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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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본문 해설

누가복음 19:36–46 NKRV
가실 때에 그들이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이미 감람 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오늘의 본문은 연달아 일어난 두 개의 사건을 담고 있다. 먼저 일어난 일은 예수께서 “호산나” 찬양 소리를 들으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사건이다.
그리고 이어서 일어난 사건은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청결하게 하신 일이다.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실 때, 많은 무리들이 “그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며 예수를 환영 하였다(눅 19:37).
그 찬송과 환영이 얼마나 대대적이었던지 마태복음은 “온 성이 소동하였다”고 기록하였다(마 21:10).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으로 불렀고 그분의 오심이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서는 영광”이라고 외쳤다(눅 19:38).
예수께서 가시는 길에는 그들의 벗은 겉옷이 양탄자처럼 깔렸고 밭에서 베어온 종려나무 가지가 펼쳐졌다.
실로 예수의 생애 가운데 이처럼 환영을 받으신 적도 없으셨다. 온 성 중에 그 환영이 얼마나 열광적이었는지 그것을 시기하는 바리새인들이 말하기를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라고 말할 정도였다(눅 19:39).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신에 대한 이 찬양을 마땅한 것으로 여기셨다. 이때는 마땅히 하나님과 그의 아들께 그러한 찬양이 드려져야 할 때였기 때문이었다.

II.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이 날은 유월절이 시작되는 첫날이었다. 예수를 환영하던 그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을을 통해서 자기들의 죄를 대속하실 하나님의 계획을 아직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고난을 통하여 이루어질 구원의 맥락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당신에 대한 찬양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셨다.

A. 예수께서 우시다.

우시며, 에클라우센
벳바게와 베다니를 떠나온 예수의 행렬이 예루살렘 성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에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생겼다.
아직도 환영의 기쁜 소리와 찬양이 성곽 앞에 가득하고 뒤따르는 백성들도 허다한데, 갑자기 예수께서 우셨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이르시되...”(눅 19:41).
그것도 그냥 우신 것이 아니었다. 우리말 개역 개정 성경에 “우시며” 라고 번역된 단어가 그리스 원어로 “에클라우센” 인데 이것은 흐느끼는 것이 아니라 커다란 소리를 내어 방성대곡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성 가까이 오사 목 놓아 우신 것도 이해가 안 가지만 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예수께서 그토록 통곡하신 이유이다.
왜냐하면, 성경 본문에는 우신 이유가 그저 “성을 보시고”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말은 더욱 이상하다. 예루살렘을 예수께서 혼자 보신 것도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수뿐만 아니라 그분을 따르던 모든 인파가 함께 그 성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예수는 홀로 통곡하고 계셨고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 그 성읍은 외관상 사람들이 목놓아 울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수많은 세월 동안 그랬던 것처럼 예루살렘 성은 그들 앞에 어제처럼 견고히 서 있었고, 성문으로는 지난주처럼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고 있었다.
성을 보시고, 에이돈
그러나 예수께서 성을 보셨다. “성을 보시고(에이돈)...” 분사형인 이 그리스어 단어는 그냥 눈에 보이는 것을 보는 게 아니다.
그것은 “직관적인 통찰로써 사물을 인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사물의 배후를 꿰뚫어 직관적으로 보는 것을 가리킨다.
외관상으로는 어제와 다름없이, 이름 그대로 예루살렘 곧 평화의 도시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도시의 영적인 통찰로써 바라보셨고 그러자 그분은 목놓아 우실 수밖에 없었다.
그분이 그렇게 통곡하신 것은 천 년 동안의 언약에 깃들여 있던 예루살렘성이 무너질 하나님의 심판을 미리 보셨기 때문이다.
큰 소리로 통곡하시던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눅 19:43).
이것은 선포가 아니라 차라리 홀로 되뇌이시는 독백과 같은 것이었다. 하나님과의 샬롬을 잃어버린 이 도시는 “평화에 관한 일”을 모르고 있었다.
언약으로 치자면 이 도성은 무려 1,500년의 약속이 깃든 하나님의 성읍이었다.
모세시대로부터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모여서 하나님을 경배하고 만날 한 장소를 예정하신다.
그 장소가 바로 성막이 설치되는 곳이었고 그것은 궁극적으로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키고 있었다(신 12:14,18).
그러나 지금 예수께서는 이처럼 유서 깊은 성 뒤편으로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다가오는 하나님의 심판을 직시하고 계셨다.
심판을 예고하신 내용 1
누가복음 19:43–44 NKRV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이것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신 말씀이었다. 주후 70년 4월 4일경 로마의 디도(티투스)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 성이 포위당하던 그때는 마침 유대인들의 최대 명절인 유월절이었다.
