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하고 부조리한 세상 살아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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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악하고 부조리한 세상 살아내기
1. 이해할수 없는 세상의 일들
1) (사진) 유학후 돌아온 목사님의 죽음, 선교사님의 죽음
2) 풀리지 않는 부조리한 현실-악의 문제, 고통의 문제
3) 시편 137편의 현실-처지에 대한 애통함, 악에 대한 애통함
4)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2. (사진) 첫째, 기억하기(1절)
1) (사진) 바벨론 포로생활-강가에 앉아 시온을 기억하며 통곡
2) 본문에서 반복되는 단어-기억, 단순한 회상이 아닌 트라우마
3) 기억-정체성을 지키는 중요한 수단(우리가 누구이며, 돌아갈 곳이 어디인가)
4) 5, 6절의 오른손과 혀(능력과 기쁨)-삶의 의미
5)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기기-정체성
(1) 정체성의 핵심-기억하기(내가 누구였으며, 지금 무엇을 해야하며, 어디로 가야 하는가)
(2) 말씀 묵상의 목적-정체성을 기억하려는 것
(3) 지금 시대는 망각의 시대-손정의의 말(인간이 금붕어, AI가 인간화)-예) 네비게이션, 전화번호
(4) 묵상은 말씀을 단지 기억하는게 아닌 마음에 새김
(5) 기억은 우리를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게 함
3. (사진) 둘째, 기도하기(7절)
1) 단순한 시가 아닌 눈물의 기도
2) 자기연민이 아닌 악에 대한 고발(3절, 7절)
3) 저주기도가 아닌 하나님의 정의를 요청하는 기도
4) 우리가 마주하는 악의 현실
(1) 하나님을 비웃고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 자기 욕망을 위해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음
(2) 최후의 보루-법, 기업의 악행들(사진-런던베이글뮤지엄, spc, 쿠팡)
5) 부조리한 현실-이해할수 없는 고통의 사람들(병을 앓는 아이, 자동차 급발진같은 사건사고피해자)
6) 우리가 할일-이웃에 대한 관심갖기(사진,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
(1) 주일예배때 보여주는 영상들
(2) 하나님의 최종적인 관심은 교회가 아닌 세상
(3) 예루살렘을 향한 예수님의 눈물, 십자가 위에서 애통하심
(4) 산상수훈-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는 이유(이 땅에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소망)
4. 셋째, 기다리기(8-9절)
1) 9절의 심한 보복?->심판을 맡김, 하나님의 정의 갈망
2) 바벨론의 잔혹성-행한대로 갚아달라는 요청
3) 우리의 현실-많은 악들, 부조리한 일들(사건 사고 피해자들)
4) 하나님이 살아계시는가 의심
5) 성경-하나님의 심판약속
6) 하나님 나라가 왔는데 왜? 하나님 나라의 이미와 아직(기다림의 소망)
7) (사진) 요한계시록의 약속(계21:4)-억울한 자의 눈물을 닦아주심, 사망과 고통이 없음
8) 기다림이 믿음(방법: 보이는 현실에 절망하지 않고, 사적인 복수하지 않기)
5. 결론
1) 서론-악의 현실, 부조리한 일들-> 이 세상이 바벨론 제국
2) 제국 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3) 바벨론 강가에 앉아 시온을 바라보며 우는 시인이 되자
4) 바벨론 우상 즐기지 않기(과학 제일주의, 기술 제일주의, 경제 제일주의)
5) 악을 향해 기도하기, 이웃의 아픔에 무관심하지 않고 동참하기
6) 우리의 최종 믿음-하나님은 살아계신다, 하나님은 결코 침묵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때가 온다
7) 우리가 할일-기억하고, 기도하며, 기다리기
[서론]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때때로 도무지 이해할수 없는 일들을 마주합니다.
정의롭지도 않고, 합리적이지도 않는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기 힘든 그런 일들 말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그 분은 수년간의 긴 유학생활을 마치고 교수로 임용되어 가족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새로운 사역을 앞두고 온 가족이 기쁨과 설렘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돌아온지 얼마 되지 않아, 갑작스럽게 교통사로를 당해 그 목사님은 세상을 떠나고야 말았습니다.
