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름 6장
게으름과 친숙한 그대에게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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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너무 자서 죄송해요. 게으름과 잠 1
하나님 너무 자서 죄송해요. 게으름과 잠 1
게으름이 사람으로 깊이 잠들게 하나니 태만한 사람은 주릴 것이니라
하나님 너무 자서 죄송해요.
하나님 너무 자서 죄송해요.
신학대학에서 교수로 섬길 때의 일입니다. 당시 학교는 안양에 있었고, 집은 인천에 있었기 때문에 매일 출근하는 것이 제게는 큰일이었습니다. 거리도 멀었지만 출근 시간이면 엄청나게 밀리는 차들 때문에 길거리에서 허비하는 시간이 너무 아까웠습니다. 그래서 한동안 차가 다니지 않는 새벽 일찍 학교에 출근했습니다.
아침 6시쯤 학교에 도착하여 교수실이 있는 건물 뒤편의 동산에 올라가 새벽 기도를 하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했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방석과 깔판을 들고 동산을 내려오노라면 학생들이 물밀듯이 들어오는 등굣길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무리에 섞여 퍽퍽대며 출근, 출근할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여유가 하루 시작의 작은 차이로부터 흘러나와 삶 전체를 적시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젊고 건강했기 때문에 마음이 원하는 것만큼 충분히 부지런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고 박윤선 박 목사님은 자신의 자서전에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내일은 나의 날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늘 이 하루가 마지막 날인 것처럼 최선을 다하여 시간을 아끼며 살아왔다.”
저 역시 늘 시간을 아끼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또 그렇게 살고자 노력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수업을 끝내기 전에 잠시 학생들에게 시간 선용에 대해 이야기를 했습니다. 역사적으로 영적인 인물들이 얼마나 시간을 철저히 사용하였는지를 실례로 들면서 그렇게 부지런한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은 게으름 때문이라는 이야기와 자기를 다 소진하시기까지 사신 예수님의 생애를 보며 제가 받은 도전을 몇 마디 나누었습니다.
강의가 끝났을 때 대표 기도를 하게 된 학생이 목맨 음성으로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너무 차서 죄송해요.”
잠의 원칙
잠의 원칙
게으름이 배어들기 가장 좋은 곳이 잠입니다. 과도한 잠의 문제는 가책을 덜 느끼는 죄인 동시에 우리의 영적 생활에 아주 심각한 폐해를 가져오는 죄입니다.
아마도 여러분은 이렇게 묻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몇 시간을 자야 한다는 것입니까? 얼마나 자야? 건강한 수면 생활이고 얼마를 자야? 방탕한 수면 생활입니까?” 그러나 이것은 획일적으로 말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체질적으로 너무 약해서 잠을 많이 자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남보다 적게 자고도 활기차게 하루를 살 수 있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신경계통에 이상이 있어서 수면을 충분히 취하지 않으면 신체적으로 이상 증상이 오는 사람이나 일시적으로 건강이 너무 소진되어 충분히 잠을 자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상황에서의 잠의 문제는 다시 두 가지로 나뉩니다. 단지 피로가 누적되어 잠이 오는 것과 기력이 완전히 소진되어 잠이 오는 경우입니다. 전자의 경우는 잠을 자면 피로가 회복되지만 후자의 경우는 잠을 자면 잘수록 체력이 가라앉아 몸을 추스르기 힘들어집니다. 따라서 후자의 경우에는 잠을 자는 것만으로만 문제를 해결할 것이 아니라 영양분이 있는 음식과 약, 적절한 운동 등으로 다방면에서 몸을 보양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수면의 문제에 있어서도 우리는 지혜로워야 합니다. 잠이 온다고 무조건 자는 것이 아니라 그 수면의 욕구가 단지 피곤해서 생기는 현상인지 좀 더 근본적인 대책을 필요로 하는 상태에서 비롯되는 것인지를 판단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수면의 문제에 있어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반드시 수면을 충분히 취해야 하는 몇 가지 특수한 경우에 해당되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잠을 많이 자는 습관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칙은 모든 것을 과하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잠을 자는 것, 밥을 먹는 것, 여가를 즐기는 것, 휴식을 취하는 것, 이 모든 것들은 그 자체를 즐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재 생산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타르데마:깊은 잠
타르데마:깊은 잠
본문의 말씀은 사람을 잠에 떨어뜨리는 것이 게으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본문을 히브리어 성경에서 직역하면 게으름이 깊은 잠을 떨어뜨리며 민첩함이 없는 사람은 굶주릴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깊은 잠은 히브리어로 타르데마라는 단어로 하나님께서 하와를 창조하실 때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셨다는 기록에도 이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창 2장 21절 갈비뼈를 뽑아도 모를 정도였으니 거의 전신 마취를 방불케 하는 깊은 잠이었습니다.
