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설교 250917 수 [로마서 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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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설교 250917 수 [로마서 7:1-6]
새벽설교 250917 수 [로마서 7:1-6]
찬송가 407
찬송가 407
기도
기도
하나님, 우리에게 하루를 시작하는 숨을 불어넣으심을 감사드립니다. 아침에 깰 때에 흙에서 온 우리의 유한함을 생각하게 하옵소서. 날마다 주님께서 새 숨을 불어넣으시기에 주어진 하루를 온전히 감사하며, 또 주어진 하루의 소명과 책임을 생각하게 하옵소서. 누구나 다 사는 것처럼 그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특별하게 주신 하루임을 알고 주님 앞에 사는 삶이 될 수 있도록 주의 성도들을 인도하옵소서.
아침저녁으로 낮은 기온과 큰 일교차에 기침하는 성도들의 건강을 지켜주옵소서. 특히 육신이 쇠하여진 환우들과, 노년의 교우들을 살펴주옵소서. 분주하고 바쁜 일정 중에 담임목사님의 건강을 지켜주시고, 저마다의 일터에서, 가정에서 주신 책임과 소명을 다하는 교우들의 건강을 지켜주옵소서. 그렇게 주님께 우리의 건강을 두고 기도할 때, 우리의 육신 곳곳마다 주님의 눈길이 미치지 않은 곳 없고, 주님께서 살피시지 않는 곳 없는 삶임을 깨닫는 지혜도 허락하여 주옵소서.
주님, 그 중에서도 오래 투병중인 환우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몸과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우리의 친구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빛을 비추어 주옵소서. 육신은 쇠하여지지만 마음에는 소망이 있게 하시고, 우울과 무기력함이 삶의 색을 앗아가지만 흔들리지 않게 의지를 굳게 하옵소서. 그리고 오래 인내할 수 있는 힘을 주옵소서. 끝이 보이지 않고, 차도가 보이지 않는 것 같아 그늘과 같이 절망이 찾아올 때 주의 선하심 아래에서 인내할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이들을 위해서 함께 기도하는 가족들과, 또 교우들을 위해서도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가족들이 아픈 이들의 버팀목이 될 때, 주님은 가족들의 버팀목이 되어 주옵소서. 아픈이를 두고 아프다고 말할 수 없고, 힘든 이를 두고 힘들다고 말할 수 없는 이들에게 주께서 쉴 공간이 되어 주옵소서. 경제적인 어려움에 치료할 때마다 근심과 걱정으로 망설이는 일 없게 하시고, 주님께서 이 모든 일에 긍휼을 베풀어 주옵소서.
수요기도회를 통해서도 함께 기도합니다. 교우들이 모이기를 힘쓰게 하시고, 모여 주의 말씀을 경청하고 기도할 때 우리가 어떤 존재들인지 다시금 확인하며 새 힘을 얻게 하옵소서. 주님, 이 땅의 교회들을 긍휼히 여겨주시고 합당한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말씀 로마서 7:1-6
말씀 로마서 7:1-6
설교
설교
오늘 새벽에도 주님의 말씀을 나누는 모든 분들께 선하신 하나님께서 은혜주시기를 기도드립니다.
개신교회는 로마서를 아주 중요한 책으로 여기지요. 기독교의 개혁운동을 이끌었던 마틴 루터는 이 책을 가리켜서 ‘신약에서 가장 중요한 책이자, 복음의 가장 순수한 본질을 지닌 책’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심지어 그는 이 책을 ‘밤낮으로 읽고 묵상해야한다’라고 강조합니다. 비슷하게 장로교의 초석을 놓았던 칼벵은 로마서를 두고 ‘기독교 신앙의 문을 여는 열쇠’라고 이야기합니다. 또 존 웨슬리는 루터의 로마서 주석을 읽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에 대한 루터의 서문을 듣고 내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신뢰하며 그분만이 나의 구원임을 확신했다.’ 감리교가 태동하는 순간이 되었지요.
로마서가 개신교회에 미친 영향은 몇 마디 인용으로 다 평가하기에는 부족합니다. 아무튼 ‘지대한 영향’이라는 표현이 가장 적절해 보입니다. 그래도 천천히 로마서를 높이 평가한 이들의 말을 곱씹어 보는 것도 필요합니다. 루터는 이 책이 ‘복음의 순수한 본질’을 나타낸다고 이야기합니다. 그가 말한 ‘복음의 순수한 본질’이란 아마도 웨슬리의 경험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 곧 ‘이신칭의’에 대한 이야기일 것입니다. 카톨릭의 사제로서 의례와 제의, 그리고 형식을 통해 전달되는 ‘하나님 용서의 효력’을 느끼지 못한 루터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바울의 말에서 은혜를 받게 되지요. ‘이신칭의’가 루터에게 복음의 정수가 된 까닭은 그의 개인적인 경험의 영향이 컸을 겁니다.
그래서 조금 상상력을 더해보면 왜 하필 ‘로마서’였을까, 싶기도 합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로마서의 이 문구는, 바울이 하박국의 예언에서 인용한 것이기 때문이지요. 하박국 2장 4절입니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만일 루터가 하박국서에서 그 감동을 경험했더라면, 어쩜 하박국서가 로마서만큼의 관심을 받지는 않았을까요?
