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설교 251002 목 [로마서 12: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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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설교 251002 목 [로마서 12:9-14]
새벽설교 251002 목 [로마서 12:9-14]
찬송가 218
찬송가 218
기도
기도
하나님, 이 새벽에 우리를 부르시고, 그 부름에 응답할 수 있는 믿음의 결단과 육신의 건강을 허락해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이 시간 주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기를 원하오니,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성령께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사흘의 부흥회를 잘 마치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부흥회를 통해서 저마다 주어진 정체성과 새로운 도전을 기억하며, 우리의 삶과 믿음으로 응답하는 믿음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가 그저 개개인으로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된 지체로 부름을 받은 까닭에, 주의 몸된 교회의 크나큰 숙제 앞에 주신 은혜로 넉넉히 이기며 나아갈 수 있는 우리의 믿음과 공동체가 되게 하옵소서.
오늘도 흩어져서 보내신 자리를 살아가는 모든 교우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임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여러가지 어려움과 쉽게 답을 내릴 수 없는 문제들 앞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됨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우리 자신의 부르심과 그 정체성을 기억함으로써, 또 우리 안에 주어진 그리스도의 충만하신 생명과 빛을 기억함으로써 어려움과 아픔과 문제을 넉넉히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얻게 하옵소서.
가을에 접어 들면서 여러가지 일로 분주한 우리의 형편을 주님께 고백합니다. 교회도 많은 행사와 일정으로, 교우들마다 여러 모임과 봉사와 기관의 사역들로, 또 우리 가정과 일터의 문제들로 바삐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우리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지혜를 더하여 주옵소서. 그저 분주하게 보내고, 많은 행사를 치룸으로써 얻어지는 성취감에 도취되지 않게 하시고, 우리가 몸된 교회로 부르심을 받아 하는 이 일들이 주의 뜻에 어떻게 봉사하는지 살피고 반성하는 지혜가 있게 하옵소서. 주님의 뜻과 그 나라가 하늘에서처럼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날마다 기도하는 것처럼, 우리의 분주함 중에서 바로 그 뜻과 나라를 구하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그러나 주님, 또한 우리의 섬김과 헌신이 무익한 것이 아니라 주께 유익한 것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여러 사람이 모여서 합심하여 일을 해 나갈 때, 우리에게 한 성령을 부어주셔서 한 마음과 한 뜻으로 행하게 하옵소서. 평화와 화해 가운데 이 일을 감당케 하시며, 이 일을 통하여 주 안에서 오히려 연합하는 은혜를 더하여 주옵소서. 많은 것을 뿌려도 적은 것이 거두어지는 형편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지치지 않고 참된 씨앗을 뿌리는 교회되게 하시며, 서로 그 마음이 지치고 낙심될 때 위로하며 주의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격려하는 공동체 되게 하옵소서.
주님, 이 가을의 시기에 그렇게 주님의 몸됨을 배워나가는 교회되기를 기도합니다. 주의 뜻과 내 곁에 있는 형제와 자매보다 우리가 하는 일, 혹은 우리 자신의 열심이나 일의 성취가 먼저되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에게 늘 지혜를 가르치셔서 조금 더디더라도 분명히 가야할 길을 가게 하옵소서.
오늘도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다. 로마로 보낸 이 편지를 통해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셔서 주의 뜻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말씀 로마서 12:9-14
말씀 로마서 12:9-14
설교
설교
주님의 은혜가 오늘 새벽에 함께 말씀을 나누는 모든 분들께 충만하시길 축원합니다.
교우 여러분, ‘목사’에게 가장 필요한 자질이 무엇일까요? 아마도 ‘목사’란 어떤 사람이다,하는 것에 따라 대답도 달라질 것 같습니다. ‘목양’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교우들의 형편에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나, 사회성이 중요하다 하겠지요. 혹은 ‘리더’라고 여긴다면 카리스마와 지도력을 높이 사겠습니다. 또 교회를 조직하고 운영하는 책임자라 여긴다면 행정력이나 사람들을 모으고 끄는 능력, 경영능력을 중요하게 따질겁니다.
