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설교 251031 금 [스가랴 14: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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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가 420

기도

주님, 우리가 미처 다 깨닫지 못하는 곳에서도 주님의 손길이 우리의 삶을 덮으시니, 그 사랑과 온유함을, 또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주님의 자비를 찬양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루하루 더해갈 수록 그 은혜를 깨달을 수 있는 눈과 귀를 열어주시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찬양하게 하옵소서. 우리도 그 사랑과 온유함을, 긍휼히 여기시는 자비의 모습을 닮아가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우리의 삶의 터전에서 만나는 이들마다 우리의 평범한 일들을 통해 하나님의 빛이 비추이게 하옵소서.
한 주를 마무리하는 이 날을 보내는 모든 교우들에게 은혜와 긍휼을 베풀어 주옵소서. 여러 일과 갈등 속에서 힘에 부친 이들을 위로하여 주시고, 우리에게 주어진 주님의 길 위에서 부딪히고 넘어진 이들을 일으켜 주옵소서. 그러나 그 모든 갈등과 부침들이 작은 일에 충성하고자 하였던 삶의 고백이 되었다면, 혹여 우리가 실패라고 할만한 것들 가운데서도 30배, 60배, 100매의 열매를 거두는 참 생명있는 씨앗이 심기어진 일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그 모든 수고로움들로 주님께 영광이 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주님, 수험생들을 위하여 또한 기도합니다. 대입을 준비하는 학생들과, 또한 취업을 준비하는 모든 청년들에게 주님의 위로와 자비와, 또한 선한 길로의 인도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이들의 수고와 애씀이 손아귀를 빠져나가는 모래와 같이 허무한 것이 되지 않게 하시고, 막막해 보이는 상황과 여건 속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빛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이 모든 시간들을 통하여 성실함의 가치를 배우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거슬러서 불의와 불법으로 세상의 권력을 차지하려는 어떤 이들과 같이 자기의 욕망을 위하여 그릇되게 행하는 것이 아니라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신 주님의 성실하심과 같이 정직하게 자신을 단련시켜나가는 그 성실함의 힘을 배우게 하옵소서. 그리고 수험생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가족과 교회와, 공동체가 있음을 깨닫게 하셔서 이들이 외로운 길을 가지만 사랑 가운데 걷고 있음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이 시간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다. 주님, 우리와 함께하시어서 이 말씀을 통해 주님의 뜻을 깨닫게 하시고, 우리는 믿음과 결단으로 주님 앞에 응답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설교

오늘 새벽에도 함께 말씀을 나누는 모든 분들께 선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시길 축원합니다.
저희 외가는 농사를 지으십니다. 그래서 추석이 되면 늘 외가를 가는 길에 황금빛으로 물든 논을 볼 수 있었지요. 해질녘과 맞물려 보이는 황금빛 논은 그야말로 장관입니다. 추수할 때가 이르러 맞이하는 추석은 그야말로 마음을 너그럽고 풍성하게 해주었던 기억이 납니다.
도시생활을 하다보니 가끔은 우리가 전통적으로 지켜오던 절기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 아쉽게 다가오기도 합니다. 비단 기후위기라서 그런 것 뿐만 아니라 계절의 변화와 흐름에도 둔하고, 추수와 수확의 즐거움도 실감하기 어렵지요. 그러나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추석’이 있다면 그들에게는 ‘초막절’이 있었지요.
초막절은 유대력으로 7월 7일,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태양력에 따르면 9-10월 사이에 해당합니다. 시기도 그렇지만 그 절기로 기념하는 의미도 추석과 비슷합니다. 수확의 기쁨을 누리면서, 또 출애굽의 은혜를 떠올리면서 보내는 초막절은 그래서 거둔 수확물을 저장하는 기쁨을 누리는 날로 ‘수장절’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다시금 강조하자면 초막절은 어느 절기보다도 ‘기쁨’의 성격이 짙은 날이지요.