예루살렘 성에는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거기에 왔던 순례자들을 포함해서 약 100만 명의 유대인들이 갇혀 있었다. 보급이 끊기자 식량난과 전염병이 성을 덮쳤다.
로마 군대에 의해 포위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성 내부의 유대 저항군들은 서로 파벌을 가르고 살육전을 벌이는가 하면 수년 동안 버틸 수 있도록 비축된 식량을 서로 불태워 버리는 등 자멸적인 내분을 겪고 있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느냐 하면 이게 로마하고 싸우는 데 있어서 누가 지도자가 될 것인가? 그거를 놓고 이제 열심당원 파가 있었고, 그다음에 약간 비교적 덜 극단적인 제사장을 비롯한 바리새파와 사두개파 사람들로 구성된 무리들이 있었고, 이렇게 세 무리가 있었어요. 대다수 에세네파는 광야에서 지내다가 멸망 전후 자취를 감추었다.
그들이 서로 파벌을 지어서 쌈질을 하면서 예루살렘 성에서만 한 몇 년 정도 버틸 수 있을 정도로 곡식이 있었는데, 그걸 서로 불질러 버렸어요.
디도 장군은 성벽을 돌파하기 위해 토성을 쌓았으나 유대 저항군의 땅굴을 이용한 기습과 공성추에 대한 화공으로 실패했다.
토성을 쌓았는데 어떻게 쌓았냐면은 토성을 그냥 쌓는 게 아니라 나무로 틀(와꾸)을 짜가지고 거기다가 흙을 붓고 그 다음에 다시 나무로 틀(와꾸)을 짜고 흙을 붓고 하면서 이게 높이 쌓아 가지고, 성벽하고 똑같게 만들거나 더 높게 만드는 거예요.
그리고 여기서 이제 저 아래로 보이니까. 공격을 하거나 아니면 줄이나 사다리 위험에서 공격을 하는데 사람들이 땅굴을 파 가지고 정확하게 토성이 있는 데까지 가가지고 토성을 밑바닥에서부터 허물어버렸어요.
그래 가지고 그거 쌓아 올린 것을 그냥 한 번에 다 주저앉혀버린 거예요. 이게 싱크홀처럼 되어버린 거지.
그리고 이제 공성추는 돌멩이 같은 거 막 발사하는 장치인데 그것을 이제 밤중에 기습을 해가지고 다 불질렀다는 거죠.
그러자 로마군은 전략을 바꿔 예루살렘 성 전체를 둘러싸는 8km의 포위 장벽을 3일 만에 쌓아 성 외부로부터의 모든 물자의 반입을 완전히 차단하고 고사 작전으로 전략을 수정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에는 극심한 기근이 발생했고 심지어 자신들의 아이를 잡아먹는 참혹한 일까지 벌어졌다.
심판을 예고하신 내용 2-멸망의 비참함
드디어 주후 70년 6월 24일 안토니오 요새가 함락되고 7월 6일에는 항상 드리던 성전의 희생 제사까지 그치게 되었다.
이어서 8월 27일에는 예루살렘 성전의 위엄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대문이 불타버렸고 9월 26일에는 전 도시가 디도 장군의 수중에 떨어졌으니 이날이 바로 끔찍한 예루살렘 최후의 날이었다.
그들의 점령에는 무자비한 약탈이 뒤따랐고 이것은 끔찍한 살육으로 이어졌다. 거리, 이곳저곳엔 겁탈을 당하는 부녀자들의 비명소리로 아비규환을 이루었다.
포위 기간과 함락 과정에서 사망한 유대인들의 수는 약 110만 명에 달하였으며, 살아서 포로로 끌려가는 사람들의 숫자만 해도 약 9만 7천 명이었다(요세푸스 유대전쟁사 6권 9장 3-5절).
예루살렘의 멸망
거리마다 유대인들의 피로 도랑을 이루었고 형식적인 제사로 사람들에게 종교적 위안을 주던 예루살렘 성전은 로마 군인들의 말굽 아래 폐허가 되었다.
디도 장군은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나서 성전과 도시 전체를 기초까지 파헤쳐서 완전히 무너뜨리라고 명령하였으니 이는 로마에 반항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로마 제국의 다른 나라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그리하여 예루살렘 성과 성전은 완벽하게 파괴되어 거의 평지가 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거기가 한때 도시였다는 사실조차 알아볼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다만 헤롯 궁전에 있던 3개의 탑만은 파괴하지 않고 보존하였는데 이는 로마가 반역하는 예루살렘을 정복했다는 사실을 기념하기 위함이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유대인들의 시체가 산을 이루었고 살아남은 자들은 노예로, 검투사로 개처럼 끌려갔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리고 회개치 아니하였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별고 없이 서 있는 예루살렘, 그러나 결국 머지않아 심판을 받게 될 종말을 미리 보고 계셨던 것이다.
