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부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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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청구교회 고별설교

Notes
Transcript
  먼저, 귀한 주일 강단을 허락해 주신 담임목사님과 당회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지난 시간동안 함께 예배드리며 지낸 성도님들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8년을 사역했지만, 이 8년의 시간이 결코 길지 않은 시간이었음을 고백합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을 먼저 함께 살펴보며 말씀에 들어가고자 합니다.
  사무엘상 2장 12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엘리 제사장 가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무엘상 2장 12절 말씀은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고 말하며, 그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에 손을 댄 일, 회막에서 수종 드는 여인들과 동침한 일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사장이라는 사람들이 이런 일을 행하니 그 시대가 얼마나 암흑과 같은 시대였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본문은 사무엘 시대의 상황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1절 말씀입니다.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성경은 오늘 본문 속 시대를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은 시대’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희귀했고, 그러다보니 이상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말씀과 이상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해 백성들에게 자신의 뜻을 전달하시는 가장 기본적인 매체였습니다. 그래서 말씀과 이상이 없었다는 것은 그 시대에 대한 하나님의 냉대를 의미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미 악순환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제사장들이 범죄하니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냉대하시고, 하나님의 냉대에 이스라엘 사회는 더욱더 죄로 가득해졌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냉대하시는, 정말 악순환이 이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시대에 말씀이 희귀하고, 이상이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2절에서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했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단순히 엘리가 나이가 들어 눈이 잘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물론 엘리의 눈이 실제로도 어두워졌겠지만, 이 말씀은 이스라엘의 영적 상황을 나타내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가 점점 더 어두워져 가며, 하나님을 보지 않고 찾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보다 세상의 소리에 더 익숙한 시대입니다. 말씀보다 유튜브, 말씀보다 세상 지식을 더 신뢰하는 것이 지금 이 시대이고, 우리의 모습 아니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한 시대, 그래서 영적 장님이 되어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그런 시대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말씀의 어둠이 깊을수록, 하나님의 부르심은 더욱 선명해집니다.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제사장이 부패하고, 백성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방황할 때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당신의 사람을 부르셨습니다. 엘리의 눈이 어두워지듯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암울한 시대를 살아갔지만, 3절 말씀은 그 때에도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성소 안에 등대의 불이 아직 꺼지지 않았다는 것이지만, 이 표현도 암시적인 것입니다. 암울한 시대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등불, 하나님의 사랑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 어린 사무엘이 있었습니다. 엘리를 통해서는 어두운 절망을 보지만, 사무엘을 통해 희망의 불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어두운 시대 속에서 어린 사무엘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하나님은 동일하게 우리 각자의 이름을 부르시는 하나님인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부르시고, 또 우리가 그 부르심에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 함께 살펴보는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부르심은 어떻게 시작되는 것입니까?

  첫째, 하나님의 부르심은 주권적으로 시작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사무엘은 준비한 적도 없고, 또 예상한 적도 없는데 하나님이 먼저 찾아오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4절 말씀입니다.
  “…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셨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무엘을 부르실 때 사무엘은 누워 자고 있었습니다. 언제 하나님이 나를 부르실지 모르니 5분 대기조처럼 눈 뜨고 앉아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기다리고 있지 않았습니다. 아무 생각없이 그냥 누워 자고 있었습니다.
  이 때 사무엘은 어린 아이였고, 상황을 제대로 판단할 능력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무엘이 올바로 상황을 판단하고 반응할 때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계속 불러 주셨습니다. 부르심은 사람의 준비나 자격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으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셨습니다. 세 번이나 그의 이름을 부르시지만, 사무엘은 엘리 제사장이 자신을 부른 줄 알고 그에게로 달려갔습니다. 7절 말씀에서 그 이유를 말해주는데,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사무엘이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성막에서 자라며 제사를 보고, 율법을 들었으며,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들었을 것입니다. 다만 그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선지자적인 지식을 갖추기에는 엘리 제사장의 가르침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여호와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한 때”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누군가를 지식적으로 아는 것과 체험적으로 아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C.S. 루이스가 자주 인용한 예화입니다.
