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포위하심(시 139: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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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포위하심
하나님의 포위하심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반드시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추이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이다
주여, 당신은 나를 면밀히 살피시고 나를 [깊이] 아십니다.
당신은 나의 앉고 일어섬을 [깊이] 아십니다. 당신은 멀리서부터 나의 생각들에 주의를 기울이십니다.
당신은 나의 여정의 길과 눕는 곳을 추적하셨고 나의 모든 길들을 예측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혀의 말이 있지 않 때문입니다.(내가 말하기도 전에 아신다는 의미인 듯)
보십시오. 주여, 당신은 모든 것들, 곧 이전 것들과 마지막 것들을 아십니다. 당신은 나를 빚으셨고 당신의 손을 내 위에 얹으셨습니다.
나로부터의 당신의 지식은 놀랍습니다. [그 지식이 너무 위대하여 나는] 결코 그 지식을 향해 갈 수 없습니다.
내가 당신의 영으로부터 떠나 어디로 가며 당신의 얼굴로부터 떠나 어디로 피하겠습니까?
만일 내가 하늘을 향해 올라간다면, 당신은 거기에 계시며, 만일 음부를 향해 내려간다면, 당신은 있으십니다.
9. 만일 내가 새벽을 따라 나의 날개들로 올라가고 바다의 심연을 향해 거한다 할지라도,
10. 거기에도 당신의 손이 나를 인도하고 당신의 오른 손이 나를 붙드시기 때문입니다.
11. 그런즉 나도 말했습니다. 흑암이 나를 짓밟고 밤은 나의 기쁨 가운데서 빛이 될 것이다.
12. 왜냐하면 어둠이 당신에게서 결코 어두워지지 않을 것이며, 밤은 낮과 같이 밝아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길가에 차량과 함께 서 있습니다.
차량은 고장이났고, 차의 주인은 자동차 보넷을 열고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나가던 사람이 그 사람에게 다가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차의 주인은 차가 고장이 났다고 말했습니다.
행인은 차량을 자신이 봐도 되겠냐고 물었고, 차의 주인은 버럭 화를 내며 말했습니다.
“내가 차량 정비만 30년 넘게 한 사람인데, 내가 모르는 것을 당신이 어떻게 고칠 수 있겠소?”라고 화를 냈지만, 행인은 자신이 한 번만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하자 마지 못해 차량 주인은 허락했습니다.
행인은, 얼마 지나지 않아 고장난 차량을 고쳤습니다.
주인이 “어떻게 이렇게 빨리 고칠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행인은 이렇게 답변합니다.
“저는 이 차를 디자인하고 만든 사람입니다”
아무리 차량을 오랫동안 고친 사람이라 할지라도, 차량을 만든 사람보다 차를 더 잘 알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매우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잘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우리 몸에 어떤 질병이 있는지, 그 질병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때로는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고, 무엇을 원하는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나라의 정신 질환자 중에서 병원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12.1%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대략 88%의 사람들은, 정신 질환을 앓고 있지만, 자신이 어떤 병인지 알지 못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기분이 안 좋거나 성격이 예민한 정도로 넘긴다고 합니다.
요즘 SNS 상에서 유행하는 심리검사나 MBTI를 통해 자신을 알고자 하는 것은, 그만큼 자신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알지 못한다는 것이겠죠.
하지만 우리를 친히 빚으시고 지으시고 만드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십니다.
실제로 오늘 본문 1-4절의 말씀을 보면, “보셨다”와 “아셨다”는 단어가 굉장히 많이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개역개정 성경에서는, 대부분 다 똑같이 “보셨다”, “아셨다”라고 번역을 했지만, 실제로 히브리어 원문으로는 거의 다른 단어들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먼저 1절에서, “살펴 보셨다”라는 단어는 “면밀히 조사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 연구를 통해서 “아신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알다”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야다’라는 단어인데, 이것은 단순히 지식적으로 안다는 것이 아니라 경험적으로 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느낌을 살려서 번역한다면, “깊이 이해하다”, “깊이 아신다”는 정도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에 대해서 얼마나 깊이 아실까요?
이어지는 문장은, 하나님의 아심의 깊이가 얼마나 깊은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2-3절은 어떤 행인이 먼 길의 여정을 떠나는 상황을 묘사합니다.
행인은, 여정을 떠나며, 때로는 잠시 쉬기 위해서 앉기도 하고, 다시 여정을 이어가기 위해서 일어서기도 합니다.
또 밤이 되면 자기 위해서 누워야 하고, 여정의 목적지를 향해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모든 과정에서도, 쉬기 위해서 잠시 앉고 일어서는 것조차도, 확실히 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여정에서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으시고, 그래서 멀리 계신 것처럼 느껴지지만, 멀리 계신 곳에서도 우리의 생각들에 주의를 기울이시는 분이십니다.
3절에서 하나님은 여정의 길(나아가는 것)과 눕는 곳(쉬는 곳)을 “살펴 보셨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원문에는 “추적하셨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행인이 나아가야 할 모든 여정의 길을 예정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4절의 말씀은, 하나님께서는 나의 삶의 모든 여정을 세밀하게 아시고 예정하고 인도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나의 입에 어떤 말이 있기도 전에, 나의 모든 생각을 아신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인이 가는 삶의 여정의 길은, 평안하고 안전한 길은 아니었습니다.
