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 사함과 사랑함

누가복음 강해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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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설교>
누가복음 7:36-50
“죄 사함과 사랑함”
2025. 11. 26
조 정 수
    할렐루야. 오늘 본문을 놓고 “죄 사함과 사랑함” 이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하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한 바리새인의 집에 초청을 받고 들어가 앉으셨을 때, 한 여인이 찾아와 향유 옥합을 깨트린 사건을 담고 있는 단락입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장면이 총 4번 나오는데요. 4복음서에 각각 하나씩 나와요. 이 중에 누가복음에 기록된 오늘 본문의 사건은 예수님의 사역 초기에 일어난 사건이고, 다른 셋은 모두 예수님의 사역 말기에, 잡히시기 전에 일어난 사건을 기록한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 총 두 번 향유가 부어진 겁니다. 그 중에서 첫번째로 향유가 부어진 사건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사건입니다. 마태나 마가나 요한은 모두 두번째 사건을 기록한 반면에, 누가만 유일하게 첫번째 사건을 기록했어요. 예수님의 사역 초창기, 과연 이때 어떤 일이 있었고,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오늘 본문을 통해서 심도 있게 살펴보고, 우리 모두 큰 은혜 바기를 축복합니다. 
    자, 먼저 오늘 본문의 배경을 봐 볼까요? 오늘 본문 바로 앞에 누가복음 7장 34절을 보면,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이 예수님을 비난하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이런 말로 비난했어요. 34절에 보니까,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뭐라고 비난했습니까? 밥이며 포도주며 먹는 것을 탐하는 사람, 절제할 줄도 모르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잘 쳐먹고 다니면서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리는 사람. 이것이 당시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비난하던 말입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 바리새인들 중의 한 사람이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초대한 거예요. 그것도 그냥 초대한 게 아니고, 같이 밥 먹자고 초대한 겁니다. 
    자, 오늘 본문 36절, 다같이 읽어볼까요? 36절 시작,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예수님이 먹기를 탐한다고 비난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같이 먹자고 초대를 해요. 희한하죠?
    이것을 우리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 사람이 도대체 왜 예수님을 초대했을까? 크게 세 가지로 해석을 할 수가 있는데요. 첫번째는, 이 사람이 예수님을 걸고 넘어질 꼬투리를 잡기 위해서 일부러 초대했다는 해석입니다. 함정을 파고, 예수님을 끌어들인 것이다. 이런 해석이 있고요. 
    두번째는 다른 바리새인들이 어떻든지 간에, 개인적으로 예수님과 교제를 나누고 싶어서 초대했다는 해석이에요. 바리새인이라고 해서 다 예수님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그 중에 몇몇은 예수님께 호의를 갖고 있었거든요. 니고데모가 그런 경우죠. 그런 것처럼, 이 사람도 예수님과 말씀도 나누고 교제를 하고 싶은 마음에 초대를 한 것이다. 이렇게도 해석을 해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세번째로, 예수님이 싫은 것도 아니고 좋은 것도 아니고, 그냥 순전히 예수님이 궁금해서 초대를 했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바리새인 동료들은 예수를 비난하고, 다른 쪽에서는 예수를 칭송하는데, 과연 예수는 어떤 사람일까? 호기심 때문에 초대를 했다는 의견도 있어요. 
    여러분, 이 중에 뭐가 맞을까요? 오늘 본문에는 이 사람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나오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정확히 알 수는 없겠지만, 그의 집에 한 여인이 찾아왔을 때, 이 사람의 반응과 예수님의 말씀을 토대로 본다면, 세번째 해석에 가깝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예수님이 싫은 것도 아니고, 좋은 것도 아니고, 그냥 궁금해서. 이러쿵 저러쿵 말이 많은데, 내가 직접 만나서 판단을 해봐야겠다, 라는 마음으로 초청한 것으로 보는 겁니다. 
    특별히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이 바리새인의 초청을 받는 장면이 세 번 나오는데요. 오늘 본문이 첫번째 장면입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11장에 두번째 장면이 나오고, 14장에 세번째 장면이 나와요. 
    그리고 이 장면들이 두번째, 세번째로 갈수록 노골적으로 예수님의 약점을 잡는 분위기로 흘러갑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냥 순수한 호기심으로 예수님을 초대했다면, 마지막 세번째 초대 장면에서는 아주 대놓고, 예수님을 엿보거든요. 
