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인물이야기-21. 베드로

주일오후예배(인물설교)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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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요한복음 21장 15~19절(신약 185쪽)
설교제목: 성경인물이야기-21. 베드로
15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반갑습니다.
주님의 한량없는 은혜가 늘 충만하시길 축복합니다.
우리 서로를 축복합시다.
“잘 오셨습니다. 주님의 은혜가 가득히 임하기를 소망합니다.”
언제가 ‘유퀴즈’라는 방송을 보았습니다. 연세대학교의 어떤 교수님이 ‘꾸물거림 또는 미루기’를 연구한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세상에는 특이한 것을 연구하는 사람도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교수님의 주 연구는 완벽주의적 성향을 가진 사람이라고 합니다. 완벽주의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의 특징 가운데 이런 모습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특별히 학생들이 시험 전날 무엇을 하는지 관찰을 해 보았다고 하면서 이런 얘기를 합니다. 많은 경우에 학생들은 시험공부는 뒤로 미루고 딴짓을 합니다. 가령, 유튜브나 흥미 위주의 방송을 보면서 하나 같이 똑같은 얘기를 합니다. ‘이것만 보고 공부하려고 했다’라고 말입니다.
그러고 그 시험을 망치고 나면, 다음엔 유튜브를 보는 대신에 책상을 치우기 시작합니다. 공부할 준비를 위해서 책상을 치웁니다. 문제는 그 정도가 과하다는 것입니다. 평소라면 그렇게까지 빡빡 닦고 문지르지 않았을 책상을 먼지 하나 남기지 않겠다는 식으로 심하게 깨끗하게 치웁니다. 그렇게 책상을 치우고 나면 뿌듯한 마음이 됩니다. 그러면서 대부분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좀만 자고나서 할까?’
그렇게 또 시험을 망치게 됩니다. 이렇게 시험을 앞둔 전날에 유형은 다르지만요. 시험공부를 미루는 사람들의 공통되는 특징이 발견됩니다. 바로 딴짓하는 것에 정작 해야할 일은 집중하지 못하고 다른 것에 흥미를 두는 것입니다.
이렇게 미루는 원인은 여러 유형으로 나눠지는데요. 특별히 완벽주의적 성향이 있는 사람은 이렇습니다. 조금만 잘못을 해도 자신을 자책하고 죄책감을 느끼며 우울해져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을 힘들어합니다. 다시 말해, 너무 완벽하게 하려고 하다보니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목표를 설정해 놓고 그것에 가닿지 않음으로 괴로워하고요. 또 조금이라도 그 목표나 이상에서 벗어나는 것을 못견뎌 합니다. 또한 그것에 스트레스를 받으니 쉽게 어떤 일을 시작하지 못하고 계속 꾸물거리거나 미루게 됩니다.
제가 일전에 밝혔는데요. 저는 완벽주의적 성향을 가진 사람입니다. 제가 생각할 때, 지금은 과거보다는 조금 누그러 듯것 같은데요. 여전히 제가 생각하는 이상이나 목표는 높고 그것에 닿지 못함으로 자책하고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종종 생깁니다. 그러다보니 어떤 일을 시작하고 끝내는 것이 용두사미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시작은 굉장히 거창하게 합니다. 이 일을 통해 마치 인류를 구원할 것 같은 목표로 합니다. 그런데 그 일의 시작은 계속 지연되거나 미뤄집니다. 결국, 마감 일자에 닥쳐서 허덕이며 그 일을 끝내버립니다.
저는 이런 제가 바뀔 수 있는지가 고민입니다. 분명 조금씩 좋아지는 것 같긴 한데요.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람이 변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사람이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십니까? 오늘 성경 이야기는 이에 관해 말해 주고 있습니다. 과연 성경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를 같이 살펴보려 합니다.