그 초막절이 오늘 본문에 이렇게 이야기됩니다.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이방 나라들 중에 남은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슥 14:16) 어제 우리가 14장의 본문을 읽으면서 이 예언이 스가랴가 본 환상이 아닐까,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환상은 현실과는 동떨어져있지요. 지금 스가랴와 공동체와 처한 현실, 상황과는 아주 거리가 먼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환상’이라는 방식을 통해서 스가랴에게 선명하게 계시된 이 내용은 하나님께서 훗날에, 13절에서처럼 ‘그 날’이라고 부를 만한, 곧 하나님이 약속하시는 ‘여호와의 날’에 이루실 것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 때, 그 날에, 곧 여호와의 날에 예루살렘을 치기 위해 올라왔던 이방 나라들 중에 남은 자들이 오히려 여호와를 경배하며 초막절을 지키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초막절일까? 왜 유월절이 아니라 초막절일까요? 본문에 구체적으로 그 이유가 나와있지 않기에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초막절이 ‘기쁨의 절기’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을 해봅니다. 예루살렘과 반목하고 늘 경쟁하고 대립하며 전쟁과 다툼을 일삼던 나라, 그 이웃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생명들이 이제 하나님 안에서 모두 하나가 되어 주님의 기쁨을 누리는 것. 아주 이상적인 환상이지요. 하나님과 더불어 온 세계가 기쁨을 누리는, 다툼도 미움도 없는, 평화의 날에 대한 소망, 혹은 그 날을 향한 하나님의 의지.
그것이 이유가 아니라면, 유월절이 아니라 초막절이 환상의 주제가 된 까닭은 아마도 이어지는 ‘물’에 대한 이야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초막절은 수확하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이면서 동시에 다가올 겨울에 내리는 비를 기도하는 절기이기도 하기 때문이지요. 이 때 기다리는 ‘비’가 흔히 성경에서 종종 접하는 이른비와 늦은비 중에 ‘이른비’에 해당합니다. 수확을 마무리하고 기쁨으로 축제를 즐기는 이 초막절에 ‘이른비’, 곧 겨울비를 기도하는 까닭은 이 비가 내려 땅을 부드럽게 해야만 씨를 파종할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크게 보면 초막절은 한 해의 농사를 마무리함과 동시에 한 해의 농사를 시작하는 절기였던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17-19절의 ‘비’에 대한 이야기가 어느정도 이해가 되지요. 그 날에, 하나님의 날에, 하나님께서 홀로 천하의 왕이 되시는 날에 기쁨으로 초막절을 지키지 않는 사람, 하나님의 기쁨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 그렇게 하여 하나님의 다스림 속에 거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비를 내리지 않겠다는 이 말씀은 실상 다그치거나 위협하는 것이라기 보단 ‘초청’에 해당합니다. 기쁨이 여기 있으니, 하늘 비의 축복이 여기 있으니 땅에 있는 다른 족속들처럼 이리로 와서 주님의 기쁨에 참여하라는 초대이지요.
이러한 이상이 20절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말 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될 것이라.’ 아마도 여기 등장하는 ‘말’은 군마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군사용으로, 전쟁을 위해 사용되는 말에는 방울을 달아서 큰 소리에 말이 익숙해지도록, 그래서 전쟁의 혼란에 두려워하지 않도록 훈련시키곤 했지요. 그러나 그 날이 되면 전쟁을 위해 사용되던 말의 방울, 아주 사소한 방울마저도 그 쓰임이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께 성결이라’, 하나님께 바쳐진 것으로 말이지요.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갈등이 없고, 나라와 나라 사이에 전쟁이 그치고, 모든 민족이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기쁨에 참여하리라는 환상, 이상, 그것이 지금 선포되고 있는 것이지요. 여호와의 날입니다. 이사야가 보았던 이상과도 같습니다. ‘(이사야 2:4)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
온 민족이 하나님의 기쁨을 함께 누리는, 하나님의 백성과 같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여호와의 날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묘사됩니다. ‘그 날에는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가나안 사람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슥 14:21) 이 말의 정확한 의미가 무엇일까요? 더 이상 하나님의 성전이 오랫동안 이스라엘의 대적이었던 가나안과 같은 이방민족들에게 위협당하지 않으리라는 것일까요? 아니면, 그동안 이스라엘에게 경고되었고, 그래서 늘 가까이 하지 않도록 경계되었던, 말하자면 부정한 가나안 사람들이 더 이상 이 땅에 없어지리라는 것일까요? 그 뜻을 확정하기는 어렵지만, 아마 그런 의미는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이 시간이 흘러서 이러한 모습으로 성취되기 때문이지요. 아주 이른 시기부터 바울은 이렇게 이야기해왔습니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6-28)
