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치 공동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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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천교회 부임설교

Notes
Transcript
  오늘 말씀은 성도님들이 신앙 생활을 하면서 정말 많이 들었던 말씀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이제는 <탕자의 비유>라고 하면 무슨 이야기를 할지 뻔히 보이고, 심지어 머릿속에 어느정도 그림이 그려지시는 분들도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저도 그랬었는데, 한 책을 읽으면서 이 비유의 말씀을 새롭게 보는 시각이 열렸고, 그 가운데 한 부분을 오늘 말씀으로 함께 나눠보려고 합니다.
  이 시간 말씀을 통해 우리가 어디를 향해 살아가고 있는지,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디로 부르고 계신지를 함께 다시 바라보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성경을 읽으실 때는 본문의 전후문맥을 살펴가며 읽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이야기는 누가복음 15장의 문맥 속에서 읽어야 합니다. 탕자의 비유 앞에는 잃은 양을 찾은 목자에 대한 비유, 잃은 드라크마를 찾은 여인의 비유가 나옵니다. 그래서 문맥을 알고 성경을 읽으면, 탕자의 비유가 잃음과 찾음의 은유에 대한 문맥 속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의 문맥은 훨씬 더 넓습니다. 탕자의 비유는 성경 전체의 큰 주제와 비슷합니다. 성경은 우리의 삶이 본향인 하나님 나라로 다시 되돌아가는 여정과 같다고 말합니다. 이 주제를 생각해 보면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단순히 잃음과 찾음에 대한 문맥을 넘어서, 훨씬 큰 주제 안에 담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탕자의 비유가 단순히 탕자를 아버지가 맞아주는 감동적인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짧은 이야기를 통해 인류 전체의 이야기, 우리의 삶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집을 향한 인간의 그리움>
  오늘 이야기 속 둘째 아들은 더 나은 삶을 기대하며 먼 나라로 떠났지만, 이내 실망하고 맙니다. 굶주리던 그는 아버지 집에 있는 양식을 떠올리며 점점 향수에 빠져들었습니다.
  저도 몇 년 전, 제 모교회와 모교를 한 번 다녀왔던 경험이 있습니다. 군대에서 전역한 이후로는 영도의 자취방에서, 신대원의 기숙사에서 지내다 보니, 집에 종종 가기는 했지만 이전의 추억에 대해 저도 모르게 아련한 것들이 생겼던 것입니다. 그렇게 모교회와 모교를 돌아보는데 기대한 것보다는 만족하지 못했던 경험이었습니다. 어린시절 친구와 뛰어놀던 교회와 고등학교 학창 시절의 추억은 추억에 불과하다는 느낌을 받았었습니다.
  이렇게 ‘집’, ‘고향’이라는 곳에 대한 진한 감정은 그 어딘가에 대한 깊은 동경이 우리 마음 속에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제가 그랬던 것처럼 그 장소가 어디가 되었든, 실제 장소나 또 우리의 가정은 그런 동경을 온전히 채워 주지는 못합니다. 어떤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상황과 감정만 남아있을 뿐, 그 동경을 채워 주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 모두는 둘째 아들과 같습니다. 다 유랑자로서 늘 집을 그리워합니다. 늘 떠돌아 다닐 뿐 어디에도 도착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왜 그런 것인지 창세기 말씀에 그 이유가 나옵니다. 원래 우리는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즐거워하고, 닮아가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그곳이 원래 우리의 집이었고, 우리는 그 나라에 살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집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권위에 인간이 반감을 품었습니다. 오늘 본문 속 탕자 같이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간섭이 싫어 등을 돌렸고, 그래서 그분과 멀어졌습니다. 둘째 아들이 집을 잃은 것과 같은 이유로 우리 역시 집을 잃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우리는 유랑하게 되었습니다.
