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설교 251117 월 [여호수아 4: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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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설교 251117 월 [여호수아 4:15-5:1]

찬송가 73

기도

하나님, 감사와 찬양을 주님께 올려드립니다. 비록 무화과 나무가 풍성하지 않으며, 밭의 열매가 없을지라도 주님께 감사를 고백합니다. 우리가 주님께 감사를 고백하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빚으시고, 우리의 삶을 돌보시며, 오늘 하루도 주와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숨을 불어넣으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지혜가 우리가 주목하는 삶의 영역보다 더 크고 넓으며, 주님의 선하심이 우리 눈에 가장 좋은 것보다 값지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손이 가난하고, 이 가을에 거둔 것의 바구니가 충분치 못하다 하더라도 주님께 감사를 고백하는 우리는 주 안에서 풍요롭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주님, 가을의 감사를 고백하는 모든 교우들이 그렇게 한 주를 살아갈 수 있게 인도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풍성함에, 만물의 충만함이신 주님께 기대어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그런 넉넉함을 가질 수 있게 하옵소서. 우리의 사랑하는 형제와 자매를 향해 우리 손 내밀기에 인색하지 않게 하시고,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이미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어주신 주님의 충만함에 힘입어 우리도 내가 아닌 다른 이들에 관심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주님, 우리의 시선과 마음이 얼마나 좁고 좁은지, 그것을 부끄러워하며 고백합니다. 우리가 관심하는 것이 그저 자기 자신뿐이라는 것을 한탄하며 참회합니다. 작은 손해에 분노하고, 이웃에게 상처준 것보다 자신의 기분이 상한 것에 원한을 삼으며, 나의 울타리 안에 있는 이들만 사랑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고백합니다. 마치 일만달란트를 묻지 않으시는 은혜를 입었으나 백데나리온을 쫓아 이웃의 영혼을 옭아매는 작은 마음 가진 사람처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고백합니다.
주님, 감사를 고백하며 주님의 은혜를 하나하나 묵상할 때 우리의 영혼의 품이 주님처럼 깊고 넓어질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우리의 분주함과 가난함을 핑계삼아 더 이상 인색하지 않게 하시고, 나 자신을 조금 희생할지라도 주님의 풍성함을 닮아 기꺼이 섬기고 나누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자신을 나눌 때 참으로 주님의 충만하심에 참여하는 성도, 그런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이 시간 주님의 말씀을 함께 나누는 우리 모두에게 선한 은혜 주시길 기도합니다. 주님 우리와 함께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말씀 여호수아 4:15-5:1

