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받고 위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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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위로받고 위로하다
제목: 위로받고 위로하다
본문: 사도행전 16장 35-40절
본문: 사도행전 16장 35-40절
찬송: 96장 예수님은 누구신가
찬송: 96장 예수님은 누구신가
말씀의 문을 열며
말씀의 문을 열며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에서 억울하게 투옥되었습니다. 귀신 들린 여종을 치유한 선한 일을 했지만 도리어 심한 태형을 당하고 지하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한밤중에 옥터를 뒤흔들어 간수와 그의 가족을 구원하셨고, 날이 밝자 집정관들이 직접 찾아와 사과하며 석방했습니다. 이제 바울 일행은 빌립보를 떠나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40절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장면을 보여줍니다. "두 사람이 옥에서 나와 루디아의 집에 들어가서 형제들을 만나 보고 위로하고 가니라." 바울과 실라는 출옥 후 곧바로 떠나지 않고 루디아의 집으로 향했습니다. 밤새 그들을 염려하던 형제자매들을 만나 위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 본문을 통해 진정한 위로가 무엇인지, 그리고 위로하는 사람이 어떻게 더 큰 위로를 받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위로받은 사람이 위로합니다
위로받은 사람이 위로합니다
바울은 고난 받는 것에 관하여 고린도후서 1장 5-6절 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환난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바울은 자신이 당한 고난과 받은 위로가 결코 자기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고난당하는 다른 이들을 위로하기 위한 주님의 준비 과정이었습니다.
고난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고난당하는 이의 마음을 온전히 헤아릴 수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말로 위로하려 해도 그것은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고난을 겪고 그 가운데서 주님의 위로를 받은 사람은 다릅니다. 그는 고난당하는 이의 곁으로 다가가 진심으로 그를 이해하고 위로할 수 있습니다.
제가 성인 수두에 걸려 격리입원 했을 때 몰골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겨우 1층에 내려가 빵을 사려는데 점원이 제 얼굴을 보고 흠칫 놀라며 뒷걸음질을 쳤습니다. 그 순간 몸이 아프면 왜 자신감이 떨어지는지 깨달았습니다. 퇴원 후 병원 심방을 갔을 때 질병 때문에 자신감을 잃은 권사님을 만났습니다. 그때 저는 그분을 진심으로 위로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겪은 그 고난이 바로 위로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바울이 형제들을 "보고" 위로했다는 40절의 표현은 중요합니다. 헬라어 원문의 "보다"는 단순히 눈으로 본 것이 아니라 그들의 상황을 깊이 이해하고 공감했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억울한 투옥의 고난을 겪었기에 밤새 자신들을 염려하던 형제들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본문 40절에서 "위로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파라칼레오παρακαλέω입니다. 이 단어는 "곁에서"를 뜻하는 파라παρά와 "부르다"는 의미의 칼레오καλέω가 합쳐진 말입니다. 문자적으로 "곁으로 부르다" "곁에서 부르다"는 뜻입니다. 진정한 위로는 멀리서 던지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고난당하는 이의 곁으로 다가가 그의 손을 잡고 함께하는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이 파라칼레오라는 단어가 39절에도 사용되었습니다. "와서 권하여 데리고 나가 그 성에서 떠나기를 청하니." 여기서 "권하다"로 번역된 단어가 바로 파라칼레오입니다. 그러나 그 의미는 전혀 다릅니다. 빌립보 집정관들은 로마 시민인 바울을 부당하게 대우한 사실이 드러나자 두려워서 그의 곁으로 다가와 간청했습니다. 자신들의 잘못을 은폐하고 바울을 조용히 내보내기 위함이었습니다.
같은 단어 파라칼레오가 사용되었지만 39절의 집정관들은 두려움과 이기심으로 다가갔고, 40절의 바울은 사랑과 진심으로 다가갔습니다. 진정한 위로는 말씀으로, 주님의 마음으로, 주님의 사랑으로 다가가는 것입니다. 인간의 위로는 본질적으로 빈말에 불과하지만 주님의 말씀으로 하는 위로는 생명의 능력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6장 7절 에서 예수님은 성령님을 보혜사라고 부르셨습니다.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입니다. 이것은 파라칼레오의 명사형으로 "위로자”라는 뜻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의 곁에 계셔서 우리를 위로하시고 격려하시고 권면하십니다. 우리가 고난당하는 이의 곁으로 다가가 주님의 말씀으로 위로할 때, 우리는 바로 파라클레토스이신 보혜사 성령님의 사역에 참여하게 됨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위로하는 사람이 더 큰 위로를 받습니다
위로하는 사람이 더 큰 위로를 받습니다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을 위로한 것은 그들로 하여금 위로의 종착역이 되게 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주님의 위로를 받아 고난을 이기고, 또 다른 고난당하는 이를 위로하는 주님의 통로가 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위로는 흘러가야 합니다. 내게서 멈추는 순간 그것은 썩은 웅덩이가 됩니다.