문제는 게으름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잠도 그렇게 깊은 잠이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은 게으름이 우리에게 잠을 주는 방식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일단 게으름이 인간에게 잠을 떨어뜨리면 그 사람은 잠이 계속 가여 느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자도 자도 졸립습니다. 출근하는 시간도, 퇴근하는 시간도 수면의 연장입니다. 시간과 장소를 불문하고 기회만 되면 잠이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이 잠의 문제에는 인생의 다른 모든 영역들도 그렇듯이 영적인 측면과 육적인 측면이 공존한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과도한 잠이 문제가 되었을 때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쏟아지는 잠에 대한 예리한 판단입니다. 잠이 쏟아지는 것이 어느 부분까지가 육체적인 문제이고 어느 부분까지가 영적인 문제인가 하는 것을 정직하게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육체적인 부분들은 신체의 원리나 자신의 경험, 의사의 판단을 따라 해결해 나가야 하고 영적인 부분들은 기도로 하나님께 의뢰하여 말씀의 비춰 주심을 따라 해결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간혹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이 잠의 문제를 무조건 육체적인 문제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에는 어떤 문제도 없고 그저 몸이 너무 피곤하여 그런 것일 뿐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런 사람들은 틀림없이 영적으로 잠들어 있는 사람입니다.
깊은 영성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부지런하지 못하고 과도하게 잠을 즐기고 있다면 무언가 가책을 느끼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깊이 잠들어 버리면 그러한 가책조차 없이 자신의 올바르지 않은 방탕한 수면 생활을 어떻게든 합리화시키려 애쁩니다. 변명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사람들로부터는 동정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을 때 지녔던 영혼의 아름다운 빛깔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게으름과 잠
게으름과 잠
게으름이 잠을 떨어뜨린다고 했는데 이것은 게으름이 아니면 영혼을 고사시키는 방탕한 잠에까지는 빠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게으름 때문에 과도한 잠이라는 문제가 발생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게으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잠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음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게으르지 않게 산다는 것은 단순하게 늘어지지 않은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매일 분투하며 살아야만 할 분명하고도 구체적인 목표를 갖고 민첩한 반응과 행동 행동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과도한 수면, 시간의 문제도 해결할 수 있습니다.
게으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도 수면 시간을 조절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새벽에 일찍 일어나고 하루 다섯 시간 이상 안 잔다고 하여도 그렇게 부지런히 살아야 하는 분명한 목표가 없다면 덜 자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목표를 가지고 있으면 그 목표에서 빗나가는 일을 하느라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싫습니다. 잠도 마찬가지입니다. 불 붙는 인생의 목표를 가진 사람들에게 필요 이상의 잠은 목표에서 벗어난 일입니다. 꼭 완성해야 할 일이 남아 있으면 밤에 잠이 안 옵니다. 아침 일찍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으면 아침에 일찍 깰니다. 분명한 목표 의식 없이 그냥 기계처럼 시간에 쫓겨서 생활하기 때문에 늘 아침에 일어나는 일이 힘든 것입니다.
나는 고 삼이다.
나는 고 삼이다.
저는 나태한 마음이 들 때마다 나는 고 삼이다. 라고 스스로를 타이릅니다. 고 삼은 모든 일에 절제하며 살아야 하는 시기입니다. 고 삼은 여행을 가고 싶어도 대학 들어가서 하자 하고 참아야 하고 이성 친구를 사귀고 싶어도 대학 들어가서 사귀자 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쉬고 싶고 놀고 싶어도 천국 가서 하자 하며 참아야 합니다. 이런 생각이야말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 가져야 하는 종말론적 긴장입니다.
고삼이 모든 즐거움을 잠시 뒤로 미루고 오직 공부에만 몰두하듯 우리도 이 세상 사는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일들에만 몰두해야 합니다.
