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설교 251204 목 [여호수아 13: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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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설교 251204 목 [여호수아 13:1-14]

찬송가 484

기도

주님, 오늘도 우리에게 새로운 한 날을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이 날에 주님을 찾는 마음을 더하여 주셔서, 말씀을 경청하고 기도로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게 하시니 또한 감사드립니다. 이 시간 우리와 함께하셔서 주님으로 우리의 영혼이 충만해지는 은혜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이 날도 주님께서 주신 새로운 한 날이지만, 어느덧 한 해의 마지막 달의 문턱에 들어서니 시간의 무상함을 느낍니다. 주님께서 모든 날들을 은혜로 베푸시고, 자고 깰 때마다 우리에게 새 숨을 불어넣으신 날들이었으나, 우리가 받은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살았는지 돌아보면 부끄럽기만 함을 고백합니다. 우리는 타자를 사랑하기보다 자기를 사랑하는데 급하였고, 자기를 사랑하는 까닭에 주님의 용서와 자비에서 멀리 있었습니다. 날마다 주님의 기도를 되뇌이지만 우리의 정욕이 더 가까웠고, 때로는 용기가 없어 주님의 부르심에 게을렀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우리의 부끄러움을 아는 지혜를 허락하여 주시고, 주님께 용서를 구하는 용기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우리가 머문 자리를 떠나 한 걸음 더 주님의 뜻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회개하는 은혜를 더하여 주옵소서. 한 해의 끝이 가까이 올 수록 그리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주시는 새 날들을 새 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저희를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오늘 교회에서 치르는 장례의 과정을 주관하여 주시고, 모든 과정이 주님께 영광이 되게 하옵소서. 남은 이들에게 위로와 소망을 허락하여 주시고, 남은 이들의 곁을 위로하는 이들에게도 주님의 마음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주님, 이제 주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우리에게 경청하는 마음을 허락하여 주시고, 어려운 말씀 중에도 주님의 뜻과 마음에 주목하게 하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말씀 여호수아 13:1-14

