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하나님의 응답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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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때로는 하나님의 응답이 없습니다
[서론]
지난주, 세상의 위로, 한병철-낙관주의와 희망의 차이, 시편 143편
[본론1]
다윗의 노래, 시인의 상황(3-4절과 7절), 고난의 상대성, 침묵하시는 하나님, 타인의 고난, 성경의 인물들
[본론2]
1-2절(주님이라는 호칭과 자격, 주님의 진실하심-5절), 옛날을 묵상하는 것, 주님의 의로우심(체다카), 하나님의 말씀-8절, 천로역정, 묵상의 힘, 미즈노겐조
‘감추어져 있다’(미즈노겐조)
하나님의 은혜란 없는 걸까?
북풍이 불고 눈이 내린 겨울 마당에
하나님의 은혜란 없는 걸까
감추어져 있다 감추어져 있다
눈 아래 땅 속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가
[결론]
키리에 엘레이손, 롬15:13, 소망의 열쇠, 눈 아래 감추인 은혜
지난주 우리는 악과 부조리한 현실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하는지 함께 고민해 보았습니다.
기억하고, 기도하고, 기다리자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좀 더 깊이 들어가보려고 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때때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을 겪습니다.
그 일이 우리의 잘못 때문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냥 갑작스럽게 찾아온 것일 뿐입니다.
그렇다고해서 그 시간이 쉽게 지나가는 것은 아닙니다.
고통은 여전히 무겁고, 마음은 여전히 무너집니다.
우리 주변에서도 깊은 절망 속에 있는 사람들을 자주 볼수 있습니다.
심한 스트레스로 우울증과 공황장애를 겪는 이들도 많습니다.
이럴 때 세상은 종종 이렇게 말합니다.
“다 잘 될거야.”
“결국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거야.”
이런 말들은 긍정적인 말처럼 들리지만, 때로는 너무 가볍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저 괜찮아 질 거라고 말하는 것은 그냥 현실을 외면하라는 말처럼 들립니다.
암 걸린 사람에게 긍정적으로 생각해라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는 것 같습니다.
독일의 철학자 한병철은 ‘불안사회’라는 책에서 낙관주의와 희망의 차이를 말합니다.
그에 따르면 낙관주의는 고통과 부정적인 현실을 보지 않으려는 태도입니다.
겉으로는 긍정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무 것도 바꾸지 못합니다.
낙관주의는 단지 “아프지 않는 척”하기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희망’은 다릅니다.
희망은 아픔을 회피하지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정직하게 바라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는 힘입니다.
희망은 아직 오지 않은 것, 낯선 가능성을 향해 움직여 나가는 삶의 태도입니다.
성경 전체가 희망, 즉 소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특히 시편에는 고통 한가운데서 부르짖는 사람들의 기도로 가득합니다.
오늘 함께 나눌 시편 143편도 마찬가지입니다.
시인은 “곧 괜찮아질거야”라는 단순한 낙관주의를 말하지 않습니다.
시인은 고통 가운데서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부르짖습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아픔을 있는 그대로 토로합니다.
절망의 한 가운데서 하나님을 향한 소망을 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고난 가운데서 주님이 어떻게 새로운 길을 여시는 지 발견하는 시간이 되길 원합니다.
[본론1]
키워드: 다윗의 노래, 시인의 상황(3-4절과 7절), 고난의 상대성, 침묵하시는 하나님, 타인의 고난, 성경의 인물들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시인은 누구이며 어떤 상황일까요?
표제어를 보면 ‘다윗의 노래’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꼭 다윗이 직접 썼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오히려 시인이 다윗의 삶을 빗대어 자신의 고난을 표현한 시로 보는게 더 자연스럽습니다.
다윗이 어떤 사람인가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왕입니다.
그 이유는 그가 단지 영토를 많이 확장하고 나라를 잘 다스렸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는 수많은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끝까지 굳게 붙들었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인생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어릴적 막내로서 아버지와 형으로부터 구박데기 취급을 당했습니다.
예언자 사무엘이 새로운 왕을 찾으러 왔을때 형들은 다 불려왔지만 다윗은 없었습니다.
양을 치고 있느라 아에 불림조차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선택하셔서 왕으로 기름을 부으셨습니다.
그렇다고 그의 삶이 술술 풀린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의 삶은 더 험난해지고 말았습니다.
골리앗을 잡을 정도로 용감했지만 오히려 사울왕의 시기와 위협을 받게 됩니다.
그 일로 인해 10년 넘게 광야에서 도망자로 살아야 했습니다.
그 후 결국 그는 왕이 되었고, 많은 전쟁에서 승리하며 영광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밧세바와 간음하는 바람에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그 후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또다시 도망자의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다윗은 참으로 험한 인생의 굴곡을 겪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상황 속에서도 그는 하나님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다윗은 수많은 시편의 모티브가 되었습니다.
많은 이들의 고난을 대변하는 상징적 인물이 된 것입니다.