매사를 해야 한다니까 할 수 없어서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마음을 쏟아서 열심히 해야 합니다. 세탁소를 한다면, 어느 집보다 깨끗하게 세탁해야 하고 슈퍼마켓을 한다면, 어느 집보다 싱싱하게 물건을 준비해 놓아야 합니다. 부동산업을 한다면, 어느 집보다 친절하고 정보가 정확하며 양심적이어야 하고 공장을 한다면, 그 공장 물건은 틀림없다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공부를 한다면, 점수 따기에만 급급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연구하고 깊이 생각하여 가르친 사람이 눈 비비고 다시 쳐다볼 만큼 지적인 성취를 이루어 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보다 중요한 일을 최선을 다해 하기 위해 신경이 다른 일들로 분산되는 것을 막으며 생활하는 고3의 정신이 필요합니다.
존 웨슬리의 교훈
존 웨슬리의 교훈
기독교 교회 역사의 한 페이지를 찬란하게 장식했던 인물 존 웨슬리는 1703년에 태어나 1791년에 사망했습니다. 그는 죽기 5일 전까지도 32km 떨어진 곳으로 전도하러 다녔고 60년 동안 변함없이 새벽 4시에 일어나 기도하고, 성경을 보았습니다. 평생 2~3시간 가량의 설교를 4천 편이 넘게 했고 200권의 책을 저술했으며 지구를 10바퀴 돌고도 남을 만한 거리를 말을 타고 다니며 전도하였습니다. 그가 그렇게 많은 일들을 하면서 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탁월한 건강을 허락하신 탓도 있지만 그 자신이 주어진 시간을 효율적으로 잘 사용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시간 사용 비결을 묻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어떤 사람을 만날 때 첫 만남에서 그 사람이 다시 만나야 될 사람인가를 결정합니다. 물론 그의 기준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그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냐.” 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면 만나서 쓸데없이 시간만 없앤다는 것입니다. 물론 지금의 기준으로는 동의할 수 없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존 웨슬리가 살았던 시대가 연회를 즐기던 사교의 시대임을 감안할 때 이것은 술과 향락 사교에서 말미암는 인생의 낭비를 줄이는 최선의 방법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말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나는 내 생애의 많은 시간들을 쓸모없는 대화와 세속적인 일들에 빠져 낭비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낭비 없는 인생
낭비 없는 인생
우리 모두가 탁월한 건강을 소유했던 존 웨슬리 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최소한 수면 생활에 방탕함으로 인해 인생을 낭비하는 것만은 피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게으르게 사는 동안에도 시간은 부지런히 흘러갑니다. 하나님께서는 큰 계획을 가지고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게으름 때문에 우리의 삶을 망치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수많은 기회들을 놓치고 그분이 세워 주신 신앙의 자리에서 끝없이 이탈하며 살고 있습니다. 나중에 어떻게 주님을 배우려고 그러십니까?
수면에 방탕함으로 인해 낭비되는 시간 중 단 30분만이라도 간절히 기도하는 일에 투자할 수 있다면 삶의 현장에 놀라운 변화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육체는 단 1분이라도 누리던 것들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저항합니다. 육체로부터 그것을 빼앗는 일을 할 때면 고통이 느껴집니다.
그때 우리는 십자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도 예수님께서도 이 세상에서 나처럼 사셨다 일어나기 힘든 그 새벽 시간에 몸을 일으키시고 주무시고 싶은 그 시간에 눈을 비비면서 일어나셨다. 고단한 몸이었지만 영혼 하나라도 더 고쳐 주시고자 늦도록 일하셨고 그렇게 사시다가 결국 십자가에 못 박혀. 물과 피를 다 흘리고 돌아가셨다. 고 말하면서 게으르고자 하는 우리 자신을 타일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일은 할 수 없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시지 않은 것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신 지식과 건강과 물질과 시간과 열정으로 당신을 섬기기를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뿐입니다. 우리가 그것들을 내어 놓는 일이 힘든 것은 우리 안에 게으름이 자리 잡고 그 자원들을 하나님이 아닌 나의 만족을 위해 쓰자고 유혹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게으름과 성화는 결단코 양립할 수 없습니다. 게으름은 우리의 육체를 정욕에 흐르게 하고 우리의 영혼을 죄 가운데 거하게 만듭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세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틀들을 허물어 버리고 하나님을 향한 반항과 저항으로 우리의 마음을 가득 채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게으르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안일해지려는 자신과 싸우며 부지런히 살아야 합니다.