흔히 교회에서 ‘교육전도사’라고 불리는 분들을 공식적으론 ‘목회자 후보생’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전도사님들께서 수학중인 신학대학원 과정을 목회자 양성 과정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신학대학원에서 학교가 무엇을 가르치는지, 교 육전도사님들은 무엇을 배우는지 살펴보면 신학교와 나아가 교단이 ‘목사’를 어떤 사람으로 정의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겁니다.
신학교에서 목회자 후보생들이 배우는 것은 앞서 나열한 능력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제 경험을 비추어보면 학교는 후보생들이 교회의 기본적인 역할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필요한 다양한 능력을 깊지는 않지만 폭 넓게 공부하도록 가르칩니다. 설교를 하는데 필요한 성서를 읽고 해석하는 능력, 그리고 시대를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는 역사적인 안목, 예배를 집례하고 그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 지식, 그리고 교회의 선교적인 성격과 운동을 수행할 수 있는 동력과 같은 것입니다. 생각보다 아주 기본적이고 기초적인 것이지요?
그 중에서 ‘성서’를 다룰 때 주로 ‘주석’하는 방법을 배웁니다. ‘주석’은 달리 말해 ‘성서가 말하고 있는 바를 읽는 눈’이라고 해야할까요? 성서학에서는 이 편이 조금 더 이해하기 쉬운 까닭에 독일어를 빌려서 ‘엑세게시스’라고 부릅니다. ‘안에 있는 것을 밖으로 끄집어 낸다’는 의미에서 ‘밖으로’를 뜻하는 ‘엑스’라는 말이 앞에 붙지요.
그런데 주석 시간 가장 처음에 가르치는 것이, 주석을 하며 결코 해서는 안되는 일입니다. 무엇일까요? ‘밖으로’의 반대, 성서 안으로 내 생각, 내 뜻, 내 의지를 집어 넣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밖으로’를 뜻하는 ‘엑스’의 반대말로 ‘아인’을 붙여 ‘아인게시스’라고 부릅니다.
문제는 ‘아인게시스’가 말처럼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 누구도 ‘내 생각, 내 뜻, 내 의지’를 성서에 집어넣겠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읽지 않지요. 이 일은 보다 교묘하게 일어납니다. 예를들면 본문이 실제로 말하는 바를 엄밀하게 따져보려고 하지 않고, 성급하게 내가 들어오고, 알아왔던, 익숙한 방식으로 답을 내리는 경우라든지, 어떤 논쟁에서 내가 가진 입장을 변호하거나 주장하기 위해 본문들을 조각내고 수집하여 증거로 사용한다든지 하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혹은 한 그루 나무로 숲 전체를 정의하는 것처럼 소수의 단어나 구절들을 확대해석하는 경우, 말하자면 침소봉대하는 식으로 본문을 해석하거나, 지나치게 자신이 가진 편향된 관점에 의지해서 해석하는 경우가 ‘아이게시스’에 해당합니다.
‘아이게시스’를 피하고 본문이 말하는 바를 듣기 위한 ‘엑세게시스’, 그러니까 주석하는 훈련은 성서를 하나님 말씀으로 대하는 성도에게 필요한 훈련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쉽지가 않지요. 다만 목회자를 양성하는 과정에서 학교가 이 태도를 첫 시간에 강조하는 것은 최소한 목회자의 설교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성서로 대신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문을 최대한 ‘맥락’속에서 읽는 것은 ‘아이게시스’를 피할 수 있는 한 방법이 됩니다. 이를테면 로마서 12:9-14을 주변의 맥락, 로마서 전체의 맥락 속에서 읽는 것이지요.
