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이 소망이 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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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고난이 소망이 될 수 있을까?
고난이 소망이 될 수 있을까?
우리의 삶속에서 없어지지 않는 여러가지중에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스트레스’일 것입니다.
이 스트레스는 보통 우리에게 ‘문제’라는 인식으로 다가오곤 하죠.
그리고 많은 유튜브나 프로그램에서 스트레스를 다스리고 스트레스가 안생기는 방법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루고는 합니다.
사람마다 스트레스를 받아들이는 강도는 분명히 다르다고 하지만 이런 부분에서 우리는 질문해볼 것이 있습니다.
스트레스라는 것, 우리에게 오는 충격들이 ‘문제’로만 여겨져야 하는가?
2020년에 접어들면서 스트레스의 힘이라는 책을 쓴 켈리 맥고나걸은 이렇게 스트레스를 정의합니다.
“스트레스, 즉 불안, 좌절, 역경은 삶에 원동력을 불어 넣어주고 성장을 이루게 하는 에너지다.” 라고 정리합니다.
재작년 베스트셀러중에 하나인 도파민네이션이라는 책은 스트레스의 역설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고통을 피하기 위해 쾌락을 찾을 때 우리의 몸은 추구한 쾌락의 크기만큼의 큰 고통으로 균형을 맞추려고 한다. 반대로 고통을 줄 때 우리의 몸은 그 크기만큼 균형을 유지하기위해 도파민을 발생시킨다.”는 역설을 보여줍니다.
우리의 삶속에 일어나는 수많은 고통들에 대해 세상은 ‘문제’로만 보지 않고 재해석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믿음가운데 오는 고통이라는 더 근본적인 문제 대해서 생각해보게 됩니다. 우리의 삶속에 ‘고난’이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바라보고 나아가야할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은 고난에 대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계신가 함께 고민하며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고난에 대하는 자세와 주시는 은혜들을 함께 묵상해보기 원합니다.
고난을 해석하는 기준이 바뀌다.
고난을 해석하는 기준이 바뀌다.
저번주에 죄에서 구원을 받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한 바울은 오늘 믿음가운데 살아가는 우리가 고난가운데 어떤 시각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를 제시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구원을 얻은 우리는 어떤 시각으로 살아갑니까?
첫번째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관점입니다. 하나님안에서 그 분과 화평하는 것입니다. 화평하다는 것은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과 뜻을 같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안에 은혜를 누리고 있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바라볼때의 시각이 이러합니다. 하나님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며, 그분의 영광과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방향으로 우리는 삶을 해석하고 바라보는 것이죠.
비울은 여기에서 중요한 화두를 던집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은혜 안에 서 있고, 영광을 바라보는 그리스도인은
심지어 ‘환난’ 속에서도 즐거워하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환난은 우리가 경험하는 믿음때문에 겪게 되는 오는 고난을 말합니다.
우리는 바울이 던진 이 화두를 이해하기 위해서 로마의 상황을 다시금 기억해야합니다.
로마는 어디입니까? 당시 세계의 중심지입니다.
팍스로마나의 중심지이자 그리스로마 신앙의 핵심지입니다. 한마디로 ‘세상’의 중심지 입니다.
이곳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여러 형태의 사회적 압박과 불편함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세상 문화의 중심지에서 이들은 ‘믿음’으로 인해 박해를 받았던 사람들입니다.
이런 상황속에서 바울은 마치 고통에 대해 생각을 바꾸어보라 말하는 지금의 방식처럼 생각을 바꾸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바울은 더 분명하게 말합니다. 생각해보라가 아니라 “우리는 이런 사람입니다” 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과 화평하는 사람, 그리고 그분의 영광을 바라며 즐거워하는 사람 입니다. 이런 생각과 마음을 가져야 하는 사람이 아니라 가진 사람입니다.
의롭다 함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입니다. 관계를 회복한 사람, 즉 하나님과 화평에 있는 사람만이 고난이 다른 시각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즐거워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죄가운데 ‘나’라는 ‘세상’ 중심으로 살던 내가 하나님 중심으로 전환된 것입니다.
다시말해, 그리스도인은 고난, 고통에 대해 해석하는 기준을 바꿔야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바뀐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인생의 기준이 ‘나’ 중심인 사람들은 저번주에 함께 나누었듯이 ‘성취’가 중요한 사람들입니다. 고난을 해석하는 기준이 ‘자기 성취’에 집중되어 있는 사람에게 고난은 성취의 실패를 의미하기에 무너질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화평한 사람’, 하나님이 중심인 사람들에게는 고난은 다른 시각으로 바라봅니다.
어떻게 바라봅니까?