‘만약’의 일의 결과는 알 수 없는 것이지만, 로마서가 개신교회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루터와 웨슬리의 경험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그 지대한 영향이란 ‘이신칭의’의 강조에 있지요. 성직자나, 교회 제도, 직제와 의례, 소위 ‘성사’라고 불리는 것을 통해서 우리가 구원의 효력, 하나님의 은총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 그 은혜를 얻는다는 강조는 교회 역사에서, 동시에 한 사람의 개인에게도 새로운 세계를 열었습니다. 그만큼 ‘이신칭의’의 강조는 크고 강한 급류처럼 흐르는 물결이었던 것이지요.
그것은 아주 거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조심스럽게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너무나 큰 무엇인가가 있을 때 그 그림자에 가려 지나치게 되는 것들이 있단 것입니다. 이는 벌써 루터에게서부터 나타난 ‘과오’라고 해야할까요? 카톨릭의 ‘의례’와 ‘성사’에 대한 반동에서 시작해 ‘이신칭의’에서 큰 은혜를 받았던 루터는 ‘행동과 행위’에 대한 반감이 커져갔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로마서’는 복음의 ‘정수’라고 하면서도 성경의 어떤 책을 두고선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폄하했습니다. 혹시 어떤 책인지 아십니까?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강조하는 야고보서였지요. ‘행함’과 ‘믿음’의 관계를 강조하는 야고보서는 루터에게, 그리고 루터가 해석한 바울과 로마서의 기준에 믿음을 다시 율법과 연결짓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일 겁니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이렇게 질문해보면 그다지 어려운 문제가 아닙니다. 야고보가 먼저입니까, 아니면 루터가 먼저입니까? 성경이 먼저입니까, 아니면 루터의 로마서와 바울 해석이 먼저입니까? 한 가지를 지나치게 강조하다보니, 반대급부로 다른 하나를 폄훼하게 된 루터의 태도, 정당하게 그 메시지에 귀 기울이지 못했던 루터의 관점은 ‘편견’이라 말할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근래에 들어서 로마서를 비롯해 바울의 서신을 연구하는 이들은 ‘이신칭의의 그늘에 가리워졌던’ 본문의 메시지를 다시 살펴보는데 관심을 갖습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본문을 볼 때 가진 선입견이라고 할 만한 지배적인 관점을 벗겨내고, 본문이 말하는 것에 귀를 기울이려는 노력이지요. 저는 이런 관심이 우리에게도 주는 메시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요컨대 우리가 가진 성경에 대한 이해, 혹은 우리가 성경 메시지라고 굳게 믿고 견지하고 있는 어떤 것, 그것은 때로 반성과 평가가 필요한 것이라는 사실이지요.
다시 말하면 우리는 늘 본문이 말하고 있는 것을 정당하게 듣기 위해 우리 귀를 새롭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오래 말씀을 들어왔고 읽어 왔습니다. 이전에 우리가 읽고 들었던 말씀,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가 경험한 감동과 도전들은 그 자체로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다른 한편으론 충분히 무르익지 못한 연구와, 전체가 아닌 일정 부분을 확대한 해석, 그리고 편향된 관심에 기대고 있는 사람의 언어를 통해 전해졌다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지요. 그리스도는 부족하지도 않으시고 변하지 않지만, 그리스도를 이야기하는 우리는 충분치 못하고 변할 수 있음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로마서의 경우엔 지나치게 강조된 ‘이신칭의’의 반성을 해보는 것이지요.
그렇게 보면 오늘 우리가 읽고 있는 7장의 본문도 어떤 ‘오해’에 둘러싸여있는 대표적인 본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달리 말하면 ‘율법과 믿음’ 혹은 ‘율법과 하나님의 의’를 대립된 것으로 보는 우리의 선입견에 희생된 본문이라는 것이지요. 바울은 7장 14절에서 분명하게 밝힙니다.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유대인 바울에게 하나님이 언약백성에게 주신 ‘율법’은 ‘신성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7장 1-6절은 주석가들도 ‘난해한 것’이라고 평가합니다. 그 이유의 하나는 본문에 사용된 ‘비유’입니다. 바울은 6장에서부터 계속 전하는 우리가 ‘율법’의 영향에서 자유롭게 되었다는 논의를 뒷받침하려고 비유 하나를 들려줍니다. ‘한 부부’를 예로 들어서 말이지요.
2-3절의 비유에서 ‘남편’은 ‘율법’을 가리킵니다. 신자는 아내에 빗대어지지요. 비유의 논지는 남편이 죽어 아내가 ‘자유’를 얻은 것처럼, 그리스도인 신자는 율법의 예속에서 자유롭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정작 4절에서 바울은 이를 해석하며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다’ 비유를 그대로 가져오면 죽은 이는 ‘율법인 남편’이 아니라 ‘아내인 신자’인 것입니다.
