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영원한 집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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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고린도후서 5:1(신약 290쪽)
설교제목: 우리에게 영원한 집이 있습니다.
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이 시간 주께서 이곳에 함께 하셔서 유가족들을 위로하시길 빕니다. 오늘 나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힘이 되길 소망합니다.
사람은 죽습니다. 이것은 오랜 역사를 통해 검증되어온 진리입니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이 진리를 빗가나간 사람은 없습니다. 결국, 저도 마찬가지지만 여러분도 언젠가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죽음은 나이 순으로 오지도 않습니다. 제게는 저보다 나이 어린 남자 사촌 동생 둘이 있습니다. 나이 차이가 크지 않아서 어린 시절부터 형제처럼 지냈습니다. 하나는 몇 년 전에 또 하나는 올해 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처럼 죽음은 불시에 우리에게 닥칩니다.
그런데 우리는 죽음에 관해 별로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저 죽음은 언젠가 막연히 내게 닥칠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하지만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고 나이가 젊다고 안심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죽음을 생각하고 준비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저는 목사여서 성경을 통해 오늘 죽음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과연 성경은 죽음에 관해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요? 특별히 오늘 나눌 성경 구절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고린도후서 5:1(신약 290쪽)
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이것은 무슨 말일까요? 이는 죽음 이후에 새로운 삶이 있음을 말해줍니다. 우리의 장막 집은 이 땅에서의 삶을 뜻합니다. 반면에 영원한 집은 죽음 이후에 하늘에서의 삶을 뜻합니다.
이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바울이라는 성경 인물입니다. 그는 예수를 믿으라고 전하는 전도자입니다. 그는 전도 활동을 하면서 또한 장막을 만드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가 장막을 만든 것은 여러 종류의 사람을 만나 전도하기 위함이었고요. 또 이를 통해 전도 활동에 필요한 비용을 스스로가 충당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렇게 장막을 만들었던 바울의 경험은 이 성경 구절에 반영되어 나타납니다. 당시 장막은 유목민과 여행자들이 이동하며 임시로 거처할 숙소 역할을 했습니다. 또한, 군대의 군인들이 이동하면서 주둔하기 위한 임시 막사이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장막은 다양한 이들의 거처이지만 임시적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장막은 온전히 편안히 머물 수 있는 숙소가 아닙니다.
바울은 이러한 장막을 마치 이 땅을 사는 우리의 모습 또는 우리의 육체로 비유하였습니다. 우리의 삶 또는 우리의 육체는 이 땅에서 영원히 머무르지 못합니다. 언젠가 죽어서 썩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우리에게 영원한 집이 있음을 얘기합니다. 다시 말해, 이 땅에서의 삶이 전부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죽음 이후에 우리가 영원히 거할 집이 있음을 얘기합니다.
이것이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죽음입니다. 그렇다면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얘기 또는 죽음 이후에 새로운 삶이 있다는 얘기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먼저는 죽음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죽음은 어떤 느낌으로 다가오십니까? 일반적으로 죽음은 두려움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처음에 말한 것처럼 사람들에게 죽음은 피할 수 없고요. 또한, 죽음은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결국, 죽음이 두려운 것은요. 우리가 죽음을 피할 수도 없고 죽음이 우리의 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앞서 말씀드렸듯이 오늘 소개해드린 성경 구절은요. 죽음이 끝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오히려 죽음이 새로운 시작이고 더 영원한 것임을 말합니다. 사실은 현재 우리가 사는 삶 또는 육체를 지닌 삶이 오히려 임시적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현재 우리의 삶 또는 육체를 장막에 비유합니다. 반면 죽음 이후의 삶을 영원한 집으로 비유합니다. 이는 죽음이 끝이 아닐뿐더러 죽음 이후에 새로운 삶 영원한 삶이 기다리고 있음을 말합니다.
그런데 사실을 말씀드리면요. 죽음 이후에 관해서는 아무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죽음 이후에 벌어지는 일에 관해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실상 보통 사람들의 걱정처럼 죽음이 완전한 끝일지 또는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죽음 이후에 또 다른 삶이 있을지 사실은 알 수 없습니다.
제가 ‘사실’이라고 했습니다. 사실은 진실과는 다릅니다. 사실은 눈에 보이고 물리적인 차원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반면 진실은 그 너머에 있습니다. 마치 이런 겁니다. 어떤 사람이 울고 있습니다. 그는 슬픈 걸까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단지 사실은 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슬픔에 관한 진실은 사실을 통해서는 밝혀내기 어렵습니다.
