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설교 251003 금 [로마서 12: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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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가 452
찬송가 452
기도
기도
주님, 오늘도 새벽을 깨워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주님, 우리를 돌보아 주시옵소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주님의 사랑으로 우리를 채우시고, 다른 것을 의지하지 않게 하옵소서. 주님이 오늘 우리의 힘과 능력이 되시며, 찬양과 기쁨이 되옵소서. 그 믿음을 기도합니다. 주로 말미암아 오늘 우리의 삶이 넉넉해지고, 우리의 영혼이 풍성하게 되는 은혜를 주옵소서.
주님, 오늘 우리 나라는 개천절로 이 하루를 기념합니다. 이 땅에 세워진 옛 뿌리, 아주 오래된 기억을 되새기며 나라와 공동체의 정체성을 온 나라가 상기합니다. 주님, 그와 같이 우리도, 그리스도인들도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기억하는 하루가 되게 하옵소서. 그리스도께서 바꾸어놓으신 우리의 처지와 형편을,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의와 해방을,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빛과 소금이란 부르심을 기억하는 하루가 되게 하옵소서. 수많은 생각과 뜻과 욕망이 우리의 삶과 행동의 방향을 저울질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그 부르심이 오늘 우리의 푯대가 되게 하옵소서.
기나긴 연휴를 시작하며 발걸음을 옮기는 이들을 축복하여 주옵소서. 그 걸음을 지켜주시고, 안전케하여 주시기를 기도드립니다. 멀리 떨어진 이들을 방문하는 걸음이나, 쉼과 새로운 도전을 위하여 여행하는 걸음이나, 또 일상의 자리를 계속해서 지켜나가는 이들이나 매한가지로 주님의 은혜와 긍휼을 베풀어 주셔서, 주님께서 함께하시는 날로 인하여 부족함 없이 풍성한 삶이 되게 하옵소서.
주님, 그 가운데 홀로 있는 이들을 위로하여 주시옵소서. 몸이 불편하거나 연약하여서, 혹은 사랑하는 이들이 너무 멀리 있어서 가까이 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주님께서 친구가 되어주옵소서. 홀로된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우리에게는 주님의 마음을 나누어 주셔서, 우리의 손과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넉넉함도 더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기도하는 자들마다 주님의 위로가 되고, 주님의 풍성함이 되게 하옵소서.
이제 주님의 말씀을 경청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들어야 할 것을 듣게 하시고, 세우고 결단해야 할 것을 주님께 겸손히 올려드리는 믿음되게 하옵소서. 감사드리며 우리의 풍성함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말씀 로마서 12:15-21
말씀 로마서 12:15-21
설교
설교
오늘도 함께 예배하며 주님의 말씀을 나누는 모든 분들께 선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로마서를 계속해서 읽어오면서 저는 줄곧 로마서를 편지로서, 그리고 바울과 로마 교우의 맥락에서 읽어야 한다고 강조드렸습니다. 구체적으로 두 가지, 이 책을 읽으면서 주의해야 할 태도로 제안드리는 것으로 하나는 본문을 조각조각내어 읽기보다는 앞의 이야기에서 이어지것으로 읽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바울이 쓴 내용을 바탕으로 로마 교우들의 형편을 상상하면서 읽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한계는 있지요. 우리가 상상력을 발휘한다 한들 실제 바울과 로마 교우들의 상황에 미처 이르지는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전문 연구자가 아닌 이상 한계는 더욱 뚜렷할 것입니다. 사실 전문 연구자들도 어떤 지점에서는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아서 논쟁하는 경우도 흔합니다. 성경의 이야기 속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하는 것은 어쩌면 대답될 수 없는 질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시도는 필요합니다. 어제 말씀드렸듯, 이런 물음, 우리의 시도가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에 귀를 기울이는 ‘경청’의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성경에서 끄집어내고자 하는 우리의 선입견, 성경보다 앞선 우리의 의도를 극복하면서 말이지요.