게으른 자의 굶주림
게으른 자의 굶주림
그런데 성경은 이어서 “태만한 사람은 주릴 것이니라” 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태만함은 언어의 의미로는 민첩함이 결핍된 것입니다. 민첩함은 분명한 목표의식에서 우러나는 태도입니다. 분명한 목표의식이 있을 때 사람들은 그 목표와 관련된 일에 민첩하게 가능합니다.
그러나 게으른 사람은 분명한 목표가 없고 따라서 민첩하지도 못하므로 굶주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육신적인 굶주림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민첩하지 못한 사람은 영적으로도 굶주릴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여러분 여러분의 영혼은 어떠십니까? 지금 자신의 영혼이 굶주려 있고 지쳐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여러분에게 분명한 목표가 생길 것입니다. 바로 그 영혼이 회복되어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교제 관계를 다시 형성하는 것입니다.
목표를 향하여 민첩하게 움직이십시오. 망가진 곳이 있으면 말씀으로 고치고 힘이 부족하면 성령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십시오. 잘못된 곳이 있으면 수술을 해서라도 부정적인 것들을 도려내고 다시 출발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만일 내 오른손이 너로 실족해 하거든. 찍어. 내 버리라. 내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마태복음 오장 삼십절.
분명한 목표가 민첩함을 부른다.
분명한 목표가 민첩함을 부른다.
머리로만 ‘그래 그래야지 그렇게 살아야지’ 해서는 소용없습니다. 알기만 하고 결단하지 않는 사람이 바로 민첩함이 없는 사람입니다. 게으른 사람은 목표를 갖고는 있지만 그것은 살아있는 목표가 아니라 허울뿐인 죽은 목표입니다.
구원 받은 신자에게는 누구나 분명한 목표가 있습니다. 어떻게든지 주님께서 원하시는 진실한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목표는 성령의 은혜를 힘입어 자신의 부패한 옛 본성과 부지런히 싸움으로써 가능해집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그런 목표에 대한 진지한 사모함이 없기 때문에 그 목표가 우리의 마음에서 점점 흐릿해져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목표만 분명하다면 우리는 움직일 것입니다. 가진 것이 없는 것, 나이가 많은 것들은 모두가 핑계일 뿐입니다. 분명한 목표가 분명하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민첩하게 움직일 수 있습니다.
죽을 병에 걸려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살아날 수 있는 약을 찾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벌떡 일어나서 그 약을 구하러 달려갈 것입니다. 링거 병을 들고 주삿바늘을 꽂고 가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갈 것입니다. 민첩함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이러한 민첩함이 없는 사람의 영혼은 계속 핍절하고 굶주릴 것입니다. 그러나 민첩함이 있는 사람은 날마다 조금씩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어 갈 것입니다. 그의 부지런한 성화의 노력에 함께하시는 성령의 은혜로서
제공해주신 설교문의 내용을 바탕으로, 청중이 핵심 메시지를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논리적 흐름에 따라 구성한 PPT 슬라이드 텍스트입니다.
Slide 1: 표지
Slide 1: 표지
제목: 하나님, 너무 자서 죄송해요
부제: 게으름과 잠, 그리고 영적 민첩성
본문: 잠언 19:15
설교자: [이름 입력]
Slide 2: 오늘의 말씀
Slide 2: 오늘의 말씀
잠언 19:15 (NKRV)
"게으름이 사람으로 깊이 잠들게 하나니 태만한 사람은 주릴 것이니라"
Slide 3: 서론 - 하루의 시작과 여유
Slide 3: 서론 - 하루의 시작과 여유
새벽 출근의 경험
밀리는 출근길의 시간 허비 vs 새벽의 여유
하루 시작의 작은 차이가 삶 전체를 적신다.
박윤선 목사님의 시간관
"내일은 나의 날이 아니다."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시간을 아끼는 삶
어느 신학생의 기도
시간 선용에 대한 도전과 회개
"하나님, 너무 자서 죄송해요"
Slide 4: 잠의 원칙 (1) - 기준 세우기
Slide 4: 잠의 원칙 (1) - 기준 세우기
얼마나 자야 하는가?
획일적인 시간 기준은 없다 (체질과 상황에 따라 다름).
수면의 구분:
단순 피로 누적 ➔ 잠으로 회복
기력 소진 (Burnout) ➔ 영양, 약, 운동 등 종합적 보양 필요
핵심 원칙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 습관적인 과수면은 금물
그리스도인의 잠 = 쾌락이 아닌 **재생산(Re-production)**을 위한 것
Slide 5: 타르데마 (깊은 잠)
Slide 5: 타르데마 (깊은 잠)
게으름이 주는 잠의 특징
'타르데마' (히브리어): 아담의 갈비뼈를 취할 때 내리신 '깊은 잠' (마취 수준)
게으름은 사람을 깊은 잠으로 떨어뜨린다.