비유와 해석의 관계가 거꾸로 되어 있어서 본문은 혼란을 더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메시지는 명확해 보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의 구속력에서 ‘자유하다’는 것입니다. 6절입니다.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그리고 우리가 조금 더 본문을 생각해보면 읽을 수 있는 것이 또 있습니다. 저는 월요일에 로마서를 ‘편지’로 읽을 필요가 있다고 말씀을 드렸지요. 우리 눈에 들어오는 부분을 지나치게 확대하기보다, 전체 안에서 바울이 이야기를 어떻게 전개하고 있는지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를 편지로 볼 때 바울은 일관된 논지를 이어갑니다. 6장 8-14절을 함께 읽으면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은 자 답게 살아야 한다’고 말한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 본문을 통해서도 같은 강조점을 전합니다. 4절입니다. ‘우리가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는데, 이는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하려 함이라.’ 어제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바울이 ‘죄의 종’과 ‘하나님의 종’을 대비시키며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의롭게 된 사람이 ‘누구의 종’인지를 강조한 것처럼, 오늘 본문은 자연스러운 결론으로 이어집니다. ‘우리가 율법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의 종이 되었으니, 이는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맺게 하려 함이라.’
이 논지에서 6절은 이야기를 반복하면서 동시에 약간의 변형을 가합니다. 이제 관심은 ‘어떻게’에 있지요. 바울은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율법에서 벗어낫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겨야 합니다.’ 새한글 성경은 이 단락을 이해하기 쉬운 말로 ‘우리가 얽매였던 율법에 죽음으로써 율법에서 풀려났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종노릇하되, 성령님의 새로운 방식으로 합니다.’라고 번역합니다. ‘성령님의 새로운 방식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 그 의미가 무엇인가? 이렇게 묻는다면 바울은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종 되었다.’ 우리는 율법의 종 되어서 그것의 요구에 다 부응하느라 사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 되어서 하나님께 열매맺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그것을 어떻게 할까? 바울은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지요. ‘성령의 새로운 방식으로 합니다.’
이 성령의 새로운 방식이라는 것을 8장에서 이야기하겠지만, 앞에서 했던 이야기를 떠올려보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이야기하지요. 5장 8절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성령의 새로운 방식, 요한복음에서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남기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지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와 자매를 사랑하는 것.
그리고 우리가 좀 더 주의깊게 볼 것이 있습니다. 일견 혼란을 더하는 듯이 보이는 2-4절의 비유와 해설입니다. 겉보기에 ‘모순’처럼 보이는 이 비유와 해설에서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제가 생각하기에 두 가지인 것 같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죽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율법에 자유하다’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죽었’습니까? 그렇지 않지요. 그러나 바울은 우리의 ‘죽음’에 대해서 앞서 이야기했습니다. 6장 3절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롬 6:3) 죽은 이는 우리가 아니라 예수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와 합한 까닭에 그의 죽음은 우리의 죽음이기도 한 것이지요. 바울의 편지를 이렇게 읽는 것이 맞다면, 그래서 바울이 우리의 죽음과 동시에 우리의 자유를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여기에 드러나지 않게 숨겨진 이야기는 이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깊이 하나가 되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 그리스도와 공동체가 되었다.’
‘너희의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 내주지 말라’는 6장 13절(롬 6:13)의 말이 이 편지를 받는 교우들의 현실적인 문제를 지적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리스도와 깊이 하나가 되었다, 연합하게 되었다는 이 메시지는 그저 ‘낭만적’으로만 들리지 않습니다. 이것은 오히려 율법보다도 더 강한 하나님의 요구이자 권리 주장이지요. 우리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입니까? 우리는 그저 자유를 얻게 된 자연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와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게 되었지만, 그 공동체의 머리는 ‘그리스도’라는 것이지요. 그리스도와 우리는 ‘사랑의 관계’를 맺지만, 그 관계의 또 다른 모습은 ‘주인과 종’으로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말이지요. 무엇에 죽었습니까? 율법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그리하여 율법의 요구가 우리에게 구속력을 갖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하여 죽었습니까?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맺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이제 그것을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바로 ‘성령의 새로운 방식’으로, 곧 우리로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한 사랑으로 한다는 것이지요. 바울은 그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6장에서 본 것처럼 지금 로마의 교우들은 그 은혜에 합당하지 않게 살아가는 것 같지요. 이러한 이야기는 성경의 오래된 이야기를 상기시킵니다. 바로, 바로의 제국에서 건져내었던 애굽의 노예들과 하나님 사이의 갈등 이야기 말이지요.
교우 여러분, 우리는 누구의 종입니까? 누구의 종이 되어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가 세상도 아니고, 율법도 아니고, 육신도 아니고, 우리 자신도 아니고 오늘 하루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성령의 새로운 방식으로 그 종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를 의롭다고 하신 그리스도의 은혜, 자신을 내어주심으로써 드러내신 그 사랑의 은혜, 그 은혜의 부르심에 걸맞게, 그 은혜로 부르신 이유를 따라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맺는, 땀흘려 열매맺는 그리스도의 종들로 살아갈 수 있기를, 온전한 사랑으로, 넘치는 그리스도의 자비와 긍휼로, 주께서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셨듯 우리도 그렇게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의 종들로 열매맺는 삶이 되어 하나님의 영광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