마찬가지로 죽음 이후의 진실을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단지 사실은 사람이 죽는다는 것뿐입니다. 그 죽음 이후에 관해 우리는 볼 수 없으므로 또한 관찰하고 증명할 수 없으므로 우리는 모릅니다. 진실이 죽음이 끝인지? 아니면 죽음 이후에 영원한 삶이 있는지 말입니다.
그래서 죽음이 끝이라는 생각도 믿음이고 죽음 이후에 새로운 삶이 있다는 것도 믿음입니다. 왜냐하면, 둘다 증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가 어떤 것을 믿느냐에 따라 죽음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죽음이 끝이라고 여긴다면, 앞서 말한 것처럼 죽음은 두려운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죽음 언제 닥쳐올지 알 수 없는 공포로 또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무로 돌리는 위협으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죽음이 끝이 아니라면, 어떨까요? 또 지금과는 다른 새로운 삶이 있다면 어떨까요? 그렇게 믿을 때 죽음이 마냥 두려움으로만 다가오지 않을 것입니다. 어쩌면 죽음 이후를 우리는 소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 구절을 통해 바울은 죽음 이후를 장막과는 다른 영원한 집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의 삶은 장막처럼 일시적이고 유한할 수 있지만, 죽음 이후의 삶은 영원한 집처럼 영원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나을까요?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이 이야기를 통해 죽음을 찬양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이야기를 하는 목적은 오히려 그 반대에 있습니다. 죽음을 생각함으로써 현재 우리의 삶을 더 잘 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다시 말해 죽음이 끝이 아니므로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더 잘 살아낼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죽고 나서 내가 살았던 삶의 시간은 어떻게 될까요? 죽음이 끝이라면,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저 사라져 버릴 테니 말입니다. 다만, 살면서 쌓아 놓은 것들이 잃게 되므로 그것이 고통스러울 수 있습니다. 또 두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죽음 이후에 더는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 이야기처럼 죽음 이후에 영원한 삶이 있다면, 어떨까요? 아마도 그것은 우리에게 매우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가령, 우리가 죽음 이후에도 현재의 삶을 기억한다고 하면요. 영원한 삶 속에서 그 삶은 계속 영향을 줄 것입니다. 내가 현재의 삶을 잘 살아왔다면, 죽음 이후에 삶은 너무나 행복한 기억들을 오래도록 영원히 간직하는 삶이 될 것입니다. 영원토록 기쁨을 누릴 테니 말입니다.
반면에 그렇지 못하다면, 영원한 삶이 오히려 불행이고 저주일 수 있습니다. 삶의 기억을 불행으로만 채웠다면요. 그것을 되풀이하는 것은 고통입니다. 그것이 영원히 되풀이된다면 그것은 말 그대로 지옥이 될 것입니다. 차라리 계속 사는 것보다 그냥 소멸하는 것이 낫다고 여길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이런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면, 죽음 이후가 없다고 믿으면 되지 않느냐고요. 그것이 오늘의 삶을 훨씬 더 즐겁게 즐기면서 살 수 있지 않겠느냐고요. 어차피 죽으면 끝인데, 뭘 그렇게 걱정하며 사느냐고요. 하지만 이것이 매우 위험한 선택이 될 수 있음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17세기 유명한 수학자이자 철학자이며 신학자인 파스칼이란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기독교인이긴 하지만 또한 수학자이면서 철학자이기에 합리적인 차원에서 생각했던 사람입니다. 그가 말년에 쓴 ‘팡세’라는 그의 책에서 그는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신이 존재하는지 아닌지 선택해야 한다면, 당신은 망설이지 말고 신이 '있다' 쪽에 내기를 걸어야 합니다."
파스칼이 이런 말을 한 것은요. 이렇게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으니 하나님이 계신지 안 계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계시다고 믿는 것이 더 합리적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안 계시다면, 하나님 없이 사는 것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계시다면 하나님 없이 사는 삶은 큰 문제가 됩니다.
다시 말해서,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는데 죽어보니 죽음 이후의 삶이 있다면요. 우리는 매우 곤란한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계신지 안 계신지 알 수 없을지라도요. 하나님이 계신 것처럼 사는 것이 더 좋고 합리적인 삶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죽음 이후의 삶이 있음을 믿는 것이 지혜로운 선택입니다.
