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기도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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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마태복음 17장 14~20절(신약 28쪽)
설교제목: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요?
14 그들이 무리에게 이르매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이르되
15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그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16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니라
18 이에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 때부터 나으니라
19 이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20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반갑습니다.
주님의 한량없는 은혜가 늘 충만하시길 축복합니다.
잘 아시겠지만 담임목사님은 휴가중에 있습니다. 오늘은 담임목사님을 대신하여 제가 주일예배를 인도합니다. 바라기로는 담임목사님이 휴가를 잘 보내고 돌아오시도록 기도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것을 한가지만 얘기해 보라면 무엇을 얘기하시겠습니까? 저는 그것이 기도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연약한 존재라 우리의 힘으로 그것을 이루기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기도는 그 불가능을 가능하게 해줍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도움을 힘입을 수 있습니다. 그때에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하여 기도가 없이는 신앙생활은 불가능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오늘 성경 이야기를 주목해야 합니다. 오늘 성경 이야기입니다. 어떤 아버지에게 소중한 아들이 있습니다. 그의 아들에게는 쉽게 치료가 되지 않는 오래된 병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예수님이 사람들의 병을 고친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아들의 병을 고치기 위해 아버지는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다행히도 아버지의 바람대로 아들은 예수님으로 인해 병고침을 받게 됩니다.
이 이야기는 단순히 병고침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를 통해 기도에 관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기도의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요?
저는 오늘 성경의 이야기를 재구성하여 다시 들려드리려 합니다. 어떤 내용은 성경에 나오지 않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것이 어떤 분들에게는 혼란을 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제가 전달하고 싶은 것은 기도의 교훈입니다. 그것에 집중해서 이야기를 들어보시길 바랍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2000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의 한 마을에는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평범한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그의 부모님은 농사를 지으셨고 그도 부모님처럼 농부가 되었습니다. 그는 장성하여 부모님의 중매로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그의 아내는 임신하였고 해산의 달이 가까웠습니다. 당시는 주로 집에서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는 산파를 불러 아내의 출산을 도왔고 아내는 아들을 출산했습니다. 그러나 기쁨을 누릴 새도 없이 불행이 찾아왔습니다. 아내는 출산 과정에서 많은 피를 흘려 죽었습니다. 당시 출산은 오늘날처럼 안전하지 않아서 더러 이런 경우가 생겼습니다.
아내의 사망 당일 절차에 따라 장례가 치러졌습니다. 세마포 천으로 시신을 감쌉니다. 향유를 바르고 바위를 파서 만든 가족 묘지에 안장합니다. 오늘 우리처럼 3일씩 장례를 치르진 않고 해가 지기 전에 하루 만에 장례는 마쳐집니다. 다만 일주일간 애도의 기간을 가집니다. 그는 집에 머물며 출입을 삼가고 가족과 친지들의 위로를 받습니다.
이 때문에 그에게 아들은 소중했습니다. 아들은 일찍 떠난 아내가 남긴 유일한 유산입니다. 또한, 조상들에게서 물려받은 가문과 터전을 이어갈 집안의 대들보입니다. 그에게 아들은 아내를 대신하는 위로이고 미래를 향한 소망입니다.
그의 바람처럼 아이는 잘 자랐습니다. 그가 사는 동네에는 같은 해에 태어난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절반 가까이가 1년을 넘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죽음이 늘 가까이 있던 시대였습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의 아이는 1년을 무사히 넘기며 무럭무럭 자랐습니다.
어느 덧 아이는 걸음마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나고 그를 ‘아빠’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아이가 잘 자라는 모습을 보는 것이 삶에 큰 힘이 되었습니다. 불행히도 일찍 아내를 떠나보낸 것은 슬프지만, 남겨진 아이의 성장은 큰 기쁨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이가 갑자기 쓰러졌습니다. 정신을 잃은 아이는 입에 거품을 물고 온몸에 덜덜 떨기 시작합니다. 갑작스레 벌어진 일에 그는 무섭습니다. 그는 아내처럼 아이마저도 죽을까봐 두려웠습니다. 눈물이 났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경련하던 아이의 움직임이 멈춥니다.