그리고 그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러한 운명을 맞이하게 될 이스라엘을 위해 통곡하지 않으실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배반한 민족의 역사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의로운 손길이다.
당시 예루살렘에서는 희생 제사가 끊이지 않았고 그들의 입술에서는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이 오르내렸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서 이탈해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있었다.
예수님의 탄식, “예루살렘, 너라도 알았었다면”
예수께서 탄식하셨다.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그리스어 성경은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이날에 너(예루살렘)라도 그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가 모두 이 평화에 관한 일에 있어서 맹인이 되었다. 조국이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린 채 반역의 길을 가고 있는 줄을 몰랐다.
이러한 심판의 영적 비밀을 사마리아가 모르는 것은 당연했다. 갈릴리가 알지 못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바로 코앞으로 다가온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예루살렘이 알지 못한 것은 큰 비극이었다.
다른 성읍들은 그러한 사실을 전혀 모를지라도 예루살렘 너 만이라도 알아야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다른 도시들을 깨우쳐야 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지금 예루살렘 성문 앞에서 목 놓아 울고 계시는 그 성과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은 이에 대해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예루살렘의 이름의 뜻이 여러 가지 의견이 있지만 이르와 살렘을 합친 “평화의 성”이라는 뜻이다.
평화의 성이라는 뜻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평화를 모르고 있다.
수동태, 숨기었도다
성경 본문은 예루살렘 성이 이처럼 눈뜬 맹인이 된 이유에 대해 말한다. “지금 네 눈에 숨기었도다.”
여기서 사용된 동사는 수동태이다. 누군가에 의해 그들이 보지 못하도록 감추어 버림을 당한 상태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진 백성들, 그분과의 평화를 잃어버린 교회의 비극적인 특징은 신령한 사실들에 대한 무지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지혜가 가려져 있고 잠들어 있는 자들에게는 역사를 다루신 하나님의 손길에 대한 이해가 없다.
적용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애통하는 마음을 이해하는가? 이스라엘 위해서 목 놓아 우시는 예수님의 심정에 대하여 관심이 있는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방 신상 앞에서나 구하던 탐심과 부패한 욕망을 그대로 간직한 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
성경은 이런 기독교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이런 무지가 우리 속에 있는 한, 우리는 결단코 이 시대와 조국 교회를 향하여 애통하시는 예수님의 눈물을 이해할 수 없다.
더욱이 멸망 받을 예루살렘 성에 그 백성들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려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신 예수님의 심정을 알 수 없을 것이다.
평화를 위해 오신 예수님에 대한 무지로 인해 환영하던 무리는 몇 일 못되어 살인자들로 변모하고 말았다.
주님의 통곡을 듣습니다. “너는 그리스도인 아니냐, 목사 아니냐? 너는 볼 수 있어야지!” 하시는 말씀이 골수에 사무치게 들려 옵니다.
설교자로서 각성하는 계기가 됩니다. 그래서 평생 공부하는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B. 잠들어 있는 성전

성전으로 들어가시는 예수님
이처럼 뜻밖의 통곡을 그치신 다음, 방문하신 곳이 어디였는지 아는가? 그곳은 바로 예루살렘 성전이었다.
이렇게 두 기사가 서로 밀접한 연결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이번에도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 벌어진다.
잠시 전까지만 해도 목 놓아 우시던 예수께서 이번에는 격렬하게 행동하시는 분으로 바뀌었다.
예수께서는 성전 안에 들어가서 사람들을 내쫓고 상과 의자를 둘러 엎으셨다. 이것을 가리켜 사람들은 “성전을 깨끗하게 하심 혹은 성전 숙정 사건”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장면은 그렇게 간단하게 지나칠 수 없는 교회의 생명에 관계된 진리를 담고 있다.
성전의 일상_제물 구매
지금 당신이 그 시대의 사람이 되어 당시 예루살렘 성전으로 들어가 예수께서 성전을 찾으셨을 때 무슨 엄청난 일이 거기에서 벌어지고 있었나? 그렇지 않다.
그날 성전에서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고 있었다. 어제처럼 지난 절기처럼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찾았고 어느 때처럼 사람들은 각자 거기서 자신의 일을 행하고 있었다.
어떤 이들은 성전에서 제사에 쓸 동물들을 팔았다고 비난하지만 이 전통은 하루아침에 생긴 것이 아니었다.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사람들은 자기의 집에서 동물을 가지고 제사드릴 장소까지 오는 것이 어려웠다.