바울이 8장까지 한 말을 간략하게 정리해보면 그는 로마에 편지를 쓰면서 그리스도인이 의롭게 되었다는 것, 도무지 어떻게 할 수 없는 죄인이 하나님께 의롭다고 여김을 받고 새로운 생명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것을 길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그리스도의 ‘은혜’ 덕분이라고 밝히지요. 나아가 바울은 은혜를 받은 자들은 은혜에 합당하게, 그리스도의 새로운 질서인 성령의 법을 따라서 살아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9장부터 논조가 조금 바뀝니다. 이것이 바울이 실제로 다루는 로마 교회의 구체적인 문제일 수 있지요. 바울은 그가 편지를 써보냈던 다른 교회와 달리 로마교회와 아무런 관계가 없었습니다. 로마에 직접 복음을 전하지도 않았고, 교회를 세우지도 않았고, 그 지도자들을 훈련시키지도 않았지요. 그래서 그는 에둘러 이야기합니다. 이스라엘의 운명에 관해서 말이지요.
9장부터 이어지는 말을 요약하면 유대인들이 당장은 그리스도를 거절하여 하나님께 내침을 당한것처럼 보이지만, 그들 역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백성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실패함이 없고, 유대인 역시 여전히 그 안에 있으며, 하나님은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바울이 왜 이토록 유대인 문제를 변호하듯이 쓰고 있는 것일까요? 로마 교인들을 ‘접붙임 받은 가지’이며, 유대인들이 ‘원래 나무의 가지’라고 하면서까지 말입니다. 아마도 이는 로마교회 내에 있었던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의 갈등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주후 54년에 로마시에 있는 유대인들을 다 추방하라는 명령이 떨어지자 유대계 그리스도인들로 세워진 로마 교회의 핵심 구성원들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로 바뀝니다. 추방령이 해제되어 쫓겨난 유대인들이 다시 돌아오자 교회 안에 갈등이 발생하게 되지요. 그러나 이미 이방인들은 ‘주류’가 되었지요. 이들은 로마 사회에서도, 교회에서도 권력을 지닌 주류입니다. 반대로 유대인들은 소수자이지요. 쫓겨났다가 돌아온 자들이고, 역사적으론 하나님의 언약을 받고도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스스로 구원 경영에서 떨어져 나간 이들로 비추어집니다. 이들이 교회 핵심 구성원들과 갈등을 일으키니 도무지 ‘받아들이지 않을 만한’ 이유가 되었겠지요.
9-11장의 긴 논증은 아마도 이 문제 때문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우리는 12장이 그 맥락에서 이어지고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본문은 따로따로 읽어도 충분히 신앙의 교훈이 되는 지혜의 말들입니다. 말하자면 로마서의 맥락에서 탈락시켜 읽어도 무방하게 들릴 그리스도교적 지혜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저 보편적인 지혜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로마 교회를 생각하며 이 지혜를 씁니다. 그 맥락에서 다시 읽어보면, 그러니까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갈등을 겪는 로마의 교회, 나아가 소수자이자 사회적인 약자인 유대계 그리스도인 동료들에 대한 멸시와 갈등의 깊은 골을 방치하는 로마 교회의 배경에서 다시 읽어보면 그 권면은 시작인 9절부터 충격적입니다. 새한글성경은 이를 이렇게 번역합니다. ‘사랑은 겉 다르고 속 다르지 않아야 합니다. 악한 것을 혐오하고, 선한 것을 꽉 붙잡으십시오.’