설교

오늘 새벽에도 말씀을 함께 나누는 모든 분들께 선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최근에 재미있는 CF를 한 편 보았습니다. 햇살 좋은 아침에 젊은 부부가 마주보고 앉아 있습니다. 두 사람을 은은하게 비추는 햇살만큼 분위기도 좋습니다. 남편을 바라보는 아내의 눈빛에는 애정이 흐르고, 남편은 옅은 미소를 띄며 책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아내가 입을 엽니다. ‘여보’ 그리곤 묻지요. ‘오늘 무슨 날인지 알지?’
그 순간 달콤하게 흐르던 배경음악이 갑작스럽게 바뀝니다. 긴장감이 더해집니다. 마치 영화의 장르가 로맨스에서 스릴러로 변한 듯한 변주가 계속됩니다. 중요한 것은 남편이 당황한 기색을 보이지 않습니다. 눈치채지 못할 만큼의 짦은 침묵을 끊어내고 기지를 발휘해 대답합니다. ‘그럼, 내가 그걸 잊을까.’
남편은 급하게 찬장을 열어서 음식을 준비합니다. 식탁에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밥과 미역국을 아내 앞에 내려놓자, 아내가 감동한 목소리로 감탄사를 내뱉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동시에 부르는 축하노래가 마침 겹치게 됩니다. ‘생일 축하 합니다.’ ‘결혼 축하 합니다.’ 그 순간 장면이 전환됩니다. 남편이 집에서 쫓겨나 복도에 앉아 처량하게 하늘을 쳐다보지요.
정말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날을 잊는다’는 것은 이렇게 큰 문제가 되지요. 그래서 우리에게 ‘달력’이 주어진 것은 아주 큰 은혜란 생각이 듭니다. 하루하루 지나가는 날들을 바쁘고 분주하게 지내다 잊어버리는 날들, 그 중에서도 아주 특별하고 인생에 중요한 날들을 늘 기억할 수 있도록 도와주니 말입니다.
과거를 기억하는 일은 무척이나 중요합니다. 그것이 단순히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남아 우리의 영혼을 생기있게 해주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우리가 맞이하는 오늘은 지나간 과거를 기념하며 새로운 의미가 더해지기 때문입니다. 해마다 우리 아이들의 생일을 축하하는 일이 없고, 우리의 결혼을 기념하는 일이 없고, 우리보다 앞서 있었지만 이제 만날 수 없게 된 이들을 추모하는 일 없다고 상상해보십시오. 다시 말해 지나간 일을 현재로 다시 불러들이는 일 없이 뒤로 흘러가기만 하는 시간은 우리가 누구인지 대답해주지 않습니다. 시간은 분명 ‘선’처럼 우리 뒤로 흘러가기만 하지만, 우리는 시간을 빙빙 돌아서 올라가는 계단처럼 나선형으로 살아갑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어디로 가는지 이해하곤 하지요.
우리는 결혼 기념일을 해마다 기념하기 때문에 처음의 언약을 기억합니다. 아이들을 키우다 보면 의견이 달라서 싸우는 일도 많고, 두 사람 사이의 문제가 아니라 바깥에서 닥쳐오는 문제로 서로 등질 때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마 10:36)인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지요.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를 찍으면 ‘남’이 된다는 유행가 가사처럼, 사랑하는 배우자가 남처럼 느껴지는 일은 그야말로 순간에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때가 되어 돌아오는 결혼기념일은 우리를 과거로 되돌려 놓습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오늘에서 과거를 요청합니다. 그 날에 있었던 일, 우리의 고백, 서로 굳게 다짐하고 맺은 언약을 현재로 불러들입니다. 그 불러들임, 과거를 기념하는 일이 우리에게 그만두고 싶은 여정을 이어갈 힘을 줍니다. 기념을 통해 과거는 오늘 우리를 구속합니다. 요청된 과거는 우리를 다시금 그 언약 앞에 세웁니다. 그리고 거울처럼 현재의 자신을 비추어줍니다. 그 때 우리는 깨닫게 되지요. 그리고 다시 결단하게 됩니다. 우리가 길을 잃었다는 것, 그러나 다시 가야할 길을 말입니다.
교회에서 ‘예배’는 익숙해서 일상처럼 느껴지지요. 학교에서는 ‘예배’도 학문의 대상으로 배우게 되는데 아직도 기억이 남는 내용이 있습니다. 예배에 익숙한 제게 그 가르침이 생소한,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예배학 개론 앞 시간에 배운 ‘예배는 재현이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재현’이라는 말이 조금 낯설기도 한데, 달리 말해 재현으로서 예배는 ‘연극’에 비유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연극’이라고 하면 ‘창작된 이야기’ ‘허구의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극장에서 연극을 본다면 우리는 그것을 ‘실재’로 경험하지요. 극장의 한 귀퉁이에 앉아서 무대 위 배우들이 분명 자신이 아닌 다른 인물이 되어서 던지는 대사와 행동들, 그 사이의 감정들, 그렇게 이끌어가는 이야기는 우리로 하여금 웃게하고, 울게하고, 긴장하게 만듭니다. 극장에서 연극은 하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실재가 됩니다. 연극은 이야기에 우리를 공명하게 만들지요. 그래서 연극은 과거를 현재화합니다. 연극은 이야기를 재현하며 우리를 이야기 속으로 끌어당깁니다. 극장 바깥에서 연극은 하나의 공연에 지나지 않지만, 그 자리에 함께하는 관객들에게 연극은 옛 이야기가 살아 자신을 만나는 시간, 나의 현재와 옛 이야기 사이에서의 살아있는 만남의 시간인 것이지요. 함께 웃고 함께 울면서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배는 재현입니다. 우리에게 성경은 늘 옛 이야기이지요. 그러나 예배는 그 옛 이야기, 과거의 사건을 오늘 우리가 있는 이곳에서 우리를 참여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이야기는 거기에 머물러 있지 않고, 예배를 통해,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함께하시는 이 시간을 통해, 우리의 참여를 통해 여기 지금 우리의 이야기가 되는 것이지요.
길갈에 세운 열두 돌은 과거를 현재로 재현합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따라서 사람들에게 명령하지요. ‘후일에 너희 자손들이 그들의 아버지에게 묻기를 이 돌들은 무슨 뜻이니이까 하거든, 너희는 너희의 자손들에게 알게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이 마른 땅을 밟고 이 요단을 건넜음이라.’(여 4:21-22) 길갈에 세워진, 마른 요단 강바닥에서 가져온 열 두개의 돌은 바로 그 날의 일을 오늘로 가져옵니다. 지나간 기억이지만 지금을 살아가는 아들들을 하나님 이야기 속에 참여하게 하지요. 그 구체적인 활동을 오늘 여호수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24절 말씀입니다. ‘이는 땅의 모든 백성에게 여호와의 손이 강하신 것을 알게 하며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항상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라.’(수 4:24)
