 사도바울의 다메섹 체험이 가져다준 하나님 사랑의 강력, 강제력의 산물입니다.
이에 대해 김세윤 박사는 자신의 책 『바울 복음의 기원』 제7장과 8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다메섹 도상에서의 그의 부르심에 대한 신적 강제력에 의해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의 아들에 관한 하나님의 복음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들 가운데서 믿음의 순종을 이끌어내려는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바울에게 주어졌습니다.”
김세윤 박사에 의하면 사도 바울이 경험한 이러한 신적 강제력이나 그의 소명 안에 내재한 저항할 수 없는 신적 강제가 그의 사도직을 그의 사도직의 본질이었다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사도바울이 경험했던 이러한 신적 강제력과 저염할 수 없는 강제는 어디서 왔을까?
그리고 실질적으로 그런 강제력이나 강제를 따라 살게 하는 원천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의 감화였습니다.
그렇다. 사도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건의 핵심은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전에 부활절 설교하면서 한번 했잖아.
그 사랑은 어떤 방식으로 깨달아졌다는 거죠?
하나님의 사랑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잖아. 그 전까지 이 사람은 두 가지 편견이 있었잖아.
첫째, 심리적인 편견이 있었는데, 그거는 유대인 외에 나머지는 다 쓰레기다.
둘째, 신학적인 편견은 나사렛의 그 젊은이가 절대로 메시아일 수 없다라는 두 가지 편견이었잖아.
그리고 또 하나는 뭐예요? 예수. 예수. 그러니까 뭐냐면 예수가 죽은 것은 자기 죄 때문에 죽은 것이었다. 뭐가 증명하냐면 나무에 매달린 것이 그걸 증명하였다. 그랬잖아.
그런데 거기 거기서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냐고?
부활의 경험을 통해서 예수를 부활함으로 말미암아 과거에 일어난 십자가 사건이 재해석됐잖아.
예전에 사도 바울이 가지고 있었던 생각은 심리적 편견, 유대인 이외의 나머지 민족은 다 쓰레기다. 그다음에 메시아는 나사렛의 젊은이는 절대 메시아일 수가 없다. 그 두 가지였다. 그랬잖아.
그리고 그는 자기 죄 때문에 나무에 매달려 죽은 것이다. 저주를 받아서 죽은 것이다. 그랬는데 그것이 새롭게 해석이 되면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깨닫게 되었다. 그랬잖아.
어떻게 새롭게 해석이 됐냐 이거야. 그게 오늘 직접 자기가 만났을 때 죽은 자가 부활해서 살아 계심을 자기가 만났을 때 그걸 통해서 죽은 자가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 있으며 그것이 어떻게 나에게 이렇게 실질적으로 만나게 할 수 있느냐 그걸 경험한 다음에 변화됐다. 비슷하네.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면서 두 가지 모순된 명제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첫째, 그 예수께서 죽은 것이 자기의 죄 때문이었다면 하나님이 살리실 리가 없다.
둘째, 예수님이 다시 살리실 만큼 예수님이 대단한 인물이었다면 죽임을 당할 수가 없었죠.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수가 없었던 거죠.
그 2개의 모순된 명제를 해결했는데 그게 뭐냐면 대리적 속죄야.
그래서 예수의 죽음이 자기 죄 때문이 아니라 구원하고자 하는 인류를 위한 죽음이었다면은 그렇다면 예수의 죽음과 하나님의 인정하심이 2개가 양립이 가능해진 거예요.
그것은 사실 그것은 사도 마을의 다메섹 체험이 가져다 준 사랑. 하나님의 사랑의 강제력의 산물이다.
그 밑에 그렇다 그렇다 사도 바울이 동시에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건의 핵심은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그것은 한 영혼으로서 바울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었으며 그가 복음을 전파하도록 부름받은 모든 이방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위대한 전도자의 가슴에 있었던 하나님의 사랑그 사랑이 자기에게도 주어졌고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주어졌다라고 하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는 거야.

C. 사랑의 공동체

예루살렘 교회 예
그리고 그 위대한 전도자의 가슴에 있었던 하나님의 사랑은 그에게만 독점되어야 할 사랑이 아니고 구원받은 신자와 불신자 모두가 공유해야 하는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런 사랑을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구성원 모두가 소유하게 될 때 자기들이 서로를 향해 “너는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라”는 고백을 현실화하는 사랑의 사회를 이룰 것이었습니다.