오늘 성경이야기의 핵심적인 장면을 그려보면 이러합니다. 예수님과 베드로가 대화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에 브로맨스가 싹트고 있는 것일까요? 대체 예수님과 베드로는 왜 이런 흥미로운 대화를 하고 있을까요? 과연 두 사람 사이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베드로는 어부입니다. 그는 갈릴리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보통 깊은 밤에 나가 해가 떠오르기 전까지 그물을 내려 물고기를 잡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처음 만날 때도 물고기를 잡던 때였습니다. 더 정확히는 해가 떠올라 물고기 잡는 것을 멈추려던 때였습니다.
갑작스레 베드로를 찾아오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보십시오.’ 평소 같으면 베드로는 이런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는 어부입니다. 물고기 잡는 일에 관해서는 이미 충분히 잘 알고 있습니다. 더욱이 예수님을 만난 시각은 그물을 걷어야 할 때입니다. 어부도 아닌 사람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하는 얘기를 본래는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신에 찾아오신 예수님이 특별한 분임을 알았습니다. 그는 근래에 사람들에 부쩍 관심을 받는 인물입니다. 베드로가 직접 보진 못했지만요. 예수님께서 여러 이적을 일으킨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베드로는 평소와 달리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 저희가 밤새도록 수고하였으나 물고기를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하지만 선생님 말씀을 따라 그물을 내려보겠습니다.’
아마도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요. 예수님을 시험해 보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을 겁니다. 어쩌면 베드로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지도 모릅니다.
‘나는 이 분야의 전문가야, 내가 해서 안 됐으면 오늘은 안 되는 것이 맞아. 대체 당신이 나보다 이 일을 얼마나 잘 안다고 그런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네. 하지만 당신이 이적을 일으키는 사람이라고 하던데, 그게 진짜인지 이번에 한번 확인해봐야겠어.’
그렇게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서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베드로는 예수님께 무릎 꿇고 말합니다. ‘주님, 저를 떠나십시오. 저는 죄인입니다.’
깊은 곳에 내린 그물은 많은 물고기로 찢어질 지경이 되었습니다. 엄청난 양의 물고기 잡혔습니다. 주변에 있던 다른 배에 도움을 청해야 했습니다. 2대의 배를 가득 채웠고 배가 가라앉을 것 같은 많은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베드로는 이 일을 겪으면서 분명 깨닫습니다. 이분은 진짜다. 당시 사람들을 홀리고 다니는 이들과 다르다. 언젠가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했는데, 정말 이분은 메시아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대단한 분을 내가 감히 시험하려 했다니 자책이 들어서 베드로는 예수님께 엎드려 용서를 구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마십시오. 이제 당신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될 것입니다. 나를 따르십시오.’ 이에 베드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이로부터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변화할 수 있는 존재임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물고기 잡는 어부에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성경에는 베드로 외에도 극적으로 변화한 여러 인물을 소개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사도 바울입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고 심지어 스데반의 죽음에 가담했던 바울이 변합니다. 그것도 적대시 하던 예수님을 찬양하고 그분을 세상 곳곳에 전하는 것에 최전선에 섭니다.
성경 밖에서도 변화는 일어납니다. 1907년 우리나라의 대부흥을 이끌었던 길선주 목사님은 본래 도교의 도사였습니다. 도교에 관해 제가 잘은 모르지만, 대략 도교의 목표는 수련을 통해서 신선이 되는 것입니다. 신선이 되면, 죽음을 극복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수련 중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고 하는데요. 정확히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전설에 따르면, 길선주 목사님이 도사로 있던 시절에는 공중부양을 했다더라, 축지법을 쓴다더라하는 ‘카더라’하는 얘기들이 있긴 했습니다.