  “누군가 꿀의 화학적 성분, 당분 비율, 점성, 색깔에 대해 아무리 자세히 설명을 해줘도, 꿀을 직접 맛보지 않으면 그 달콤함을 진정으로 ‘안다’라고 할 수 없다.” 
  꿀이 가진 과학적 정보를 아무리 분석하고 이해해도, 그것은 단지 정보일 뿐입니다. 하지만 혀끝으로 그 꿀을 맛보는 순간, 비로소 꿀 맛을 ‘안다’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듣고, 배우고, 이해하는 것을 넘어서, 그 하나님을 ‘맛보아 아는’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시편 34편 8절에서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은 아마 그의 평생 하나님에 대해 들었기에 하나님을 ‘안다’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다만 하나님에 대해 지식으로 배웠던 것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그 때서야, 그는 하나님에 대해 ‘배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난 사람’,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음성을 세 번이나 들었지만, 엘리가 부르는 소리로 착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지만, 사무엘은 아직 그 음성을 분별할 줄 몰랐습니다. 그만큼 그의 믿음이 미숙했고, 경험이 부족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무엘이 단 번에 알아듣지 못했다고 해서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의 경험이 부족하다고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들을 때까지, 깨달을 때까지 부르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우리도 신앙과 사역의 길에서 처음에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왜 나를 이 자리에 두셨는지, 왜 이런 길을 걷게 하셨는지 이해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헤매는 그 시간조차도 하나님은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 뜻을 다 알지 못할 때에도, 여전히 우리를 향해 일하고 계십니다. 여전히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며 우리를 기다려 주십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실수가 없고, 하나님의 계획에는 한 치의 오차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그 자리, 그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부르고 계시다는 그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보시다시피 하나님은 사무엘을 완전한 선지자로 세워서 부르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이 어두운 시대를 밝혀줄 선지자로 잘 준비되었기에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사무엘은 아직 미숙했고, 하나님의 음성을 구별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를 부르셨고, 그가 깨달을 때까지 기다려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주권적 부르심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완벽한 사람을 찾지 않으십니다. 연약하고 부족한 우리를 부르셔서, 그 부르심의 자리에서 빚어 가십니다. “나는 아직 준비가 안된 것 같은데”, “나는 아직 저 자리를 감당하지 못할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드십니까? 네 맞습니다. 아직 우리는 준비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가정에서는 부모로 자녀로, 직장에서는 사장으로, 직원으로, 또 교회에서는 장로로, 권사로, 집사로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준비되어서, 잘나서 부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우리를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부르신 그 부르심의 자리가 바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자리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완성된 사람’을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말을 잘 못한다고 뒤로 물러서려고 했고, 기드온은 스스로를 ‘가장 작은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베드로는 감정이 앞섰고, 실수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부르셔서, 그 자리에서 다듬어 가시고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 “부르심 앞에 서겠다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부족하지만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대답하는 사람을 통해 하나님은 시대를 바꾸어 가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지난 주일 말씀을 다들 기억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삽 하나 쥐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포크레인 기사입니다. 어차피 우리가 할 수 있는건 별로 없습니다. 하나님이 포크레인으로 한 삽 크게 퍼시면, 뒤에 가서 땅 좀 두드리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때로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이 명확하게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왜 저를 이곳에 두셨습니까?”, “왜 이런 일들을 제게 허락하셨습니까?”하고 묻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실수로 우리를 그 자리에 두신 적이 없습니다. 지금도 그 자리를 통해 우리를 다듬고 계시며, 그 부르심 안에서 선한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서 있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다면, 그 부르심은 언제나 선하고 완전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대구에서 사역을 하고 있으니 친구들이 종종 묻습니다. 사역 안힘드냐고 말입니다. 들어보셨겠지만, 대구가 “사역자들의 무덤”이라고 불리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대구라는 지역 자체가 사역자가 사역하기에 쉽지 않은 곳으로 소문이 나있습니다.