오순절 성령이 갖는 사건과 함께 기적적인 방언이 주어졌고 그것은 여러 나라 사람들이 각각 자기들의 언어로 무엇인가 동일한 내용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큰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인류의 구원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과 하늘 보좌에서 통치 그리고 성령 강림 사건이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큰 일”의 핵심은 예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큰 일” 곧 복음의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이 복음이 사도들에 의해 능력 있고 열렬하게 선포되었으니 그 능력과 열렬함의 내적 동기는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뜨거운 사랑,가슴 저미는 긍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예
이런 하나님의 긍휼에 대한 경험은 그들의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사도로 파송될 때 곧 모든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친 권능”을 받았을 때는 못 느꼈던 사랑의 정동이었습니다(마 10:1).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였던 12사람을 사도로 세우시고 파송하셨습니다(눅 6:13). 무엇 때문이었을까? 아직도 당신의 제자로서 불완전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에게 큰 권능을 주셔서 사도로 파송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성경은 이러한 사도 파송의 동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내면에 있었던 극적인 사랑에서 찾습니다.
마태복음 9:36 NKRV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여기서 우리말 개역 개정 성경이 “불쌍히 여기시니”라고 번역한 그리스어 원문은 “에스프랑크니스데” 인데 이 단어는 동사 수동태로서 “창자에 이르기까지 감동을 받다”라는 뜻입니다.
당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인간 영혼의 좌소가 창자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에스프랑크니스데”를 문화적 맥락에 맞게 등가 번역한다면, “주께서 당신의 가슴이 찢어지도록 아프셨으니”가 됩니다.
이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사랑의 세 국면 중 곧 긍휼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눅 23:34 설교문 가운데, 2025년 10월 26일).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예수께서 무리들을 보시며 가슴이 찢어지도록 아파하셨던 이유입니다(이런 교회를 만날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이에 대해 성경 본문은 그 이유를 두 가지로 제시합니다.
첫째는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는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기진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그리스 텍스트에 보면은 “이돈” 그러고 나오잖아. “이돈”이 뭐냐 하면 “호라우”에서 온 건데 보기는 보는 건데 “정신적인 통찰”을 의미해요. 통찰로서 보는 거. 그러니까 눈에 보이는 것들을 그대로 보는 거는 “브래포”라고 하고 “호라오”는 뭔가 이게 현재 분사야. 그래서 보시며 이렇게 된 것이 뭔가 이렇게 통찰력을 가지고 사물의 배후를 꿰뚫어 보는 것. 그걸 의미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말 성경에서 “고생하다”로 번역된 그리스어 원어는 “에스콜메노이”인데 이는 “괴롭게 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 에클뤼오 제1현재 완료 수동태 분사 남성 복수형으로서 과거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혹은 과거에 괴롭힘을 당했으나, 현재까지 그 괴롭힘의 결과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는 뜻입니다.
또한 우리말 성경에서 “기진함”이라고 번역된 그리스 원어는 “에림메노이”는 “내던지다, 팽개치다”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 “흐립토”의 제1 현재 완료 수동태 분사 남성 복수형으로서 “내팽개쳐진”이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종합해보면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을 사도로 파송하기 전, 당신을 따르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영적 통찰력으로 직시하셨는데 그때 그분의 가슴은 찢어지는 것처럼 아프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백성들이 세상에서 마치 목자 없는 양같이 괴롭힘을 당하고 또 내팽개쳐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그걸 느꼈을까? 못 느꼈을까? 못 느꼈을까? 못 느낀 거야. 그게 말하자면은 그 사도들이 병을 고치고 뭐 이렇게 권능을 받은 그 사건이 가지고 있는 한계야.
그러니까 성령이 오긴 왔는데 그게 그들의 내면을 변화시키는 성령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그냥 은사만을 행할 수 있게끔 온 거야. 그거를 이제 성령의 사역적 사역이라고 부르는 거야.
일 자체를 위해서 성령이 일을 하시는 거야. 사람의 구원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 그러니까는 이 당시까지도 사실은 사도들이 중생했다고 볼 수가 없죠. 볼 수 없죠.
성령이 오시면서 그러면서 이제 이루어진 일들이었단 말이에요.