꿈을 펼쳐보지도 못한채 말입니다.
남겨진 사모님과 자녀들은 큰 슬픔과 고통 가운데 놓이게 되었습니다.
왜 하필 그때 일까요? 왜 하나님은 막아주지 않으셨을까요?
또 다른 예가 있습니다.
올해 2월에 마다가스카르에서 사역하던 선교사 두분이 강도의 습격으로 순교하셨습니다.
한 분은 은퇴후 그 땅을 품고 헌신하신 장인이었고, 다른 한 분은 그를 돕기 위해 막 들어간 사위였습니다.
가족들이 함께 그 땅을 위해 선교사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겨우 90만원을 노린 강도에게 생명을 빼앗기고 만 것입니다.
왜 주님은 이토록 선한 일을 하신 분들을 지켜주지 않으셨을까요?
이런 비극은 드물지 않습니다.
의인이 고난을 당하고, 악인이 번영하는 부조리한 현실은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그래서 때로 우리는 울며 하나님께 묻습니다.
“주님, 정말 우리 삶에 개입하고 계신가요?, 이것이 과연 주님의 뜻입니까?”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오늘 시편 137편을 만납니다.
바벨론 강가에서 울고 있던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나라를 잃고 성전을 잃고 자유를 잃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잃지 않았습니다.
바벨론이라는 이방 땅에 살며 그들은 여전히 시온, 예루살렘을 기억하며 애통해 합니다.
그들의 눈물은 단순한 슬픔이 아닙니다.
무너진 현실 속에서 하나님을 찾으려는 영혼의 몸부림입니다.
우리는 부조리한 현실 앞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본론1]
첫째, ‘기억하기’ 입니다.
1절입니다.
“우리가 바빌론의 강변 곳곳에 앉아서 시온을 생각하면서 울었다.”
여기서 ‘기억하다’는 말은 단순히 회상하다는 정도의 의미가 아닙니다.
그 기억이 마치 트라우마처럼 마음에 깊이 새겨진 것을 말합니다.
그 기억이 이방땅에 사는 그들의 삶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기억’입니다.
시인은 눈물 속에서 시온, 즉 하나님의 성전을 기억합니다.
이들은 지금 바벨론이라는 이방땅 강가에 앉아 있습니다.
자신들의 죄로 하나님께 징계를 받고 나라가 망했고, 하나님의 성전이 무너졌습니다.
그들은 고향을 잃고, 예배를 잃고, 자유를 잃고 포로로 끌려왔습니다.
그 현실이 너무나 참담해 통곡하지 않을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아픈 기억이 오히려 그들의 정체성을 지키는 수단이 됩니다.
그 기억을 잊어버릴 때 그들은 바벨론 제국에 속한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그 기억을 잊지 않을때 그들은 바벨론에 살면서도 그곳에 속하지 않게 됩니다.
자신들이 돌아가야 할 곳을 알기 때문입니다.
5-6절입니다.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는다면, 내 오른손아 너는 말라비틀어져 버려라. 내가 너를 기억하지 않는다면, 내가 너 예루살렘을 내가 가장 기뻐하는 것보다도 더 기뻐하지 않는다면, 내 혀야, 너는 내 입천장에 붙어 버려라.”
시인은 자신이 예루살렘을 잊는다면, 자신의 오른손이 말라비틀어지길 저주합니다.
예루살렘을 가장 기뻐하지 않는다면, 혀는 입천장에 붙어 아무런 말도 할수 않게 해달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능력과 자랑이 오직 예루살렘을 향한 것이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드러낸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핵심은 ‘정체성’입니다.
정체성은 기억에서 시작됩니다.
내가 누구였으며, 지금 누구이며, 나는 어디를 향해 가는지 잊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고 예배하는 것도 바로 기억하기 위해서 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시며, 내가 누구인지 기억하려는 것입니다.
