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1장 1-1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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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고난을 이기는 비결
제목: 고난을 이기는 비결
본문: 고린도후서 1장 1-11절
본문: 고린도후서 1장 1-11절
찬송: 488장 이 몸의 소망 무언가
찬송: 488장 이 몸의 소망 무언가
오늘은 고린도후서 1장 1-11절 말씀을 가지고 "고난을 이기는 비결"이란 제목으로 함께 말씀을 묵상하려 한다.
우리 각자는 저마다의 고난을 안고 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고난 속에서도 위로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음을 증거한다.
1-4절은 모든 위로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말한다.
1-4절은 모든 위로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말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3절). 바울은 편지를 시작하면서 먼저 하나님을 찬송한다. 그가 처한 상황은 결코 찬송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에베소에서 생명의 위협을 받았고, 고린도교회로부터는 오해와 비난을 들었다. 그럼에도 그는 하나님을 찬송한다.
"자비의 아버지"라는 표현에 주목해야 한다. 원래 이 말의 뜻은 "긍휼이 풍성하신 아버지"다. 우리가 고난 중에 있을 때 하나님은 무관심하게 지켜보시는 분이 아니시다. 오히려 우리의 아픔을 아시고 친히 위로하시는 분이시다. 이사야 선지자는 "어미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사 66:13)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위로는 어머니의 품과 같이 따뜻하다.
4절은 더욱 놀라운 진리를 보여준다.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4절).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로하시는 목적이 있다. 우리가 받은 위로로 다른 이를 위로하게 하려는 것이다.
일본의 '긴츠기' 기법은 깨진 도자기를 금으로 이어 붙이는 기술이다. 깨진 자리가 오히려 가장 아름다운 부분이 된다. 하나님은 우리의 깨진 상처에 당신의 위로라는 금을 부어 더 아름답게 회복시키신다. 그리고 그 경험이 있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다른 이의 아픔을 위로할 수 있다. 우리는 위로받은 자로서 위로하는 자로 살아가야 한다.
5-7절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넘치는 만큼 위로도 넘친다는 것을 말한다.
5-7절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넘치는 만큼 위로도 넘친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침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5절). 여기서 "넘친다"는 표현이 두 번 나온다. 고난도 넘치고 위로도 넘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고난"은 단순히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 주님과 연합하여 겪는 모든 고난을 의미한다. 우리가 믿음으로 인해 겪는 어려움, 진리를 지키다가 당하는 핍박, 복음을 전하다가 만나는 거절,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다.
압력밥솥은 압력이 높을수록 음식의 맛이 더욱 깊어진다. 우리 삶의 압박도 마찬가지다. 고난의 압력이 클수록, 그리스도의 위로는 더욱 깊이 우리 안에 스며든다. 이것이 바울이 경험한 진리다. 그는 에베소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것 같은 극한의 고난을 겪었지만, 바로 그 자리에서 넘치는 위로를 경험했다.
6절과 7절은 더 나아가 고난의 공동체적 의미를 보여준다. "우리가 환난을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6절). 바울의 고난은 그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고린도교회를 세우고 격려하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의 고난도 마찬가지다. 혼자만의 고통이 아니라 공동체를 세우는 통로가 된다. 한 사람의 인내가 다른 이에게 소망이 되고, 한 사람의 신실함이 교회 전체에 힘이 된다. 우리는 혼자 고난을 짊어지는 영웅이 아니라, 함께 짐을 나누는 공동체임을 기억해야 한다.
8-11절은 극한의 고난 속에서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믿음을 말한다.
8-11절은 극한의 고난 속에서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믿음을 말한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가 심한 고난을 당하여 죽을 뻔하였으니"(8절). 바울은 자신이 겪은 고난을 숨기지 않고 고백한다. "심한 고난"이라는 말은 원어로 "견딜 수 없는 짐에 짓눌림"을 뜻한다.
바울은 이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노라"(9절). "사형 선고"는 법정 용어다. 출구가 전혀 보이지 않는 절망적 상황이었다. 터널의 정중앙에 있을 때를 생각해보자. 뒤도 앞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 순간이 우리에게도 온다.
그러나 바울은 이 경험을 통해 더 깊은 진리를 깨달았다.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9절). 출구가 없을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만 바라보게 된다. 자기 힘, 자기 지혜, 자기 경험에 의지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을 만난다.
이 표현은 놀랍다. 바울은 하나님을 부활의 하나님으로 고백한다. 단순히 과거에 예수님을 부활시키신 하나님이 아니다. 지금도, 오늘도, 죽은 것 같은 상황에서 우리를 일으키시는 하나님이시다. 정밀검사 통보를 받았을 때, 진행하던 일이 무너졌을 때, 관계가 깨졌을 때, 우리는 죽음을 경험한다. 그러나 바로 그 자리에서 부활의 하나님이 우리를 일으키신다.
11절은 기도의 공동체를 말한다.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11절). 바울은 혼자가 아니었다. 고린도교회의 기도가 그를 떠받쳤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혼자 감당할 수 없는 고난도 함께 기도하는 공동체 안에서는 견딜 수 있다. 우리가 기도로 서로를 떠받칠 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난다.
오늘 우리는 고난을 이기는 세 가지 비결을 배웠다. 첫째, 모든 위로의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다. 둘째,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며 넘치는 위로를 경험하는 것이다. 셋째, 극한 상황에서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이다.
이 새벽, 고난 중에 있는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넘치기를 바란다. 우리가 받은 위로로 오늘 만나는 이웃을 위로하는 자가 되기를 바란다.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죽은 것 같은 상황을 부활의 능력으로 일으키실 것을 믿고, 오늘 하루도 그 위로가 우리와 함께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참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
이 새벽 주님께서 주신 말씀 앞에 우리를 세워주시니 감사합니다. 고난 중에 있는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친히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 우리는 지금도 각자의 고난을 안고 있습니다. 몸의 아픔으로, 마음의 상처로, 관계의 어려움으로, 삶의 무게로 힘들어하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통해 주님께서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심을 다시 확신합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우리의 눈물을 보시며, 우리의 탄식을 들으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주님, 우리가 받은 위로를 다른 이들과 나누게 하옵소서. 옆 사람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함께 짐을 지는 공동체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고난이 공동체를 세우는 통로가 되게 하시고,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아름다운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극한의 순간에도 주님만 의지하는 믿음을 주옵소서.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부활의 하나님을 신뢰하며, 출구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게 하옵소서.
오늘 하루 각자의 삶의 자리로 나아가는 우리 모두를 주님께서 친히 지켜주옵소서. 건강이 허락되지 않는 성도들에게 주님의 치유하심이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가정에 주님의 공급하심이 있기를 간구합니다. 자녀 문제로, 가정 문제로 마음 아파하는 성도들에게 주님의 지혜와 평강이 임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드린 기도제목들을 주님께서 들어주시고, 주님의 때에 가장 선한 방법으로 응답해 주옵소서. 오늘 하루도 주님과 동행하며, 그 위로 안에서 승리하는 하루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