그러나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이 있기까지 제자들은 사도로 파송을 받은 때조차도 예수 그리스도의 그러한 내적 동기, 곧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주는 아픔을 동반한 사랑인 긍휼의 마음을 물려받지 못했습니다.
비록 그들이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악한 것들을 고치는 권능”을 받았을지라도 아직 성령께서 그들의 마음에 임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마 10:1).
즉, 다시 말하자면, 사도로 파송될 때도 제자들의 가슴에는 예수 안에 있는 불쌍한 영혼들에 대한 가슴 찢어지는 것과 같은 사랑과 애끓는 긍휼이 없었던 것입니다.
변화의 진짜 원인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그런 심정이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때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한 번에 물 붓듯이 부어졌습니다. 그들이 첫 번째로, 경험한 성령 충만은 곧 사랑의 충만을 의미했습니다.
로마서 5:5 NKRV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이러한 그 충만의 경험을 통해서 자기들도 이제 비로소 선의 실재와 이데아를 본 거야. 그리고 인제 카타가시스 해야 할 운명을 느끼는 거야.
이게 느낀 거야. 그러면서 그 공동체가 완전한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가는 그 모습을 보여주잖아. 그다음
이러한 사랑의 경험은 복음의 핵심적 사실들을 현재적으로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분의 죽음이 구원받을 자들을 위한 대리적 속죄의 죽음이었으며 부활하신 후에는 하늘에 오르셔서 온 우주를 다스리는 통치자가 되셨으며, 그분을 믿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며, 이 세상에 재림하실 것이라는 사실들이 그것입니다.
성령 강림으로 영적 각성(사랑의 세례)을 경험
그리하여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으로 말미암아 제자들은 비로소 사도다운 사람들이 될 수 있었습니다.
성령 강림 사건에 대한 경험은 그들의 영적으로 어두운 눈을 환히 뜨게 해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들 세계와 역사에 대하여 하나님의 시각과 심정을 갖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세상에서 방황하고 있는 잃어버린 영혼들에 대한 말할 수 없이 커다란 긍휼과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의 화급성에 영안이 열리게 하였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으로 만난 그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은 모두 성령의 충만한 세례를 경험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세례였습니다.
사랑의 공동체의 두 가지 모습
예루살렘 교회의 형제들은 이처럼 성령이 세례처럼 부어지는 사건을 통하여 두 가지 방향으로 사랑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내적으로는 교회 지체들을 향해 “너는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라”는 고백을 갖게 되었습니다.
외적으로는 교회 밖의 불신자들이나 이교도들을 향해서 예수 안에 있었던 “에스프랑크니스데”의 절절한 긍휼의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경험한 사람들은 비로소 잃어버린 영혼들에 대한 예수의 심정, “에스프랑크니스데”의 마음을 전수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부활의 증인이 되어서 영혼을 향한 말할 수 없이 뜨거운 사랑과 불붙은 긍휼의 마음으로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하게 되었습니다.

III. 결론 및 적용

나는 그 초대 교회가 어떠한 오류나 흠이 추어도 없는 교회였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신자들이 교회에 가입하자 헬라파와 히브리파 유대인 사이에 갈등이 생겼습니다.
또한 열두 사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반성하는 일은 그 교회가 얼마나 불완전했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있고 나서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에 나타난 일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예루살렘 교회의 불완전성은 내가 앞에서 언급한 바 지상의 교회가 결코 완전한 공동체가 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입증할 뿐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불완전성, 사탄의 영향, 그리고 신자들을 모두의 불완전성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하는 사람들, 곧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성령충만한 사랑의 공동체 교회는 “너는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라”라고 고백하는 지체의식을 갖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서로에게 관심을 가지고 웃고 우는 것입니다.
먹을 것을 나누어 먹는 것입니다.
서로 용서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성령충만한 사랑의 공동체 교회는예수님의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나에게 도움이 될까 안 될까’ 가 아닙니다.
사람을 바라볼 때 잃어버린 영혼들로 보이는 것입니다.
목자 없는 양 같이 공생하며 기진하는 영혼들로 보여야 합니다.
우상을 섬기다가 지옥에 떨어질 영혼들로 보여야 합니다.
그들을 향한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진리를 아는 자로서 불붙는 마음으로 의무감을 가지고 진리를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꿈이 성령님의 강림으로 실현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현재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간절하게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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