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름 7장

게으름과 친숙한 그대에게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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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잠 방탕한 잠 게으름과 잠 2

Proverbs 20:13 NKRV
너는 잠자기를 좋아하지 말라 네가 빈궁하게 될까 두려우니라 네 눈을 뜨라 그리하면 양식이 족하리라

잠자는 즐거움

게으름은 뚜렷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 존재하는 어떤 경향성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내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실제적인 삶을 통해 흘러나옵니다.
그런데 이 게으름은 자기가 좋아서 하는 취미활동이나 자기의 즐거움을 위한 일들에는 배어들지 않고 대부분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의무에 배어듭니다.
즉 게으른 사람이라고 해서 모든 일에 게으른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특정한 어떤 부분만 보고 그의 부지런함을 과신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조금 특별한 영역이 있습니다. 바로 잠입니다. 잠자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잠을 적게 자는 것이 즐거운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사는 사람치고 방탕한 수면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대체로 절제하는 수면생활을 가진 사람치고 게으르게 사는 사람은 드뭅니다.
잠은 쉽고 달콤하고 평화롭습니다. 잠자는 시간이야말로 인간이 가장 편안히 쉬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잠자기를 좋아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이후를 가난해질까 봐 두렵기 때문이다 라고 말합니다.
사실 본분의 말씀을 히브리어 성경에서 직역하자면 가난하지 않도록 잠자기를 사랑하지 말라 입니다.
잠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타락한 인간의 일반적 성품입니다. 병적 현상으로 잠을 안 자거나 못 자는 경우를 제외하면 모든 인간의 내면의 부패성 속에는 잠자기를 좋아하는 습성이 깃들여 있습니다. 이것은 육적으로나 영적으로나 마찬가지입니다.
본문에서 사랑하지 말라는 잠자기는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분량의 건전한 잠이 아닙니다. 일정한 도를 넘어 방탕한 상태가 되어버린 잠입니다. 방탕이란 정해진 수준과 정도를 지나쳐 해로운 결과를 가져오게끔 자의적으로 마구 허비하는 것을 나타냅니다.
필요 이상의 잠을 자는 것은 방탕입니다. 우리는 흔히 동물적인 삶이라는 말을 하는데 그것은 아무에게도 구애받지 않고 본능을 따라 살아가는 삶입니다. 우리가 자고 싶은 대로 다 잔다면 그것은 동물과 똑같은 삶을 사는 것입니다.
돼지가 자명종 틀어놓고 자는 것 보셨습니까?

성경이 말하는 두 가지 잠

하나님께서 잠자기를 사랑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잠은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어둡고 둔하게 만드는 요소들을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잠을 다르게도 이야기합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표시로 내려 주시는 잠입니다.
시편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시는도다. (시 127: 2)” 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잠은 하나님께서 당신과의 교제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영육간의 안식을 주시는 방편으로 제공해 주시는 은혜입니다. 그래서 푹 잠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은 하나님과의 신령한 교제 안에 있는 사람들보다 오히려 잠자기를 좋아하는 게으른 사람들에게 더 많은 사랑을 받습니다. 이 구절을 통해 자신들의 방탕한 수면생활에서 오는 가책을 위로받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매우 틀린 일이며 위험한 일입니다. 예배 시간에 습관적으로 졸고는 돌아서서 이 말씀을 통해 평안을 누리는 사람이 있다면 지금 당장 사도행전 20장 9절을 읽어 보십시오. 모든 잠이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기 때문에 주시는 것이라면 유두고는 왜 떨어져 죽었겠습니까?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해 성경 말씀을 끌어오는 것은 커다란 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농담 가운데에서도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의 위엄을 생각하고 그 앞에서 옷깃을 여밀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이 잠을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에게 베푸시는 선물로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잠은 죄악의 잠으로 이야기됩니다. 죄악의 잠은 영적으로도 나타나고 육적으로도 나타나는데 육적으로 나타나는 죄악의 자매의 대표적인 예가 요나입니다. 요나는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항해 중 심한 풍랑이 일어났는데 그때 요나는 배 밑창에 드러누워서 깰 줄 몰랐습니다. 죄악이 가져다주는 평안을 만끽하며 죽은 듯이 잠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나 1장 5절
이런 죄악의 잠은 영적으로도 나타나는데 그 예는 수없이 많습니다. 이사야서에 나오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해 견고하지 않는 선지자의 영적인 잠 말씀 앞에 깨어나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혼의 깊은 잠 등이 그것입니다. 이사야 56장 10절

방탕한 수면이 영적 생활을 망친다.