  천상병 시인의 <귀천>이라는 시를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이 시의 마지막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그는 하늘이 고향이고, 이 세상 삶이 소풍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사실 우리의 삶은 소풍이라기보다 유랑에 가깝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삶이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이후로 영적 유랑자가 되어 방황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본래 집에서 쫓겨나 유랑한 뒤에, 그 아들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인 죄로 정처 없이 땅을 유리해야 했습니다. 먼 훗날 야곱은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도망가 여러 해 동안 유랑해야 했습니다. 이후에 요셉을 비롯한 야곱의 가족은 기근 때문에 집을 떠나 애굽으로 가야 했습니다. 다윗도 왕이 되기 전 수배자 신세가 되어 방랑해야 했습니다. 이후에는 이스라엘 나라 전체가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다시 바벨론에서 유랑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이처럼 유랑에 대한 이야기가 반복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인류 전체가 귀향을 시도하는 유랑자라는 것을 성경이 계속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탕자의 이야기는 우리 모두에 대한 이야기, 우리의 인생에 대한 본질적인 이야기입니다.
  <죄로 인해 쉽지 않은 귀향길>
  집이란 장소는 우리가 갈 때 우리를 받아주는 곳입니다. 그런데 비유 속 둘째 아들이 알고 있었듯이 성공적인 귀향이 반드시 보장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다 돌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앞에 죄라는 벽이 서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아들은 그 벽을 어떻게 돌파해야 할지 몰랐고, 자신이 거부당해 계속 유랑자로 살아야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은 우리의 귀향길에 얼마나 높은 장벽이 있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벨론 포로 기간에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포로기간이 끝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예언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바벨론을 떠나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지만, 실제로 고향으로 돌아간 유대인들은 소수였습니다. 남은 사람들은 그곳에서 계속해서 타국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갔습니다. 그 이후로도 그리스, 시리아, 로마와 같은 강대국들이 줄곧 이스라엘을 침략하고 지배했습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었지만 여전히 압제를 벗어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에 나오는 모든 해방과 귀향은 작은 해방과 작은 귀향이었지, 모두가 동경하고 고대하던 완전한 귀향이 아니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죄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이스라엘 백성은 여전히 유랑 중이었습니다. 불의와 압제, 상실과 고통이 여전히 그들의 삶을 지배했습니다. 포로에서 귀환해 고향에 와 있었지만 궁극적인 귀향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생각한 귀향은 이스라엘의 민족적이고 정치적인 해방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기다린 메시아는 막강한 군사력과 정치력을 가진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사람들은 모여서 예수님을 보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예수님은 사람들의 기대에 못미쳤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신 곳은 왕궁이 아닌, 저 시골 베들레헴의 마굿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정치적으로도 완전히 무관하게 살아가셨고, 학문적으로도 종교적으로도 어떤 인정이나 자격을 얻지 않으셨습니다. 결국 생애 끝에 이르러 도성 밖에서 십자가에 달리셨는데, 이것은 공동체에게 거부당한 유랑자의 생생한 상징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을 정치적 압제로부터 해방하시기 위해서 였습니까? 아닙니다. 우리 모두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우리를 본래의 집으로 데려가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강함이 아닌 약함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겪으신 유랑은 마땅히 우리가 겪어야 할, 우리가 당해야 할 몫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 아버지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유랑하셨습니다. 인류의 반항에 대한 모든 저주와 실향을 친히 당하신 것입니다. 단 하나의 목적, 우리를 진정한 집, 진정한 본향으로 맞이하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마지막 날 벌어질 대잔치>
  탕자의 비유는 둘째 아들의 귀향 잔치로 마무리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역사의 종말을 기록한 요한계시록도 잔치로 끝납니다. 요한계시록의 잔치, 무슨 잔치입니까? “어린 양의 혼인 잔치”입니다. 어린 양은 우리를 용서하고 집으로 데려가시려고 세상 죄에 희생 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잔치가 벌어질 곳은 새 예루살렘, 즉 하늘에서 내려와 이 땅을 가득 채울 하나님의 도성입니다.
  하나님의 도성에는 하나님이 거하실 뿐 아니라, 생명나무도 있습니다. 그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합니다. 죽음과 부패와 고난이 종식될 것입니다. 더이상 전쟁도, 질병도, 아픔도, 슬픔도 없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날에 세상을 다시 완벽한 집으로 만드실 것입니다. 더이상 우리는 떠돌이처럼 유랑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집으로 돌아갈 것이고, 그 때 아버지는 우리를 기쁘게 끌어 안으시며 잔치에 들이실 것입니다.
  요한복음 2장을 보시면 혼인잔치에 포도주가 너무 일찍 떨어지는 일이 생겼습니다. 결혼한 부부는 물론이고, 피로연을 진행하던 연회장도 사람들에게 망신을 당할 처지에 놓였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돌항아리 여섯 개에 물을 채우라고 하시고, 그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습니다.