설교

오늘 새벽에도 선하신 우리 주님께서 합당한 은혜 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종종 성경을 읽다 시험드는 일이 생기지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메시지 보다는 본문 자체에서 시험들 때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장이나 역대기 1-9장에서 보게되는 ‘낯선 이름들의 긴 목록’, 그러니까 족보를 읽다 보면 정신이 혼미해지고, 마음이 심란해지곤 합니다. 여기에 도대체 무슨 하나님의 말씀이 있나,하는 생각이 들곤 하지요.
비슷하게 ‘낯선 지명들의 긴 목록’도 우리를 힘들게 만듭니다. 그리고 하필이면 오늘 우리는 그 긴 목록의 초입에 들어서게 되지요. 여호수아서 13장부터 21장까지, 한동안 우리는 ‘낯선 지명들의 긴 목록’을 읽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큐티하는 분들도, 설교하는 이들도 험난한 경주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 들지요.
이런 본문을 만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요? 본문을 집중있게, 몰입하여 읽는 일이 어렵고, 의미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으니 얼른 읽고 넘겨버릴까요? 아니면 두꺼운 주석을 몇권 펼쳐놓고 하나하나 의미를 파악해 그 뜻을 조합해낼 수 있을까요? 이런 본문을 만날때면 자료도 부족하고, 시간도 부족하다 보니 사실 할 수 있는 일이 그리 많지 않은 것처럼 느껴져서 ‘일단 일독을 하자’는 생각으로 얼른 읽고 지나가기를 선택할 때가 많은 듯 합니다.
그러나 본문들이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지만, 이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가능한 본문에 주목하고 경청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듣는 마음, 또 읽고 쓸 수 있는 지혜를 다하여 하나님의 뜻과 생각을 기록된 성경에서 담아내는 일입니다. 그것이 겸손함 아닐까요? 겸손은 낮은 마음으로 귀 기울이는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다하여 주님의 뜻을 찾고 구하는 것이지요. 한편으로 겸손은 노력하는 것이고, 가진 것으로 애쓰는 일입니다.
우리는 신학자들처럼 훈련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성경의 ‘맥락’속에서 본문을 읽는 것이지요. 여호수아서는 여호수아서 홀로 있지 않습니다. 이 책은 신명기에서 이어졌고, 사사기로 이어갑니다. 조금 더 멀리 뻗어보면 민수기, 레위기를 지나 출애굽기에서 이어져왔지요. 이제 긴 땅의 목록을 만나게 되었지만, 본문 역시 ‘땅의 목록’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과 성취의 맥락 속에서 이어집니다.
잠깐 출애굽기에서 시작된 이야기로 눈을 돌려보면 하나님은 애굽의 종들을 해방시키셨습니다. 그들을 이끌어 광야를 지나가는 동안엔 하나님께서 ‘어떤 공동체를 꿈꾸시는지, 어떤 공동체를 만들고자 뜻을 품으시는지’ 가르쳐주시지요. 이제 리더십이 여호수아에게 넘어간 시점에 하나님은 공동체를 터잡게 하십니다. 여호수아서는 그렇게 주어진 가르침을 바탕으로 살아갈 준비를 하는 단락인 것이지요. 이것이 여호수아서의 맥락, 달리 말해 여호수아서의 배경이 됩니다. 특히 신명기의 가르침들이 여호수아서의 배경이자 목적이기도 하지요.
때문에 여호수아서의 이야기에서, 특히 땅의 이야기에서 ‘승리하고 땅을 차지했다’는 주제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땅의 쓰임새’입니다. ‘율법을 등에 입은 여호수아서가 말하는 땅의 쓰임새’이지요. 사실 이것이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을 수는 있습니다. 우리 신앙의 역사에서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는 말씀에 따라서 ‘찾고 구하고 두드리는’ 것을 강조해왔지요. 그러다보니 ‘찾고 구하고 두드리는 일’에는 익숙합니다. 그러나 ‘무엇을 위해서’라는 질문은 쉽게 지나치곤 하지요. 더욱이 땅을 소유와 복락, 자산과 풍요의 상징으로 여겨왔던 우리 신앙의 역사에서 여호수아서의 땅 이야기는 더욱 그렇습니다.
이 책에서 이야기되는 전쟁 이야기를 정복으로, 땅 이야기를 소유와 하나님의 축복으로 보려고 할 때면 우리가 떠올려보아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사고 야고보가 전하는 ‘경계’이지요.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약 4:3-4) 이 이야기들을 정복과 소유, 믿는 자들에게 주어진 축복의 관점으로만 본다면 어쩜 우리는 자신의 정욕을 정당화하려고 본문을 뒤적거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때문에 우리는 여기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 땅을 얻게되고 분배하는 이야기를 쌓고 소유하고 확장하려고 하는 우리의 근원적인 욕망의 눈빛이 아니라, 더 넓게 펼쳐진 성경의 관점에서 볼 때 말이지요. 그 때 우리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기업’이라는 단어입니다. 여호수아서 13-23장 사이에서 총 46번이나 반복해서 등장하게 될 이 ‘기업’이라는 단어는 6절에서 이렇게 등장합니다. ‘내가 그들을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리니 너는 내가 명령한대로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분배하여 기업이 되게 하되’(수 13:6)
성경의 넓은 관점에서 본문에 등장하는 ‘기업’은 크게 세 가지 의미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번째로 민수기 26:53는 이렇게 씁니다. ‘이 명수대로 땅을 나눠주어 기업을 삼게하라. 수가 많은 자에게는 기업을 많이 줄 것이요, 수가 적은 자에게는 기업을 적게 줄 것이니.’ 하나님은 애굽의 종 된 이들을 이끌어 터잡게 하십니다. 그들은 그 터 위에서 하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삶을 살게 될것입니다.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은 사람들의 수만큼 땅을 주십니다. 8-14절에 등장하는 땅의 경계를 읽고 우리가 정확한 지도는 그리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민수기 26:35를 떠올린다면 이것은 이야기할 수 있지요. 요단 동쪽 지파들은 ‘그 백성의 숫자만큼, 그들의 필요에 알맞게 기업을 분배받았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원칙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주시는 ‘기업’의 원칙입니다. 달리 말해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 백성은 세상과 다른 질서를 따라간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누가 땅을 차지합니까? 