다행히도 아이가 죽은 것은 아닙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아이의 코에 손을 가져다 대보니 숨을 쉽니다. 아이는 잠든 것 같습니다. 그는 아이를 업고서 마을의 어르신을 찾아갑니다. 당시에 의사의 역할을 하는 치료사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보통의 사람은 그 치료비를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어떤 문제가 생기면 주로 마을의 경험이 많은 어르신들의 지혜를 구했습니다.
그는 마을의 원로에게 아이에게 일어난 일을 말했습니다. 그 마을의 원로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아이를 살펴봅니다. 아이에게 특별한 외상이 있거나 아까처럼 이상한 반응이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마을의 원로는 그를 위로하면서 아이를 위해 기도하고 집으로 돌려보냅니다.
그런데 아이에게는 종종 그와 비슷한 증상이 반복되어서 나타났습니다. 그때마다 그는 마을의 원로를 찾아갑니다. 또 어떤 때는 신령한 능력이 있다는 사람들을 찾아가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이에게 나타나는 증상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때로조심성 없는 이들은 아이가 귀신들린 거라고 얘기하기도 합니다. 듣기 싫은 소리지만 그도 마음 한 켠에는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예수라는 분이 계신데, 그분이 어떤 병이든 치료하신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심지어 그분은 돈을 받지 않으신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지금 그분은 갈릴리 마을에 계시다고 합니다. 남자는 아들과 함께 예수께서 계신 갈릴리로 향합니다.
이 이야기를 어떻게 들으셨습니까? 제가 임의로 오늘 성경에 나오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그려보았습니다. 실제 그 아버지가 이렇게 예수님을 찾아오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성경에는 없는 이야기입니다. 단지, 아들의 병을 고치려 온 아버지를 소개합니다.
성경에 없는 얘기를 했다고 이것이 불편하게 다가오지 않았으면 합니다. 성경에는 없지만 당시의 상황을 놓고 볼때 일어날 법한 이야기로 구성한 것입니다. 또 앞서 말씀드렸지만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게 진짜냐 아니냐에 있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야기를 통해 기도에 관해 생각하는 것입니다. 저는 아이의 아버지가 예수님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기도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또는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그가 어떤 심정으로 예수님께 나아가고 있느냐입니다.
저는 아이의 아버지가 예수님께 나올 때, 매우 간절한 마음이었을 거라 여깁니다. 이는 그에게 예수님 외에는 다른 길이 없음을 말합니다. 만약 그에게 다른 선택지가 있었다면 그가 꼭 예수님께 나아올 필요도 없었을테지만요.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께 나아오지는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그에게 예수님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음으로 그는 정말 간절하게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께만 답이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에 따라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는 간절히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다시 오늘 성경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한편 예수님은 친히 12명의 제자를 임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권능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처럼 귀신을 내쫓으며 병을 고치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힘입어서 복음을 전파하고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을 내쫓았습니다. 사람들은 제자들의 능력에 놀라워하며 몰려들었습니다. 제자들도 자신을 통해 일어나는 일에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처럼 제자들도 이내 권능에 따른 현상에 익숙해집니다. 이제는 제자들에게 병고침을 받고 귀신이 나가는 일이 더이상 새롭지 않습니다. 마치 잠자리에 들면 당연히 내일이 올 것처럼 생각하듯이요. 그 모든 것이 당연하다 여깁니다.
또 제자들은 처음엔 사람들이 몰려오는 것이 놀라웠습니다. 자신들이 뭐라고 그렇게 사람들이 몰려오나 생각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사람들의 주목이 쑥쓰럽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것도 익숙한 일이 되었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못 알아보고 괜히 마음이 언짢아지기까지 했습니다.
처음에 제자들은 권능이 나타나는 것으로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이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제자들은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기도하지도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권능이 어디에서 나오게 된 것인지조차 잊었습니다. 마치 자신에게 원래 그런 능력이 있었던 것으로 착각했습니다.
어느 날은 제자들에게 어떤 아버지와 아이가 찾아왔습니다. 그는 아들의 병을 고치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 온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잠시 자리를 비운 상태였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없어도 이 일을 자신들이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오히려 그것이 예수님을 위해서도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제자들이 보기에 아버지와 아이가 약간의 지친 기색이 있을뿐 특별히 큰 문제가 있어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이의 상태는 제자들이 만났던 여러 아픈 사람에 비해 오히려 더 좋아 보였습니다. 제자들이 다루기에 그의 문제는 가벼워 보였습니다.