분명히 본문만으로는 충분히 로마 교우들의 형편을 상상하기가 어렵습니다. 어제 본문 14절에서부터 오늘 21절까지의 내용을 살펴보면 이런 생각을 하게 되지요. 과연 로마 교우들은 박해를 받고 있는가? 특히 이 두 구절을 보면 로마 교우들이 ‘박해’받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바울은 14절과 19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하지요. ‘박해하는 자들을 축복하라’ ‘원수를 친히 갚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라’. 이런 말은 ‘내가 박해받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할 만한 권면입니다. 물론 그 박해의 내용이 어떤 것인지, 누구에게서 받는 것인지는 다 드러나지 않지만, 바울의 말을 곱씹어보면 로마 교우들은 자신들이 ‘박해받고 있다’고 생각할 만한 형편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로마의 교우들에게 전하는 이 편지에는 전혀 다른 상황도 엿보입니다. 로마 교인들이 ‘박해받는 자’가 아니라 ‘박해하는 자’로 비추어지는 본문들이 있지요. 특히 우리는 앞서 로마 안에서 일어난 역사적인 사건들로 인해 로마 교회가 ‘이방인 중심’이 되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이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유대계 교우들과 갈등을 겪었고, 교회 안에서, 그리고 사회적으로도 소수가자 된 유대계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배제하고 내쫓으려는 듯한 뉘앙스를 읽을 수 있었지요. 이런 상황은 조금 다른 문제로 14장에서도 드러납니다. 앞당겨서 조금 살펴보면 14장에서 바울은 로마 교우들을 ‘믿음이 강한 사람’이라 부릅니다. 아마도 이것은 초기 교회에서 흔히 이슈가 되었던 ‘음식 문제’와 관련한 것 같습니다.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평생 하나님께 거룩한 신앙으로 지켜왔던 정결규례 때문에 발생하는 갈등과 논쟁이 있는 것이지요. 이런 관계를 미루어 보면 ‘강한 사람’으로 불리우는 로마 교회의 다수자들, 주류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받고 있다’는 상황은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뒤이어지는 13장을 고려해보면 어쩜 로마 교우들은 박해를 받으면서, 동시에 박해하는 형편에 있을 수도 있지요. 예를 들면, 우리가 그런 경험들이 있지 않습니까? 엄격한 가부장제도 안에서 할머니는 할아버지에게 때로 박해받는 처지에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며느리에게는 또한 박해하는 처지에 있기도 하지요. 박해를 하면서 박해받는 형편은 의외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로마 교우들 역시 ‘박해받고 있다’는 이 경험은 더 큰 권력을 가진 기관, 그러니까 13장에 등장하는 ‘로마 제국’과 관련한 것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로마 교우들이 한 쪽에서는 약한 이들, 사회적으로는 소수자이면서 믿음에 있어서는 초보인 이들과의 관계에서는 힘을 휘두르는 자들로, 또 제국의 통치 권력과의 관계에서는 스스로 박해받는 자들이라 생각할 수 있겠지요. 바울은 그런 모순된 처지에 놓인 로마 교우들을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오늘의 권면은 아주 적절합니다. 바울의 편지가 로마 교우들에게 딱 알맞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지요. 다른 사람들과 갈등관계 중에 있는 로마 교우들, 때로는 강한 자가 되고, 때로는 약한 자가 되는 그리스도인들, 그들에게 바울은 권면합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있는 체 하지 말라.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롬 12:15-18)
어떤 때는 억울합니다. 나 자신만 피해를 입고 상처를 받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잘못한 것이 없는데 사람들이, 세상이, 교회가 잘못되어서 소외되고 고립당했다고 느끼고 하지요. 그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저 사람은 당해도 싸. 평소에 행실이 잘못되었으니 벌 받을 만하지. 교회 다닌다고 하면서도 믿음 없이 방탕하게 생활하더니, 무례하고 다른 이들에게 아무렇지 않게 상처주더니 제 값 자기가 치룬 것이지 누굴 탓하겠어. 이런 모순된 처지를 우리가 다 한번쯤 겪지 않습니까?
‘여자의 마음은 갈대다’라는 옛 카피라이트가 있었던 것 같은데, 글쎄요, 저는 그보다는 오히려 사람은 바다 위 유리하는 부표와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모든 사람에게 한결같은 사람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다른이들에게 일관되게 무례하거나 불친절한 사람은 종종 만나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어떤 힘이든, 그 힘의 관계에 따라 다른 모습을 띄는 듯 합니다. 사람들은 정도는 다르지만 어느정도 이중적인 면모들이 있지요. 사람은 나는 순수하고 순전한, 아주 흠없는 순결한 희생양이라는 생각과,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이들에게 잣대를 들이밀어 재단하고 재판할 수 있다는 생각을 동시에 가질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생각을 드러내놓고 하는 사람은 드물지요. 오히려 이런 형편은 성경이 이야기하는 인간의 ‘죄성’에 가깝습니다. 바울이 고백하듯 ‘내가 원하지 않지만 처하게 되는’ 형편이지요. 창세기에서부터 끊임없이 지적하듯 자기가 중심된 사람의 형편입니다.