  이 일은 예수님께서 첫 번째로 행하신 기적이었습니다. 요한은 이 기적을 “표적”이라고 말합니다.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 사역의 방향을 보여주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일도 많은데 예수님은 왜 굳이 잔치집에서 음료를 준비하시는 일로 자신의 사역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신 것입니까? 그것이 예수님의 사역과 일치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흥겨운 잔치를 베풀러 오셨기에 그 혼인잔치에서 최상급 포도주를 만드는 일로 사역을 시작하셨던 것입니다.
  먹고 마시는 식사는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식사가 중요한 이유는 몸에 영양분을 공급해 성장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생존하고 성장하려면 각자가 꾸준히 먹고 마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복음을 각자 자신의 것으로 삼아야 하며, 점점 더 자신이 보고 생각하고 느끼는 모든 것의 중심에 두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지혜와 사랑과 기쁨과 평안에서 영적으로 자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복음을 믿기는 하지만 여전히 나의 소망과 안전을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로부터 찾으려고 합니다. 여전히 우리 마음이 의지하는 것은 예수님이 아니라 나를 향한 사람들의 인정, 직업적인 성공, 권력, 명예와 같은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은 단순히 우리의 의지로 바꿀 수 없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원리, 진리를 배우고 실천하려고 힘쓴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영적 변화는 복음을 더 깊이 이해하고, 그 복음이 우리 마음에 베어들게 해야만 가능합니다. 쉽게 말하자면, 복음을 꼭꼭 씹어먹고 잘 소화해서 나의 일부로 삼는 식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복음을 가지고 식사하고 소화시켜야만 성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먹고 소화시켜 나오는 실제적인 변화의 예를 하나 들어보자면 이런 것입니다.
  복음을 먹고서 이전보다 돈을 더 후하게 베풀고 싶을 수 있습니다. 갑자기 복음이 맛없어 보이지는 않으셨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단순히 의지를 가진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재물이란 남들의 인정과 존경을 얻는 길입니다. 또 돈이 많으면 스스로의 삶을 잘 통제할 수 있다고 느낍니다. 그래서 돈이 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소망을 거기에 두고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사도 바울이 성도들에게 “연보, 즉 헌금하는 것은 사도인 나에게 너희가 마땅히 해야할 의무다”라고 압력을 넣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감정에 호소해 빈민들의 어려운 사연을 말하거나, 그들이 다른 이들보다 부자라는 식으로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대신 바울은 고린도후서 8장 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은 다시 그들을 복음으로 데려갑니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값비싼 은혜를 한 번 생각해 봐라. 그러면 결국 너희도 예수님처럼 베풀고 싶어질 것이다.” 인색함을 해결하기 위해 돈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베푸심이 있는 복음으로 방향을 돌린 것입니다.
  이처럼 변화가 이루어지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씹고 뜯고 맛보고 소화시켜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동기, 자아, 정체성, 세계관이 뜯어고쳐집니다. 그래서 복음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출발점이며 동시에 종착점입니다.
  매주 예배라는 하늘 잔치가 열립니다. 그 잔치에 멋지게 차려진 그 복음을 보고 “목사님 말 잘하네~”, “음식 잘 차려놨네”하고 그냥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라는 맛있는 음식을 잘 씹고 뜯고 맛보고 소화시켜 복음으로 변화되고 성장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잔치라는 것은 본질상 공동체적인 것입니다.
