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을 전달하는 사람 (The Bearers of J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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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이사야 35:1-10, 시편 146:5-10, 야고보서 5:7-10, 마태복음 11:2-11 (새번역)
1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처럼 피어 즐거워할 것이다.
2 사막은 꽃이 무성하게 피어, 크게 기뻐하며, 즐겁게 소리 칠 것이다.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샤론의 영화가, 사막에서 꽃 피며, 사람들이 주님의 영광을 보며, 우리 하나님의 영화를 볼 것이다.
3 너희는 맥풀린 손이 힘을 쓰게 하여라. 떨리는 무릎을 굳세게 하여라.
4 두려워하는 사람을 격려하여라.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희의 하나님께서 복수하러 오신다. 하나님께서 보복하러 오신다. 너희를 구원하여 주신다” 하고 말하여라.
5 그 때에 눈먼 사람의 눈이 밝아지고, 귀먹은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다.
6 그 때에 다리를 절던 사람이 사슴처럼 뛰고, 말을 못하던 혀가 노래를 부를 것이다.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 시냇물이 흐를 것이다.
7 뜨겁게 타오르던 땅은 연못이 되고, 메마른 땅은 물이 쏟아져 나오는 샘이 될 것이다. 승냥이 떼가 뒹굴며 살던 곳에는, 풀 대신에 갈대와 왕골이 날 것이다.
8 거기에는 큰길이 생길 것이니, 그것을 ‘거룩한 길’ 이라고 부를 것이다. 깨끗하지 못한 자는 그리로 다닐 수 없다. 그 길은 오직 그리로 다닐 수 있는 사람들의 것이다. 악한 사람은 그 길로 다닐 수 없고, 어리석은 사람은 그 길에서 서성거리지도 못할 것이다.
9 거기에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도 그리로 지나다니지 않을 것이다. 그 길에는 그런 짐승들은 없을 것이다. 오직 구원받은 사람만이 그 길을 따라 고향으로 갈 것이다.
10 주님께 속량받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들이 기뻐 노래하며 시온에 이를 것이다. 기쁨이 그들에게 영원히 머물고, 즐거움과 기쁨이 넘칠 것이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질 것이다.
5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고 자기의 하나님이신 주님께 희망을 거는 사람은, 복이 있다.
6 주님은, 하늘과 땅과 바다 속에 있는 모든 것을 지으시며, 영원히 신의를 지키시며,
7 억눌린 사람을 위해 공의로 재판하시며,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시며, 감옥에 갇힌 죄수를 석방시켜 주시며
8 눈먼 사람에게 눈을 뜨게 해주시고, 낮은 곳에 있는 사람을 일으켜 세우시는 분이시다. 주님은 의인을 사랑하시고,
9 나그네를 지켜 주시고, 고아와 과부를 도와주시지만 악인의 길은 멸망으로 이끄신다.
10 시온아, 주님께서 영원히 다스리신다! 나의 하나님께서 대대로 다스리신다!
할렐루야.
7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참고 견디십시오. 보십시오, 농부는 이른 비와 늦은 비가 땅에 내리기까지 오래 참으며, 땅의 귀한 소출을 기다립니다.
8 여러분도 참으십시오. 마음을 굳게 하십시오. 주님께서 오실 때가 가깝습니다.
9 형제자매 여러분, 심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서로 원망하지 마십시오. 보십시오, 심판하실 분께서 이미 문 앞에 서 계십니다.
10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한 예언자들을 고난과 인내의 본보기로 삼으십시오.
2 그런데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들을 감옥에서 전해 듣고, 자기의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어,
3 물어 보게 하였다. “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4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가서, 너희가 듣고 본 것을 요한에게 알려라.
5 눈 먼 사람이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 환자가 깨끗하게 되며,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며,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
6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
7 이들이 떠나갈 때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을 두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무엇을 보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8 아니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은 왕궁에 있다.
9 아니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예언자를 보려고 나갔더냐?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렇다. 그는 예언자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다. 이 사람을 두고 성경에 기록하기를,
10 ‘보아라, 내가 내 심부름꾼을 너보다 앞서 보낸다.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닦을 것이다’ 하였다.
11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가 낳은 사람 가운데서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 그런데 하늘 나라에서는 아무리 작은 이라도 요한보다 더 크다.
[서론] 화려한 도시와 메마른 광야 사이에서
[서론] 화려한 도시와 메마른 광야 사이에서
사랑하는 여러분, 반갑습니다.
대림절의 절반을 넘어선 셋째 주, 오늘은 전통적으로 ‘기쁨의 주일(Gaudete Sunday)’이라 불리는 날입니다. 우리는 오늘 회개와 엄숙함을 상징하는 보라색 초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핑크색 초를 켜며 다가올 빛에 대한 기쁨을 미리 맛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과연 이 메시아를 어디서 기다리고 있습니까? 혹시 우리는 우리의 구원자가 강남 한복판의 으리으리한 대형 교회, 화려한 조명과 세련된 분위기가 감도는 곳에서 멋진 수트 차림으로 나타나길 기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 또한 가장 잘 차려입은 모습으로, 가장 교양 있는 태도로 그분을 맞이해야 한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하지만 오늘 성경의 시선은 전혀 다른 곳을 향합니다. 화려한 도심이 아니라, 메마른 광야와 사막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황무지에서 피어나는 기쁨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기쁨을 전달하는 사람으로 산다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함께 고민해보고자 합니다.