  친구들이 물을 때마다 제가 뭐라고 답했겠습니까? 어디 좋은 사역지 없냐고 물었겠습니까? 그랬으면 지금 이 자리에 없겠지요. 친구들에게 대구도 있을만하다고, 우리교회 좋다고 그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도 좋고, 같이 사역하는 부교역자들도 좋고, 성도들도 너무 좋다고 그렇게 말했습니다. 마지막이라고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저희 교역자들끼리 모여서도 우리 성도님들 너무 좋다 이런 이야기들을 자주합니다. 지난 주일에도 교역자들이 마지막으로 다같이 식사하면서도 우리 성도들 좋다고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건 그렇고, 사역지를 옳기지 않느냐는 그 물음에 저에게 확고한 기준 하나가 있었습니다. 다른 사역지로 하나님의 부르심이 확실히 있기 전에는 옮기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곳에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자리, 대구청구교회의 전도사, 강도사, 목사라는 그 자리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부르신 자리이고, 부족한 종이지만 세우시고 사용하시는 자리라 믿었기에 그 부르심을 따라 자리를 지키며 섬겼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시고 세우신 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왜?”, “나는 잘 모르는데?” 이런 생각이 드십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다면, 그 부르심은 반드시 선하다는 것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어떠함이 아닌, 내가 준비가 되어서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으로 우리를 부르신다는 그 사실을 기억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렇다면 그 부르심에 우리는 어떤 자세로 서야 하겠습니까?

  둘째,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순종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아직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지 못하던 사무엘이 하나님의 음성을 세 번이나 듣고 엘리에게 찾아가자, 그 둔한 엘리가 드디어 눈치를 챘습니다. 나는 부르지 않았는데 세 번이나 자신을 불렀다고 찾아온 사무엘을 보고서,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셨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에게 다음 번에 하나님이 부르시면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대답하라고 할 말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사무엘을 찾아오셨고, 사무엘은 엘리 제사장이 가르쳐준 말을 그대로 반복함으로써 하나님과의 대화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10절 말씀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을 부르셨다고 말합니다. “전과 같이” 사무엘을 부르셨다는 것은 앞선 세 번의 부르심에도 동일하게 사무엘의 이름을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EBS 강사 중에서 수업하기 전에 수강생의 이름을 부르고 시작하는 분이 계시다고 합니다. 수강하는 학생에 대한 선생님의 관심과 격려일 것입니다. 분명 이름을 들은 그 학생은 선생님의 격려로 열심히 공부할 것입니다.
  학창시절을 떠올려 보시면, 선생님들 중에서도 이런 분들이 계셨습니다. 학기 초에 한 주 정도 출석을 부르고, 그 이후에는 잘 부르지 않고 결석자 체크정도만 하는 선생님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선생님들은 학기가 끝날 때까지 학생들 이름을 외우지 못하시곤 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부를 때, “진관아~” 하고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그냥 “야”, “너”, “거기” 이런 식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어떤 선생님은 늘 이름을 불러주시는 분이 계셨습니다. “진관아~ 현찬아~” 이런식으로 이름을 불러주시는 선생님은 늘 따뜻한 마음으로 바라보게 되었던 그런 기억이 있습니다.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를 잘 아실 것입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우리도 삶을 하나의 의미없는 몸짓이 아니라, 잊혀지지 않는 의미가 되어 살아가고 싶어 합니다. 그런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하나님은 우리의 이름을 불러 주십니다.