처음에는 성전 가까운 동네에서 제물로 바칠 동물을 사가지고 왔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성전에서 그것을 구입할 수 있게 되었다.
성전의 일상_돈 바꾸는 일
돈 바꾸는 일도 그 나름대로의 사연이 있었다. 당시에는 헬라 돈, 로마 돈, 그리고 히브리 돈이 함께 통용되고 있었다.
그런데 헬라 돈과 로마 돈은 명목상 가치가 실질적 가치보다 높은 일종의 악화였다.
그러나 히브리 돈인 세겔은 동전 자체가 표준 중량을 지니고 있어서 두 가지 가치가 일치하였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히브리 돈 세겔만이 하나님께 바쳐질 수 있는 흠 없는 예물로 여겼다.
이것 역시 처음에는 예루살렘 성전 가까운 동네에서 교환해 가지고 와서 예물로 드렸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성전에서 화폐를 교환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성전에서 재물을 팔고 돈을 바꾸면서 큰 이익을 남겼다고 주장하지만 브루스 같은 신약학자는 이 같은 주장에 대해 근거가 없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시각을 상실한 성전을 책망하시는 예수님
그런데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통곡하셨던 예수께서는 성전에 들어오셔서 아주 큰 일을 행하셨다.
마태복음 21:12 NKRV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이 본문을 묵상하면서 깨닫게 되는 중요한 교훈은 이것이다.
우리는 우리 앞에 있는 기독교, 익숙해진 신앙오래된 전통적 관습에 대해 거의 문제의식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과 전통의 시각에서 보면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아무 문제가 없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예수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각에서 보면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었다. 그것은 거룩한 약속의 전당이 아니라 강도의 소굴이 되어 있었다(마 21:13).
이 시대와 교회의 큰 불행은 하나님의 시각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교회 자신과 세상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관점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나약하지 않고 강하신 분이었으나 언제나 지극히 온유하셨다.
우리가 그분의 생애를 뒤돌아볼 때 이렇게 격정적으로 흥분하시며 기염을 토하신 적이 거의 없다.
자신을 팔아 넘기려는 제자에게 입맞춤을 당하시는 순간에도, 억울한 누명을 쓰신 채 사형인 언도를 받으시는 순간에도, 십자가를 치시는 순간에도 이렇게 행동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외관상 아무 일도 없이 잘 돌아가고 있는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오셔서 이처럼 흥분하셨다.
그리고는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 파는 사람들을...” 책망하셨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2:15-16).
그것은 바로 예수께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시각으로 성전을 바라보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시각 안에서 타락한 이스라엘 향한 하나님의 심정을 전수받고 계셨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께서 아무도 보지 못한 예루살렘의 멸망을 미리 보시고, 아무도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했던 예루살렘에 잠들어 있는 성전을 영적으로 통찰하시기까지 살아오신 삶의 궤적을 보라.
기도로 액체의 생애를 사신 예수님
지금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버림받아 십자가를 지고 못 박히러 올라가는 이 시간까지 그분이 하나님 앞에 살아오셨던 삶의 방식이 어떠했는지 생각해보라.
예수의 생애는 액체의 생애였다. 그분의 생애는 피의 생애였다. 땀의 생애였고 눈물의 생애였다.
그렇게 사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십자가에 매달려 마지막 한 방울의 피까지 다 쏟으신 보혈의 생애였다.
그러나 이것을 기억하라.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아들이 드리는 십자가의 보혈를 받으시기 전에 피를 쏟기까지 흘리신 땀과 눈물의 기도를 먼저 받으셨던 것이다.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한 번도 아버지와 떨어져 보신 일이 없이 그분과 동행해 오신 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그분에게 어떤 모습으로 이 땅에서 하나님과 함께하며 그분의 뜻을 이루며 사시는지를 우리에게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보여준다.
히브리서 5:7 NKRV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참으로 그분의 생애는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기 전에 먼저 기도의 눈물로 얼룩진 생애였다.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 성령에 이끌려 가신 광야의 40일 기도가 그분에게 얼마나 많은 희생을 요구했는가?
그 바쁜 일과와 수많은 논쟁과 봉사 속에서도 “새벽 아직 어두울 때”와 “깊은 밤”을 하나님께 바칠 시간으로 따로 떼어 놓으셨던 예수님의 기도의 삶은 우리의 메마른 가슴에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 (막 1:35, 눅 6:12).
