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3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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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 찬송가 435, 430장
공동체, 서로함께
공동체, 서로함께
민수기가 36장까지 있는데 어느것 32장까지 왔습니다. 광야 40년이 거의 끝나가는 시점이죠.
이스라엘 백성이 이제 요단강만 건너면 됩니다. 앞장에서도 전쟁을 할 만큼 이스라엘 2세대가 본격적으로 약속의 땅에 들어갈 준비가 다 갖추었고 이제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이때에 르우벤과 갓 지파가 지금 요단 동편을 보니까 이런 생각을 하는 거예요. 1절에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은 심히 많은 가축 떼를 가졌더라 그들이 야셀 땅과 길르앗 땅을 본즉 그 곳은 목축할 만한 장소인지라
그들의 눈에 뭘 봤냐면,
약속의 땅, 하나님의 뜻, 민족적 사명 이게 아니라, “가축을 목축하기 좋은 땅”이 보였던 거예요.
“모세여, 우리가 가진 가축이 참 많은데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야셀과 길르앗 땅을 보니까
가축 키우기에 너무 좋은 땅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굳이 요단 서쪽까지 가지 않게 해 주시고 이 땅을 우리 기업으로 삼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하는 장면입니다.
민수기에서 2번째 인구조사를 보면 르우벤과 갓 지파는 인구가 압도적으로 많은 지파는 아니였어요. 하지만 가축만큼은 남들보다 훨씬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저번 31장에서 얻은 전리품도 있었고 그동안 하나님이 주신 복이었죠.
그런데 문제는, 그 복 때문에 약속의 땅을 멈추고 ‘여기까지만’ 하고 싶어지는 유혹이 생겼다는 겁니다. 그래서 5절에
또 이르되 우리가 만일 당신에게 은혜를 입었으면 이 땅을 당신의 종들에게 그들의 소유로 주시고 우리에게 요단 강을 건너지 않게 하소서
겉으로 보기에는 굉장히 공손합니다.
“우리가 은혜를 입었으면… 당신의 종들에게…” 말은 참 예의 바르게 해요.
그러 속으로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보다 여기에 정착하고 싶고, 앞으로 벌어질 전쟁에 참여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는 표현을 합니다. 형제들이 앞으로 싸우러 들어갈 때 이 두 지파는 자기 지파, 자기 가축을 더 돌보고 싶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모세의 반응이 아주 직설적이게 변해요.
모세가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에게 이르되 너희 형제들은 싸우러 가거늘 너희는 여기 앉아 있고자 하느냐
여기 “앉았고자 하느냐”라는 말은 그냥 잠깐 쉬고 싶다는 말이 아닙니다.
히브리어 뉘앙스가 “여기 자리 잡고, 여기 정착해서, 편히 살려고 하느냐” 하는 뜻이에요.
지금 이 전쟁, 이 사명은 다른 지파들이 수행하게 두고, 너희는 여기 편히 정착해서 살겠다는 거냐?라고 말하면서
너희가 어찌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낙심하게 하여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신 땅으로 건너갈 수 없게 하려 하느냐
낙심하게 하여서”라는 말도 그냥 기분 나쁘게 한다, 정도가 아닙니다.
히브리어 원래 뜻은 “마음을 꺾어 버린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막는다”는 뉘앙스예요.
너희 행동이 형제들을 낙심시키는 거기 때문에 이건 너희 개인 선택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 전체를 무너뜨릴 수 있는 일이라는 말을 강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누구를 떠올리냐면 바로 가데스 바네아 사건을 떠올립니다.
12명의 정탐꾼을 보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들어가자!”라고 믿음의 보고를 합니다.
그런데 열 명은 “우리는 메뚜기 같다, 못 들어간다”고 말합니다.
그 말이 온 백성의 마음을 무너져서 결과적으로 가나안 들어가는 것이 38년이나 미뤄지고, 출애굽 1세대가 광야에서 다 죽습니다.
그리고 15절에 굉장히 무거운 말을 하는데
너희가 만일 돌이켜 여호와를 떠나면(그때 열 정탐꾼이 했던 짓을 그대로 반복하면) 여호와께서 다시 이 백성을 광야에 버리시리니 그리하면 너희가 이 모든 백성을 멸망시키리라
지난 번 열 정탐꾼 때문에 한 세대가 광야에서 죽은 것처럼, 이번에는 너희 두 지파 때문에 또 한 세대가 광야에서 죽을 수 있다.라는 말을 하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메시지가 나옵니다.