길갈에 세워진 이 열두 돌은 그저 돌덩이일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 어떤 관심도 갖지 않는 이들에겐 돌덩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곁을 지나가지만, 눈길주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열두개’라는 것을 발견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이상의 의미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들에겐 그렇지 않습니다. 그 돌의 이야기를 관심하는 사람에겐 그렇지 않습니다. 요단강을 마른 땅으로 건너간 사람들의 그 후손들, 아들을 지나 아들, 그리고 또 아들들에 이르러서 그 날 살아있던 사람들이 흙으로 돌아가 살아있는 증언을 전해줄 수 있는 사람들이 남지 않은 때에도 그들에게 이 돌들은 ‘지금 말하는 것’입니다. 마치 결혼 반지처럼 말입니다. 마치 우리의 목에, 우리의 서재에, 우리의 책상에, 우리의 집에, 우리의 교회에 걸린 십자가 처럼 말입니다. 그것들은 그저 하나의 사물, 나무이든 돌이든 깎아만든 사물로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지금 우리에게 말을 건내는 것이며, 우리를 그 날의 사건으로 초대하는 것이지요.
그리스도교의 예배는 그런 의미에서 ‘재현’입니다. 하나의 ‘연극’이지요. 극장 바깥에 있는 이들에게는 ‘꾸며낸 이야기’가 상연되는 하나의 공연, 퍼포먼스에 지나지 않지만 극장 안에 있는 우리에게 그것은 살아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예배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그리스도로 인하여 확증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살아서 공명하는 사건입니다.(롬 5:8) 그리스도교의 예배는 자신의 탐욕을 위해 힘과 권력을 불의하게 유용하는 이들이 저지른 폭력에 희생당한 하나님의 종이, 그들이 휘두를 수 있는 최종적인 무기인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써 세상을 이겼음을 증언하는 사건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예배는 그 부활을 기념하고 경축하며, 그 그리스도와 하나됨의 성찬을 함께 나눔으로써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공의롭게 대우하는 것이 참된 진리임을 확증하는 사건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예배는 그 날 십자가에 이루어진 바로 그 사건의 재현입니다. 그 사건이 그 날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오늘의 예배를 통해,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고, 주님의 떡과 잔을 함께 떼어 나누며, 다시금 공명하는 증언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하나님의 사랑 안에 살고, 진리를 찾고 구하며, 이웃을 향한 정의의 걸음을 내딛도록, 과거에 일어났으나 지금 여기서 벌어지는 사건입니다. 길갈에 열두개의 돌이 있었다면 우리에게는 예배가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열두 개의 돌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의미를 지니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길갈에 세워진 열두개의 돌은 24절에 여호수아가 남긴 말씀처럼, 그것을 보고 그 재현된 이야기 속에 살아가는 이들마다 하나님의 강하신 손을 믿어 주어진 믿음의 길을 굳게 걸어가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두려움 가운데 소망을 얻었던 것은 아님을 기억해야겠습니다. 길갈의 열두 개의 돌은 바로 그 일을 위해, 과거로부터 오늘을 미래로 이끌기 위해 주어졌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그저 돌멩이에 지나지 않았고, 시간이 흘러서는 그저 사람들이 자기 욕망을 채우기 위해 구별된 ‘영험한 곳’으로 전락해버리기도 했지요. 시간이 흘러 예언자 호세아와 아모스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그들의 모든 악이 길갈에 있으므로 내가 거기서 그들을 미워하였노라.(호 98:15)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는구나.(암 4:4)
오늘 이 말씀이 우리의 예배를 회복하는 은혜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우리의 예배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예배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닙니까? 우리는 어떻게 예배에 참여합니까? 그러나 이 모든 질문들을 넘어서서 우리에게 이 물음의 대답이 있었으면 합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위하여 우리에게 예배의 자리에서 만나기 원하십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예수와의 연합, 그 사건은 과거에 일어난 한 날의 사건이지만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모여서, 주님의 몸된 공동체로 예배할 때 바로 여기 이곳에서 앞길을 바라보는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사건으로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예배, 하나님께서 건내신 만남의 자리에서 우리는 여전히 사방에서 우리를 옭아매는 죽음을 딛고 생명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의 삶을 소망할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늘 우리 주님의 부활이 오늘 우리의 삶과, 내일의 걸음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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