나라를 새로이 세울 때 공을 세운 사람들, 개국공신들을 일렬로 줄을 세워서 전쟁에서 적군을 사로잡은 만큼, 승리에 기여한 대로 분배하지요. 세상에서는 누가 땅을 더 많이 차지합니까? 힘 있는 사람들입니다. 계급이 높은 사람입니다. 남에게 빚을 지울 수 있는 사람, 창고가 큰 사람, 그것이 자신의 능력이고 권리라고 주장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서의 ‘땅’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기업’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여호수아서의 이야기는 전쟁이 아니고, 소유가 아닙니다. 이들에게 주어진 ‘기업’은 하나님이 ‘수여’해주시는 것, 쉽게 말해 ‘선물’해주시는 것입니다. 과거에 종이 되어 자기 것 하나없이, 목숨마저 저당잡혀 살아가던 이들이 터 잡고 스스로의 손으로 땅 일구어, 저마다 자기 포도나무 아래에서 즐거워하며 때로 환난당한 가난한 이들을 충분히 도울 수 있도록 주시는 하나님의 넉넉함입니다. 그래서 ‘기업’은 하나님의 ‘눈에 보이는 은혜’입니다. 이스라엘의 강함이나, 능력이나, 그들 자신의 성취로 주어진 것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졌습니다. 광야를 지나가며 앞에서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서, 요단강을 마른 땅 위로 걷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서, 여리고와 아이성의 두터운 성벽을 상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넘어뜨리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서 주신 선물입니다.
기업이 눈에 보이는 은혜, 은혜의 선물이라는 사실은 두 번째 의미를 끌고 나옵니다. 우리가 기업을 은혜로 받았기 때문에, 우리도 은혜를 따라 서로, 형제와 자매를 은혜로 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명기가 유난히 강조하는 것이 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거기 사는 사람들처럼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생각해보면 그것은 내가 전쟁에 더 보탬이 되었으니 더 받을 만하다, 내가 더 능력이 있고 당신은 약하니 내가 더 가질 자격있다는 듯 형제와 자매를 대하는 것을 뜻합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그렇게 살았습니다. 사람이 사람 위에 올라서 사람이 사람을 다스릴 수 있다는 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스라엘보다 먼저 왕을 세우고, 사람을 사고 팔아 종으로 부렸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 하나님께 은혜의 선물로 살 땅을 얻은 사람들, 그 위에서 형제와 접한 땅을 경계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내가 은혜의 선물로 기업을 받았으니, 형제와 자매가 받은 은혜의 선물을 인정해야합니다. 그 위에서 형제와 자매 사이에 이루어질 것은 은혜의 질서이지요.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요단 동편에 정착하게 되는 8절 이하의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는 한 차례 아픔을 겪은 적이 있습니다. 형제들로부터 의심과 멸시를 받았던 것이지요. 그러나 동시에 요단 동편의 지파들 역시 은혜로 형제들을 대하지 않았습니다. 동편의 땅을 먼저 점령한 그들은 그대로 눌러앉아 형제들이 요단강을 건널 때 ‘저쪽 땅에서 싸우는 것은 당신들 몫이야’하고 방관하려했습니다. 이는 은혜의 질서가 아닙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이야기하듯 죄가 없으신 분이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실 수 있지요.(히 4:15) 우리는 그 은혜를 받았습니다. 죄 없으신 분이 우리의 고통 속으로 뛰어든 것이 우리가 받은 은혜라면, 이 은혜는 우리의 형제 자매들과 함께 멍에 질 것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입니다. 오늘 본문은 레위 지파의 이야기로 끝이 납니다. 다른 지파와 달리 이들은 ‘땅을 기업으로 얻지 못했다’는 말씀으로 말이지요. 그러나 여호수아서는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의 가르침을 떠올리며 이렇게 씁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드리는 화제물이 그들의 기업이 되었음이더라.’(수 13:14)
다시금 강조하지만 이스라엘의 기업은 개인의 자산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눈에 보이는 은혜이지요. 거기에 책임이 따라옵니다. 신명기는 그 책임을 이렇게 전합니다. ‘너는 마땅히 매 년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 네 성읍에 거주하는 레위인은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자이니 또한 저버리지 말지니라 매 삼 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의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신 14:22, 27-29)
그러므로 기업은 무슨 의미일까요? 언약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업을 주셨으니, 언약 안에서 백성들은 돌려드릴 책임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기업받은 자의 책임이 말이지요.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들’의 기업이 되어주는 일, 하나님이 맡기신 이들을 향하여 응답하는 일입니다.
이제 우리가 읽게 될 이 긴 땅 분배의 본문은 하나님이 얼마나 신실하게 약속을 지키셨는지 우리 눈에 보여줄 것입니다. 하나님이 젖과 꿀이 흐르는 풍성하고 복된 땅을 주셨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겠지요. 그 영광에 우리는 감탄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땅이 그저 소유가 아닌 기업으로 주어졌다는 것, 은혜와 책임으로 주어졌다는 것을 우리가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삶도, 우리의 구원도, 우리의 믿음도, 우리의 성도됨도,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과 함께 주어진 그 영광의 기업, 부르심의 소망, 베푸신 능력도 마찬가지이겠지요. 교우 여러분, 은혜를 받으셨습니까? 그 은혜 위에서 오늘 하루도 살아가십니까? 그렇다면 그 은혜의 기업을 기억하시며 주님의 복된 부르심 속에서 살아가실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책임을 우리가 기억하며 오늘 하루 주님의 거룩한 백성, 성도로 살아가는 삶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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