8절의 말씀을 보면,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신다고 고백하고, 9절에서 바다의 끝, 다시 말해서, 바다의 가장 깊은 심연에 빠진다고 고백하는 것은, 자신의 삶이 언제나 평안하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또 11절에서 “흑암이 반드시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고 고백하는 것은, 자신에게 찾아오는 깊은 절망의 상황들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 시를 쓴 다윗의 삶을 보면, 사울 왕의 질투로 인해 시작된 10여 년의 도망자 생활을 해야 했고, 그 가운데 블레셋 왕 앞에서 미친 척을 하기도 했습니다.
또 그는 자신을 이유 없이 죽이려고 하는 사울을 피해서 블레셋으로 망명해 돌아와보니 자신의 거처인 시글락이 아말렉에 의해 불타고 가족들이 모두 납치된 상황 속에서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를 높여 울기도 했습니다.
다윗과 그와 함께 한 백성이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를 높여 울었더라
하지만 다윗은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힙입어 용기를 회복했습니다.
백성들이 자녀들 때문에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으나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또 자신의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자신의 왕궁을 버리고 도망치기도 했습니다.
그로 인해 다윗은 머리를 가리고 맨발로 울며 걷기도 했습니다.
다윗이 감람 산 길로 올라갈 때에 그의 머리를 그가 가리고 맨발로 울며 가고 그와 함께 가는 모든 백성들도 각각 자기의 머리를 가리고 울며 올라가니라
또 다윗은 밧세바 사건으로 죄책감 속에 뼈가 쇠하는 고통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내 일생을 슬픔으로 보내며 나의 연수를 탄식으로 보냄이여 내 기력이 나의 죄악 때문에 약하여지며 나의 뼈가 쇠하도소이다
이처럼 다윗의 삶은, 바다의 깊은 심연 속에 빠진 것과 같은 상황 속에 수없이 처했지만, 그는 그 모든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손이 자신을 붙잡고 인도하셨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다윗은, 주님과 함께 한다면, 주님의 빛으로 인해 밤이 낮이 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이 모든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평안의 길을 갈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5절의 고백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주님이 내가 어디에 있든지, 나를 깊이 이해하시고, 나의 모든 상황과 처지를 깊이 헤아리시는 주님께서 나를 포위하시고, 내 머리에 손을 얹고 계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포위 속에서, 자신에게 빈틈은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강력한 손으로 나의 삶의 사방을 지키고 보호하시며, 주님의 손이 내 머리 위에 얹어져 한없는 힘과 용기를 부어주시기 때문에, 내 삶에 어떤 흑암이 찾아온다 할지라도, 평안할 수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시고 창조하신 분이심을 믿으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아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깊은 상처와 고통을, 나와 가장 친한 누군가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나의 아픔까지도 하나님은 모두 알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애쌔가며 하나님을 설득시킬 필요가 없습니다.
또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아픔과 고통과 상황을 증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이죠.
지금 내 상황이 절망적일 수 있고, 고통 가운데 있을 수 있지만, 또는 과거의 어떤 상처와 아픔 가운데 사로잡혀 있을 수도 있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 가운데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저 멀리 계신 것처럼 느낄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미 내가 인식하기도 전에 나의 생각을 감찰하시고, 지금도 나를 애워싸시고 포위하시며, 나의 머리에 주님의 손을 얹고 계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소유라고 확정하시며, 어떤 악의 세력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경계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우리를 철저하게 보호하신다는 사실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주님의 손에 붙들린바 되어 살아간다면, 우리는 바다 깊은 심연 한 가운데서도 주님의 손길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 사실에 대해서 아아구스티누스는 이렇게 설교합니다.
“세상의 번영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지도 않고, 세상의 역경이 우리를 비참하게 만들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의를 지키고, 믿음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소망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 이웃도 사랑해야 합니다. 이러한 수고 후에 우리는 쇠하지 않는 빛, 지지 않는 낮을 갖게 될 것입니다. 이 밤의 모든 빛과 어둠은 덧없습니다.”
전에 한 번 소개한 적이 있지만,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했을 때, 장수철 선생님과 그의 가족들도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늘 시편 23편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간 이 가정에게 큰 위험이 닥치게 됩니다.
다리가 끊겨 피난을 가지 못하는 상황 속에 있을 때에도, 장수철 선생님은 시편 23편의 말씀을 의지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강으로 떠내려 오는 나룻배 한 척을 발견해서 강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장수철 선생님은 음악 공부를 하기 위해서, 가족들을 남겨둔 채 유학길에 오르지만, 어느 날 아내로부터 편지 한통이 오게 됩니다.
내용은, 12살 된 사랑하는 큰 딸 해경이가 폐렴으로 사망하게 되었다는 내용이었죠.
형언할 수 없는 고통속에 괴로워할 때, 편지 뒷장에 이런 내용이 써 있었데요.
“내 영혼을 소생시키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리고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장수철 선생님은 유학을 마치고 지금까지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을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의 마음을 담아 곡을 쓰게 되고, 거기에 아내 최봉춘 여사가 가사를 쓰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찬송가 570장, “주는 나를 기르시는 목자”입니다.
삶의 말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 있었지만, 사방을 애워싸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의지하고, 어둠 가운데서도 주님과 함께 함으로 빛의 길을 걸어갔던 장수철 선새님의 삶을 우리도 본 받아, 날마다 빛의 길을 걷는 저와 여러분들의 삶이 되기를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