제가 흥미롭게 생각하는 것은 이렇게 어떤 조직에 깊숙이 관여하는 사람 특별히 종교적인 영역에서 심취한 사람이 다른 종교로 개종을 한다는 것은 참 놀라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생각인데, 아마 우리가 교회를 평생 다니며 신앙생활을 했다고 한다면, 쉽게 다른 종교로 하다못해 성당으로 나가는 것도 어렵지 않을까 합니다. 그런데 길선주 목사님은 도교의 도사였으니까요. 우리로 치면 목사라고 할 수 있을까요? 어째든 그런 분이 개종을 했다는 것은 참 놀라운 일이라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 이러한 변화가 가능한가라고 했을때,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요. 예수님을 통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베드로, 사도 바울, 길선주 목사님 모두가 예수를 믿고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인생의 방향이 완전히 바뀐 분들입니다. 제가 몇몇 예를 들기만 했지만, 사실은 예수 믿고 변화했다는 이야기는 엄청나게 많습니다. 제가 종종 시청하는 기독교 간증 프로그램만 봐도 수두룩 합니다. 그러니 성경은 우리가 변화할 수 있으며, 그 변화의 중심에 예수님이 계심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만나십시오. 그러면 우리의 인생이 새로와 질 수 있습니다.
어부에서 예수님의 제자로 변화된 베드로의 삶은 어땠을까요? 베드로는 예수님의 12제자 중에서 자주 돋보이는 말과 행동을 보였습니다. 대체로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에 늘 적극적이었고 앞장서는 모습으로 성경에 자주 등장합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베드로의 모습을 꼽자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으로 가셨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이에 베드로는 말합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이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고백은 예수님의 제자 중에서 가장 먼저였으며 예수님을 가장 명확하게 표현하는 고백이었습니다.
사실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이런 고백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가이사랴 빌립보는 크고 화려한 신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곳엔 제자들이 잘 아는 예루살렘 성전보다 더 화려하고 웅장해 보이는 성전들도 있었을 겁니다. 그렇게 번쩍이는 도시에서 남루한 차림의 예수님을 제자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이해를 돕기 위해 좀 속된 비유를 들겠습니다. 예전에 사람의 외모를 비하하기 위해 사용된 표현중에 ‘오징어로 보인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이런 거죠. 드라마나 영화에서 주인공이나 잘 생긴 배우들을 보다가 ‘내 남편이나 내 남자 친구를 쓱 쳐다보면서 그러는 겁니다. 오징어로 보인다’고요. 이게 참, 설교시간에 사용할 적절한 표현은 아닌데요.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예수님을 바라보던 제자들의 심정을 좀 격하고 공감해 보려고 합니다.
남루한 옷차림, 쉴만한 곳도 마땅히 없고, 가진 것은 믿음 뿐인 약 30대 남자인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어떻게 보였을까요? 더군다나 마천루 같은 이방의 신전들이 즐비한 곳에서 예수님을 바라보는 제자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할 수 있었을까요? 차리라 이방지역이 아니라 좀 더 예수님의 장점이 부각될 수 있는 장소였다면 더 낫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그러한 예수님의 모습에 아랑곳하지 않고 베드로는 예수님의 진짜 정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입니다. 이는 달리 말하자면, 온 우주의 주인이시고 세상의 진정한 왕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백이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나온다는 것이 당시로는 기적에 가깝습니다.
또 베드로의 행적 중에서 눈여겨보게 되는 장면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밤에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과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제자 대부분은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그들도 목숨이 아까웠고 그것은 본능적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베드로는 그 과정에서 저항합니다. 어떻게 가지게 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베드로는 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으로 하여금 예수님을 잡으러 왔던 사람과 대항하려 했습니다. 예수님의 만류에 그 일은 계획대로 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다른 제자와 달리 예수님이 잡혀가신 대제사장의 뜰까지 예수님을 쫓아 왔습니다. 하지만 그도 인간이고 목숨이 아까운 것은 본능적인 것이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베드로는 닭이 세 번 울기 전에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합니다. 예수님께 남다른 열심을 가진 베드로였지만 죽음 앞에서는 모두가 그렇듯 그도 두려웠습니다.
이 일로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예수님의 임종을 지키지도 못했습니다.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맞게 될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몸을 낮추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숨어집니다. 그러다가 그들은 다시 전과 같이 물고기 잡는 일로 돌아갔습니다.