[본론 1] 이사야의 꿈: 변혁을 향한 상상력
[본론 1] 이사야의 꿈: 변혁을 향한 상상력
오늘 본문 이사야 35장은 바빌론 유배 생활에 지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포된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처럼 피어 즐거워할 것이다." (이사야 35:1, 새번역)
이 말씀은 단순히 건조한 땅에 꽃이 핀다는 낭만적인 시구가 아닙니다. 이것은 **'창조 세계의 회복'**에 관한 거대한 비전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던 그 태초의 질서가 다시 세워진다는 약속입니다.
특히 5절과 6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눈먼 사람의 눈이 밝아지고, 귀먹은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다." 우리는 흔히 이 구절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하여 신체적 장애의 치유로 국한하곤 합니다. 그러나 신학적인 깊이를 더해 들여다보면, 이것은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차별의 시선이 사라진다는 뜻입니다.
메시아가 오시면 전쟁 없는 세계, 장애와 비장애의 경계가 무너지는 세계, 가난하다는 이유로 소외되지 않고 모든 생명이 한 가족으로 존중받는 세계가 도래한다는 선언입니다. 이사야의 꿈은 사회의 불평등 구조와 불의한 체제가 완전히 뒤집히는 **'세상의 변혁'**을 전제합니다.
바빌론 포로들에게는 귀환이, 로마 압제 하의 백성들에게는 해방이 기쁜 소식이었듯, 2025년을 앞둔 우리 청년들에게 이 기쁜 소식은 무엇입니까? 취업난, 주거 불안, 끊임없는 경쟁과 혐오의 시대 속에서 메시아가 가져올 변혁은 단순히 개인의 마음의 평안을 넘어섭니다. 그것은 우리를 옥죄는 구조적 모순이 깨어지고,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에 대한 꿈입니다.
[본론 2] 인내의 이중주: 저항하되 탓하지 않는다
[본론 2] 인내의 이중주: 저항하되 탓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거대한 꿈이 이루어질 때까지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냥 손 놓고 하늘만 쳐다봐야 할까요? 여기서 야고보서의 말씀이 우리에게 중요한 통찰을 줍니다.
"농부를 보십시오. 농부는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거두려고, 첫 비와 늦은 비가 내릴 때까지 오래 참으며 기다립니다." (야고보서 5:7, 새번역)
농부의 기다림은 무기력이 아닙니다. 씨를 뿌리고 가꾸며 하늘의 비를 구하는 치열하고 능동적인 기다림입니다. 마틴 루터는 행위를 강조한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 폄하하기도 했지만, 이는 면죄부와 같이 돈으로 구원을 사려 했던 시대적 한계 속에서 나온 해석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 땅을 경작하고 관리할 청지기로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이 '기다림'의 과정에서 아주 구체적이고 뼈아픈 지침 하나를 우리에게 던집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심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서로 원망하지 마십시오." (야고보서 5:9, 새번역)
여러분, 삶이 광야 같고 고통스러울 때 우리의 본성은 어떻습니까? 누군가를 탓하고 싶어집니다. 일이 잘 안 풀리면 리더를 탓하고, 사회 시스템을 탓하고, 가장 가까운 가족이나 동료에게 짜증을 내며 원망을 쏟아냅니다. 공동체가 어려움에 처하면 서로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분열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야고보는 말합니다. "서로 탓하지 마라."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지금 이 고난의 비를 함께 맞고 있는 연약한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인내는 단순히 시간만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도 옆에 있는 지체를 원망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오히려 서로의 연약함을 보듬어주는 것. 그것이 야고보가 말하는 '성숙한 인내'입니다.
물론, 이 인내가 불의에 대한 침묵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야고보는 바로 뒤이어 엘리야를 언급합니다. 아합 왕과 이세벨의 불의한 권력에 목숨 걸고 저항했던 그 예언자 말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불의한 구조에 대해서는 엘리야처럼 단호히 저항해야 합니다. 그러나 고난을 함께 겪는 형제자매들에게는 서로 탓하지 말고 따뜻하게 품어주어야 합니다. 바깥을 향해서는 거룩한 분노를, 안을 향해서는 깊은 연민과 관용을 가지는 것, 이것이 대림절을 사는 우리의 자세입니다.