육체의 게으름에서 오는 방탕한 잠은 반드시 우리의 영혼과 마음에 옳지 않은 결과를 가지고 옵니다.
여러분들에게 한 가지 묻겠습니다. 밤에 늦게 잔 것도 아니고 몸이 아픈 것도 아닙니다. 그냥 일어나기 싫어. 계속 이불 속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해가 훤히 떴는데도 꿈꾸고 침 흘리며 계속 잠 잤습니다. 그렇게 지칠 때까지 자다가 허리도 아프고 소변도 마려워 할 수 없이 일어났습니다. 그때 여러분은 상쾌한 기분으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습니까? 푹 잤기 때문에 더 활기차게 살게 되십니까?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찬란하게 뜬 태양이 “너 그렇게 살아도 되겠니?” 라고 물어보는 것 같고, 몸은 찌뿌드드하고 생각은 멍할 것입니다. 그날은 예배당에 나와 기도를 해도 기도 속에 영혼의 힘이 안 실릴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방탕한 수면생활이 우리 영혼에 해악을 미치는 증거입니다.
방탕한 수면 생활이 우리 영혼에 해악을 미치는 이유는 앞장에서 살펴보았듯이 그것이 게으름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게으름과 화목하게 지내는 한 복음과의 화목은 없습니다. 게으름과 화해하고 살아가는 한 참된 영적 생명의 풍성함은 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잠자는 일을 당연한 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적절한 수준을 넘어서는 잠은 바로 악으로 이어집니다. 따라서 방탕한 수면 생활의 위험을 깊이 자각하고 생각 없이 살아온 날들을 하나님 앞에 가슴 아파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많은 날들은 하나님을 섬기라고 주신 날들이지 편히 쉬고 마음껏 자라고 주신 날들이 결코 아닙니다. 한 사람이 하루 1시간씩만 필요 이상으로 수면을 취한다면, 1년이면 365시간이고 10년이면 3,650시간입니다. 그 시간이면 우리가 얼마나 많은 일을 할 수 있는지 모릅니다.
죄란 다른 무엇이 아닙니다. 자기 인생을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는 왕이신 하나님을 밀치고 자기를 왕으로 세우는 반역이기 때문입니다.

방탕한 수면 생활에서 벗어나려면

그러나 과도한 잠이 영혼에 극심한 해악을 미치는 것을 알았다 하더라도 이것을 쉽게 고칠 수는 없습니다. 방탕한 수면 생활에 익숙해져 온 사람이 어느 날 아침 갑자기 더 자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고 이불 밖으로 나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초인적인 노력으로 얼마간 그런 삶을 지속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내 지쳐 포기하고 맙니다.
그래서 이렇게 몇 번 시도하다 포기한 사람들이 선택하는 방법은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잠이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를 조금 받는다고 해서 잠이 줄어들지는 않습니다. 은혜 받는다고 해서 금방 죄인의 본성이 변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은혜 받아도 방탕하게 자던 기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자야 됩니다. 결국 수면 생활은 성화와 관련된 문제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부분과 관련하여 꼭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수면 생활의 문제와 씨름하는 사람들이 흔히 범하는 실수는 잠을 사랑하는 자신을 무조건 뜯어 말리며 이 문제를 해결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잠을 사랑하는 자신을 고치기 위해서는 잠을 사랑할 수 없는 이유를 분명히 하는 기초작업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기초작업은 잠보다 하나님을 더 깊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좋아하는 장난감을 빼앗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아이가 그것보다 더 좋아하는 것으로 유혹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아이는 기쁜 마음으로 애지중지하던 장난감을 내려놓습니다.
방탕한 수면생활의 문제에 있어서도 이것은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불타오르는 사람에게는 잠이 대수가 아닙니다. 잠들 때면 어서 빨리 날이 밝아 새벽 기도에 가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기를 고대하며 눈을 감습니다. 잠이 부족한 것은 괜찮지만 하나님과 교제하며 보낼 시간이 부족한 것은 원통하여 눈물이 핑 돕니다. 물론 늘 이런 정서로 사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깊은 사랑은 우리에게 이런 정서를 경험하게 해줍니다.
따라서 한 사람이 은혜를 많이 받았는데도 수면 생활에 방탕하며 고쳐지지 않는다면 은혜가 정말로 그 사람의 본성을 변화시키는 성화의 작용을 동반하는 은혜이며 그에게 하나님을 향한 애끓는 사랑을 경험하게 해주는 은혜가 되도록 순종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며 날마다 애써 성화의 삶을 걸어가는 사람이라면 방탕한 수면생활을 하면서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주인공