이로부터 생각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약합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변화된 삶도 때로는 지켜내기가 힘이 듭니다. 저는 한편으로 우리가 예수 믿고 변화된 후에도 그 변화된 마음과 삶을 지키기 위해 부단한 노력이 필요함을 생각합니다. 어쩌면, 우리 신앙생활과 우리의 삶은 그렇게 하나님께 온전히 서기 위한 계속되는 투쟁이 아닌가 합니다.
목숨을 내 걸며 예수님을 전했던 사도 바울도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빌립보서 3장 12~14절의 말씀인데요. 제가 새번역 성경 버전으로 읽습니다.
빌립보서 3:12-14
12 나는 이것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며,
이미 목표점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 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
13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아직 그것을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일은 오직 한 가지
입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몸을 내밀면서,
14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목표점을 바라보고
달려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변화된 삶을 산다고 했을 때, 혹은 구원받은 삶을 산다고 했을 때요. 그것은 완성에 이른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계속해서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신앙생활은 때때로 참 고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나아가는 길은 세상과는 다른 길이고 자주 세상과 마찰음을 내게 되는 길이니 말입니다.
그러다보니 어떤 분들에게 종종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예전에 비하면 신앙심 또는 믿음이 많이 떨어진 것 같다’ ‘전에는 지금보다 더 열정적이고 열심이었고 했는데, 지금은 과거처럼 열심이지 못한다’라고요.
이런 말씀을 하시는 분들은 대체로 저보다 인생을 더 길게 살아오신 분이고 신앙생활을 저보다 더 오래 하신 분들입니다. 제가 짧은 식견을 가지고 목사랍시고 이래라 저래하는 것이 우습다는 생각을 하는데요. 그러나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이렇습니다. 심지어 베드로를 포함한 제자들에게도 신앙을 지켜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무너지고 퇴보하는 자리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회복하고 돌아오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에 베드로를 비롯한 여러 제자가 본래의 생업인 물고기잡이로 돌아갔습니다. 전에 하던 방식으로 그들은 밤에 나가 물고기를 잡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날은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허탈한 마음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이제 막 동이 트려할 무렵에 한 남자가 베드로의 배 쪽으로 다가옵니다. 아직 빛이 밝지 않아 얼굴을 식별하기 어렵습니다. 그는 베드로에게 말합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면, 물고기를 잡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오래된 기억을 떠올렸습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저으면서 그럴리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분명 예수님은 돌아가셨는데, 그분일 리가 없다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익숙하고 힘이 느껴지는 그의 음성은 그 말을 따라야 할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베드로는 그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리어 그 남자의 얘기를 따라 그물을 내렸습니다. 믿음을 없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물이 터질 듯이 많은 양의 물고기가 그물에 걸려든 것입니다. 점점 밝아지는 햇살 속에 그의 얼굴이 훤히 드러납니다. 그곳에 있던 제자들이 하나둘 예수님이라고 주님이라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너무도 반갑고 또 감격스러운 마음에 배가 땅에 닿기도 전에 물가로 뛰어내려 예수님께 나아갑니다. 놀랍게도 그곳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분명히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그 분이 맞습니다. 손에 못 자국과 허리에 창 자국을 가진 예수님이 맞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 식사를 준비해 주셨습니다. 빵과 물고기로 그들을 먹이십니다. 제자들은 믿을 수 없는 상황에 잠깐 넋이 나가다가도 또 밀려드는 배고픔에 예수님이 준비한 아침을 허겁지겁 먹습니다. 식사를 하는 중에 아무도 먼저 예수님께 말을 걸지 못합니다. 배가 차기 시작하자 왠지 숙연한 마음과 죄송한 마음이 들어찹니다.
