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랴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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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총과 연합의 막대기

지난주 까지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10장 전반부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 - 주시리라는 약속과 다른 것 찾지말라 왜냐하면 헛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스가랴 초반에 등장한 메시아 예언은 싹에서, 왕과 제사장직을 겸하고 이어서 공의와 겸손의 왕으로 오셔서 어떤 일을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12월 성탄을 향하는 이때에 이런 예언이 이루어짐을 함께 묵상한다면 귀한 말씀일 것입니다.
계속해서 내가 목자들에게 노를 발한다. 모퉁잇돌이 그에게서 나온다. 나온 그를 용사와 같이 한다. 원수를 밟을 것, 말 탄 자들을 부끄럽게 한다는 말씀은 공의가 어떻게 작동되는 것인지 그리고 구원이 일어납니다. 6절에 구원하겠다. 불쌍히 여기고 돌아오게 할 것이다. 요셉 족속 뿐만 아니라 북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에브라임도 구원하시는데 7절에 ‘구원을 보고 기뻐한다’ 그들의 마음이 즐거울 것이다고 선포합니다. 이런 구원은 9절에 ‘여러 백성들 가운데’ 일어나고 돌아오게 될 것과 이집트, 앗시리아, 길르앗, 레바논까지 돌아오게 되면 10절 후반 ‘그 땅이 살기에 비좁을 것’이라고 미래적인 놀라운 선포를 합니다.
여기에서 먼저 주의해야 할 점을 하나 말씀드립니다. 현재 이스라엘이 이런 구절들을 이용해서 다시 메시아의 도래를 새롭게 지을 3성전과 함께 꿈꾸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찌보면 맞아 들어가는 모양이죠. 흩어진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여 나라를 다시 세우고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번영한 이스라엘은 국토가 좁은 상황에서 가자 지구를 자신들의 영토로 만들려는 야욕도 이런 성경 구절을 이용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백투더 예루살렘과 같은 신사도 운동도 다시 고개를 드는 이유가 어찌보면 이런 구약의 내용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신약의 예수를 부정합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바라는 메시아의 모습과 다르기 때문이죠. 예수께서 오셔서 하신 천국 복음이 자신들의 이익과 부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설득되고 논리적으로 맞는 것처럼 보인다고 혹해서 예수를 잘 믿다가 이상한 길로 빠질 수 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합니다.
이어지는 11장에서는 앞서 9장에서부터 계속되는 선지자의 선포가 스가랴 자신의 이야기와 같이 병행되어 혼돈이 있을 수 있습니다. 먼저 레바논에 대한 심판 경고가 3절까지 등장합니다. 자주 말씀드렸는데 레바논의 백향목이라고 할 만큼 대표적인 백향목과 2절의 잣나무는 건축의 대표적인 재료입니다. 아가 1:17 “17 우리 집은 백향목 들보, 잣나무 서까래로구나” 짧은 3절의 레바논 심판은 레바논의 특정한 잘못보다는 권력과 재물에 의해 움직이는 두로와 시돈과 같이 그들이 믿던 백향목과 잣나무와 같은 천연 자원에 의존하며 부를 누리는 자들을 향한 대표적 심판으로 이해해도 될 것입니다.
이어지는 4-14절까지 참 목자에 대한 말씀을 선포합니다. 이 부분이 앞서 말씀드린 스가랴 자신의 이야기처럼 되는데 예언의 선포인지 비유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예수께서 오셔서 당하신는 고난과 무관하지 않는 예언으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먼저, 4절에 ‘잡혀 죽을 양 떼를 먹여라’ 고 여호와께서 스가랴에게 말씀하십니다. 7절에 ‘나는 잡혀 죽을 양 떼를 돌보았다’라고 말합니다. ‘잡혀 죽는다’ 무슨 말일까요? 5절에 사람들은 그것들을 사다가 잡아도 벌을 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부요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양 떼를 이익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죠. 양 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죠. 오히려 그들은 부정한 방법의 이익을 여호와를 찬송하고 목자들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았다는 고발입니다. 앞서 돌아온 백성, 구원 받은 백성에게 이렇게 살아라고 했던 말씀과 그렇지 않고 심판 받을 시돈, 두로 등 레바논 처럼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이걸 하나님께 복을 받은 것이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6절 ‘불쌍히 여기지 않겠다’라고 잡혀 죽을 양 떼를 먹였던 스가랴가 말합니다. 이런 동시적인 구조, 즉 스가랴의 행동 같으면서도 하나님의 뜻인 구조를 통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적극적인 인도하심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불쌓히 여기지 않는다는 표현은 심판 받는다는 것입니다. 왜 심판 받지 않습니까? 불쌍히 여기기 때문에 심판이 넘어가는 것입니다.