자! 우리가 일어나서 겟세마네 동산을 올라가 보자. 잠들어 있는 제자들 곁에서 어린아이처럼 하나님께 매달리는 우리 주님의 신음 어린 기도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기도로 세워진 교회의 역사
만일 교회의 역사가 성령이 역사한 역사라면 이 성령의 역사 뒤에는 보이지 않는 기도의 역사가 있다.
비록 교회의 역사는 성령의 역사를 기록하고 선교의 역사만을 전해도 하나님은 그것이 가능하도록 권능을 가져오게 했던 기도의 역사를 기록하고 계신다.
굽이치는 선교의 역사 속에서 구원받은 무리들과 함께 천국에 설 때, 비로소 우리는 이름 없는 그리스도인들, 교회의 역사가 기록하지 않았던 기도의 사람들을 만날 것이다.
무릎이 낙타의 무릎처럼 굳어지고 아직도 그 밤에 눈물 자욱이 지워지지 않은 교회와 역사를 움직였던 위대한 기도의 사람들을 만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얼마나 영광스러운 존재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을 기도의 사람으로 세우신 하나님을 찬송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진심으로 원하시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모이는 것도 아니고 또한 모인 사람들이 단지 열심히 종교적 의무를 열심히 수행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교회에 모인 그들이 비록 소수일지라도 하나님의 시각으로 이 시대와 교회의 영적 상태를 분별하고 그리스도의 심정으로 하나님의 아픔을 느낄 줄 아는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하는 것을 원하신다.
그러므로 아무일도 없이 모든 것이 잘 돌아가고 있는 것 같은 우리 시대의 교회를 예수부터처럼 영적인 통찰로서 돌아볼 수 있도록 하나님의 시각을 갖도록 절절히 간절히 기도하라.

C.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예수께서 평범한 사람들이 흔히 예상할 수 있는 정도를 뛰어넘는 진노 끝에 성전을 정결케 하신 후에 주실 말씀이 무엇이었나?
기도하는 집을 성경신학적 관점(이사야 56장)으로 보기
그것은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대하여 하신 말씀이었다. 그것은 거룩한 심판을 앞두고 있는 예루살렘 한복판에서 잠들어 있는 성전을 향하여 주신 결정적인 말씀이었다.
마태복음 21:13 NKRV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이 부분을 마가복음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하면 받으리라.”(막 11:17).
그런데 이 말씀은 이사야서 56장에서 인용된 것이다. 히브리어 원문에서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왜냐하면, 내 집은 그 모든 백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리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53장에서 메시아의 고난과 영광에 대해 예언한 뒤 54장부터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회복될 것을 말한다.
오늘 누가복음이 인용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있는 이사야 56장이 바로 이 문맥 안에 놓여 있다.
하나님을 거슬러 모질게 반역하던 이스라엘이 다시 하나님의 사랑을 회복하고 영적으로 새롭게 깨어나 은총의 시대를 맞게 될 것이었다.
그런데 그 때, 하나님의 교회에는 그의 상당한 변화가 일어나는데 그것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의 집인 예루살렘 성전이 그 모든 백성들을 위한 기도의 집으로 회복된다는 것이다.
기도의 집.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원받아야 할 그 민족들을 위해 기도하는 집이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예루살렘 성전을 향한 하나님의 열망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소원이었다.
그러나 오늘 예수께서 바라보시는 예루살렘 성전은 이 같은 하나님의 열망에서 멀리 떠나 영적으로 깊이 잠들어 있었다.
히브리어 성경과 그리스어 성경은 모두 이 성전에 대하여 정확히 말하고 있다. 그래서 그것을 기도하는 집이라고 기록하지 않고 소유격을 써서 “기도의 집”이라고 말한다.
기도하는 집의 목적
이것은 하나님의 교회가 어떤 집이 되어야 할 것임을 말해주는데 그것은 곧 기도의 집, 기도하는 것이 특징이 되어 버린 그 집, 구원받아야 할 백성을 위해 기도한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나의 집. 이미 잘 드러나지 않을 그 집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이 시대의 조국 교회를 향한 거룩하신 하나님의 열망을 잘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세상을 위한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중심적 역할이 무엇이냐 하는 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께 올라가는 향훈과 같은 기도, 오직 주님께 온 마음을 쏟아놓는 기도, 구원받지 못한 그 모든 백성들을 위한 간절한 섬김의 기도가 없이는 결코 교회가 본래 존재의 목적을 다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오셔서 불같이 진노하시며 성전을 정결케 하신 이유다. 왜냐하면,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기도의 집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몇 가지 점에서 우리에게 의문을 갖게 한다. 성전에서 매매하고 돈 바꾸는 일과 기도하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그 당시의 문맥에서만 보면 매매하고 돈 바꾸는 일은 모두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었던가?
