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설교 251205 금 [여호수아 13: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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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설교 251205 금 [여호수아 13:15-33]

찬송가 435

기도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고,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는 사람,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주님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은 복있습니다. 주님, 오늘 새벽에도 주님의 말씀을 기꺼워하여 이 자리로 모인 우리를 복있다고 하시니 감사와 찬양을 고백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이 늘 우리에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록된 말씀을 통해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고자 하는 마음을 심어 주시니, 그 마음에 맺히는 열매로 우리의 영혼이 기쁘고 즐거워하는 은혜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주님, 시편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우리가 그렇게 복있는 삶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가까이 할 때 우리가 악인들의 꾀를 멀리하게 하시고, 죄인들의 길에서 돌이키게 하시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서 일어나 주와 함께 걸어가게 하옵소서. 늘 우리 곁에서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하시는 성령님과 같이, 우리도 주님과 더불어 걷게 하옵소서. 악인들의 꾀와 죄인들의 길과, 오만한 자들의 자리가 우리에게 더욱 쉽고, 편하고, 안전하고, 또 복되게 느껴질 때가 있지만 이 자리에서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는 우리와, 또 곳곳에 흩어져 한 주를 마무리하는 주님의 성도된 모든 교우들에게 힘과 용기와 믿음을 주셔서 기꺼이 주님과 함께 서게 하옵소서.
주님, 오늘은 한 주를 마무리 할 뿐 아니라 하반기를 마무리하며 구역교회 종강예배로 함께 모입니다. 주님의 몸된 교우들을 섬기며 부르신 사명에 애쓴 모든 구역장 권찰들을 위로하여 주시고, 주께서 복되게 하여주시길 기도드립니다. 지나고 나면 늘 부족함이 많음을 깨닫고 주님 앞에 아쉬운 마음 많지만, 그러나 ‘잘하였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이제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칭찬 들으며, 주님이 베풀어주시는 환대와 위로로 그 영혼이 풍성하게 되는 은혜가 있게 하옵소서.
주님, 이제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입니다. 이 시간 우리와 함께하셔서 기록된 말씀을 깊이 볼 수 있는 눈을 열어주시고, 그 속에서 메아리치는 주님의 뜻과 생각을 들을 수 있는 귀를 열어 주시고, 그 마음에 합하여 우리 삶을 돌이킬 수 있는 선한 심령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주님, 이 시간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시며 우리와 함께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말씀 여호수아 13:15-33

설교

오늘 새벽에도 우리 선하신 주님께서 은혜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아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저는 고향이 대구입니다. 대구에서 태어나서 근 30년 가까이 대구에서 생활을 했지요. 그래서인지 저를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 종종 이렇게 물어봅니다. 혹시 ‘부산 사람’이냐고 말이지요. 아마 제 말투나 억양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부산 사람이냐’하고 질문을 받을 때면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니요, 대구 방언은 부산 방언이랑 전혀 다릅니다.’
정말로 그렇습니다. 대구 방언은 부산 방언과 전혀 다릅니다. 타지인이 듣기에 둘 다 똑같은 경상도 방언처럼 들리겠지만, 경상도 사람들은 딱 알지요. 저는 구분하지 못하지만 아마 전주 사람과 광주 사람 말이 다르고, 청주 사람과 충주 사람 말이 다르지 않을까 싶습니다. 방언 연구자들은 90년대 까지만 하더라도 서울 방언과 경기 남북부의 방언이 달랐다고도 하지요.
그런데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더 세밀한 차이가 있습니다. 경상 북부 지역에 상주, 문경, 예천, 안동, 영주가 인접해있는데 특히 예천은 문경, 안동, 영주와 접해있어서 생활권이 비슷합니다. 그런데도 이 지역 사이에 미묘한 어감 차이가 있습니다. 타지인은 전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지요. 그런 경험을 하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학문적으로 검증된 것은 아니지만 ‘말’이라는 것이 산을 넘어가고 물을 건너가면 달라진다는 것이지요. 그럴듯 하지 않습니까?
