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서 7
골로새서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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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그분은 몸, 즉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시작점이시고, 죽음에서 처음 사신 분이십니다. 이는 모든 것의 우선 순위가 되시기 위함입니다.
그분은 몸, 즉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시작점이시고, 죽음에서 처음 사신 분이십니다. 이는 모든 것의 우선 순위가 되시기 위함입니다.
지난 설교에 이어 이번 설교도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바울의 시각에서 보게 됩니다. 이 본문은 바울이 발견한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그 모습을 신생 교회인 골로새 교회의 교인들에게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마도 바울은 최대한 쉽게 그리고 가장 중요한 모습만을 추려서 기록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모습이 본문의 묘사로 전부 표현 될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모습은 예수님과 육체적으로는 시간을 보내지 않았던 바울에 의해 기록된 것 또한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매우 영적인 측면에서 이 본문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몸의 머리가 되신다고 설명합니다. 우리가 아직 에베소서를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바울의 교회론에 대해 자세히는 모릅니다만, 골로새서 역시 교회에 대한 이해를 몸을 통해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교회를 몸이라고 봤습니다. 몸은 머리가 없이는 기능을 할 수 없습니다. 즉 머리되신 그리스도가 없는 교회는 전혀 교회로서의 기능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대의 많은 교회들이 머리 없이 몸만 돌아다니며 자신들이 제 기능을 한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 증거가 어디있느냐 하면, 그리스도가 누구냐에 대해 모르는 것입니다. 신학적 지식, 성경 공부, 설교 등을 통해 그리스도에 관한 설명은 들었고 안다 할지라도, 실제로 머리와 몸의 관계로 그리스도를 아는 교인들이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자녀가 없는 학생들도 유아 교육과를 졸업하면 왠간한 엄마보다 지식적으로는 아이들을 잘 압니다. 하지만 실제로 매일 아이들을 키우는 엄마보다 더 애들을 잘 키울 수는 없습니다. 매일 매일 그리스도가 머리로서 몸인 나에게 영양을 공급하고 신경맘으로 연결이 되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가 내 삶속에 머리로서 계시냐는 것입니다. 아마도 대부분 그리스도인들이 아닐 겁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은 나를 구원하신 분이시고 날 위해 기도하시고 애쓰시는 분이시지, 그래서 고맙고 감사한 존재지, 매일 매일 내 삶속에 나의 머리로서 기능하기를 원치 않을지도 모릅니다.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예수님은 나를 돕는 분이 아니십니다. 내가 있고 내 밖에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내 안에 내 머리로서 내 삶의 모든 것을 진두 지휘하시는 분이십니다. 난 그분 없이는 단 일초도 생존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본 예수님이십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모든 것의 시작이 되신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쓰인 원문은, 처음 으뜸 통치자 라는 뜻이 있습니다. 시작이 되셨다는 것은 예수님을 처음으로 시작하여 계속해서 진행되어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처음이 되시고 모든 인류가 그 뒤를 따라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 없이는 인류가 없음을 말해 주는 것이고, 이 모든 것의 출발과 기준과 중요함이 예수님께 있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인류의 출발을 예수님으로 본 것입니다. 그리고 현재 내가 사는 이 시점도 예수님 없이는 존재할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교회를 그리스도를 머리로 인정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한다면, 바울은 교회뿐 아닌 모든 인류의 출발도 예수님이었다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이 머리가 아닐지는 몰라도, 그들이 좋든 싫든 예수님은 여전히 그들에게 이유와 원인이 되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죽음에서 처음 사신 분이시라고 설명합니다. 원문의 설명에 충실하자면 죽은자들의 집단 또는 죽은 상태에서 처음 태어나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죽음이라는 어떤 영역에서 처음으로 태어나신 존재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천지창조때 하나님께서 공허로부터 만물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만드신 것을 기억하게 합니다. 죽음이라는 것도 어떻게 보면 하나님께서 정하신 영역이기 때문에 하나님 입장에서 그곳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다시 시작하시는 것 또한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죽음이라는 영역에서 처음 태어나신 존재가 되셨습니다. 우리 입장에서 죽음은 이미 정해진 바꿀 수 없고 더하거나 뺄 수 없는 불가항력의 영역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는 아닙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신 것처럼 보일 수 있어도, 예수님께 죽음은 이기거나 정복할 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 안에 컨트롤 되는 영역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 안에 포함되어 있었던 영역인 것입니다. 거기에서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태어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더 이상 죽음이라는 영역이 정복해야 하거나 싸워야 하는 대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곳은 우리가 다시 태어나는 곳입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은 몸인 교회 우리는 죽어야 사는 것입니다.