잠은 은혜를 받는다고 저절로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으로 인생의 목표를 수정함으로 인해 자신의 모든 삶이 재편되면서 줄어들어 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은혜를 받았는데도 계속해서 수면 생활이 방탕하다면 그것은 성화의 부족 때문입니다. 아직도 그의 안에 잠을 깊이 사랑하는 죄가 많이 남아 있어 그로 하여금 순전하게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분이 원하시는 길을 걸어가게 두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때에는 잠을 사랑하는 자신과 싸워야 합니다. 잠을 많이 자는 자신을 미워하고 잠을 많이 자는 것에 대해서 회개해야 합니다. 잠을 많이 자는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고 어떨 때 그렇게 많은 잠을 자는지 면밀히 연구하여 스스로 경계해야 합니다.
저녁에 식생활이나 수면 습관도 연구해서 내가 육체를 어떻게 다룰 때에 수면 생활의 방탕함이 극치에 달하고 어떨 때 하나님의 은혜가 강화되어 수면 생활이 방탕으로 흐르지 않는지 알아내야 합니다.
방탕한 수면생활은 우리에게 죽여야 할 대상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방탕한 수면을 즐기며 게으르게 사는 신자의 삶을 끊임없이 스스로를 경계하며 사는 충성스러운 신자의 삶과 비교해 보십시오.
게으른 신자가 자기 육체의 요구에 굴복해서 푹 자는 동안 충성스러운 신자는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을 간직하고 자기와 싸우며 기도합니다. 게으른 신자가 고단하다는 이유로 따뜻한 이불 속에 있는 동안 충성스러운 신자들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교회에 나와서 봉사합니다. 게으른 신자가 아무 생각 없이 TV 앞에서 웃고 있을 때 충성스러운 신자는 말씀을 섭취하고 은혜로 마음을 채웁니다.
이 두 사람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똑같이 대우해 주시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역사에 있어서 전자의 사람은 항상 엑스트라였고 후자의 사람이 늘 주연 배우였습니다.

얼마나 자야 하나

잠을 좋아하는 사람의 마음은 자기의 육체를 중히 여기는 게으름으로 인해 부패한 틀이 되어버립니다. 그 틀은 죄가 거하기 좋은 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져도 보존이 안 되고 금세 사라지고 맙니다. 그럼 우리가 아예 잠을 자지 말아야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잠을 자되 잠에 빠지지 말고 다시 생활할 수 있는 에너지를 재충전시키는 용도로 국한시켜 잠을 자야 합니다.
경험해 보셨다면 아시겠지만, 잠은 방탕하게 내버려 두면 계속 늘어납니다. 그래서 사람으로 하여금 하루 12시간 이상씩 자게 할 수도 있습니다. 가끔 자기는 8시간 이상씩 안 자면 큰일 난다는 사람을 만나기도 하는데 어떤 질병이나 체질 때문에 특별히 잠을 많이 자야 하는 사람이 있음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8시간 넘게 자야만 한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모두 다 건강상 문제 있는 사람들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 중 상당수는 방탕한 수면 생활을 내버려 둔 결과 장시간의 수면이 몸에 배어 그렇게 자지 않으면 당장 몸에 이상을 느끼는 상태로까지 발전한 것입니다.
그리고 설령 정말로 연약한 부분이 있어. 그렇게 많이 자지 않으면 도저히 안 되는 경우라 하더라도 제가 그 입장이라면 잠을 많이 자서 몸을 달래기보다는 생사를 걸고 체질을 바꿔달라고 하나님 앞에 병고침의 은혜를 구하겠습니다. 그래야 바울처럼 하나님께서 당신의 섭리 가운데 그렇게 내버려 둘 수밖에 없다고 하신다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방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쨌거나 정당한 수면의 기준은 다음날 하루를 영위해 나갈 수 있는 에너지가 충전될 때까지입니다. 거기까지가 올바른 수면시간입니다. 그 이상은 방탕한 수면에 빠지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 동안의 시간인지는 자신의 건강과 기타 여러 정황들에 따라 결정해야 할 문제입니다.
살다 보면 잠이 안 와서 문제가 될 때도 있습니다. 늘 생활할 것을 생각하면 잠을 자야 하는데 야속할 정도로 잠이 오지 않습니다. 기도를 해도 잠이 안 오고 수를 세어 봐도 눈이 말똥말똥합니다. 그럴 때는 가만히 누워서 아무 생각 말고 눈을 감고 쉬십시오. 이렇게만 하여도 수면을 취할 때 충전되는 에너지의 50%가 충전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조차 내키지 않는다면 차라리 오래 고민하지 말고 그 시간을 무엇인가 생산적인 일을 하며 사용하십시오.