더욱이 이 일들은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께 헌금하고 제물을 바쳐 섬기는 일이 매매하고 돈 바꾸는 일보다 먼저였다.
더욱이 그 일들은 오늘 어느날 갑자기 생겨난 것도 아니지 않는가. 그러면 이 사실이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예수님의 책망의 이유
그것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눠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로는 교회에서 가장 중요시하여야 할 것이 바로 “기도”라는 것이다.
둘째로는 이렇게 매매하는 일과 돈 바꾸는 일들이 교회가 전적으로 기도에 헌신하는 데 심각한 방해를 준다는 것이다.
매일 기도하면서도 좀 더 깊은 신앙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가? 먼저 여러분의 마음속에 있는 돈 바꾸는 상과 매매하는 자들의 심령에서 몰아내라.
여러분의 삶 속에 자리 잡은 탐욕과 심령 깊은 곳에 뿌리박은 불결한 것을 내어버리기 전까지는 결코 교회와 세상을 변화시키는 기도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의 인격적 특징은 마땅히 기도하는 사람, 아니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유서 깊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진노하시던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만나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회개하라. 네 속에 있는 온갖 더러운 것들을 몰아내라. 너는 만민을 위한 기도의 사람이다.”
기도하는 교회에 대한 동기 부여
우리의 눈앞에 영적으로 가난한 이 시대의 교회와 초라한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 보이는가? 영광을 잃어버린 이 시대의 교회는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의 중심이 되고 있는가?
그분께서 보내신 성령을 끊임없이 의지하는가? 기도가 참으로 온 교회의 가장 중심적 기능이 되고 있는가?
오늘날 우리 시대의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인도받는 대신 정교한 규칙에 의해 운영되고 성령의 능력 주심에 의지하기보다는 잘 짜진 조직과 기구들을 의지하며 기도 대신 사교가 교회의 중심이 되고 있지는 않는가?
이러한 모습으로는 교회가 그 영광스러움을 회복할 수는 없다. 이것들이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묵은 땅이다(호 10:12).
이제는 영혼의 깊은 잠에서 깨어나자. 일어나자. 무엇보다도 간절하고 열렬히 기도하므로 우리의 심령과 이 시대의 교회를 기경하자.
책망에 대한 이유 분석 1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현실적인 질문을 하게 된다.
왜 기도가 교회의 중심적 기능이 되지 못하는가? 하나님께서 그토록 원하시는데 교회는 어째서 그 일에 있어서 연약한가?
그것에 대한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첫째로는 그것은 교회가 기도하는 일 자체를 그릇되게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교회가 기도하는 일 자체를 교회가 가지고 있는 많은 해야 할 일 중 하나인 정도로 믿고 있다.
이것은 교회와 기도에 대한 가장 심각한 무지 중에 하나다. 교회가 기도하는 집이 되는 것은 결코 교회가 해야 할 더 좋은 많은 일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그 모든 백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 되지 아니하고는 민족과 그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미리 알아서 외칠 수 없기 때문이다.
교회가 기도하는 집이 되지 못할 때 민족 앞에 다가온 멸망도 그들 눈에 가려지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 뜻을 알리고 피할 길을 외쳤던 선지자들의 삶을 보라. 그들은 하나님과 열린 교제의 창을 가진 사람들이었다(겔 1:1, 단 6:10).
조국 교회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이 시대의 교회의 가난한 영적 상태를 슬퍼하는 우리들은 이러한 시각을 갖도록 새롭게 눈을 뜨지 않으면 안 된다.
책망에 대한 이유 분석 2
둘째로는 현실적으로 교회가 기도하는 일에 충실할 수 없는 이유는 이런 기도가 영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기도는 영적인 일인 동시에 영적인 투쟁이다. 그래서 육적인 교회, 잠들어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신령한 일에 헌신하기를 매우 꺼려한다.
왜 이 기도가 육신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에게 무리한 일인가?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기도할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
깊은 기도는 보다 확실하고 풍성한 하나님의 임재 앞에 드려지는 간구다. 이 거룩한 임재 앞에서는 우리의 있는 모습이 그대로 드러난다.
우리의 허물이 드러난다. 죄악이 보다 선명하게 인식되고 하나님의 면전 의식이 우리 마음을 가득 채운다. 코람데오.
이 같은 의식은 우리로 알고 하나님 앞에 정직해지도록 요구하고 그리하여 이제까지 피상적으로 스스로 속여왔던 많은 문제들이 우리에게 엄연한 사실로 다가온다.
육적인 교회, 잠들어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 같은 일을 수행하는 것이 영혼과 정신에 무리한 부담이 된다.