최근에 SNS를 보다가 ‘오늘날 왜 청년들이 교회를 나오지 않는가’하는 물음으로 연예인 부부가 찍은 영상을 보았습니다. 이미 중년이 된 이 부부가 하는 이야기를 요약하면 ‘오늘날 청년들은 자신의 부모님이 교회와 생활에서의 모습이 다르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겉다르고 속다르다는 것이지요. 물론 저는 이 말씀을 확대해석해서 우리 스스로 비난하거나 죄책감을 갖도록 할 의도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들지요. 바울은 어쩌면 이어지는 이 말씀의 맥락에서 9절의 말씀을 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10절입니다. ‘형제 자매의 사랑으로 서로 아껴주고, 서로 존중하는 일에 앞장서십시오.’ 로마 교인들, 로마 교회의 다수가 되어 주류가 된 이방계 그리스도인들, 스스로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이라고 하지만, 입으로 형제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실상은 갈등의 역사를 극복하려고 하지 않고, 잘못을 용서하려고 하지 않고, 미움을 지우려고도 하지 않고, 기댈 곳 없이 되어버린 사회적 약자가 된 형제와 자매들을 ‘미움받아도 마땅하다’고 여기며 돌 던지는데 동참하는 로마 교인들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요?
이런 맥락을 염두에 둔다면 로마서의 아주 유명한 이 말씀, 12장 1절도 다시 읽을 수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영적’이라고 하니 흔히 신령한 것, 땅의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신비한 것, 이런 것들이라고 해석하곤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곧 이어 ‘영적 예배’라는 말을 자신이 어떤 의미로 사용하는지 이렇게 덧붙이지요. 새한글성경으로 2절입니다. ‘이 세대의 흐름에 자신을 맞추지 말고, 생각을 확 새롭게 해서 달라지십시오. 그리하여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곧 무엇이 선하고 하나님 마음에 들고 완전한 것인지를 검증하여 밝혀내십시오.’(롬 12:2, 새한글) 이 세대의 흐름에 자신을 맞추지 말고,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맞추라, 이것이 영적 예배라. 그렇기 때문에 바울이 오늘 이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것 아닐까요? ‘사랑은 겉 다르고 속 다르지 않아야 합니다. 악한 것을 혐오하고, 선한 것을 꽉 붙잡으십시오. 형제자매의 사랑으로 서로 아껴주고, 서로 존중하는 일에 앞장서십시오.’(롬 12:9-10, 새한글) 이 땅에서 하늘의 사람으로 살아가라, 하늘에 속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가라, 애굽을 떠나 나온 광야에서 주님께서 주신 삶의 율법이 가르친 것처럼, 이 땅에서 하나님의 질서를 따라 살아가라, 이것이 영적 예배라.
바울이 바라보는 로마 교회의 형편에서, 그들에게 보낸 이 편지의 맥락에서 오늘 본문 9-14절은 특히 다른 사람들, 나와는 성격이나 성질이 다른 집단들, 그들과 갈등을 겪고 있는 신앙인, 교우들에게 전하는 권면, 혹은 가르침으로 읽을 수 있겠지요. 오늘날 우리가 많이 사용하는 표현을 떠올려보면 갈등의 대상을 혐오하고 있는 교인들이라고 할 수 있을겁니다. 그러니 9절의 새로운 번역을 우리가 깊이 새길 필요가 있겠습니다. ‘사랑은 겉 다르고 속 다르지 않아야 합니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다’는 말을 달리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겠지요. 입으로는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에 달리셨다고 하지만, 바울이 8장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교회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당신의 사랑을 확증하신 하나님의 그 사랑에 기대어 살아가는 존재들이라고 이야기하지만, 11장에서 바울이 로마 교우들의 형편을 지적하듯 접붙임 받은 가지가 처음의 가지들을 멸시하는 이 교회가 말하는 사랑은 겉 다르고 속 다른 형편이라는 것, 그것은 영적 예배도,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선물을 합당하게 사용하는 일도 아니라는 것이지요. 오히려 그런 교회는 야고보가 지적하는 것처럼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를 내뱉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교우 여러분,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 나를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 주님을 더욱 배워가시길 축복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더욱 배워가시길 권면드립니다. 타인을 미워하고 멸시하고 혐오하는 곳에 우리 영혼의 쉼은 없습니다. 겉 다르고 속 다르지 않은 사랑,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하는,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그 사랑 안에 영혼의 쉼이 있습니다. 그 사랑의 삶을 통해 온전한 영적 예배를 드리며 쉼을 얻는 인생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