오늘 시편 143편의 시인도 다윗처럼 큰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143편 3-4절입니다.
“원수들이 내 목숨을 노리고 뒤쫓아 와서, 내 생명을 땅에 짓이겨서, 죽은 지 오래된 사람처럼 흑암 속에 묻혀 살게 하였습니다. 내 기력은 약해지고, 놀란 심장은 박동조차 멎어 버렸습니다.”
원수들이 집요하게 시인을 죽이려고 공격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시인은 거의 죽을 지경입니다.
너무 힘들어서 죽은 사람처럼 어둠 속에 갇혀있다고 고백합니다.
심장이 멎어버린 것 같고, 기력은 바닥나고, 삶은 무너지고 있습니다.
7절은 더 절박합니다.
“주님, 나에게 속히 대답해 주십시오. 숨이 끊어질 지경입니다. 주님의 얼굴을 나에게 숨기지 말아 주십시오. 내가 무덤으로 내려가는 자들처럼 될까 두렵습니다.”
시인은 죽기 직전의 매우 위급하고 절박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를 더 괴롭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느껴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게 시인을 더욱 힘들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누구나 살면서 크고 작은 고난을 겪습니다.
고난이란 대부분 굉장히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것입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별것 아닌 것같아도, 내가 겪는 고통은 언제나 가장 크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이런 시간 속에서 우리를 진짜 무너지게 하는 것은 고통 그 자체가 아닐수 있습니다.
오히려 기도해도 하나님의 응답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것 같을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게서 멀어진 것같을때 우리는 더 깊은 절망과 외로움을 느낍니다.
제 주변에도 이런 고통을 겪는 분들을 많이 봅니다.
어떤 분들을 보면, “내가 저 상황이라면 정말 견딜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그들의 이야기가 오히려 우리에게 위로가 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이들의 고난 앞에서 우리는 우리의 고통을 다시 바라보게 됩니다.
다른 시각으로 다른 해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아브라함, 야곱, 요셉, 모세, 다윗, 엘리야.
모두 엄청난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 하나 고난을 피해간 사람이 없습니다.
그들의 삶은 마치 우리와 너무 다르게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고난 앞에서 그들도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했습니다.
우리처럼 흔들리고 아파하며 외로워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을 붙잡았습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이유는 완벽해서가 아닙니다.
연약함 속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고난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수 있을까요?
고난의 시간 앞에서 우리는 어떤 태도로 견뎌내야 할까요?
바로 이것이 오늘 시편 143편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입니다.
[본론2]
1-2절-주님이라는 호칭과 자격, 주님의 진실하심-5절, 옛날을 묵상하는 것, 주님의 의로우심(체다카), 하나님의 말씀-8절, 천로역정, 묵상의 힘, 미즈노겐조
시인이 고난 가운데 의지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1절입니다.
“주님, 내 기도를 들어 주십시오. 애원하는 내 소리에 귈르 기울여 주십시오. 주님의 진실하심과 주님의 의로우심으로 나에게 대답해 주십시오.”
시인은 계속해서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단순한 호칭이 아닙니다.
구원받아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에 있는 사람만이 부를 수 있는 이름입니다.
마치 자녀가 아버지를 부르듯, 시인이 하나님을 신뢰하며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자격이 있어 하나님께 부르짖는 게 아닙니다.
그는 원수들만큼이나 자신도 의롭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앞에서 어느 누구도 의롭지 못합니다.”
시인은 자신의 의로움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그가 붙드는 것은 주님의 진실하심과 의로우심입니다.
주님의 ‘진실하심’이 무엇일까요?
다른 번역본을 보면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 신실하심을 말합니다.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시는 사랑, 언약을 반드시 지키시는 분을 말합니다.
5절입니다.
“내가 옛날을 기억하고, 주님의 그 모든 행적을 돌이켜보며, 주님께서 손수 이루신 일들을 깊이깊이 생각합니다.”
여기서 ‘옛날’이란 단순한 추억을 말하는게 아닙니다.
이스라엘과 개인의 삶 속에서 하나님이 구원해주신 일들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아무리 죄를 지었어도 하나님은 결코 그들을 포기한 적이 없으십니다.
이스라엘을 징계하신 것도 결국 그들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을 기억하고, 돌이켜보고, 깊이깊이 생각합니다.
기억하고, 돌이켜보고, 깊이깊이 생각하는 것이 바로 묵상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응답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그 사랑을 묵상하는 것이 절망을 견뎌내는 영적 자원이 됩니다.
그럼 주님의 ‘의로우심’이란 무엇일까요?
주님의 의로우심이란 히브리어로 ‘체다카’인데 이것은 단순한 공정함이나 형벌의 의미가 아닙니다.
억눌린 자, 고통받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뜻합니다.
시인은 자신이 의롭지 않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의로우심을 근거로 자신을 구원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그 믿음이 그를 기도하게 만드는 힘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진실하심과 의로우심이 가장 잘 드러난 곳이 있습니다.