제자들은 아이의 병에 관해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이가 어릴 때부터 종종 쓰러져 몸을 심히 떠는 증상이 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귀신들린 것이라 말했다고 합니다. 제자들이 보기에도 아이의 증상은 귀신들린 것 같습니다.
제자들은 이제 아이의 문제를 파악했습니다. 정답을 알고 푸는 문제처럼 이 문제는 쉬워 보입니다. 제자들은 확신에 차서 아이를 치유하려고 나섭니다. 이미 전에도 해본 적이 있는 일이빈다. 제자들은 아이를 붙잡고 외쳤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귀신아! 떠나가라’
그러나 아무런 변화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제자들의 경험으론 보통 이렇게 하면, 눈동자부터 변합니다. 그러나 아이의 눈동자는 여전히 생기가 없습니다. 제자들은 애써 당황한 것을 숨기며 서로 번갈아 앞서 했던 말을 더욱더 힘차게 되풀이합니다.
저는 이 장면을 통해 생각합니다. 기도의 능력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처음부터 제자들에게 귀신을 내어쫓고 병을 고치는 능력은 없었습니다. 제자들의 권능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허락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착각했습니다. 자신들이 권능의 주인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제자들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기도하면 놀라운 일들이 생기는 것을 여러 차례 경험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 된것 같은 착각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처음부터 ‘예수의 이름’으로 행해졌습니다. 결코 제자들의 능력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언젠가 들었던 이야기입니다. 아니 사실은 여러 교회에서 사역하면서 종종 들었던 이야기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기도해주셔서 병이 나았다. 또는 불임이었는데 임신을 하게 되었다. 등등의 이야기 말입니다. 아마 저만 들어본 것은 아닐 겁니다. 우리 교인분들에게서도 들은 이야기이기도 하니까요. 이러한 이야기를 들으면 분명 기도가 능력이 있음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기도의 능력은 누구에게서 나오는 것일까요? 우리는 당연히 하나님께 나온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대체로 그 어떤 목사님께 기도받으러 갑니다. 마치 그 분에게서 기도의 능력이 나온다고 여기는 것처럼 말입니다.
물론 그것은 그만큼 간절하다는 뜻일 겁니다. 앞서 얘기했지만, 기도는 간절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는 자연스러운 것일 수도 있습니다. 가령 우리가 누군가에게 중요한 부탁을 할 때도요. 그와 친한 사람을 통해 부탁합니다. 아무래도 전혀 모르는 사람보다 깊은 관계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더 잘 들어줄테니 말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인지상정인 법입니다.
하지만 오늘 성경의 이야기는 말해줍니다. 분명 예수님께 권능을 받은 제자들입니다. 어찌 보면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이들입니다. 예수님의 측근이고 예수님께 친히 임명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기도는 응답받지 못합니다. 기도의 응답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주권에 따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기도의 능력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따릅니다. 아무리 훌륭한 기도자가 간절한 기도를 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응답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어야 합니다.
다시 성경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셨고 이를 함께할 제자들 12명을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제자들을 친히 가르치셨습니다.
각자 개성이 강한 제자들이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또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 조금씩 성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제 제자들과 함께할 시간이 길지 않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은 제자들과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으로 갔습니다. 유대인인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이곳은 좋지 않은 곳입니다. 가이사랴 빌립보는 이방인이 사는 지역이고 여러 이방 신전이 있었습니다. 경건한 유대인이라면 가기를 꺼리는 지역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행보에는 늘 특별함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면서 자주 어떤 깨달음과 변화를 경험했습니다. 그랬기에 제자들은 군말없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제자들과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도착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제자들은 그동안 자신이 들었던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다시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그렇다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예수님의 물음에 제자들은 일순 긴장합니다.
그때 늘 앞장서는 제자 베드로가 예수님께 확신있게 말합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이야기를 듣고서 말씀하십니다. ‘베드로야 너는 복이 있다. 이를 알게 하신 이는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다.’