경건 생활이 짓밟힐 때

우리의 경건 생활은 모두 종교적인 삶의 가장자리에 모여 있습니다. 오후 2시부터 3시까지를 기도시간으로 정해 놓은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남의 돈 받고 직장 생활하는 사람이 오전 10시부터 12시까지를 기도 시간이라고 정해 놓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경건생활들은 앞으로 당겨지든가 뒤로 밀리든가 둘 중에 하나입니다. 그런데 두 시간 모두 방탕한 수면생활에 의해서 짓밟히기 쉬운 시간들입니다. 깨어있는 신앙의 단호함이 없다는 말입니다.
만약 여러분의 직장이 아침 6시까지 출근해야 하는 곳이라면 어떨까요? 도저히 그 시간에 못 일어나. 결국 사표를 제출하게 될까요?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종교적인 생활이기에 자신의 사회생활 자체를 무너뜨리지 않는 한 거기에 적응하면서 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는 그렇게 살아야 되면 그렇게 살 수도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잠의 폭력적인 횡포를 규제할 수 있는 육체적인 능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도 도우십니다. 따라서 방탕한 수면생활에 치여 우리의 경건생활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는 왜 방탕한 수면생활을 청산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느냐고 우리에게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아직은 쉴 수 없습니다.

방탕한 수면생활은 시간 사용의 문제만을 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방탕한 수면 생활을 가만히 내버려 두면 그것은 영적인 문제로까지 이어져 영혼으로 하여금 게으른 잠을 자도록 만듭니다. 따라서 신자는 필요 이상의 시간을 잠을 자며 보내서는 안 됩니다. 졸린 잠을 깨치며 새벽 기도에 나와야 하고 피곤함을 무릅쓰고 하나님의 말씀을 한 자라도 더 배우려고 밤늦도록 불을 밝혀야 합니다.
잠을 절제하며 사는 사람들은 그렇게 사는 것이 쉬워서 그리 사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육체도 마냥 자고 싶은 소원을 품고 있습니다.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도 잠을 절제하고 게으름을 경계하며 사는 삶이 힘들고 고단하셨는데 하물며 인간에게 쉬울 리 있겠습니까?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했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에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디모데후서 4:7-8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새벽에 기도하러 나가셨고 깊은 밤에 하나님을 만나러 산으로 오르셨던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 길을 따라가는 사람이 되십시오. 이 세상에서의 시간은 금방 지나갑니다. 오래지 않아. 우리는 영원한 안식이 있는 주님의 나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때는 잠과의 싸움도 필요 없고 알람시계에 맞추며 새벽 기도 시간에 일어나지 못할까 봐 긴장해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방탕한 수면의 요구로 자꾸만 무너지는 자신을 채찍질하여 일으켜 세울 필요도 없습니다. 이 땅에서는 누려본 적이 없는 달콤한 잠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참된 안식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은 아닙니다. 지금은 우리들이 깨어 있어야 할 때이고 허리띠를 동이고 살아야 할 때입니다. 왜냐하면, 때가 아직 낮이기 때문입니다.
해주신 설교문을 바탕으로 PPT 슬라이드 형식으로 요약 및 정리해 드립니다.