  잔치에 누군가를 초대하고 함께 먹는다는 것은 긴장을 풀고 서로 알아가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시대는 공동체보다 개인이 우선시되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영적 성장을 원하면서도 교회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독립성을 잃지 않으려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교회 공동체에 깊이 동참하지 않고서는 결코 영적으로 성장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20-22절에서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퉁잇돌이 되셔서 우리의 기초가 되어주시고,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연결되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어간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 각자가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예수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간다고 말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서로 서로 연결되어, 함께 성전으로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나 혼자서는 성전이 될 수 없습니다. 나 혼자서는 모퉁잇돌 옆에 있는 돌 하나밖에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공동체로서 함께 연합해야만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는 영적 성장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혹시 “나는 다른 사람들과 교제하는 것이 귀찮아”, “저 사람하고 같이 하는 것보다 나 혼자 하는게 더 완벽하고, 더 빠르고, 제대로 할 수 있어”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교회 공동체는 그렇게 움직이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완벽하게 일을 해야 하나님께 영광이라면 각 분야의 전문가를 고용해서 모든 일을 완벽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목적은 완벽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함께 지어져 가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다른 이들의 약함을 감싸주고, 나의 약함은 다른 이들이 감싸주며, 함께 영적 성장을 이루어가는 공동체가 교회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기 전에 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바베트의 만찬』이라는 소설입니다. 이 이야기는 ‘마르티네’와 ‘필리파’라는 두 자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녀들의 아버지는 덴마크의 작은 해변 마을에서 매우 엄격한 종교 공동체를 이끌던 목사였습니다. 두 자매는 젊은 시절 각자 세상적인 유혹을 받았습니다. 마르티네에게는 젊은 장교가 다가왔고, 필리파에게는 그녀의 노래를 듣고 반한 오페라 단장이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결국 세상의 길을 선택하지 않고, 아버지 곁에 남아 종교 공동체의 삶을 이어갔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공동체는 유지되었지만, 기쁨은 사라졌습니다. 사람들은 도덕적으로는 바르게 살았지만, 서로를 원망했고, 마음은 굳어져갔습니다. 대화가 줄어들었고, 얼굴에는 웃음이 사라졌습니다. 공동체에 종교적 옳음은 있었지만, 생명력은 없었던 것입니다.
  그 무렵, 프랑스에서 정치적 난민으로 도망쳐 온 한 여인이 이 집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바베트였습니다. 어느 날 바베트는 뜻밖에 복권에 당첨됩니다. 그리고 그 돈으로, 두 자매의 아버지 생신을 기념하는 저녁 식사를 자신이 준비하겠다고 했습니다.
  알고보니 바베트는 과거 파리에서 명성이 있던 요리사였던 것입니다. 식사 날이 되었고,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 모였습니다. 그 자리에 과거 마르티네에게 다가왔던 장교도 장군이 되어 참석했습니다. 그는 성공한 인생을 살았지만, 마음 한켠에는 늘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이 있었고, 자신이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식사가 시작되자 분위기가 달라졌습니다.
  정성껏 준비한 음식과 포도주가 사람들의 마음을 풀어 놓았습니다. 오래된 원망이 누그러지고, 굳어 있던 표정들이 부드러워졌습니다. 말이 다시 오가기 시작했고, 용서와 화해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습니다.
  그때 장군이 자리에서 일어나 시편 85편을 인용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은혜와 진리가 서로 만나고, 의와 천국의 기쁨이 입맞추었습니다.”
  이 만찬이 사람들을 바꾸었습니다. 도덕적으로 바뀌지 않던 공동체가, 한 번의 잔치로 녹아내렸습니다.
  하지만 이 소설은 여기까지입니다. 작가는 이 만찬이 무엇인지 정확히 말해주지 않습니다. 다만 세상의 성공도 아니고, 종교적 성취도 아닌 다른 무엇이 필요하다는 것만 보여줍니다.
  성경은 그 다른 무엇을 숨기지 않습니다. 그 만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한복음 6장 35절에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은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 세상을 따라 살아가는 동생의 삶도, 윤리적인 삶을 살았던 형의 삶도 영적으로 막다른 골목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로 가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 자신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떤 길로 가고 계십니까? 동생이 갔던 길입니까? 형이 갔던 길입니까?
  나는 형과 같이 아버지 집 안에 있으며, 종교적인 길을 잘 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안심하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그런데 세상의 길 뿐만 아니라 윤리적이고 종교적인 형의 길도 그 끝은 막혀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가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길을 가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마지막 날, 연회장이신 예수님께서 베푸신 최고의 잔치에 참여해 최고의 만찬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함께 하나님 나라의 잔치 공동체를 이루어가면, 미래에 누릴 그 놀라운 잔치를 지금 미리 맛볼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기에 우리 교회 공동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함께 걸어가는 잔치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다른 무엇이 아닌 복음으로 돌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걸어가시길 소망합니다. 그래서 종말에 누릴 하나님 나라의 잔치, 천국 잔치를 지금부터 맛보며 살아가는 잔치 공동체가 되는 우리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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