  이사야 43장 1절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도 그의 이름을 부르셨고, 모세를 부르실 때도 그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마리아를 향해 그의 이름을 부르셨고, 바울을 부르실 때도 그의 이름을 불러 주셨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의 이름도 기억하시고 부르시고 계십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묻어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진관아~”, “누구야~” 하고 부르실 때 하나님의 돌보심과 인도하심을 우리는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10절 말씀을 보니, 하나님은 “임하여 서서” 말씀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임하여 서서”라는 말은 사무엘이 음성을 들었을 뿐 아니라 어떤 환상도 보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15절에서 사무엘이 하나님을 만난 이 경험을 “이상”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1절 말씀에 의하면 지금 이 엘리 시대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던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무엘에게 하나님의 말씀과 이상이 함께 보여져 나타났습니다. 어두운 시대에 사무엘을 통해 말씀과 이상이 회복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제 사무엘이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했던 말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10절 하반절에서 사무엘은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말합니다. 부르심에 대해 듣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의 종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듣는 태도와 순종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기본적인 태도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듣다”라는 말은 문법상 ‘분사’로 쓰여서, 이미 사무엘이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있는 자라는 것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이 사무엘상 15장 22절에서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라고 말한 것처럼,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고 이상이 보이지 않는 시대에서 사무엘은 지금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듣는다는 것은 비워내는 일이다”
  무슨 말입니까? 듣는 일은 단순히 귀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진짜 듣는다는 것은 내 마음 속에서 판단을 멈추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대화를 하면서 우리는 꽤 자주 ‘심리적 방어’라는 것을 세웁니다. 상대가 무심코 한 말에도 “나를 무시하나?”, “그건 아닌데?”라며 이미 속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반면 대화할 때 마음이 느긋한 사람도 있습니다. 이들은 말을 들을 때 머릿속을 비운 상태, 백지 상태에서 듣습니다. 당장 판단하거나 반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잠깐의 침묵을 허락하는 것입니다. 이 짧은 침묵이 듣기의 결정적 순간입니다.
  예를 들어, 직장에서 상사가 “이건 다시 해야겠네요”라고 했을 때, ‘내가 잘못했구나’라고 반응하면 목소리가 움츠러 듭니다. 하지만 ‘좋은 결과를 원해서 그렇구나’라고 들으면, “네, 그러면 다시 해보겠습니다”라고 반응하게 되는 것입니다. 같은 상황이지만 다른 해석이 나오는 것, 이것이 바로 듣는 태도의 위력이라는 것입니다.
  사무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겠다고 했을 때 이런 마음으로 들었습니다. 내 마음 속에서 판단을 멈추고, 나의 생각을 비우고 백지 상태로 말씀을 들었던 것입니다. 
  사무엘이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할 때, 단순히 “말씀을 듣겠습니다”라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에서 ‘듣는다’라는 말은 언제나 ‘순종한다’는 행위와 함께 묶어서 사용합니다. 히브리어로 ‘쉐마’는 듣는다는 뜻이지만, 듣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듣고, 받아들이고, 마음에 새기고, 그 말씀대로 살아내는 것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신명기 6장의 “이스라엘아 들으라”, “쉐마 이스라엘”에서 말하는 것이 딱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라고 외치면서, 너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을 지키라고 말합니다. 듣는 것과 순종하는 것은 분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듣는다는 것은 곧 순종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했을 때, 그는 그냥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청자로 서겠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종으로 서서 순종하겠습니다”라는 태도를 고백한 것입니다. 그 고백이 사무엘의 인생을 바꾸었고, 이스라엘의 역사를 바꾸는 새로운 시대의 문을 여는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어린 사무엘의 입에서 나온 그 한 마디,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이 고백은 그저 아름다운 신앙고백이 아니라, 한 사람의 영혼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우는 결정적 고백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의 고백을 들으시고 그에게 처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맡기셨습니다. 그 말씀은 결코 쉬운 메시지가 아니었습니다. 엘리 집안에 대한 심판의 말씀이었습니다. 아직 어린 소년 사무엘에게 얼마나 무거운 말씀이었겠습니까. 하지만 사무엘은 그 말씀 앞에서 도망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듣겠다고 고백했고, 순종하겠다고 고백했고, 그 고백대로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그의 순종은 하나님께서 그를 온 이스라엘의 선지자로 세우시는 길이 되었습니다. 사무엘의 순종은 한 사람의 도덕적 성장에 그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의 영적 회복을 여는 시작점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했던 시대에, 하나님은 순종하는 한 사람을 통해 다시 말씀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이것이 순종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한 사람을 통해 시대를 바꾸십니다. 가정도, 교회도, 공동체도, 한 사람의 순종을 통해 다시 살아납니다. 부흥의 첫걸음이 바로 순종이라는 것입니다.