[PPT 제목] 즐거운 잠, 방탕한 잠, 게으름과 잠 (2)

Slide 1: 주제 말씀

잠언 20:13 (NKRV) "너는 잠자기를 좋아하지 말라 네가 빈궁하게 될까 두려우니라 네 눈을 뜨라 그리하면 양식이 족하리라"

Slide 2: 잠자는 즐거움과 경고

게으름의 특성
취미나 즐거움이 아닌 '마땅히 해야 할 의무'에 배어듦
가장 치명적인 영역: '잠' (누구나 좋아하고 달콤한 것)
성경의 경고
"잠자기를 좋아하지 말라" = "가난해질까 두렵다"
금지하는 잠: 생존을 위한 건전한 잠이 아님
방탕한 잠: 필요 이상으로 마구 허비하는 잠, 동물적인 본능만 따르는 삶

Slide 3: 성경이 말하는 두 가지 잠

1.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 (시편 127:2)
하나님과 교제하는 자에게 주시는 영육간의 안식
주의: 게으름을 합리화하는 데 이 구절을 사용해서는 안 됨
예: 유두고 (사도행전 20:9) - 설교 중 졸다가 떨어져 죽음
2. 죄악의 잠
육적 죄악: 요나 (풍랑 속에서도 죄악의 평안으로 깊이 잠듦)
영적 죄악: 이사야 56:10 (영적인 깊은 잠에 빠진 선지자와 백성들)

Slide 4: 방탕한 수면이 영적 생활에 미치는 해악

과도한 수면의 결과
상쾌함보다는 몸이 찌뿌드드하고 생각이 멍해짐
기도와 예배에 영혼의 힘이 실리지 않음
게으름과의 관계
게으름과 화목하면 복음과 화목할 수 없음
시간 낭비: 하루 1시간 과수면 = 10년이면 3,650시간 낭비
죄의 정의: 왕이신 하나님을 밀치고 내 인생을 내 것으로 여기는 것

Slide 5: 방탕한 수면 생활에서 벗어나는 길

단순한 의지나 은혜만으로는 부족함
은혜를 받아도 육체의 본성(잠을 사랑하는 기질)은 남아있음
근본적인 해결책: 사랑의 대상 교체
잠을 억지로 참는 것이 아니라, 잠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해야 함
하나님과의 교제를 사모하면 잠을 줄이는 것이 억울하지 않음
성화(聖化)의 과정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본성을 변화시켜 나가는 싸움

Slide 6: 하나님의 주인공 vs 엑스트라

충성스러운 신자 (주인공)
하나님을 사랑하여 잠과 싸우고 기도함
피곤해도 봉사하고, 말씀을 섭취함
게으른 신자 (엑스트라)
육체의 요구에 굴복하여 잠을 즐김
편안함을 좇아 TV 앞에서 시간을 보냄
적용: 자신의 수면 습관과 식생활을 연구하여 스스로를 경계해야 함

Slide 7: 적절한 수면의 기준

수면의 목적: 다음 날 활동을 위한 에너지 재충전
올바른 태도
하루를 영위할 에너지가 충전될 때까지만 자야 함
'나는 8시간 이상 자야 해'라는 생각은 습관화된 방탕일 수 있음
잠이 오지 않을 때는 억지로 자려 말고 눈을 감고 쉬거나 생산적인 일을 할 것

Slide 8: 경건 생활의 사수

경건 생활의 위기
기도 시간(새벽, 밤)은 잠에 의해 가장 침범받기 쉬운 시간
우리의 능력
직장 출근을 위해 일찍 일어날 수 있다면, 하나님을 위해서도 일어날 수 있음
방탕한 수면으로 경건 생활이 무너지는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음
책임: 성령의 도우심과 육체의 능력이 있음에도 자는 것은 태만임

Slide 9: 결론: 아직은 쉴 때가 아닙니다

영원한 안식을 소망하며
이 땅에서의 시간은 금방 지나감
천국에는 잠과의 싸움이 없는 참된 안식이 있음
지금 해야 할 일 (디모데후서 4:7-8)
예수님과 바울처럼 선한 싸움을 싸우고 믿음을 지켜야 함
깨어 있어야 할 때, 허리띠를 동여매고 낮처럼 살아야 할 때임

Slide 10: 적용 및 기도

방탕한 수면 습관을 회개합시다.
잠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는 마음을 구합시다.
깨어 근신하여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으로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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