넷째로, 이 모든 것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 모든 것의 우선 순위가 되시기 위함이라고 설명합니다. 정리하자면 교회 즉 하나님의 백성들은 예수님을 머리로 삼은 사람들입니다. 둘째 그렇지 않은 모든 사람들도 예수님이 창조의 근원이 되셨음을 말해줍니다. 셋째 예수님께서는 죽음이라는 영역에서도 처음 태어나신 분이십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아는 모든 세상에서 예수님은 원인 근본 처음이시라는 말입니다. 예수님 없이는 아무것도 존재하거나 설명이 되지 않는 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경험한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방 교회인 골로새 교인들에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믿든 말든 좋아하든 그렇지 않든 인정하든 아니든 다 상관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사실이고 이것이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이 본문을 아주 좋아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경험한 예수님을 자랑스럽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경험할 모든 사람들이 이 사실을 보게되고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분 안에서 모든 완전함이 기꺼이 거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분 안에서 모든 완전함이 기꺼이 거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19절이 매우 조심스럽습니다. 제가 번역한 모든 본문 중 개역 성경과 가장 다르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제 헬라어 실력이 부족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저는 개역 한글 성경의 번역이 무슨 말인지는 알겠지만 동의가 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해석과 제 설명은 여러분들께서 충분히 연구하시고 비교하셔서 판단하시길 부탁드립니다. 헬라어 본문에서는 ‘오티’ 라는 접속사로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기 때문에 그래서 라는 접속사입니다. 바울은 그가 경험한 예수님을 15절에서부터 18절까지 아름답게 묘사합니다. 그리고 19절에서 결론을 내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런 존재일 수 밖에 없는 이유, 그것은 모든 충만함이 그분 안에 기쁨으로 거하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 자발적으로 기꺼이 거하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예수님이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두분이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같은 원리로 성령님께서는 하나님과 예수님과 본질적으로 같으신 분이십니다. 그런 분이 지금 우리 안에 기쁨으로 거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 기쁨으로 거하신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논리나 경험이나 지식으로 이것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므로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진 특권입니다. 만일 이것을 깨닫는 다면 우리의 삶은 이전과 같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안에 기쁨으로 거하신다는 것을 안다면 그리고 그런 삶을 살기로 결정한다면 그래서 그 결과가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풍성하심이 내 삶을 통해 표현이 된다면, 어찌 흥분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교회는 우리는 그런 존재인 것입니다.
왜 개역 성경이 그 번역을 선택했냐면 많은 학자들이 이 구절의 주어를 하나님 이라고 생각합니다. 참고로 이 문장에서 하나님이라는 단어는 없습니다. 하지만 문맥상 그리고 문법상으로 그것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이 문장의 번역은 이렇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분 (예수님) 안에 모든 (하나님의) 완전함이 거하기를 기뻐하셨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분 (예수님) 안에 모든 (하나님의) 완전함이 거하기를 기뻐하셨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 번역이 맞다면 20절 역시 이어지는 문장이기 때문에 주어가 하나님이 되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두 번역 모두를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사실상 주어가 하나님이 된다고 해도 크게 뜻이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바울이 전달하기 원하는 메세지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설명하는 데에 있었기 때문에, 두 번역 모두 바울의 설명이 되기에 충분합니다. 어짜피 15절에서 바울은 예수님께서는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했습니다. 즉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이 표현된다고 한 것이고, 그래서 19절의 주어가 하나님이 된다고 해도 뜻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두분이 동일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을 통해서 모든 만물이 그와 화합합니다. 땅에서든지 하늘에서든지 그의 십자가에서 흘린 피로 평화를 만드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을 통해서 모든 만물이 그와 화합합니다. 땅에서든지 하늘에서든지 그의 십자가에서 흘린 피로 평화를 만드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땅에 있는 것들과 하늘에 있는 것들이 다 그의 십자가에서 흘린 피로 (하나님과) 화평하게 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땅에 있는 것들과 하늘에 있는 것들이 다 그의 십자가에서 흘린 피로 (하나님과) 화평하게 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바울의 두번째 결론은 예수님을 통해 모든 만물이 통일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방법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 그리고 그분이 흘리신 피를 통해 이 세상을 다시 온전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정하신 원칙 안에서 일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원칙을 알고 이해한다면, 우리의 신앙 생활은 다른 국면을 맞게 됩니다. 우리가 겪는 어려움의 대부분은 하나님과 그분의 원칙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이해하고 알게 된 예수님은 이 세상을 다시 재창조 하신 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은 죄로 물들게 되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다시 재창조를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일이십니다. 예수님은 완벽하고 완전하게 그 일을 하셨습니다. 죄는 하나님과 우리를 분리하고 갈라냅니다. 예수님의 피는 하나님과 우리를 다시 하나되게 하십니다. 그래서 보혈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보혈에 감사하고 찬양하는 이유입니다.
15절에서 20절까지의 말씀은 우리가 두고 두고 묵상하고 깊이 연구해야 하는 말씀입니다. 앞으로 골로새서를 계속 묵상하겠지만 그것과는 별도로 15-20절 말씀을 외우시고 깊이 묵상하시기를 강력히 권해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