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설교 02 - 하나님의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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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3:19–26
지난주 우리는 창세기를 통해 인류의 비극적인 시작을 보았습니다. 범죄한 아담과 하와는 자신의 수치를 가리기 위해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었습니다. 그러나 그 잎사귀는 곧 말라비틀어졌고, 그들의 부끄러움을 온전히 가릴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 모습과도 같습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의 수치와 공허함을 가리기 위해 도덕, 선행, 종교, 성공이라는 '무화과나무 잎'을 엮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단호하게 선언합니다. "그것으로는 안 된다."
로마서 1장부터 오늘 본문 직전까지, 사도 바울은 마치 검사처럼 인간 전체를 피고석에 앉히고 고발했습니다. 그 결론은 참담합니다.
로마서 3장 10절 에 이렇게 선언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의인은 없습니다. 그것도 하나도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부패하고 타락한 인간은 오염이라는 것을 계속해서 상속받기 때문에 스스로 의인이 될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로마서 3장 19절 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이것이 율법이 하는 일입니다. 율법은 거울과 같아서 우리의 더러움을 보여주지만, 우리를 씻겨주지는 못합니다. 우리는 절망의 벼랑 끝에 서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21절에서 성경 전체에서 가장 위대한 접속사가 등장합니다. "이제는(But now)!" 율법의 정죄와 절망이 가득한 법정에, 하나님께서 새로운 길을 여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복음의 핵심, '하나님의 의'를 주목해야 합니다.
먼저 23절을 보십시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여기서 '죄'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하마르티아', 즉 과녁을 빗나갔다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은 화살을 멀리 쏘고, 어떤 사람은 바로 코앞에 떨어뜨렸을 수 있습니다. 도덕적으로 훌륭한 사람이 있고, 흉악한 범죄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인간끼리는 차이가 나 보입니다. 하지만 태평양을 헤엄쳐서 건너려 할 때, 10미터를 가다 빠져 죽은 사람이나 10킬로미터를 가다 빠져 죽은 사람이나, "건너지 못했다"는 결과는 똑같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전적 타락입니다. 단순히 나쁜 짓을 몇 번 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 그분의 영광을 반영하고 그분과 교제해야 할 본래의 과녁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다시 그 과녁으로 돌아갈 수도, 하나님의 기준인 영광에 도달할 수도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절망적인 현주소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의로워질 수 없기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밖에서 의를 준비하셨습니다. 21절입니다.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이 의는 우리가 노력해서 쌓아 올린 의가 아닙니다. 이것은 '낯선 의'입니다. 밖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마치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지어 입히신 '가죽옷'과 같습니다. 나의 더러운 옷을 벗기시고,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완벽한 의의 옷을 입혀주시는 것입니다.
이 의는 어떻게 우리 것이 됩니까? 22절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고 선포합니다.
어떤 자격증도, 수업료도 필요 없습니다. 오직 '믿음'이라는 빈 손을 내밀어 받으면 됩니다. 그리고 24절에서 이 과정을 '속량'이라고 표현합니다.
속량은 고대 노예 시장에서 쓰던 단어입니다. 누군가 몸값을 지불하고 노예를 사서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의 노예였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생명을 몸값으로 지불하시고 우리를 사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값없이 주어지지만, 결코 값싼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이라는 우주에서 가장 비싼 대가가 지불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굳이 아들을 죽이셔야만 했을까요? 그냥 말로 "용서한다" 하시면 안 되는 걸까요? 25절에 그 답이 있습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여기서 '화목제물(Hilasterion)'이라는 단어는 구약 성막의 지성소 안에 있는 법궤 뚜껑, 즉 '속죄소(Mercy Seat)'를 의미합니다. 일 년에 한 번 대제사장이 짐승의 피를 가지고 들어가 이 속죄소 위에 뿌렸습니다.
법궤 안에는 십계명 돌판, 즉 율법이 들어있습니다. 율법은 끊임없이 죄인인 인간을 고발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공의는 죄에 대해 진노하셔야만 합니다. 만약 하나님이 죄를 보고도 그냥 넘어가신다면, 그분은 공의로운 재판장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율법 위에 덮개(속죄소)가 있고, 그 위에 희생 제물의 피가 뿌려집니다. 하나님께서 위에서 내려다보실 때, 율법을 어긴 죄인의 죄목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 죄를 대신해 흘린 '피'가 보입니다. 그 피를 보시고 하나님의 진노가 멈추고, 심판이 넘어갑니다(Passover).
예수님이 바로 그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죄를 얼마나 미워하시는지 보여주는 동시에, 죄인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보여주는 장소입니다. 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무시무시한 진노와 저주가 내가 아니라 예수님께 쏟아졌습니다. 이것이 '형벌 대속'의 은혜입니다. 주님이 저주를 받으심으로 우리가 복을 받고, 주님이 버림받으심으로 우리가 영접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십자가 사건을 통해 하나님은 위대한 일을 이루셨습니다. 26절입니다.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이것은 하나님의 딜레마가 해결된 순간입니다. 죄를 벌해야 하는 '공의(Justice)'와 죄인을 살리고 싶은 '사랑(Love)'이 십자가에서 만났습니다.
예수님을 심판하심으로 하나님은 자신의 공의를 만족시키셨기에 '자기도 의로우시며', 그 대속을 통해 우리를 용서하셨기에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시는' 분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를 포기하지 않고도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요, 복음의 신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완벽한 구원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나의 선행, 나의 경력, 나의 눈물을 보태서 구원을 완성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27절은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내가 만든 무화과나무 잎을 걸치고 하나님 앞에 서려고 할 때가 많습니다. 내가 좀 착하게 살면 하나님이 예뻐하시고, 내가 좀 실수하면 하나님이 버리실 것처럼 불안해합니다. 그것은 아직 복음을 모르는 것입니다. 복음은 '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오늘 이 시간, 나의 의를 내려놓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서 율법 외에 준비하신 한 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하나님, 저는 죄인입니다. 제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저를 대신해 화목제물이 되셨음을 믿습니다. 주님의 의가 나의 의가 됨을 믿습니다."
이 믿음의 고백 위에 서는 자에게 하나님은 재판장의 의사봉을 두드리시며 선언하십니다.
"너는 무죄다. 너는 의롭다."
이 놀라운 칭의의 은총이 여러분의 삶을 자유케 하고, 감격하게 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으로 이끄시기를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