생각해보면 옛 마을이 그렇게 생겼던 것 같습니다. 산과 강이 가로막고 길이 발달하지 않아 이동이 자유롭지 않을 때, 자연히 접근성이 서로 떨어지게 될 때 산 이편 저편으로 ‘우리 마을’ ‘너희 마을’이 생기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게 마을 공동체가 산과 강을 따라 어느정도는 독립을, 또 어느정도는 고립을 경혐합니다. 그 시간이 쌓이고 쌓여 ‘말’에 생긴 경계선의 흔적이 ‘방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지요.
그만큼 산과 강의 경계, 자연 환경의 경계는 커다란 장벽이었을 겁니다. 교통수단도, 도로도 발달하지 않은 과거에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일상의 교류를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겠지요. 때문에 작은 마을 공동체의 독립, 그리고 어느정도의 고립은 자연스러운 결과일 것입니다. 동시에 이것은 ‘차이’와 ‘분열’이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기도 하지요. 사람은 그렇게 늘 ‘우리와 너희’를 쉽게 구분하고 나누곤 하니 말입니다. 공동체 사이의 작은 불씨가 얼마든지 ‘우리’를 다시 ‘우리와 너희’로 분열시키고 파괴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작은 불씨가 큰 불 되는 것을 ‘지역감정’이라는 이름 아래 지난 수십년 목격하지 않았습니까?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땅 분배 이야기 이면에도 그런 불씨가 내재해 있습니다. 요단강을 사이에 두고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는 나머지 지파들과 분리됩니다. 심지어 이 세 지파 사이에도 경계선이 뚜렷하게 그어집니다. 남북으로 길게 늘여진 땅을 분배받은 이 지역에 갓 지파의 땅이 나머지 두 지파의 사이를 반으로 가르는 형태입니다. 게다가 본문에 반복되는 골짜기와 산맥, 그리고 강들은 지파와 지파의 경계선이 되었음을 보여주지요.
그래서 본문은 이스라엘이 크게는 동쪽과 서쪽으로, 그리곤 다시 남쪽과 북쪽으로 나뉘어져 있음을 보여줍니다. 각 지파들 사이론 산과 강으로, 또 골짜기가 가로지르고 있지요. 그렇게 나뉘어진 사람들은 또한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불립니다. 자신들의 조상이 되는 이스라엘의 열두 아들들의 이름으로, 에브라임은 므낫세와 구분되고, 유다는 르우벤과 구분됩니다. 그러니 이렇게 상상해보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어쩌면 이들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보다는 ‘유다’라는 ‘우리 지파’의 이름이, 서로를 묶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보다 서로의 차이를 부각시키는 ‘에브라임과 므낫세’라는 이름이 더 가깝네 느껴졌을지도 모른다고 말이지요. 다시 말해 이 책의 땅 분배 이야기는 하나님의 약속과 성취, 은혜의 선물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사람들 사이에 내재한 ‘분열의 불씨’를 암시합니다.