로마 교우들도 사정이 그리 다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종종 그 모순된 처지를 겪는 것처럼, 그들 역시 지금 그 형편에 처한 것이지요. 바울의 권면은 바로 그 때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삶의 모습입니다. 다시 한번 바울의 말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는 이 권면을 마무리하는 21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새한글 성경은 이렇게 번역해둡니다. ‘악에게 정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정복하십시오.’(롬 12:31) 그리스어 원문을 보니, 새한글성경이 보다 그 뉘앙스를 잘 담아낸 것 같습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라는 표현과 선으로 악을 ‘이기라’하는 표현에 그리스어 성경은 똑같은 단어를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지지 말라’는 표현은 수동태로, ‘이기라’는 표현은 능동태로 쓰는 차이가 있을 뿐이지요. 저는 조금 달리 번역하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굴복당하지 마십시오, 악에게. 오히려 굴복시키십시오, 선한 것으로, 악을.’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얻어서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게 되어, 성령과 더불어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가 교회가 되었다는 것은 특권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특권’만은 아닙니다. 우리가 종이었다가 자유인이 되었다, 우리가 외인이었다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우리에게 일어난 근원적인 변화, 이 신분과 정체성의 변화는 그저 ‘특권’만을 가져오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와, 하나님과 새로운 들어간 언약은 우리에게 특권과 동시에 책임을 가져다줍니다. 특권엔 의무가 따라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니, 죄에서 자유자가 되었으니, 그 다음엔 무엇입니까?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겠다, 의의 종으로서 살겠다, 하나님의 종으로 살겠다, 내가 바로 그렇게 살겠다’는 의지의 표명, 결단이 따라오는 것이지요.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삶의 모습, 하나님께서 ‘그가 바로 나의 아들이다’라고 말씀하셨던 그 참 사람의 모습을 앞에 두고 쫓아가는 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를 ‘믿음의 경주’라고 부릅니다. ‘나는 굴복하지 않겠습니다, 악에게. 나는 선을 쫓아 굴복시키겠습니다. 악을.’ 이렇게 선포하며, 날마다 그 의지를 다지며, 자신을 쳐 주님의 뜻에 복종시키는 삶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오늘 주님의 말씀을 인용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19-20절입니다.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내게 상처를 준 사람을 향해 적개심이 고개를 듭니다. 미움과 증오가 영혼의 색을 물들여 갑니다. 자기 연민이 안개처럼 마음의 방을 가득 채웁니다. 내 손으로 원수를 갚을 방법이 없을까 궁리합니다. 내게 상처를 준 이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도록 저주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합니다. 인지상정이지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그렇겠지만,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성령과 더불어 공동체를 이루어 간다는 것은, 그것이 ‘사람’이지만 우리는 주의 말씀따라 살겠다, 나는 악에게 굴복당하지 않고 주의 말씀으로 악을 굴복시키겠다, 다짐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기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지요.
교우 여러분,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한계 속에 놓여있습니다. 하나님이 근원적으로 우리의 위치를 바꾸어 놓으셨지만, 바울이 7장에서 이야기하듯 ‘내가 원하지 않는 바 죄가 발견되는’ 모순된 처지가 바로 우리의 형편입니다. 이것을 인정하며 동시에 우리가 이 부르심을 그저 낭만적으로만 생각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저 주님의 사랑에 감동하고, 찬양하며 눈물을 흘리고, 그것만이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닙니다. 다시 바울의 말 12장 2절을 읽어드리겠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그 뜻을 알고, 그 뜻을 다짐하며, 그 뜻을 향하여 달려가는 인생, 그 때 성령께서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힘 주시는 인생, 그리하여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향하여 진력하는 인생’(딤후 4:7)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임을 기억하시길 권면드립니다. 그 믿음을 올려 드리십시오. 그 결단을 고백하십시오. 그리하여 우리의 삶이 바로 그 삶이 되어 늘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