본문 40절을 자세히 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울 일행은 본래 바울과 실라, 디모데와 누가 네 명이었습니다. 그런데 16절에서 귀신 들린 여종을 만날 때는 "우리가"라는 1인칭 복수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기록자인 누가가 그 일행 속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과 실라가 투옥된 25절부터는 주어가 3인칭 "그들이"로 바뀝니다. 투옥을 면한 디모데와 누가는 루디아의 집에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40절에서 바울과 실라가 출옥하여 빌립보를 떠날 때는 다시 "우리가"로 바뀌어야 합니다. 디모데와 누가도 함께 떠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40절의 "가니라"는 동사는 여전히 3인칭 복수형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17장 1절도 "그들이"로 시작됩니다. 이것은 누가가 홀로 빌립보에 남았다는 의미입니다.
누가는 의사 출신으로 당시 최고의 엘리트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바울 일행에 합류했고, 바울이 빌립보를 떠날 때 홀로 빌립보에 남아 초신자들인 빌립보 교인들을 돌보았습니다. 당시 빌립보 교회는 루디아와 그녀의 가족들, 간수와 그의 가족들, 합쳐서 기껏해야 스무 명 남짓한 작은 무리였습니다. 누가는 사도행전 20장 5절 에서야 다시 바울 일행에 합류합니다. 무려 5년 동안 그 작은 무리를 위해 헌신한 것입니다.
누가는 자신이 기록한 사도행전 속에 자신의 헌신을 직접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단지 동사의 인칭 변화로만 겸손하게 암시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작은 신앙 공동체를 주님의 말씀으로 파라칼레오―권면하고 위로하고 격려한 누가를 잊지 않으셨습니다. 파라클레토스이신 보혜사 성령님께서는 누가를 주님의 말씀으로 파라칼레오―위로하시고 격려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하나님의 말씀인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기록자로 세우셨습니다.
여기에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내가 주님의 말씀으로 누군가를 파라칼레오―위로한다는 것은 곧 나 자신이 주님 말씀의 통로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나를 통해 흘러가는 주님의 말씀이 어찌 나 자신을 먼저 파라칼레오―위로하고 권면하며 격려하지 않겠습니까. 창조와 생명의 능력이신 주님의 말씀으로 주님의 파라칼레오를 힘입은 나의 삶이, 파라클레토스이신 보혜사 성령님의 도우심 속에서 날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으로 엮어지게 될 것입니다.
구약성경 잠언 25장 11절 은 말합니다.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니라." 필요할 때 필요한 주님의 말씀으로 권면하는 것보다 더 확실한 위로는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곧 주님의 생명이요 사랑이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중앙교회 성도님들, 우리는 구역 모임에서 주님의 말씀을 배우는 것에만 만족하지 말아야 합니다. 구역원들을 주님의 말씀으로 파라칼레오―위로하고 권면하고 격려하는 구역 리더로 헌신해야 합니다. 전화 한 통, 방문 한 번이 바로 파라칼레오입니다. 고난당하는 이의 곁으로 다가가 주님의 말씀으로 그를 위로할 때, 우리 자신이 먼저 주님의 말씀으로 채워지고 위로받고 격려받게 됩니다.
말씀의 문을 닫으며
말씀의 문을 닫으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부터 우리가 주님을 좇다가 당하는 고난이 주님의 넘치는 위로를 담는 은혜의 그릇이 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신앙 체험이 고난당하는 누군가의 곁에서 그 사람을 위로하고 바로 세우는 원동력이 되어야 합니다.
단순한 우리 자신의 빈말이 아니라 창조와 생명의 능력이신 주님의 말씀으로 위로하고 격려하는 파라칼레오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의 통로로 살아가는 우리 자신이 주님의 파라칼레오 속에서 위로받고 격려받아 날마다 이 험한 세상을 이기는 새 힘을 얻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이 세상에서는 비록 보잘것없는 존재라 할지라도 보혜사 성령님이신 파라클레토스의 도우심 속에서 우리의 삶이 매일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으로 엮어지기를 바랍니다.
예수의 마음을 품고 서로를 위로하며 성령의 능력으로 부흥하는 우리 중앙교회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