어제 본문을 나누며 여호수아서가 앞으론 신명기, 뒤로는 사사기에 이어진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이 맥락은 이 ‘불씨’가 괜한 우려가 아님을 확인시켜줍니다. 사사기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보다 ‘열두 아들들의 이름’이 더 가까웠다는 것을 확인시키며 이들 사이의 갈등을 묘사하는데, 사사기 11-12장에서는 에브라임과 길르앗 사이의 다툼을 전해줍니다. 지역의 경계가 되는 요단강 나루터에서 배를 타려는 사람들을 붙잡고 길르앗 사람들이 묻습니다. “‘쉽볼렛’이라 발음해보라.” 그리곤 ‘쉽볼렛’을 발음하지 못하고 ‘십볼렛’이라 하는 에브라임 사람들을 때려 쓰러뜨리지요. 성경은 그 때 쓰러진 사람이 사만 이천명이라고 기록합니다.(삿 12:6)
실로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제 우리는 이 땅이 하나님의 기업, 은혜의 선물이라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기업 위에 하나님 공동체를 만들고자 하셨다고 말입니다. 그 공동체는 평화의 공동체입니다. 안식을 누리는 공동체이지요. 주인과 종이 없이 서로를 형제와 자매로 부르는 공동체입니다. 가난한 사람이 끊어지지는 않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주신 것으로 기꺼이 가난한 이들을 배불리 먹이는 하나님의 손이 되는 공동체입니다. 그 공동체는 하나님이 주신 기업, 이 땅 위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들입니다. 그러나 땅의 경계를 사이에 두고 사람들 사이에 평화와 안식이 아니라 갈등과 다툼, 피흘림이 발생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불완전해서, 부족해서 그런 것일까요? 아니, 그보다는 은혜 받은 우리의 양면성이라고 해야하겠습니다. 받은 은혜로 평화를 거두지 못하고 갈등과 폭력을 잉태하는 우리의 죄성 때문에, 기독교회에서 오래 고백해온 것처럼 우리가 ‘구원받은 죄인들’이기 때문이지요.
때문에 이 이야기가 필요합니다. 여호수아서는 요단 동편에서의 땅 분배를 이런 식으로 이야기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지요. 가만히 살펴보면 이 책은 마치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듯이 요단 동편의 땅이 어떻게 나뉘어졌는지 이야기합니다. 마치 할아버지가 어린 손자를 무릎에 앉혀두고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 본문의 처음과 끝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모세가 르우벤 자손의 지파에게 그들의 가족을 따라서 기업을 주었으니, 요단 동쪽 여리고 맞은편 모압 평지에서 모세가 분배한 기업이 이러하여도 오직 레위 지파에게는 모세가 기업을 주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의 기업이 되심이었더라’(수 13:15, 32-33) 여호수아서를 쓴 사람은 요단 동편과 서편의 땅이 모두 매한가지로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하나님이 약속하신대로, 하나님께서 주신 이스라엘의 기업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나뉘어졌으나 하나인 것,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불리지만 한 이름으로 주어진 것이란 말씀 아닐까요?
이 본문이 ‘옛 이야기’처럼 들려지고 있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성경의 다른 기록들처럼 여호수아서는 여호수아와 갈렙의 이야기를 하려고 쓴 것 아닙니다. 그들의 일기도, 당시 이스라엘의 승전기도 아닙니다. 이 책은 이 책을 읽을 사람들, 여호수아와 갈렙 이후의 사람들, 길갈에 세워진 돌을 보고서 아버지에게 ‘이것의 뜻이 무엇인가’ 물었던 사람들과 같이 이 이야기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그 기업 위에 살아가는 사람들, 혹은 시간이 지나 땅을 잃고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 또 시간이 지나 황폐화된 그 땅으로 돌아온 사람들, 그리고 오늘 이 글을 읽고 있는 우리를 위해 말이지요. 은혜를 받았으나 선으로도, 또 악으로도 사용할 수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한 이름으로 불리었지만 서로를 향한 차이점들로 고립되고 분열하고 파괴적인 갈등을 겪을 수 있는 이들을 위해서 말입니다.