하나님 눈에는
“나 하나 편하게 살겠다”는 선택이 공동체 전체를 죽게 만드는 선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십니다.
우리가 이렇게 선을 긋고 물러나는 순간, 내가 그냥 한 발 뒤로 물러난 것 같지만, 옆에 있는 사람의 마음을 꺾어 버릴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누군가 새롭게 헌신하려고 할 때, 옆에서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어”라고 말하면, 그 한 마디가 그 사람의 마음을 꺾습니다.
어떤 사역을 새롭게 시작하려고 할 때, “그거 해봤자 뭐가 달라지겠냐” 하는 말 한 마디에 모두의 열정이 식어 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르우벤과 갓 지파를 향해 단순히 “너희 너무 계산적이다” 정도를 말하는 게 아니고,
“너희가 지금 이스라엘 전체를 다시 광야로 돌려보낼 수 있다.”
“너희 선택이 공동체 전체의 운명을 흔드는 선택이다.”
이렇게까지 경고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는 철저히 공동체입니다.
함께 예배드리고, 함께 말씀을 듣고, 함께 들어가는 공동체입니다.
가나안은 “열심 있는 몇 지파가 들어가는 땅”이 아니라온 이스라엘이 함께 들어가야 할 땅이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묵상해보면
“교회가, 공동체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향해 싸우러 나갈 때,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앞장서서 함께 나아가는 자리있는가, 뒤에서 묵묵히 받쳐주는 자리있는가 돌아보게 되고, 아니면 “나는 여기까지만” 하고 한 발 물러나 앉아 있는 자리있는지 생각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함께 부르십니다. “너 혼자만 잘 되려고 하지 말고, 함께가라 말씀하십니다.
감사한 건, 르우벤과 갓이 여기서 깨달아요. 모세의 책망을 듣고 태도가 바뀝니다.
그들이 모세에게 가까이 나아와 이르되 우리가 이 곳에 우리 가축을 위하여 우리를 짓고 우리 어린 아이들을 위하여 성읍을 건축하고
이 땅의 원주민이 있으므로 우리 어린 아이들을 그 견고한 성읍에 거주하게 한 후에 우리는 무장하고 이스라엘 자손을 그 곳으로 인도하기까지 그들의 앞에서 가고
이스라엘 자손이 각기 기업을 받기까지 우리 집으로 돌아오지 아니하겠사오며
처음엔 “우린 여기까지, 요단 안 건널래요.” 였다가, 이제는
“형제들이 기업 얻기 전에는 우리가 앞장서 싸우겠습니다. 그때까지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로 바뀝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공동체의 모습이 다시 한 번 드러납니다.
땅의 조건적 성격 – “여호와 앞에서 싸우면, 이 땅이 너희 것이다” (32:20–24)
땅의 조건적 성격 – “여호와 앞에서 싸우면, 이 땅이 너희 것이다” (32:20–24)
두 지파가 “앞장서 싸우겠다”고 약속하자, 모세가 이렇게 정리합니다.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만일 이 일을 행하여 무장하고 여호와 앞에서 가서 싸우되
너희가 다 무장하고 여호와 앞에서 요단을 건너가서 여호와께서 그의 원수를 자기 앞에서 쫓아내시고
그 땅이 여호와 앞에 복종하게 하시기까지 싸우면 여호와 앞에서나 이스라엘 앞에서나 무죄하여 돌아오겠고 이 땅은 여호와 앞에서 너희의 소유가 되리라마는
함께 나가 싸우면 요단 동편은 너희의 소유가 될 것인데 이어서 경고도 등장합니다.
너희가 만일 그같이 아니하면 여호와께 범죄함이니 너희 죄가 반드시 너희를 찾아낼 줄 알라
라고 경고합니다.
그런데 반복적으로 20–22절 사이에 “여호와 앞에서”라는 말이 계속됩니다.
“여호와 앞에서 가서 싸우고”
“그 땅이 여호와 앞에 복종하게 하고”
“여호와 앞에서 너희 소유가 되리라”
라고 여호와를 강조합니다.
이 마른 이 땅은 그냥 네가 알아서 소유하는 땅이 아니라, 여호와 앞에서,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맡기는 언약적 기업이라는 거예요.
이스라엘에게 땅은
경제 자산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구현되는 공간입니다.