더 이상 가나안 사람이 다시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와 더불어 합하여 하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피부색도 다르고, 출신 성분도 다르고, 언어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고, 경제적인 지위나 사회적인 신분도 다릅니다. 그러나 더 이상 가나안 사람이 다시 있지 않습니다.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딸이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사람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가나안 사람이라고 불러 구분하는 것, 차별하는 것이 없어진 것이지요. 성령을 힘입어 그리스도와 합하여 그와 더불어 하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도 헬라인도, 종도 자유인도, 남자도 여자도 여전히 우리는 뜻하기만 한다면 서로에게 구분지어진 이 이름들로 경계선을 지을 수 있겠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스가랴는 회복된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하나님께서 하늘의 비를 내리시고 생수를 부으실 것을 봅니다. 우리는 그 환상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었음을 초대교회의 증언을 통해 듣게 되지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성전이 되시고, 또 생수의 근원이 되셔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런 까닭에 더 이상 이스라엘도, 가나안도 없이, 유대인도 헬라인도 없이, 남자도 여자도 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 교회 공동체, 주님의 몸된 공동체는 기쁨의 공동체입니다. 생명의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의 돌보심을 힘입어 내리는 이른비와 늦은비를 따라서 삶의 터전을 기경하고, 씨를 뿌리고, 거두어 기쁨을 주님과 함께 나누는 그런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이 공동체는 열린 공동체이지요. 예루살렘 바깥에 있는 땅의 족속들, 과거에 대적하고 갈등하며, 때로 핍박하고 억압했던 애굽을 향해 열린 공동체입니다. 열려있을 뿐 아니라 그들을 부르고 초청합니다. 이제 우리 사이를 가로막던 담을 허물어 더 이상 나와 너가 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라고 부르며 환대합니다. 스가랴가 보았던 그 환상은 그리스도를 통해,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하지 않았던 교회를 통해 성취되었던 것이지요.
교회는 예언의 사람들입니다. 환상의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예언과 환상을 의지해 소망의 부름을 받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예언과 환상이 우리를 통해, 우리에게서 성취되기 위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기다립니다. 주어진 예언은 기다립니다. 무엇을, 누구를 기다립니까? 우리, 예언의 사람들, 환상의 사람들을 기다리는 것이지요. 우리를 통해서, 우리에게서 성취될 것을 기다립니다.
그렇기에 예언은 다시금 우리를 부릅니다. 그림처럼 예언자의 눈에 비친 환상은 마치 거울처럼 우리의 모습을 투영합니다. 우리의 변화를 기다리면서, 우리의 회개를 기다리면서 말이지요. 우리가 스스로 세운 담벼락을 허물고, 다른 이들을 차별하고 구분짓는 시선들을 낮추고, 내 자리를 확장하려는 욕망을 버리고 자리 잃은 이웃들에게 곁을 내어주는 온유를 기다립니다. 예언자들은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전권, 주권을 선포합니다. 구원의 가능성이 사람에게는 털끝마저도 없다는 듯이 사람에게는 어떤 기대도 갖지 않으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예언자들도 늘 회개를 요청합니다. 돌아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라고 요청합니다. 스가랴가 보는 환상은 분명 하나님의 주권으로 이루어집니다. 거기에 우리가 어떤 손을 얹을 수 있는 것처럼, 스가랴는 그런 기대를 갖지 않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환상은 우리를 부릅니다. 하나님의 편에서 그 환상의 성취에 동참하라고. 바울이 갈라디아의 교회를 향하여, 고린도의 교회를 향하여, 또 로마의 교회를 향하여 이방인을 차별하지 말고, 종들을 구별하지 말고, 여성을 배제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하나됨에 참여하라고 이야기한 것처럼 말이지요.
우리는 그 환상의 성취 속에서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와 더불어 초막절의 즐거움과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고 있습니까? 우리가 더 많이 사랑한다면, 우리가 점차 차별을 지워나간다면, 담을 낮추고 환대하며, 우리가 환대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사람들까지도, 그들에게 씌운 ‘가나안 사람들’이라는 우리의 굴레를 지워가며 환대한다면 우리는, 우리 교회는 그런 예언의 사람들, 환상의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초막절의 기쁨, 그 생수의 풍성함을 주님과 더불어 함께 누리며 말이지요.
교우 여러분, 주님께서 우리에게 남기신 서로 사랑하라, 이 한 가지의 말씀을 우리가 새기고 순종하며, 우리의 담장을 낮추고 환대할 수 없는 이들도 환대하며 예언의 사람들이 되어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하여 참된 기쁨과 생명의 풍성함 누리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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