  사무엘을 부르신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교회와 성도 한 분 한 분을 부르고 계십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부르심에 어떻게 응답하는가?”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여러분의 이름을 부르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대답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도 이 자리에서 사무엘처럼 고백해야 합니다.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순종하라고 하니까 부담이 되십니까? 갑자기 집 팔고 땅 팔고 냉장고 팔아서 헌금하라고 할까 걱정되십니까? 하던 일 다 그만두고 교회에서 헌신하라고 할까봐 걱정되십니까?
  순종은 결코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종종 순종을 큰 사명의 실현이나 특별한 헌신으로만 생각합니다. 하지만 순종은 아주 작은 자리, 아주 작은 태도에서 시작합니다. 말씀 앞에서 잠시 멈추는 태도에서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말씀 앞에서 잠시 멈추는 것, 내 생각과 판단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것, 그 작은 멈춤이 순종의 출발입니다.
  가정에서 이런 저런 안좋은 감정이 올라올 때, 잠시 멈추고 말씀을 떠올리며 말씀대로 사랑하고 용서하려는 작은 결단이 순종입니다.
  직장에서 눈 앞의 이익보다 말씀의 기준을 선택하는 것이 순종입니다. 성실함과 정직함을 포기하지 않는 선택, 그 작은 결단이 바로 “주의 종이 듣겠습니다”라는 말의 열매라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어떻습니까? 맡겨진 직분과 사명을 내 힘으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감당하는 것이 순종입니다. “나는 부족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부르셨으니 순종하며 나아갑니다” 이 고백으로 섬기는 삶이 바로 순종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도 이런 순종의 열매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시간에 교회에 나와 정리를 하고, 또 화장실 청소를 하고, 쓰레기를 정리해 주시는 손길이 있습니다. 이름도 빛도 없이 “하나님이 맡기셨으니 제가 순종하겠습니다”라고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우리가 보기에 작은 일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작은 순종을 기억하시고, 그 순종을 통해 교회를 세워가십니다. 이렇게 순종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 교회를 세우시고 공동체를 회복시키십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종들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이름을 부르실 때, 두려워하지 마시고, 주저하지 마시고,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순종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은 어두운 시대 속에서 사무엘을 부르셨습니다. 아직 사무엘이 준비되지 않았지만, 그의 미숙함과 연약함을 문제 삼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사무엘이 말씀 앞에 순종하기를 기다리셨습니다. 그리고 그 순종을 통해 이스라엘의 영적 흐름을 새롭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사람은 연약해도, 시대는 어두워도, 환경은 어렵고 이해되지 않아도, 하나님은 결코 실수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언제나 정확한 뜻과 완전한 계획이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8년이라는 시간동안 사역할 수 있었던 것은 성도님들 한 분 한 분의 기도와 사랑 덕분이었습니다. 부족한 부분이 많은데, 늘 응원해 주시고, 잘한다 칭찬해 주셔서 지금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초등부에서 또 대학청년부에서 함께 아이들과 청년들과 신앙생활했던 그 시간들도 하나님께서 주신 귀한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왜 하나님께서 대구로 저를 부르시고 사역하게 하셨는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이제와서 돌아보면 어느것 하나 우연이 아니었고, 실수가 아니었습니다. 신대원 졸업도 하지 않은 전도사로 와서 강도사가 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혼자 왔는데 결혼도 했고, 아이도 곧 태어납니다. 교회에서 정말 많은 사랑을 받았고, 이런 저런 훈련도 잘 받았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 우리의 이름을 부르실 그 때, 사무엘처럼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고백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렇게 고백하는 우리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 교회를 세우실 것입니다. 그런 우리의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는 이 고백과 순종이 저와 여러분의 평생의 고백이 되어,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하나님의 귀한 종으로 쓰임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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