예수님은 이제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사역은 갈릴리에만 머물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예루살렘을 향해나아갈 것입니다. 문제는 예루살렘에서의 사역은 제자들의 기대와는 다른 일이 될 것입니다. 제자들이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일지가 걱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듣고서 예수님은 이제 예루살렘을 향할 때가 왔다고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갈릴리 호수 남쪽에 있는 높은 산으로 갔습니다. 산 아래에 대부분의 제자들을 남겨두셨습니다. 단지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데리고 산을 오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드러낼 것입니다. 또한 그곳에서 하나님의 뜻을 받들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산을 오른 제자들은 황홀한 광경을 마주합니다. 예수님은 이전과 달리 광채를 띈 모습으로 변하셨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오래 전에 하늘 나라로 간 그 유명한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를 나누시는 장면을 본 것입니다. 베드로는 꿈을 꾸는 것 같았습니다. 너무 신비로운 광경에 베드로는 예수님께 그곳에 초막을 짓고 여기에 살자고 얘기를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곳에서 하나님의 뜻을 받들고 제자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옵니다. 예수님이 산 아래에 있던 제자들에게 다가갈 때, 갑자기 한 남성이 예수님께 달려와 무릎을 꿇고 말합니다. ‘주님, 제 아들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아들이 병에 걸려서 고통받고 있습니다.’
그 남성은 덧붙여 말합니다. ‘아이를 선생님의 제자들이 고치지 못했습니다.’ 상황을 파악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하겠느냐, 아이를 내게로 데려오라.’
제자들은 아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예수님은 그 아이를 치유하셨습니다. 불치의 병인 것 같던 아이의 병이 치유되자 아이의 아버지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버지와 아이는 연신 허리를 숙이며 예수님께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는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도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숙소에 도착한 제자들은 민망해하며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 ‘우리는 왜 아이를 고치지 못했습니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의 믿음이 적기 때문이다. 겨자씨만한 믿음으로도 너희가 못할 것이 없다.’
이렇게 예수님은 오늘 성경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깨닫게 하십니다. 기도에는 믿음이 필요함을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믿음이 적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하지만 또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겨자씨만한 믿음으로도 못할 것이 없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의 양보다 질이 중요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의 질이 중요하다는 것은요. 믿음의 본질은 ‘하나님을 믿는 것’에 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믿음은 내 생각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자기의 생각을 따라 아이를 치유하려 했습니다. 이전에 그렇게 해보았고 그때 성공한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제자들은 하나님보다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믿었습니다. 그러니 자신들의 생각대로 되지 않음에 당황하였습니다. 만약 그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었다면, 그들은 주어진 결과에 당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병을 고치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고 그렇지 않은 것도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는 그 뜻을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분께서 뜻하신 바가 있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더 보충해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예전에 소개한 어떤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이분은 어린 시절에 소아마비로 다리를 저는 장애인입니다. 목회자가 되기로 하면서 장애를 고쳐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자기 생각에는 장애가 없으면 더 목회를 잘할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러나 몇 년의 시간이 흘러도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오래 기도했지만 다리가 나아질 기미는 없습니다. 그러던 중에 교회에서 하는 어떤 집회에 참석하면서 기도 응답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다리를 저는 장애인입니다. 그런데도 그가 기도 응답을 받았다고 한 것은 이러합니다. 그동안 자기의 생각으로는 목회를 하는 것에 다리의 장애가 문제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의 생각일 따름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이 문제라고 여기지 않으심을 참석한 집회에서 깨달았습니다. 그로 인해 그의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자신의 장애가 더는 문제가 되지 않음을 알았습니다. 그는 그것으로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 여겼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믿는 것은 내 생각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분명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 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을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은 대림절 첫째 주일입니다. 대림절은 예수님의 오심을 묵상하는 절기입니다. 교회 절기의 시작은 이 대림절로부터 시작됩니다. 쉽게 말해서 대림절은 교회에서 의미있고 중요하게 다뤄야 할 절기입니다.
보통 이러한 절기의 시작에는 절기에 관한 설교를 합니다. 가령, 부활절과 성탄절에 하는 설교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저는 절기와 관계없는 내용의 설교를 합니다. 제가 이렇게 한 것에는 이런 고민이 있었습니다.
언젠가 헬스장에서 런닝머신을 이용해서 달리기를 하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운동하는 것을 참 싫어하는 사람이지만, 또 이렇게 땀을 흘리면 운동하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드는데, 왜 기도의 자리는 그렇지 못할까.