시편 32:1–2 “1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2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나와 토로하는 백성을 우리가 소선지서에서 살폈던 기억이 있습니까?
우리 생각에 자꾸 하나님 앞에서 내가 한 걸 꺼내려 해요. 그리고 이건 잘못한 건 아니잖아요 라고 말합니다. 이런 말은 사실, 말도 잘 못하는 어린 아이들이 하는 행동입니다. 부모가 좋은 습관을 가르치기 위해 친구에게 과자하나 줄래 하면 그걸하고 부모가 칭찬을 하면 다음에도 그렇게 해요 왜냐하면 부모의 칭찬을 받고 싶으니까요. 이런 행도은 어릴 때 하는 행동이죠. 학교를 다니고 배우면서 성장이 따라와야 하는데 이스라엘 백성은 그렇게 성장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70년이라는 포로 생활에서 돌아와 지어지는 성전을 보면서 다시 우쭐해지고 교만하려는 태도를 다잡으려 스가랴 선지자를 보내신 것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7절에 스가랴는 ‘나는 잡혀 죽을 양 떼를 돌보았다’ 이런 일들이 있기 때문에 70년의 포로 생활을 견딘 것입니다. 포로 시기에 바벨론에 에스겔 선지자를 보냈고, 폐허가 되는 예루살렘에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회복을 이야기했고 포로 시기에도 다니엘과 같은 친구들이 좋은 자리에 올라 민족을 돌보고 에스더 같은 여인도 민족의 진멸을 막기 위해 죽으면 죽겠다는 믿음의 헌신을 했다는 거죠.
이어지는 단어 ‘라켄’은 참으로, 특별히 등 문맥상 접속사의 형태로 사용되지만 앞선 행위의 이유를 강조한 형태로 ‘가련한 양들’ 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하심이라고 하는 말씀이 이것이죠. ‘잡혀 죽을 양 떼’를 돌보는 스가랴는 지팡이 두 개를 취해서 하나는 ‘은총’ 하나는 ‘연합’이라고 이름 짓고 양 떼를 돌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시편 23:4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그럼에도 8절 ‘한 달 동안에 내가 그 세 목자를 제거했다’는 말씀은 삯군 목자라는 것입니다. 지금 말로는 ‘해고’했다 입니다. 그들은 스가랴를 미워했습니다. 즉 하나님을 미워했다는 말입니다. 신기하죠. 공의와 겸손이 행해지는 자리에 일어나는 첫 번째가 서로를 미워합니다. 그 시작으로 시기하고 상대의 잘못을 찾아 마치 자신의 정의로운 것처럼 행동합니다. 그래서 무리를 만들고 함께 공격합니다. 여기 세 명의 목자들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스가랴는 9절에 ‘내가 너희를 먹이지 않겠다’라고 선포합니다. ‘나는 더 이상 너희를 돌보는 목자 노릇을 하지 않겠고, 죽은 놈은 죽고, 망할 놈은 망하고, 남은 것들은 서로 잡아 먹는다’는 표현입니다.
10절에 ‘은총’이라는 막대기를 꺽었다. 맺은 언약이 취소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11절에 그 언약은 당일에 폐하여 집니다. 그런 중에 ‘내 말을 지키던 가련한 양들은 이것이 여호와의 말씀이었던 줄 안지라’ 알게 된다는 깨달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스가랴는 그들에게 자신의 삯을 요구하며 은 삼십 개를 줍니다. 노예 한 사람을 살 돈이라고 합니다. 하찮은 가치로 여기는 것입니다. 선지자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가 전하는 하나님이 말씀을 그렇게 여기는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예수께서 은 삼십개에 팔린 사건을 볼 때도 유대 공의회가 예수를 얼마나 하찮게 여겼고, 조롱의 대상으로 삼았는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13절에 ‘그들이 나를 헤아린 바 그 삯’은 그런 것입니다. 그것을 성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로 스가랴는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집니다. 그리고 연합이라는 막대기 마저 꺽어버립니다. 연합은 이 땅을 살아가며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입니다. ‘고독한 존재’의 인간은 그 내면에 항상 불안함을 갖고 살아갑니다. 누군가 이야기하고 그러면서 자신의 존재를 발견합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2:18 “18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좋지 않다는 표현이 계속 사용하는 토브의 부정적 ‘로’가 붙어 ‘로 -토브’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려하신 것은 ‘죄 없음’의 상태인데 상태 자체도 중요하겠지만 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결국은 서로간의 돕는 형태, ‘돕는 베필’의 궁극의 모습인 사랑의 관계 때문이죠. 그 관계를 회복하시는 것입니다. 자주 사용하는 예로 눅15장의 표현이 그것이고, 더 나아가 요15장의 포도나무의 비유가 관계의 이루어짐이며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는 말씀과 결국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화목은 고린도후서 5:18–19 “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19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요한복음 14:6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우리는 어떻게 하면 됩니까? 히브리서 10:22 “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하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선지자는 두 개의 지팡이 ‘은총’과 ‘연합’을 꺾는 것은 하나님께 나아감, 그분과 함께 함, 동행함을 꺽는 것입니다. 물론 1차적으로 유다와 이스라엘 형제의 의리를 끊으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총과 연합의 막대기는 이 땅에 오신 예수께서 알려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과 하나됨’입니다. 그런데도 유대인의 공의회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국 하나님의 아들을 거부했습니다.