[본론 3] 실존적 참여: 편안함의 함정과 거룩한 불편함
[본론 3] 실존적 참여: 편안함의 함정과 거룩한 불편함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가 낳은 사람 가운데서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아무리 작은 사람이라도 요한보다 더 크다." (마태복음 11:11, 새번역)
참으로 역설적입니다. 이 말씀은 요한이 구약의 마지막 주자로서 메시아를 '인식'하는 데 그쳤다면,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메시아의 사역에 직접 **'동참'**함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실존적으로 경험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이 '동참'을 잊어버리고 안락함에만 머물 때 신앙은 공허해집니다. 영성신학자 유진 피터슨(Eugene Peterson)은 자신의 목회 회고록에서 자신의 목회 여정 중 가장 '황무지' 같았던 시기를 고백합니다. 역설적이게도 그때는 교인들이 힘을 합쳐 멋진 교회 건물을 완공했을 때였습니다.
성도들은 화려한 건물을 보며 "이곳이 하나님의 몸 된 교회다"라고 감격했습니다. 그러나 피터슨은 그때 교회가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이 화려한 건물과 '하늘나라의 소망'에만 도취 된 나머지, 정작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이웃들에게 친절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안락한 건물 안에서 서로에게 다정할 필요를 잃어버렸고, 서로의 고통에 눈을 감아버렸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제가 왜 평소에 자주 "교회는 좀 불편해야 한다"라고 말씀드리는지 이제 아시겠습니까?
모든 것이 완벽하게 갖춰진 시스템, 너무나 푹신하고 안락한 의자, 나를 귀찮게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환경... 얼핏 보면 좋아 보이지만, 그곳에서는 진정한 공동체가 싹트기 어렵습니다.
교회 안은 좀 불편해야 합니다.
때로는 자리가 부족해 좁게 앉아야 하고, 시설이 완벽하지 않아 서로의 손을 빌려야 하는 그 불편함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불편함' 때문에 비로소 서로를 쳐다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불편한 공간을 함께 편안한 곳으로 만들기 위해, 이 부족한 시간을 서로에게 좋은 시간으로 채우기 위해, 우리는 옆에 있는 지체를 더 성실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자리가 좁으시죠? 제가 좀 당겨 앉겠습니다."
"그건 제가 도와드릴게요."
이런 작은 배려와 관심들이 오고 갈 때, 우리는 소비자가 아닌 '가족'이 됩니다. 서로를 향한 성실한 눈빛은 안락함이 아니라, 기꺼이 감수하는 거룩한 불편함 속에서 나옵니다.
유진 피터슨이 경계했던 '황무지'는 바로 이 '불편함'이 제거된 상태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떻습니까? 혹시 우리는 불편함을 피하려고 관계를 단절하고, 화려한 시스템 뒤에 숨어 서로를 외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결론 및 적용] 기쁨을 전달하는 배달부
[결론 및 적용] 기쁨을 전달하는 배달부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이사야의 꿈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완성은 저절로 오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늘을 바라보되, 발은 이 척박한 땅을 딛고 서 있어야 합니다.
메시아를 기다리는 동안, 농부처럼 인내합시다. 고난의 때일수록 서로를 탓하거나 원망하지 맙시다. "네 탓이다"라는 손가락질을 거두고, "함께 견뎌보자"라고 손을 잡아주십시오.
이번 한 주, 여러분께 한 가지 구체적인 실천을 제안합니다. **'기쁨의 배달부'**가 되어 주십시오.
원망 멈추기: 일이 꼬이고 힘들 때,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쏟아내려던 짜증과 원망을 멈춰보십시오. 그리고 "힘들지? 우리 같이 힘내자"라고 말해주십시오.
불의에 눈 뜨기: 나의 안위만 챙기는 것을 넘어, 우리 사회의 아픈 곳과 불공정한 일에 대해 거룩한 관심을 가져 주십시오.
기꺼이 불편해지기: 공동체를 위해, 타인을 위해 나의 편안함을 조금 양보하는 '거룩한 불편함'을 실천해 주십시오. 누군가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내가 조금 더 움직이고 성실하게 바라볼 때, 그곳에 하나님 나라가 임합니다.
희망 전하기: 삶의 무게에 짓눌린 이들에게 이렇게 말해주십시오."조금만 더 인내합시다. 예수님이 오시면, 우리의 고통에는 끝이 있습니다."
이사야가 꿈꾸었던 그 평화의 나라, 사자와 어린 양이 함께 뒹구는 그 변혁의 꿈을 품고, 서로를 탓하지 않는 따뜻한 연대와 성실한 사랑으로 기쁨을 피워내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화려한 곳이 아니라 낮은 곳으로 오신 주님을 기다립니다.
고난의 시간 속에서 쉽게 남을 탓하고 원망했던 우리의 입술을 회개합니다. 또한 나의 편안함만을 추구하느라 이웃을 성실하게 바라보지 못했던 무관심을 돌이킵니다.
야고보의 권면처럼 서로를 탓하지 않고, 우리가 마주한 거룩한 불편함을 기쁨으로 감당하며, 이사야의 꿈처럼 이 땅의 무너진 곳을 회복시키는 자들로 살게 하소서.
우리 삶이 누군가에게 기쁨의 소식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