그래서
땅은 분명히 은혜로 받은 선물이지만,동시에 언약에 대한 순종과 공동체적 책임 안에서만 온전히 누릴 수 있는 선물이에요.
땅은 하나님 것, 우리는 청지기
땅은 하나님 것, 우리는 청지기
민수기를 보다보면 반복적으로 들어나는 것 중에 땅의 분배, 땅의 기업이라고 하면서 땅에 대한 것을 유난히 많이 다루고 있습니다.
앞선 두 지파도 땅에 대한 것으로 모세에게 나아왔죠. 5절에
또 이르되 우리가 만일 당신에게 은혜를 입었으면 이 땅을 당신의 종들에게 그들의 소유로 주시고 우리에게 요단 강을 건너지 않게 하소서
여기서 중요한 단어가 “소유”입니다. 원어에는 “붙잡다, 움켜쥐다”라는 뜻이 들어 있어요.
“이 땅을 우리 손에 꽉 쥐게 해 주십시오. 놓치지 않을 자기 땅으로, 자기 소유로 만들게 해 주십시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땅”은 원래부터 그런 식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닙니다.
레위기 25장에서 하나님이 뭐라고 하셨죠?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땅은 하나님의 것이고, 이스라엘은 그 땅에서 잠시 맡겨 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희년 제도까지 주셨어요. 아무리 경제 사정 때문에 땅을 팔아도, 희년이 되면 원래 가족에게 돌아가게 하십니다.
왜 그렇죠?ㅡ “땅은 네가 ‘영원한 내 것’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것죠. 너는 다만 언약 안에서 잠시 맡아 사는 청지기일 뿐이다.
여기서 “땅의 조건적 성격”이 드러납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땅은 언제나 조건부입니다.
땅 자체가 축복이 아니라, 언약 안에 있을 때만 축복입니다.
땅이 넓고 기름져서 축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사명을 따라 살 때만 그 땅은 복입니다.
르우벤과 갓 지파는 요단 동편 땅이 “여호와께서 치셔서 열어주신 땅”이라는 말까지는 맞았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시혼과 옥을 물리치시고 그 땅을 정복하게 하셨거든요.
그런데 거기서 한 발 더 나가서 “하나님이 이 땅을 우리에게 열어주셨으니, 이제는 우리 마음대로 살아도 되는 땅이다.
이쯤에서 약속의 여정은 멈추고, 우리의 가축과 우리의 안정과 우리의 안녕을 꾸리며 살겠다.”라고 본다면 그것은 하나님주신 기업이 아니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기회와 땅은 언제나 언약과 사명 안에 있을 때만 복입니다. 그 자리를 내 욕심을 위해, 안일을 위해, 하나님의 뜻과 공동체 사명과 끊어놓는 순간, 그 땅은 더 이상 “약속의 땅”이 아니라 “위험한 땅”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신 “땅”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자리, 가정, 직장, 교회에서의 맡겨주신 여러 일들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처럼 이 땅아 내 것인 양, 이 땅의 주인이 나 인 것 처럼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맡겨주신 청지기로서 주님 뜻을 따라 살며 주님께서 주신 언약의 약속을 이루어 나갈 땅임을 기억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 소망합니다.
경계선 신앙의 위험과 가능성
경계선 신앙의 위험과 가능성
요단 동편에 살게 된 지파들, 르우벤, 갓, 그리고 므낫세 반 지파는 지리적으로 보면 경계선 지파입니다.
한쪽은 약속의 땅 가나안, 다른 한쪽은 모압, 암몬, 아람, 나중에는 앗수르 같은 이방 나라들.
그 사이에 딱 경계선에 서 있는 사람들이에요.
먼저 긍정적으로 보면,
요단 동편은 이스라엘의 전초기지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이방의 침략을 가장 먼저 막아내는 자리,
하나님 나라와 주변 민족 사이에서
하나님을 드러낼 수 있는 자리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선교지, 디아스포라 교회,
세상 한복판에 있는 우리 각자의 직장, 학교, 가정도
충분히 이런 “경계선”이 될 수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믿는 사람 별로 없는 곳”, “힘든 자리” 같지만, 어찌 보면 가장 앞에 나와 있는 이 모든 자리가 요단 동편처럼 전초기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이 자리는 가장 위험한 자리이기도 합니다.
역대상 5장을 보면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가 어떻게 되죠?