그래서 잠잠히 간절하게 깊은 기도 속으로 들어가기보다는 그 대신 몸으로 때우는 육체적인 수고를 선택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탄의 간교한 속삭임이다.
열심히 봉사하는 것만 가지고는 그의 헌신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향해 있는 것인지를 알 수가 없다. 기꺼이 몸으로 희생하고 노고를 치르는 것만 가지고는 그가 진정 하나님께만 헌신된 사람인지를 알 수 없다.
오직 그의 기도의 세계가 그것을 말해준다. 보이지 않는 골방에서 드려지는 그의 열렬하고 깊은 기도의 헌신이야말로 그가 진정으로 오직 하나님께만 헌신된 사람인지 그리하여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인지를 보여준다.
오늘날 영적으로 경박한 사람들은 기도하는 것에 대해 기도만 하면 되냐고 비아냥거린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말함으로써 스스로 자신의 기도의 세계에 대해서 아는 바가 별로 없음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 깊고 간절한 기도 속에서 만나는 하나님의 방대하심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이다.
큰 소리로 외치든지 작은 소리로 속삭이든지
주님은 믿음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라
산에 올라 외치든지 골방에 앉아 속삭이든지
주님은 믿음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라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믿음으로 간구할 때에
응답을 약속한 신실한 하나님, 믿음으로 간구할 때에
기도에 대한 은유적(바다) 표현
기도. 그 기도의 세계를 생각할 적마다 나는 드넓은 바다를 떠올리게 된다. 푸르고 끝없는 기도의 바다, 나의 기도 생활은 그 바다 가장자리에서 가랑잎 배나 띄우고 있는 형편에 불과함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 바다보다 하나님의 어떠하심과 누구이심을 가장 확실하게 경험할 수 있는 곳이 어디 있을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그분을 알게 하지만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거룩하신 성품을 경험하게 해준다.
성경 말씀은 우리에게 그분의 존재와 인격을 가르쳐 주지만 기도는 그분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해준다.
기도. 그 드넓은 기도의 바다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하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가 언제까지나 바닷가에서 모래성이나 쌓는 어린아이로 머물기를 머물러 있기를 원하시지 않는다.
오히려 기도의 바다 한가운데로 나아가기를 원하신다. 기도의 바다로 나아갈 때 우리는 남들이 듣지 못하는 표효하는 격랑의 회오리 바람과 그 시대를 향한 진노의 폭풍 소리를 듣는다.
기도의 바다로 노를 저어 더욱 더 멀리 나아갈 때 우리는 그 바다에서 이 시대의 조국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애통하시는 눈물을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서 그리스도의 교회와 자기의 백성들을 사랑하신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만나기에 우리는 그 기도의 바다의 소망을 발견한다.
그리고 때로는 잔잔한 바다의 평온함과 갈매기들의 노래들 속에서 우리는 “내가 너와 함께하노라” 하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
교회를 향한 적용
지금이야말로 우리의 교회가 깨어나야 할 때다.
무엇보다도 그동안 영적으로 우리를 묶어온 온갖 얽매인 죄의 사슬들을 끊고 드넓은 기도의 바다 한가운데로 나아가야 할 때다.
이 기도 시간에 관한 그 많은 진리들을 다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신앙 공동체가 각성되고 조국 교회가 영광스러움을 회복하고 이 민족이 의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원하시는 신자들이여, 이것을 기억하라.
역사 속에서 교회가 영적으로 각성되고 영광스러움을 회복하기까지 특별히 먼저 깨어나 일어선 기도의 사람들이 있었고, 이들이 기도할 때 그리스도인들은 깨어났다.
오랜 세월 영적인 잠에서 깨어난 교회는 다시 한번 “만민을 위한 기도의 집”으로 회복되었다.
그러므로, 베개에 얼굴을 묻고 일이십분 기도하는 것으로 여러분의 영혼의 위안을 삼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으시길 거절하신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기도의 실천으로써 그것이 사실임을 입증하라.
진정으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인 깊은 잠에서 깨어나기를 원하고 교회가 그 약속된 영광을 회복하기를 원한다면, 먼저 하나님께 기도로 매달리는 일에 있어 헌신된 그리스도인이 되라.
목회자를 향한 적용
진정으로 여러분이 조국 교회와 여러분의 공동체가 이 민족을 이끌어갈 영적 지도력을 회복하길 원한다면, 더 오랜 시간을 무릎으로 싸워라.
잠들어 있는 우리 시대의 교회들이 깨어나 “만민을 위한 기도의 집”이 되게 하자. 기도에 헌신이 없는 눈물은 종교적 감상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먼저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가 누구를 영적으로 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겠는가?