아시다시피 저는 교회에서 일을 하니까요. 거의 매일 새벽기도회를 나갑니다. 또 정해진 날에는 제가 새벽기도회를 인도해야 합니다. 제가 우리 신황등교회에 온 것은 약 4년이 넘었지만요. 신대원을 졸업하고 교회에서 전임사역을 한 것은 내년이면 10년째에 들어섭니다.
그런데 부끄러운 고백을 하자면 그렇습니다. 그렇게 기도의 자리에 여러 차례 참석을 하고 때로는 그 자리를 인도하는 역할을 하는데요. 저는 여전히 땀 흘리며 운동하는 것만큼이나 기도의 자리가 좋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기도의 자리가 싫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제가 남은 인생에서 죽을때까지 해야할 일 중 하나로 꼽은 것이 기도입니다. 제가 생각할 때, 기도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또 제 삶에 있어서 너무나도 중요한 것임을 생각합니다.
다만, 그럼에도 기도의 자리가 편안하고 기분 좋게만 다가오지 않는 것입니다. 마치 이런 거에요. 요즘에는 더 일찍 배우지만 저는 중학교때 영어를 처음 배웠습니다. 그리고 대학교때까지는 영어 관련 수업을 의무적으로 들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보면, 적어도 10년 영어 공부를 한 것이죠.
보통 어떤 분야에서 10년을 하면 전문가 소리를 듣습니다. 그러나 영어를 10년 공부했다고 해서 영어의 전문가가 되었냐 당연히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진지하게 영어를 1년 공부한 사람보다 훨씬 수준이 떨어질 것입니다.
기도를 하면서 받는 느낌이 이런 것입니다. 이게 중요한 것도 알고 또 기도의 응답도 분명히 받았던 경험도 있는데요. 이상하게도 기도가 능숙하다거나 기도의 자리가 편하다는 느낌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제가 그 이유를 알고 있습니다. 영어를 10년 공부했어도 실제로 공부한 시간은 10년이 안 됩니다. 아마 10년동안 겨우 몇 개월 치의 공부를 했을 뿐일 것입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명 사역하는 동안 여러 차례 새벽기도회를 비롯한 기도회에 참여 했지만요. 실제로 기도하거나 진지하게 기도한 것은 얼마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목사가 되어서도 기도의 자리가 아직 힘이든 것입니다.
저에게 이것은 부끄러운 이야기이고 되도록 공개적으로 말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제가 이런 생각을 해보는 것입니다. 저처럼요. 오랜 기간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는데 여전히 기도가 힘든 분들이 있겠다고요. 저는 그분들에게 저 역시도 그러함을 얘기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결코 이대로 괜찮은 것은 아닙니다. 저는 진정으로 기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온전한 신앙생활을 또 목회를 제대로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지금의 상태로 계속 있으면 안 된다고 또한 말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저도 이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용기내어서 저의 부끄러움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저는 앞으로 이에 관해서 보다 진지해 지려고 합니다. 그래서 최근에 기도에 관한 책을 열심히 읽고 있고요. 가정에서 매일 밤 아내 함께 아이를 붙잡고 짧은 기도회를 합니다. 기회가 닿는데로 이 일에 더 힘쓸 것이고요. 이 일에 많은 노력을 기울일 것입니다.
하지만 당장에 어떤 성과가 있지 않습니다. 매일밤 가족들과 기도를 해도 여러 권의 기도의 책을 읽었어도 여전히 기도의 자리를 편안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분명히 믿는 것은요. 이 시간이 쌓이고 쌓이면 내게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시간이 될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저는 특별히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 또 다시 분명해지는 것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기도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 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선한 길로 인도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당장에는 노력에 비해 아무런 성과도 별다른 변화도 느낄 수 없지만요.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좋은 곳으로 인도하실 것을 믿으며 나아가려고 합니다.
바라건대, 오늘 우리 성도님들께서도 믿음으로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가 저의 연약함을 드러내면서까지 기도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요. 그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너무나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을 몰라도 하나님은 나의 실체를 잘 아십니다.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니고 직분을 받았어요. 내가 진실로 하나님 앞에서 있지 않다면 이제는 회개하고 주님께 나아와야 합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고 기도할 때, 우리는 치유되고 변화되는 경험을 이룰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기적을 경험하는 우리 귀한 성도님들 다 되시길 간절히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도합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