식사를 마치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갑작스럽게 쏟아진 질문에 베드로는 당황스럽다가도 정말로 주님이시구나 하며 한편 안도감을 느낍니다. 베드로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합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같은 질문은 세 번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처음엔 그 질문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질문을 거듭하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위로하시는 것이구나. 베드로는 내장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것이 솟구쳐 올라옵니다. 금방 눈시울이 붉어지며 울음이 터지려는 것을 꾹 참습니다. 하지만 얼마 견디지 못하고 베드로는 어린 아이처럼 울부짖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다시 사명을 주십니다. 다시 사람을 낚는 어부의 삶을 이어가도록 그를 격려하시고 위로하신 것입니다. 그가 앞으로 견뎌야 할 시련은 지금보다 더 혹독한 것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직이 베드로에게 그 시련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전설에 따르면, 베드로는 예수 믿으라고 전도하다가 십자가 달려 죽게 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같은 모양으로 십자가에 달릴 수 없다고 하여서요.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순교했다고 합니다.
베드로의 이야기를 살피면서 저는 생각합니다. 사람은 변화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 변화는 예수님을 통해 가능한 것임을 또한 알게 됩니다. 그런데 그 변화는 완성된 변화가 아니라 완성을 향해 가는 변화입니다. 베드로처럼 신앙이 흔들리고 다시 이전의 자리로 습관과 본능을 좇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 본문은 예수님은 우리가 거기에 머물기를 바라지 않으심을 봅니다. 다시 회복하여 온전히 믿음의 경주를 이어가길 바라십니다.
베드로처럼 우리는 때로 실패의 자리에 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고 우리를 다시 주님의 길로 초청하십니다. 우리가 거기에 머무르지 않으면, 우리는 놀라운 변화를 맞보게 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의 저자인 마가도 그랬습니다. 그는 사도 바울과 바나바의 1차 선교여행에 동행했던 인물로 처음 성경에 등장합니다. 그는 바나바의 조카였고 그 덕분에 역사적인 여정에 함께 참여할 소중한 기회를 얻었습니다.
하지만 마가는 그 여정이 너무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마가는 1차 선교여행 도중에 집으로 돌아가버립니다. 2차 선교 여행을 계획하면서 사도 바울과 바나바는 마가를 데려가는 문제로 갈등합니다. 바나바는 마가에게 다시 기회를 주자 했고 사도 바울은 그럴 수 없다는 대립니다.
결국, 사도 바울은 실라라는 새로운 동역자와 2차 선교여행을 떠납니다. 그리고 바나바와 마가가 또한 한팀이 되어서 2차 선교여행을 떠납니다. 그 후로부터 바나바는 무대에서 사라집니다. 바나바의 선택은 어떤 결과를 가지고 왔는지 성경은 자세히 알려주지 않지만요. 훗날 사도 바울은 마가를 이렇게 부릅니다. ‘유익한 사람’, ‘동역자’ 그 마가는 변화하였고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훗날 마가는 베드로의 제자이자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마가는 그리스어가 능통했고 베드로에게 사사를 받으며 베드로의 통역관으로 사역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를 통해 들은 예수님의 이야기를 마가복음이라는 책으로 써냅니다.
세상에는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사람이 변한다고 분명하게 이야기합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배신했던 이들도 예수님은 변화시킨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그분으로 인해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 과정에서 실수 또는 실패와 같은 사건을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다시 초청하십니다. 우리가 그 초청에 응한다면, 우리는 이전보다 단단해지고 깊어진 믿음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가롯 유다는 자신의 잘못을 견디지 못하고 비극적인 선택을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 나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끝까지 손을 내미십니다. 우리가 그것을 거절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구원의 기회는 아직 있습니다.
바라건대, 저는 오늘 우리가 예수님이 내미시는 그 구원의 손을 붙잡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께서는 오늘 넘어지고 방황하는 우리에게 여전히 손 내밀고 계십니다. 그 손을 붙드셔서 다시 일어나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다시 견고하게 세워가는 일에 힘쓰는 우리 성도님들 다 되시길 간절히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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