역사적으로 교회가 그 자신의 영광을 회복한 그 뒤에는 목숨을 걸고 기도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자신의 마음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쏟아부으며 하나님 앞에서 그 시대의 과제를 짊어지고 그들을 대신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간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들을 깊은 기도 속에서 만나주셔서 그 시대와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와 사랑의 마음을 미리 알게 하셨다. 그것은 하나의 전쟁이었다.
그것은 차라리 기도의 투쟁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자기들의 민족과 조국의 교회를 위한 기도의 전투였다.
주님의 책망을 듣습니다. “너는 기도 쉬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던 사무엘의 소리가 들리지 않느냐!” 하시는 말씀이 골수에 사무치게 들려 옵니다.
기도자로서 각성하는 계기가 됩니다.
기도자로서 먼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선포하는 설교자가 되어야 함을 깨달았습니다.

III. 결론 및 적용

사랑은 형이상학적으로 말하면 관계를 맺으려는 마음의 성향입니다.
관계가 없는 사람과는 관계를 맺고 싶어하고 관계가 있는 사람과는 더 깊은 관계를 맺고 싶어합니다.
삼위하나님의 이런 서로 사랑의 속성이 천지창조와 인간창조를 이루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존재로 관계를 맺으며 살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인된 우리를 사랑하셔서 찾아 오셔서 죽기까지 사랑하심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예배하는 사람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라는 방편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는 마치 두 날개와 같습니다.
말씀과 기도의 두 날개를 가지고 하나님을 향하여 날아 올라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우리가 높이 올라갈 수록 하나님의 보시는 것처럼 세상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듣고 마음 속에 예수님의 통곡과 책망을 들으셨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을 만나는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의 어깨가 가렵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어깨에 말씀과 기도라는 날개를 달아주실 것입니다.
이미 날개가 있으신 분들은 더 크게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잠들어 있던 우리의 심령을 깨우시고 주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이제 여러분의 마음을 형식에 담으십시오.
물이라는 내용을 마시려면 컵이라는 형식이 있어야 하듯이
시간과 공간 안에 말씀과 기도에 대한 헌신을 담으십시오.
나는 30분 동안 언약교회당에서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리라.
나는 1시간 동안 언약교회당에서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리라. 나는 2시간, 나는 3시간.
말씀의 빛과 기도의 뜨거운 열기를 끊어지지 않게 하리라.
저는 2시간에서 3시간으로 넘어가는 것을 아직 어려워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가지고 눈물로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전하면서 뭇 영혼들이 주께로 돌아오도록 하는 것이 우리를 교회로 부르신 사명입니다.
예수님의 보시는 진리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하나님과 원수된 자들을 긍휼히 여기며 웁시다.
우리의 자녀들을 위하여 웁시다.
예수님의 진노하시며 기도를 종용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읍시다.
불평의 말을 내려놓고 기도의 입술로 무릎을 꿇읍시다.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시는 목사님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환우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눈 멀어 멸망으로 달려가는 전도 대상자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우리의 어두운 눈을 열어 주시고 언약 교회가 기도의 집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합시다.
교회가 기도의 집으로 회복되는 일 없이는 이 세상을 위해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이루는 도구가 될 수 없다.
여러분이 기도의 사람이 되기 전에는 결단코 이 민족과 조국의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애통하시는 사랑을 이해할 수 없다.
우리의 공동체가 이 민족을 위해 아무리 많은 비전을 가슴에 품고 뜻을 모은다고 하자. 그렇게 할지라도 교회가 만민을 위한 기도의 집으로 회복되지 않는다면 그 모든 도모에도 불구하고, 멸망을 앞둔 도성 속에 잠들어 있는 예루살렘 성전과 같은 처지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의 교회가 깊은 잠에서 깨어나기를 원하는가?
탐욕과 부패로 물든 세상에서 교회가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으로 나타나기를 소망하는가?
정녕 이민족이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는 백성이 되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우리 모두는 이토록 기도하지 않는 삶에서 돌이켜야 한다.
이제까지 입술로 섬기는 삶에서 무릎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삶으로 돌아서라!
온 마음을 다하여 우리의 교회가 기도의 집이 되게 하라!
기도가 여러분의 신앙 인격의 특징이 되게 하라.
여러분이 다시 한번 무릎으로 하나님을 섬기기로 결심할 때 교회는 깨어날 것이며 교회의 영광은 회복될 것이다.
조국의 교회들이 그 모든 백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 될 때 강퍅한 이 불신의 시대, 강철같이 굳은 이 백성들의 뺨에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으로 말미암는 감격의 눈물이 흐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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