    자, 누가복음 14장 1절을 봐 볼까요? “안식일에 예수께서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시니 그들이 엿보고 있더라” 
    이것은 시간이 갈수록, 바리새인들의 적대심이 커져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첫번째 초대 때만 해도, 예수님을 싫어하는 바리새인들이 있는가 하면, 예수님에 대해서 궁금해 하는 바리새인들도 있었어요. 그런데 세번째 초대쯤 되니까, 오로지 예수님을 싫어하는 바리새인들만 남더라는 겁니다. 
    오늘 본문은 그래도, 아직까지는 예수님을 싫어하기보다는 호기심으로 예수님을 대하는 바리새인이 등장합니다. 이 사람이 예수님을 초대했어요. 그리고 예수님은 기꺼이 그 초대를 받고, 그의 집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한번도 초대를 거절하신 적이 없어요. 그 사람이 죄인이든 세리든, 부자든 가난한 자든,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든 싫어하는 사람이든, 그 모든 것을 막론하고, 무조건 초대에 응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하실 일이 있으시기 때문에. 그곳에서 만나실 자가 있기 때문에. 그래서 바리새인의 초대를 거절하지 않고, 기꺼이 가신 겁니다.
    그랬더니, 아니나 다를까. 바리새인의 집에 불청객 하나가 찾아오죠. 오늘 본문 37절에 보니까,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찾아와요. 37절 봐 볼까요?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 이 여자가 초대도 안 했는데 갑자기 집에 들어옵니다. 이 여자가 어떤 죄를 지었는지는 몰라요. 그런데 그 죄가 동네에 소문이 날 정도로 큰 죄였던 것 같아요. 그래서 모두가 이 여자를 손가락질하고, 피합니다. 학자들에 따라서는, 그 죄가 성적인 죄, 구체적으로 자기 몸을 파는 매춘부였을 것이라고 많이 추측들을 하는데요. 그건 알 수가 없고, 어쨌거나 큰 죄를 지은 죄인이었다. 
    그런데, 그런 여자가 다른 집도 아니고,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왔어요. 바리새인이 이 여자를 초대했을 리는 없죠. 무단침입을 한 겁니다. 집주인 입장에서는 당장에 쫓아버릴 일이죠. 그런데 바리새인이 여자를 쫓아내지 않아요. 그냥 내버려둡니다. 그는 불결한 여자가 집에 들어온 것보다, 과연 예수님이 어떻게 반응하실까에 더 집중을 했던 겁니다. 그래서 여자와 예수님을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어요. 
    오늘 본문 38절을 봐 볼까요? 38절에 여인이 집에 들어와서 무엇을 하는지 보겠습니다.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아멘.
    여자가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까지 부었습니다. 
    이 여자는 예수님께 무슨 은혜를 받았길래, 갑자기 찾아와서 이런 대단한 헌신을 하는 것일까? 이 여자가 예수님을 과거에 만났었다는 기록도 없고, 왜 갑자기 찾아와서 이렇게 하는지 배경설명도 없기 때문에,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추측만 할 뿐이에요. 이 여자가 갑자기 이렇게 예수님을 찾아와서 귀한 향유까지 부을 정도라면, 분명히 언젠가 예수님을 만나서 은혜를 받은 경험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일면식도 없는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죄인의 신분으로 바리새인의 집에 무단침입을 하기까지 할 수가 있겠습니까? 감히 남들 앞에 얼굴을 드러내고 다니기도 수치스러운 사람인데, 그 수치를 이겨내고, 귀한 향유까지 쏟는 그 용기와 헌신을 볼 때, 아하, 예수님과 이 여인 사이에 뭔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겠구나. 짐작을 해볼 수 있는 것이죠. 
    어떤 은혜를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은혜와 그 감격이 너무나도 커서, 언제라도 다시 예수님을 만나기만 하면, 내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이 은혜를 갚으리라. 이런 결심을 하고 있었으리라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마침 자기 마을에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 시선 다 무시하고, 옥합을 들고 쳐들어온 겁니다. 