교우 여러분, 모든 공동체는 하나의 공동체이면서 동시에 분열된 공동체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모인다는 것은 연합하면서 동시에 분열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 교회도 70년에 가까운 역사를 지나왔지만 어떻게 늘 좋은 날만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지요. 우리가 사는 날에 화창한 날이 있는가 하면, 구름끼고 흐려서 기분을 우울하게 하는 날들이 있는 것처럼, 인생에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이 있는 것처럼, 공동체에도 늘 좋은 날만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모여서 늘상 웃고 즐거워하며, 기뻐하기만 한다면 어쩜 그것은 ‘현실의 공동체’는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그런 날들은 종종 공동체를 분열시키기도 하지요. 우리에게 찾아오는 시험과 어려움들은, 우리를 잘게 쪼갭니다. 사람들은 그 때마다 자신과 생각이 비슷하고, 정서를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과 묶이고, 그렇지 않은 이들과 편을 가르곤 합니다. 그렇게 사람들은 세대별로 묶이고 나뉘어지고, 출신 지역별로 나뉘고 묶이어집니다. 경제력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학력과 문화수준이 나뉘어진 사람들끼리 묶이고 나뉘어집니다. 서로의 차이점이 두드러질 때마다 서로를 이해할 수 없을 것처럼 느껴가며, 심지어는 악마처럼 여기기도 합니다. 하나의 이름 아래 모이지만 분열된 공동체는 갈등과 다툼으로 깨어지는 일에 빠르게 다가갑니다.
이런 일이 늘상 있습니다. 사람들은 서로를 묶어주는 공통점보다 서로를 분열시킬 수 있는 차이점들을 더욱 부각시키지요. 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세례로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하나가 되었다는, 그렇게 주의 몸이 되었다는 교회에도 서로를 편가를 수 있는 ‘차이’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성경의 많은 교회 중에도 분열로 유명했는데, 심지어 이들은 ‘내게 세례를 베푼 사람이 누군가’에 따라서 편이 나뉘어 갈라지기도 했습니다. 리더십을 따라서, 자신의 계급과 계층에 따라서, 한 교회 안에서 적게는 네 개로, 많게는 열여섯개로도 분열되었지요. 때문에 바울이 그런 교회를 향하여 이렇게 선포합니다. 어느 누구보다도 이 말씀을 되새겨야 하기 때문이지요.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 12:13)
여호수아의 리더십 아래에서 땅을 분배받는 이스라엘도 다르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 그 땅에서 산과 골짜기와 강으로 나뉘어져, 각 조상의 이름을 따라서 서로의 차이를 부각시켜나가게 될 열두 지파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다르지 않지요. 우리에게 재개발이라는 불확실하고 위험성이 큰 시기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 시간은 우리를 위협하고 흔들 것입니다. 사람들의 생각이 다르고 입장이 다르고, 저마다 그리는 미래가 다르다는 것이 더욱 두드러질 것입니다. 처지와 세대가 우리를 묶고 가르게 될 것입니다. 이미 그런 것들을 우리는 경험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서로 분열의 위험성을 안고 있는 공동체에게 이 땅 분배의 본문들은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하나된 주님의 공동체’라고 말이지요. ‘이 모든 것은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의 기업이 되심이었더라.’하고 말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보낸 편지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두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2:14-16) 오늘 땅을 분배받는 각 지파 사람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그들이나 우리나 우리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들은 르우벤 지파, 갓 지파, 므낫세 지파 사람들이지만 동시에 ‘이스라엘’입니다. 우리는 저마다 개별적인, 서로 공유될 수 없는 삶의 특징을 가진 사람들이지만 동시에 ‘그리스도의 한 몸’ 입니다. 그 하나의 이름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기억합니다. 그 하나의 이름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이어받을 것을 요청받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둘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셨더라.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공동체의 일은 그리스도께서 기꺼이 자신을 내어주셔서 둘로 한 새 사람을 지으신 것처럼 화평하게 하는 것이지요.’
여기에는 ‘나의 깨어짐’이 따라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자신을 깨트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장벽을, 나와 너 사이의 장벽을 깨트렸던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 교회는 앞으로 더 큰 풍랑을 맞이하겠지요. 그 때 우리를 분열하게 만드는 시험과 유혹은 더욱 거세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 우리가 우리 자신을 깨트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 때 우리가 우리의 이름을 기억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스도의 한 몸된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의 제자된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베푸신 은혜대로 우리도 스스로를 깨트려 분열된 곳에 치유를, 갈등하는 곳에 화평을 이루며, 그리하여서 참된 주의 몸이 되는 우리의 믿음의 여정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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