게으름의 악순환
자도 자도 졸리며, 삶의 모든 시간이 수면의 연장이 됨
기회만 되면 잠이 쏟아짐
Slide 6: 잠의 원인 진단 - 영적인가, 육적인가?
Slide 6: 잠의 원인 진단 - 영적인가, 육적인가?
정직한 판단이 필요함
육체적 문제라면 ➔ 의학적, 신체적 원리로 해결
영적 문제라면 ➔ 기도와 말씀으로 해결
영적 잠의 위험성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졌음에도 '피곤함'으로 합리화
깊이 잠든 영혼은 가책조차 느끼지 못하고 변명만 늘어놓음
Slide 7: 게으름의 해독제 - 분명한 목표
Slide 7: 게으름의 해독제 - 분명한 목표
게으르기 때문에 자는 것이다
게으름의 문제를 해결해야 잠의 문제가 해결됨
게으르지 않은 삶: 구체적인 목표를 갖고 민첩하게 반응하는 것
목표의 힘
불타는 목표가 있는 사람은 잠자는 시간이 아깝다.
해야 할 일이 명확하면 새벽에 눈이 떠진다.
기계적으로 시간에 쫓기는 삶 vs 목표가 이끄는 삶
Slide 8: '고3'의 영성 - 종말론적 긴장
Slide 8: '고3'의 영성 - 종말론적 긴장
"나는 영적 고3이다"
고3의 특징: 대학 입학이라는 목표를 위해 여행, 이성 교제, 쾌락을 유보함
그리스도인의 자세:
이 땅에서의 즐거움을 절제하고 천국을 소망함 (종말론적 긴장)
맡겨진 일(직업, 학업)에 '최고'가 되기 위해 몰두함
중요한 일을 위해 신경이 분산되는 것을 막음
Slide 9: 역사의 증인 - 존 웨슬리
Slide 9: 역사의 증인 - 존 웨슬리
존 웨슬리 (1703-1791)
지구 10바퀴 거리 전도, 설교 4천 편, 저서 200권
60년간 새벽 4시 기상
시간 사용의 비결
"그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인가?"
쓸모없는 대화와 사교로 인생을 낭비하지 않음
탁월한 건강 + 효율적인 시간 관리
Slide 10: 낭비 없는 인생과 십자가
Slide 10: 낭비 없는 인생과 십자가
빼앗긴 시간을 되찾으라
수면의 방탕함을 줄여 단 30분만 기도해도 역사가 일어난다.
육체의 저항을 이겨내야 함
십자가를 묵상하라
새벽 미명에 일어나시고, 밤늦도록 일하신 예수님
물과 피를 다 쏟으신 주님 앞에서 게으름을 합리화할 수 없다.
게으름과 성화(Sanctification)는 결코 양립할 수 없다.
Slide 11: 태만한 자의 굶주림
Slide 11: 태만한 자의 굶주림
태만함 = 민첩함(Agility)의 결핍
민첩함은 분명한 목표의식에서 나온다.
목표가 없는 게으른 자는 영적으로 굶주릴 수밖에 없다.
영적 굶주림의 해결
내 영혼이 굶주렸음을 깨닫는 순간, 회복이라는 목표가 생긴다.
망가진 곳은 고치고, 부족한 힘은 성령께 구하라.
Slide 12: 분명한 목표가 민첩함을 부른다
Slide 12: 분명한 목표가 민첩함을 부른다
죽은 목표 vs 산 목표
알기만 하고 결단하지 않는 것은 민첩함이 없는 것이다.
가진 것이 없고 나이가 많은 것은 핑계일 뿐이다.
생명을 찾는 자의 민첩함
불치병 환자가 약을 찾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처럼 달려가라.
민첩한 사람은 날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모습으로 변해간다.
Slide 13: 결단과 기도
Slide 13: 결단과 기도
성령의 은혜를 구하며
흐릿해진 목표를 다시 선명하게 하소서.
안일해지려는 육체와 싸워 이길 힘을 주소서.
영적 굶주림을 채우기 위해 민첩하게 움직이는 신자가 되게 하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