    여러분이 볼 때, 이 장면이 어떻게 보이십니까? 아름다운 장면 아닌가요? 은혜 받은 사람의 헌신, 사람들에게 도전을 주고 감동을 주는 장면이에요. 그런데, 지금 이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현장에서는 아무도 감동을 받지 않습니다. 마치 못 볼 걸 봤다는 듯한 반응이 일어나요. 
    특히 집주인인 바리새인은 예수님의 영적인 능력을 의심합니다. 자, 39절을 봐 볼까요?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더러운 죄인이 자기 발을 닦고 발에 입을 맞추는 것을 가만히 내버려 두고 있으니까, 바리새인이 의심을 하는 겁니다. ‘이 사람이 진짜 선지자가 아닌가 보구나. 만일 선지자라면 이 여자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만지지 못하게 했을 텐데, 가만히 두는 것을 보니까, 선지자가 아닌 것이 분명해.’ 이렇게 속으로 혼자 생각을 하는 것이죠.
    바리새인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을 보고 판단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을 한 겁니다. 죄인이 찾아와서 예수의 발을 만지고 있고, 예수는 가만히 보고만 있는, 이 상황의 내면에 어떤 은혜와 감격이 흐르고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함부로 판단을 하는 겁니다. 
    그런 반면에, 예수님은 사람의 내면을 단번에 꿰뚫어 보십니다. 시몬의 생각을 아셨어요. 그리고 그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오늘 본문 40절에 예수님이 말씀하셔요.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그가 이르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예수님은 바리새인 시몬의 생각을 아셨고, 그의 이름까지도 알고 계십니다. 시몬은 예수님께 자기 이름을 아직 말씀드리지 않았거든요. 아직은 그의 이름이 비밀 속에 있었어요. 그래서 그가 계속 바리새인으로만 소개가 됐던 겁니다. 만약에 이름이 소개가 됐더라면, 36절에 예수님이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다고 기록이 됐을 거예요. 하지만 이름이 없이 계속 바리새인으로만 나옵니다. 왜냐하면, 아직 이름이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 밝혀지지 않은 사실을 직접 밝히셨어요. 시몬, 이것이 바리새인의 이름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의 내면까지도 밝혀내십니다.
    밑에 41절과 42절에, 하나의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시는데요. 빚을 탕감 받은 두 사람에 대한 비윱니다. 간략하게 설명을 드리면, 한 사람은 오백 데나리온을 빚졌고, 또 한 사람은 그 십분의 일, 오십 데나리온을 빚졌어요. 오백 데나리온은 쉽게 말해서 2년치 연봉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오십 데나리온은 두세 달 월급이라고 보면 되겠죠.
    그런데 오백 데나리온이나 오십 데나리온이나, 두 사람 모두 갚을 능력이 안 돼요. 그것을 주인이 모두 탕감해줬어요. 
    그렇다면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누가 더 주인에게 감사하고 주인을 사랑하겠느냐 하는 문젭니다. 자, 42절 봐 볼까요? 42절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예수님이 시몬에게 질문하십니다.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아주 쉬운 질문이죠. 누가 더 주인을 사랑할까? 당연히 더 많은 돈을 탕감받은 사람이겠죠.
    그래서 시몬도 아주 쉽게 대답을 합니다. 43절에 보니까,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이르시되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라고 대답을 하니까, 예수님이 네 판단이 옳다고 하셨어요. 정답이라는 거죠. 당연히 더 많은 돈을 탕감받은 사람이 더 많은 감사와 사랑을 하게 돼있습니다.
    그런데. 이 뒤에 예수님의 책망이 시작됩니다. 44절부터 47절까지, 여인과 시몬을 비교하면서 여인의 헌신을 칭찬하고, 시몬의 냉담함을 책망하셔요. 
    여인이 오백 데나리온을 탕감받은 사람이라면, 시몬은 오십 데나리온을 탕감받은 사람이거든요. 여인은 오백 데나리온을 탕감받고, 더 많은 사랑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고 향유를 부었습니다. 
    그렇다면 시몬은 어떻게 행동해야 했을까요? 오십 데나리온을 탕감받은 자로서, 마땅히 그만큼의 헌신을 해야 되거든요? 오십 데나리온밖에 안 되지만, 그것을 탕감할 능력이 안 됐어요. 그래서 탕감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그만큼의 감격을 가지고 헌신을 해야 돼요.