고난은 인내를, 연단을, 결국에는 ‘소망’을 이루는 줄을 알기에 바라고 한 걸음 더 나아가는 방향으로 바라봅니다.
환난은 나를 짓누르는 현실이라면, 인내는 버티는 내적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우리는 연단을 통해 진짜 믿음을 나의 삶속에 경험케 됩니다. 증명되는 것이죠. 그리고 우리는 고난을 지나 하나님의 뜻을 깨달음으로 주님이 주시는 ‘소망’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에게 고난은 나를 무너뜨리기보다, 하나님이 주신 믿음을 실제 삶 안에서 증명하고 깊어지게 하는 장이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고난을 소망으로 바꾼다.
하나님의 사랑이 고난을 소망으로 바꾼다.
어떻게 그리스도인인 우리 안에 이런 소망이 생겨납니까? 생각을 바꾸는게 아니라 우리에게 이미 주어졌다면 우리는 어떻게 고난을 견디고 연단을 거쳐 소망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까?
바울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가운데 부어주시는 놀라운 사랑으로 인해 고난가운데 소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소망의 출발점은 나의 성숙함이나 의지가 아닙니다.
내가 고난을 잘 견뎌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즉, 고난이 소망이 되는 이유는 ‘내가’ 잘 버텨내는 능력이 있어서보다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 부어지기에 고난가운데 포기하지 않을 인내의 힘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여기서 부은 바 됨이니의 이 부어지다라는 헬라어는 단순히 부은 것이 아닙니다. 넘치도록 부었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을 넘어 넘치도록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성도는 이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고난을 다르게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고난을 바라보며 구해야하는 것은 고난을 이겨내는 힘도 힘이겠지만 더 핵심은 하나님의 사랑을 내 마음가운데 부어달라고 구해야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넘치도록 부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입니까? 바울은 다시금 우리에게 그 사랑이 어떤 것인지 떠오르게 합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가 내 중심으로 살던 연약한 그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의인을 위하여 선인을 위하여 희생한 것이 아닌 하나님을 찾지도, 원하지도 않은 죄인을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품으신 그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에게 고난과 세상을 바라보는 다른 시각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묵상할 때마다 나의 자격없음과 내 중심의 삶속에서도 부으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떠올릴 때마다 그 넘치는 은혜로 우리는 이 상황을 견디며 이겨내는 것입니다.
이게 바울이 말한 ‘소망’ 구원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난을 이렇게 봅니다.
고난은 실패의 결과가 아니라,
구원의 은혜를 다시 확인하게 하는 자리입니다.
고난 속에서 우리는
인내를 배우고,
연단을 통해 믿음이 실제가 되고,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이 이미 주신 구원의 소망을 다시 발견합니다.
고난 → 인내 → 연단 → 소망
이 과정 자체가 구원을 경험하는 과정입니다.
바라기는 우리의 믿음의 여정가운데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모든 환난가운데서 소망을 발견하며 이겨내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구원이 소망이다.
구원이 소망이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말씀을 정리하고자 합니다.
바울이 오늘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진리는 이것입니다.
고난이 소망이 되는 이유는, 우리가 가진 ‘구원’ 때문입니다.
우리는 고난 그 자체 때문에 소망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이 편해서도 아니고, 고난이 달라서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고난의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소망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바라보는 ‘정체성’이 다르기 때문에 소망합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미 은혜 안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미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넘치도록 부어받은 사람입니다.
이 모든 것이 무엇을 말합니까?
바로 우리는 구원받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오늘 고난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결국 우리를 다시 ‘구원’으로 이끌어갑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하나님을 찾지도 않았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
이 구원의 사랑이 확실하기 때문에 그 사랑이 지금도 우리 안에 부어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고난 속에서도 인내하고, 인내 속에서 연단되고, 연단 속에서 결국 소망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소망은 우리가 만들어내는 감정이 아닙니다.
상황이 좋아졌기 때문에 생겨나는 결과도 아닙니다.
소망은 구원의 은혜가 지금도 우리 안에서 일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소망은 하나님이 이루신 구원에서 흘러나오기 때문입니다.
혹시 지금 믿음으로 나아가는 여정속에 고난 가운데 계십니까? 문제 속에 있습니까? 해석되지 않는 삶의 무게를 견디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기억하기 원합니다.
고난이 소망이 되는 이유는 상황이 바뀌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한 번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나를 붙들고, 변화시키고, 견디게 하고, 소망으로 이끌어가는
하나님의 지속적인 사랑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소망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소망은 나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바라기는 우리의 모든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이 주는 이 확실한 소망을 다시 붙드시고, 그 소망으로 오늘을 살아가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