내게 주신 능력으로 무엇을 해야하는지, 누구를 높이고 자랑해야 하는지 기억하려는 것입니다.
현대 사회는 ‘기억’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엊그제 이재명 대통령을 만난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은 앞으로 인간이 금붕어가 되고, AI가 인간이 되어가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만큼 기술발전은 오히려 우리의 기억을 빼앗아 가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네이게이션이 길을 기억해 주고, 핸드폰이 전화번호를 기억해 줍니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전화번호를 최소 10개, 20개를 외우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이제 모두 기계에 의존하다보니 기억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앱으로 찾아보고 그치면 안됩니다.
말씀은 단순히 머리에 기억하는 게 아니라 마음에 새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만 말씀이 삶으로 드러날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이라는 이방 제국에서 예루살렘을 기억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도 이 세상이라는 제국 속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정체성이 우리를 울게 만들며, 우리를 다시 일으키고,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기억은 우리를 기도의 자리로 이끌게 됩니다.
[본론2]
둘째, ‘기도하기’ 입니다.
7절입니다.
“주님, 예루살렘이 무너지던 그 날에, 에돔 사람이 하던 말, “헐어버려라, 헐어버려라. 그 기초가 드러나도록 헐어 버려라”하던 그 말을 기억하여 주십시오.”
이 시편은 단순히 시가 아닙니다.
바벨론 강가에 앉아 예루살렘을 기억하며 드리는 눈물의 기도입니다.
자신의 고통을 감추지 않고 하나님께 쏟아붓는 정직한 기도입니다.
그의 기도는 단순한 자기 연민이나 슬픔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들을 조롱하고, 모욕하는 악에 대해 하나님께 고발합니다.
3절을 보시면 바벨론 사람들이 자신들을 위해 시온의 노래를 부르라고 강요합니다.
그들의 목적은 단순히 노래를 듣고 싶은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조롱하고 그의 신앙을 모욕하려는 것입니다.
“너희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그 잘난 하나님이 너희를 이토록 포로로 내버려 두셨냐?”
이런 조롱 앞에서 시인은 하나님께 울분을 포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특히 에돔은 형제나라였던 유다가 무너질때 돕지 않았습니다.
“헐어버려라, 헐어버려라. 그 기초가 드러나도록 헐어 버려라.”
형제 나라의 파멸을 보며 오히려 조롱하고 유다의 포로들을 바벨론에 넘겨 줬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하나님 앞에 그들의 악을 기억해달라고 부르짖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복수를 구하는 저주의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정의를 요청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당하는 현실 속에서 그 상황을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의 기도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이런 악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두려움없이 악을 저지릅니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진실을 왜곡하고, 죄를 숨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럼 사회 정의의 최후의 보루라고 부리는 법은 과연 공정할까요?
재판이 공정하다고 말하지만, 돈과 권력에 따라 판결이 흔들리는 모습을 우리는 자주 봅니다.
검찰개혁, 사법개혁을 외치는 정치인들조차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기준이 달라집니다.
기업은 어떻습니까?
노동자를 한 명의 인간이 아닌 마치 교체 가능한 부품처럼 대합니다.
런던베이글뮤지엄, SPC, 쿠팡에서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돈 앞에서 사람의 생명을 우습게 여기는 태도는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는 우리가 이해할수 없는 사건 사고들도 일어납니다.
특별히 잘못한 것도 없지만 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최근 자동차 급발진으로 인해 죽은 사람들도 많습니다.
단 한번의 우연으로 인생과 가정이 무너진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있습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우리가 해야할 일은 무엇일까요?
먼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눈을 떠야 합니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독일 장교의 가정만 보여줍니다.
하지만 담 너머에는 유대인 수용소에서 비명과 학살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관심을 갖고 귀를 기울이면 그 참혹한 현실이 들리는데 외면하는 것입니다.
조금만 눈을 밖으로 돌려보십시오.
고통받는 사람들의 부르짖음이 들립니다.