이방 신들을 따라가고,
우상 숭배에 빠지고,
결국 앗수르 왕이 쳐들어와서
제일 먼저 포로로 끌려갑니다.
왜 제일 먼저 무너졌을까요?
경계선에 서 있으면,
이방 문화에 더 많이 노출되고,
세상의 가치관과 힘을
더 직접, 더 현실적으로 느끼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마음에 이런 유혹이 생깁니다.
“그래도 눈에 보이는 힘이 더 든든하지 않나?”
“하나님도 좋지만, 결국 세상 힘이 있어야 사는 거 아니야?”
바로 이 자리가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힘을 의지하고 싶어지는 자리”입니다.
민수기 32장에 등장했던 요단 동편은
눈에 보기 좋은 땅, 가축 키우기 좋은 땅, 경제적으로 유리한 땅이었지만,
결국 그 땅이 그들을 무너뜨렸습니다.
여러분, 이게 우리 인생에도 그대로 오지 않습니까?
좋아 보이는 자리, 편해 보이는 자리,
돈이 잘 버는 자리라고 해서
“여기면 됐다” 싶어서 들어갔는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 자리가 내 영혼을 가장 먼저 무너뜨리는 자리가 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함께 기도하실 때, 우리는 질문해야 합니다.
“나는 지금 어떤 경계선에서 살고 있는가?”
믿음과 세상 사이의 경계에서,
진리와 타협 사이의 경계에서
우리는 두 가지 모습 중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복음의 전초기지가 되든지,
아니면 서서히 세상과 동화되어
조용히 사라지는 사람이 되든지.
그 차이를 만드는 건 사실 딱 한 가지입니다.
“내가 어디에 서 있든지,
여호와 앞에서, 그리고 공동체와 함께, 언약의 정신을 붙들고 서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요단 동편에 사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동쪽에 살든, 서쪽에 살든” 그게 본질이 아니었어요.
진짜 문제는,
“그 자리에서 어떤 영적 태도로 살았느냐”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고, 언약 붙들고 살고, 하나님이 주신 땅을 가꾸는 청지기로 사는가가 삶의 태도를 바꿉니다.
결론 덧붙이기: 예수님과 우리의 요단
결론 덧붙이기: 예수님과 우리의 요단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도 각자의 요단 동편이 있습니다.
“이 정도면 됐다” 싶은 신앙의 선,
“여기까지만 하겠다”는 헌신의 선,
“이 이상은 내 삶을 건드리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의 경계선이 있습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우리 주 예수님은 그 어떤 경계선에서도
“여기까지만” 멈추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을 때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십니다.
예수님은 끝까지 순종하셔서 우리에게 참된 약속의 땅, 하나님 나라의 문을 여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여기까지만”이 아니라 “예수님이 부르시는 데까지” 갈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여호와 앞에서, 공동체와 함께,
주님이 부르시는 데까지 함께 건너가는 이 고백이 우리 삶과 가정과 교회 위에 실제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기도 하겠습니다 ]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우리를 예배 자리로 불러 주시고 말씀 앞에 서게 하신 은혜를 감사합니다.
광야 끝에 선 이스라엘처럼 우리도 인생의 여러 갈림길 앞에 서 있지만, 많은 때에 “여기까지만 하면 됐다”고 선을 긋고 나만 편한 자리, 나만 안전한 자리를 먼저 찾았던 우리의 마음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르우벤과 갓 지파처럼 나 하나쯤은 괜찮겠지, 나는 요단을 굳이 안 건너도 되겠지 했던
이기심과 계산을 내려놓게 하시고, 형제 자매의 마음을 꺾는 말이 아니라 서로의 믿음을 살리는 말,
격려하는 공동체 되게 하옵소서.
은혜의 주님,
우리에게 주신 가정과 직장과 교회에서의 자리가 내 소유가 아니라 주님께서 맡기신 자리임을 기억하게 하시고, 땅도 시간도 건강도 주님의 것임을 고백하며 청지기로 살게 하옵소서.
특별히 오늘 병상과 질병 가운데 있는 성도들을 기억해 주옵소서.
육체의 연약함으로 예배에 나오지 못한 이들에게 주님이 직접 위로자가 되시고, 치유와 회복의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또한 추운 날씨에도 예배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나온 성도들을 붙들어 주시고, 가정과 일터와 자녀 위에 필요한 은혜와 평안을 더하여 주옵소서.
이 모든 말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주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