15절부터 그런 상태 즉 어리석은 목자들에 의해 마음을 빼앗기고 길을 빼앗긴 자들의 악행이 선포됩니다. 16절에 ‘내가 이 땅에 한 목자를 세우겠다’ 그런데 이 목자는 양 떼를 돌보지 않고, 양 떼를 착취합니다. 그래서 그는 17절에 화 있을진저 즉 저주 받은 운명이라는 것입니다. 왜 이런 자가 등장합니까? 하나님을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5:18–19 “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그런 세상은 결국 자기하고 싶은대로 살고 싶다고 그들끼리 연합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연합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아니 버리는 것이죠. 세상의 이익과 가치가 더 크게 보이기 때문에 말 그대로 가차없이 하나님을 떠나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떠나는 둘째 아들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등장하는 목자는 선한 목자와는 전혀 다릅니다. 언제나 이익에 따라 양 떼를 버리는 쓸모 없는 목자에게 재앙이 닥친다고 17절은 말합니다. 여러분 그렇기에 중도는 없습니다. 상당히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중도에 서 있다고 착각합니다. 마치 내가 서 있는 기준으로 지구가 자전하고 공전하는 것처럼 말합니다. 그런 사고는 결국 멀리 떨어져 나간 후에나 알게 되고 후회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15–16 “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여러분도 살면서 미적찌근한 사람, 결정하지 못하는 사람 그런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얼마나 답답합니까? 결국 그런 사람이 많은 공동체는 앞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세상 흐름에 떠밀려 떨어져 나가기 때문에 라오디게아 교회가 책망을 받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 입니다. 왜 먹을게 없냐면 심지 않았기 때문이죠. 젊고 어릴 때 많은 곳에 다양한 방법으로 심어보는 것입니다. 물론 일찍 자신의 달란트를 깨달아 한 길로 가는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겉 보기에는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는 길이지만 그냥 갑니까? 아니죠. 그 길에도 다양성은 있습니다.
스가랴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길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성전을 짓고 눈에 보이는 영광을 좇지 말고 그보다 더 큰 영광을 보라는 것입니다. 다시 너희가 일러준 대로 살아내면 심으면, 훈련하면 그 길이 맞다고 믿음으로 걸어가면 하나님께서 영광의 길, 하나님의 나라 백성으로 맞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0:27 “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음성을 들으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중도의 길이 아닙니다. 머무르는 것은 후퇴며 성장하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오늘은 내일보다 나으리라는 꿈으로 산다’고도 노래하지만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여기저기서 희망의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노래가 없다면 좌절하고 절망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허망해도 자신이 그리는 상상에 매료가 됩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확실한 미래를 말씀하십니다. 예레미야 29:11 “1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잠언 4:18 “18 의인의 길은 돋는 햇살 같아서 크게 빛나 한낮의 광명에 이르거니와”
스가랴는 백성들에게 다시 포로로 잡히는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인도하심을 믿고 세상의 방식을 따라 살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 내도록 권면하며 미래적인 예언을 선포합니다. 힘들지 그래 안다 그럼에도 기다리면 오시는 공의와 겸손의 왕이 너희를 진정한 구원으로 참된 누림을 갖게 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다면 자신의 힘과 돈을 믿는 시돈이나 두로처럼 천연자원을 믿는 레바논처럼 멸망의 길로 가게 될 것이다. 그것을 말하고 그 방향을 가리키는 거짓 선지자. 목자들을 따라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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