이러한 죽음의 이해가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다른 의미는요. 우리의 삶이 달라집니다. 우리의 삶의 가치가 달라지고 그에 따른 삶의 방식이 달라집니다.
우리는 많은 경쟁 속에서 자라납니다. 그 경쟁을 통해 성공과 실패를 나누고 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한 것을 실패라고 합니다. 학교에 다닐 때부터 등수가 매겨지고 그 등수에 따라 우리의 삶의 방향이 서로 달라집니다. 경쟁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위를 향하고 그렇지 못하면 아래를 향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나는 성공한 인생을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 반대에 있습니까?
어쩌면 대부분은 그 반대에 속할 것입니다. 경쟁에서 성공을 거머쥐는 사람은 다수가 아니라 소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혹 우리 중에 경쟁에서 살아남은 소수의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요. 대부분은 경쟁에서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평가가 죽음 이후의 삶을 믿을 때, 무의미해집니다. 경쟁을 통해 획득한 성공은 현재의 삶에만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경쟁을 통해 부와 권세와 능력을 얻었다고 할지라도요. 그것은 죽음 앞에서 아무런 의미도 없이 사라집니다.
잘 아시다시피, 지금까지 어떤 사람도 이 땅에서 얻은 소유를 하늘까지 들고 간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모든 것을 이곳에 남겨두고 가야 합니다. 심지어 자신의 육체마저도 이 땅에 남겨두어야 하고요. 그것은 썩어서 완전히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죽음을 통과하면 현재 또는 이 땅에서의 성취와 소유가 무의미해집니다. 그것은 더는 하늘의 삶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음 이후의 삶을 믿을 때, 우리의 삶은 달라집니다. 경쟁에서 이기고 지고 하는 것에 가치를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분명 그것은 언젠가 사라질 것입니다. 그리하여 거기에 모든 에너지를 쓰면서 사는 어리석은 짓을 멈추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오늘 성경 구절을 통해 봅니다. 우리는 영원한 집에서 살아갈 준비를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영원한 집에 이르지 못할 것은 버려야 합니다.
그러면 무엇이 영원한 집에 속합니까? 말 그대로 영원한 집에는 일시적인 것들 유한 것들이 속할 수 없습니다. 결국, 우리가 죽음 이후에 가져갈 수 없는 것은 영원한 집에 속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집은 하나님이 지으신 집입니다. 이는 하나님께 속한 것만이 영원한 집에 속할 수 있음을 말해줍니다. 저는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이고요. 그에 따르는 우리 삶이라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죽음 이후에 우리에게 남게 되는 것이 영원한 집에 속합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의 삶이 성공했느냐 하는 것은 이를 통해 평가된다고 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었느냐’ 또 ‘그 믿음을 따라 살아갔느냐’하는 것으로 말입니다. 이런 기준 아래서 우리의 삶은 달라집니다. 세상에서 중요하다고 얘기하던 것들이 더는 중요해지지 않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고인이 되신 강진희 권사님의 삶을 이렇게 평가해 볼 수 있습니다. 강진희 권사님은 성공한 삶을 사셨다고 말입니다. 강진희 권사님께서 하나님을 믿고 그 믿음에 따라 삶을 살아내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저는 강진희 권사님을 잘은 모릅니다. 다만 제가 신황등교회에 오고서요. 정기적으로 해마다 봄과 가을에 권사님이 머무셨던 요양원에 심방을 다녀왔습니다. 그곳에서 주로 권사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제가 들은 여러 이야기 중에서요. 권사님이 하나님을 부인한 적이 없습니다. 아마도 권사님은 끝까지 하나님을 믿고 그 믿음을 가지고 살아내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권사님께서 성공한 삶을 사셨다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우리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통해 우리는 어떤 삶을 살고 있습니까? 혹시라도 세상에서 썩어질 것들에 관심하고 그것에 많은 에너지와 시간을 쏟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불행하게도 그것은 죽음 이후에 아무런 쓸모도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그것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면 우리는 어리석게도 불행을 자초하는 결과를 얻게 될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죽음을 준비하지 않으면, 우리는 허망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오늘 성경의 이야기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마지막이 후회과 고통으로 얼룩지지 않았으면 합니다.
남은 삶을 통해 영원한 집에 이르기 위한 준비를 하십시오. 하나님을 믿으시고 그 믿음에 따른 삶을 살아내시길 바랍니다. 그때 우리의 삶은 이전과 다른 새로운 삶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이 말씀에 따라 살아가시길 간절히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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