    하지만 시몬은 헌신을 하지 않죠. 예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것들을 전혀 드리지 않았어요. 자, 오늘 본문 44절부터 46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아멘.
    여인은 헌신을 했는데, 시몬은 하지 않았습니다. 발 씻을 물도 안 주고, 입맞춤도 안 하고, 감람유도 붓지 않았어요. 이것은 본래 집주인이 손님에게 해야 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 당연한 것도 안 했어요. 
    지금 시몬의 집에서, 누가 정상이고 누가 비정상입니까? 시몬은 여인이 비정상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시몬이 비정상이었습니다. 탕감 받아서 사랑하는 것은 정상이죠. 탕감 받아놓고도 사랑하지 않는 것은 비정상입니다. 
    시몬이 정상이 아니에요. 예수님이 지금 그것을 책망하시는 겁니다. 네가 스스로 탕감할 수 없는 돈을 탕감받아 놓고도, 너 지금 뭐하고 있냐? 이 여인이 행하는 일들을 보고도, 너 아무런 감동도 없냐? 이런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밑에 47절에서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아멘.
    돈을 탕감받는 것의 의미를 예수님은 죄가 사함을 받은 것으로 해석해주십니다. 이 여인은 많은 죄가 사하여졌어요. 그래서 그가 이렇게 자기의 모든 것을 다해서 사랑의 헌신을 한다는 겁니다. 
    반면에 죄사함이 적은 사람은 그만큼 적게 사랑을 해요. 그런데 이 말씀을 자세히 봐 보세요. 지금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사함을 적게 받았다 해도 어쨌거나 사함을 받은 거잖아요. 그러면 적게라도 사랑을 해야 된다는 거예요. 시몬 너처럼 그렇게 냉담하게 앉아서 아무 것도 안 하고 있으면 안 되고, 적게라도 사랑을 해야 된다는 겁니다. 발 씻을 물, 입맞춤, 감람유. 여인의 것과 비교하면 별 거 아니지만, 그래도 마땅히 이러한 것들을 드려야 마땅해요. 
    하지만 시몬은 그것도 하지 않았죠. 기껏 예수님을 집까지 모셔다놓고, 정작 아무런 은혜도 얻지 못해요. 은혜도 없고 감격도 없고.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만난다고 해서 끝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만났으면 감격이 있어야 돼요. 예수님이 나를 만나러 우리 집까지 오셨는데, 멀뚱멀뚱, 건성건성 있다가, 우리 집에 놀러온 이웃집 사람만 덜렁 은혜를 받고, 나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끝나버리면 얼마나 억울합니까? 억울해서 잠이나 자겠어요?
    우리가 그렇게 놓쳐버리는 기회들이 많아요. 받은 은혜에 보답할 길이 없어서, 헌신의 자리, 봉사의 자리로 가서 충성하고, 거기에서 더 큰 은혜를 받기도 하지만. 시몬처럼, 일절 헌신이나 봉사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멀찍이서 남들이 하는 것을 보고 판단만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면 안 돼요. 여러분, 충성하는 자에게 상급이 있는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이미 죄사함을 받았어요. 내가 갚을 수 없는 돈을 탕감받았습니다. 누군가는 오십 데나리온을 탕감받았고, 누군가는 백 데나리온, 또 누군가는 오백 데나리온. 액수가 얼마든지 간에, 우리 모두는 탕감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마땅히 탕감 받은 것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있어야 돼요. 
    그리고 그 감격을 안고 충성된 자리로 나아갈 때, 더 큰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비록 내가 하는 일을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주님이 알아주십니다. 오늘 본문이 끝날 때까지 여인의 이름이 나오지 않아요. 그러나 이 여인이 행한 헌신은 잊혀지지 않고, 오늘날까지도 기억되잖아요. 
    우리가 누구를 위하여 일할 것인가, 우리가 누구의 기억 속에 남을 것인가.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일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기억 속에 남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세상이 몰라줘도 주님은 우리를 아십니다. 우리의 내면을 아시고, 우리의 모든 상황을 아시는 주님이 우리에게 평강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죄 사함을 받은 자로서, 주님을 더욱 사랑하시기를 바랍니다. 날마다 사랑과 봉사와 헌신으로, 주님을 위하여서 더욱 충성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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