바로 말씀입니다.
8절입니다.
“내가 주님을 의지하니, 아침마다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의 말씀을 듣게 해주십시오. 내 영혼이 주님께 의지하니, 내가 가야 할 길을 알려 주십시오.”
고난의 한복판, 어두운 밤을 지내고 시인이 아침에 가장 먼저 찾은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상황은 여전히 죽을 것 같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는 것을 놓치 않습니다.
왜 일까요?
말씀 속에 이 절망 감옥을 탈출할 힘이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존번연의 천로역정을 기억하십니까?
주인공 크리스천과 소망이 길을 가다가 절망 거인에게 붙잡힙니다.
그리고 절망 거인이 사는 “의심의 성” 지하 감옥에 갇힙니다.
절망 거인은 매일 몽둥이로 때립니다.
절망 거인의 아내 ‘자포자기’는 자살을 종용합니다.
그러자 크리스천과 소망은 너무 고통스러워 정말 죽고 싶을 지경입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크리스천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가슴을 치고 외칩니다.
자기 가슴 속에 “약속”이라는 열쇠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크리스천이 그 약속의 열쇠를 감옥에 가져다 대자 감옥문이 열리고 맙니다.
우리에게도 이 열쇠가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시인이 아침마다 주의 말씀을 듣게 하소서라고 외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내 감정도 소진되고, 상황도 최악일때 마지막 붙들 것은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담긴 말씀은 “내가 너를 포기하지 않는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묵상은 단지 성경을 읽는 행위가 아닙니다.
묵상은 우리의 시선을 바꾸는 영적 훈련입니다.
고난을 내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것입니다.
절망 속에서도 소망이 있음을 깨닫게 합니다.
어둠 속에서도 빛이 있음을 깨닫게 합니다.
우리 삶의 불안과 두려움을 멈추게 해주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인 ‘말씀’뿐입니다.
일본에 미즈노 겐조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11세에 뇌성마비로 전신이 마비되었습니다.
말도 할수 없게 되었고, 몸도 움직일수 없게 되었습니다.
오직 신체중 오직 귀와 눈만 살아 있게 된 것입니다.
말 그대로 살아있는 시체처럼 된 것입니다.
얼마나 자신의 삶이 비참하게 느껴졌을까요?
죽고 싶어도 누군가 도와주지 않으면 마음대로 죽을수도 없는 상태입니다.
절망 속에 살아가던 그가 어느날 한 목사님을 통해 복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날부터 성경을 읽으며 그는 자신이 살아있는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게 됩니다.
그가 의사표현을 하는 유일한 방법은 작은 미소와 눈을 깜빡이는 것 뿐입니다.
그런 그가 눈으로 글자를 선택해서 한 일이 있습니다.
바로 시를 짓는 일입니다.
처음에는 한 문장을 쓰는데 일주일이 걸렸다고 합니다.
그런 그의 시에는 놀랍게도 원망이 없습니다.
그의 첫번째 시집 이름이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입니다.
그의 시 한편을 소개하겠습니다.
‘감추어져 있다’는 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란 없는 걸까?
북풍이 불고 눈이 내린 겨울 마당에
하나님의 은혜란 없는 걸까
감추어져 있다 감추어져 있다
눈 아래 땅 속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가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지금 당장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없는 것이 아니라 감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눈 아래 땅 속처럼, 소망은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합니다.
[결론]
키리에 엘레이손, 롬15:13, 소망의 열쇠, 눈 아래 감추인 은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엊그제 아내 연주회를 보면서 가슴이 뭉클한 순간이 있었습니다.
베토벤 곡 중에서 반복해서 부르는 가사가 있었습니다.
바로 ‘키리에 엘레이손’
라틴어로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의미입니다.
그 단어를 들으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의 악과 고난 앞에서 우리가 드릴 수 있는 최고의 기도가 바로 이 한 마디가 아닐까?
“주님, 저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주님, 긍휼을 베풀어 주십시오.”
이 고백은 절망 속에서 나오는 무기력한 탄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믿는 믿음에서 터져 나오는 진실한 소망의 기도입니다.
로마서 15장 13절은 이렇게 우리에게 증거합니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때로는 너무 힘들어 기도조차 나오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말씀 한 구절조차 읽을 힘도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때 우리가 할수 있는 가장 짧고도 강력한 기도가 있습니다.
바로 “키리에 엘레이손”, “주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입니다.
내 힘으로는 도저히 일어설 수 없기에, 주님의 진실하심과 의로우심에 내 존재를 전적으로 맡기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소망의 열쇠’입니다.
천로역정의 주인공이 절망의 성에서 의심의 감옥문을 열고 나왔던 그 열쇠가 바로 이 간절한 부르짖음 속에 있습니다.
새해를 시작하며 우리의 상황이 여전히 겨울 같을지라도, 눈 아래 감추어진 은혜를 믿으며 함께 고백하면 좋겠습니다.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는 주님을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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