제가 대표기도 전에 사회문제와 관련된 영상들을 보여드리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 안에만 머물지 않고, 세상 속의 악과 고통에 애통한 마음을 품기 위해서 입니다.
하나님은 교회 일에만 관심을 갖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아직 실현되지 않은 하나님의 정의가 있습니다.
그 정의가 이루어지도록 우리에게 기도를 맡기신 것입니다.
악에 침묵하지 않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애통해야 합니다.
내게 억울한 일이 일어나면 탄식하며 하나님 앞에 억울함을 토로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탄식을 듣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악으로 가득찬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시며 애통해 하셨습니다.
세상 악과 고통받는 자들을 향해 눈물로 기도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 산상수훈에는 이런 예수님의 말씀이 등장합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왜 애통하는 자에게 복이 있을까요?
이 땅의 삶에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애통하는 기도에 하나님은 위로와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마지막으로 해아할 일은 무엇일까요?
기억하기, 기도하기에 이어 하나님의 정의가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 일입니다.
[본론3]
셋째, 기다리기 입니다.
8-9절입니다.
“멸망할 바빌론 도성아, 네가 우리에게 입힌 해를 그대로 너에게 되갚는 사람에게, 복이 있을 것이다.
네 어린 아이들을 바위에다가 메어치는 사람에게 복이 있을 것이다.”
이 구절을 문자 그대로 보면 잔혹하게 보복하라는 것처럼 들립니다.
특히, 바벨론의 어린 아이들을 바위에다가 메어치라는 표현은 너무 심한 보복 같습니다.
예수님은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셨지 이렇게 보복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잘 보면 시인 자신이 보복하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악에 대한 심판을 맡기고 기다리며 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기를 갈망하는 가운데 나온 고백입니다.
그 배경을 보면 좀 더 이해가 됩니다.
바벨론은 원래 잔인한 제국입니다.
한 나라를 정복할때 왕의 눈을 뽑고, 아이들을 바위에 내던져 죽였습니다.
시인은 단지 그들이 행한대로 갚아달라고 하나님께 요청하는 것입니다.
이런 악을 행한 이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이런 식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이런 시인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도 악이 너무 많고 이해할 수 없는 사건, 사고로 가득합니다.
거짓이 진실을 이기고, 무고한 사람들이 억울하게 고통당하는게 현실입니다.
이럴때 우리는 “하나님이 진짜 살아계신가?, 왜 가만히 계시는가?”
이런 질문을 품게 됩니다.
그러나 시편 137편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침묵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악을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그것이 성경에서 하나님이 하신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 나라의 이미와 아직 사이에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하나님 나라가 이미 이 땅에 임했지만 여전히 악의 잔당들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직 임하지 않은 완성된 하나님 나라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 날이 오면 악에 고통받는 자들의 눈물을 닦아주실 것입니다.
악인들이 더이상 판을 치고 돌아다니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이 행한대로 그들에게 갚아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내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기다리는 자는 쉽게 절망하지 않습니다.
지금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기다리는 복수를 꿈꾸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기다리는 자는 기도하며 인내합니다.
완성된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설교 서론에서 우리는 이 세상에 일어나는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에 대해 나누었습니다.
꿈을 안고 돌아온 목회자가 사고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이야기,
선교지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무참히 희생당한 선교사님들의 이야기,
병이나 사고, 억울한 일들로 고통받는 수많은 사람들,
이 모든 현실은 우리가 사는 세상이 여전히 바벨론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런 바벨론 같은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오늘 시편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바벨론 강가에 앉아 시온을 바라보며 우는 시인처럼 살라고 말입니다.
기억하고 기도하며, 기다리며 살라고 말입니다.
불의가 판을 치고, 진리가 조롱받는 시대입니다.
우리도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수 없는 부조리한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원인을 알수 없는 고통 속에서 아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지금도 일하고 계시며 결코 이 세상에 대해 침묵하지 않으십니다.
그 날이 오면 모든 억울함은 풀리고 모든 고통받고 눈물흘리는 자들을 닦아 주실 것입니다.
모든 악은 심판받아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도 기억하며, 기도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