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10장

이주혜
새벽기도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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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 찬송가 302, 384장

다시 새겨 주시는 하나님, 마음에 새겨지는 언약

신명기 10장을 통해 은혜받고 가는 귀한시간되길 소망합니다.
여러분, 신명기라는 책은 같은 이야기를 많이 반복합니다. “십계명 이야기 또 나오네.” “규례 이야기 또 나오네.” 이런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같은 말을 반복하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람은요, 한 번 들었다고 해서 그 말씀이 삶이 되지 않습니다. 한 번 결심했다고 해서 그 결심이 곧바로 습관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말은 반복해서 새기고, 중요한 약속일수록 다시 확인합니다.
제가 남동생이 하나 있습니다. 남동생이 인생에서 가장 큰 돈을 움직였던 순간이 전세계약을 할 때였습니다. 서류를 얼마나 신중하게 보는지, 한 줄 한 줄을 몇 번이나 다시 읽는지, 도장을 찍기 전에 다시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그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의심해서가 아니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큰 약속일수록, 큰 결단일수록, 다시 확인하면서 마음에 새깁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잊지 말라”는 말은 단지 기억력의 문제가 아니라, 정체성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신명기는 출애굽 2세대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광야에서 자라난 세대입니다.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두고 있는 세대이기 때문에 이제 막 현실의 선택을 해야 하는 세대입니다. 그러니 모세는 다시 말합니다. “너희가 누구인지 잊지 말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잊지 말라.” “말씀이 무엇인지 잊지 말라.”
그런데 오늘 본문 신명기 10장은 그 반복 중에서도 특별히“규례를 지켜라”만 말하는 장이 아니라, 깨진 언약이 어떻게 다시 세워지는지를 보여 주는 장입니다.

깨진 언약을 다시 세우시는 하나님(1–5, 10–11)

10장의 처음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 때에.”(10:1)
이 “그 때”는 바로 금송아지 사건 직후입니다. 백성이 우상숭배로 무너졌고, 모세가 하나님 앞에 엎드려 중보했고, 하나님이 긍휼로 언약 회복을 다시 말씀하신 바로 그 때입니다.
여러분, 이 “그 때”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장 부끄럽고 가장 처참하게 무너진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무너져 있고 언약에 깨져 있는 그 때에
Deuteronomy 10:1–2 NKRV
그 때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너는 처음과 같은 두 돌판을 다듬어 가지고 산에 올라 내게로 나아오고 또 나무궤 하나를 만들라 네가 깨뜨린 처음 판에 쓴 말을 내가 그 판에 쓰리니 너는 그것을 그 궤에 넣으라 하시기로
하나님의 마음이 여기에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끝났다”라고 하지 않으시고 “다시 올라오라”와서 “다시 쓰겠다” 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다시 세우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아주 현실적인 은혜가 함께 들어 있습니다. 첫 돌판은 하나님이 친히 주신 돌판입니다. 그런데 두 번째 돌판은 모세가 직접 다듬어 준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위에 말씀을 새겨 주십니다.
이게 무엇을 의미면 하나님이 용서하시면, 관계는 회복됩니다. 그러나 회복이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되는 방식은 아니라는 말씁입니다. 회복은 되지만 흉터는 남아 있다라는 말씀이에요.
우리가 누군가에게 큰 실수를 했을 때 관계가 다시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실수가 남긴 흔적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회복된 관계는 가벼 울 수 없고 오히려 더 진지해집니다. 더 조심해지고 소중하게 붙들게 됩니다.
신명기 10장은 그 은혜를 이렇게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다시 언약을 새겨 주시는데 그 새김은 가벼운 새김이 아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다른 내용”을 새기지 않으십니다.
“네가 깨트린 처음 판에 쓴 말을”(10:2 요지) 그대로 다시 써 주십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시려고 말씀의 기준을 낮추지 않으십니다. 형식과 상황은 달라질 수 있어도, 하나님이 주신 계명과 언약의 내용은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오늘 말씀이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깨진 언약을 다시 세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은혜는 현실을 건너뛰는 은혜가 아니라, 다시 새기게 하시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지고 살게 하신다.(6–11, 8–9)

이제 10장 중간으로 가면 가로로 쳐져 있는 부분이 등장하면서 분위기가 갑자기 달라집니다. 갑자기 이동 경로 같은 기록이 나오고, 아론의 죽음과 제사장직 계승 이야기가 나오고, 레위 지파 이야기가 나옵니다. 처음 들으면 “왜 갑자기 이 얘기를 하지?” 싶은데 말씀을 자세히 보면 앞에 세운 언약이 공동체의 중심이 되도록 하나님이 질서를 세워가심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10:6입니다. 아론이 죽고, 엘르아살이 제사장의 직임을 이어갑니다.
사실 아론에게도 범죄와 실패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제사장직을 끊어 버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신실하심으로 제사장직이 후손에게 계승되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계승은 그냥 행정 절차가 아니라, 모세가 아론의 옷을 엘르아살에게 입히는 상징적 의식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금송아지 사건 이후 언약이 다시 회복되었다는 사실이, 첫째는 돌판의 회복으로 드러나고, 둘째는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서 중보할 제사장직의 계승으로도 분명히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2. 그리고 10:8에서 “그 때에 여호와께서 레위 지파를 구별하여…”
이번에는 레위지파를 구별하십니다. 레위지파는 언약궤를 어깨에 메고, 여호와 앞에 서서 섬기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는 일 담당하게 하십니다.
말씀은 박물관에 유리장 안에 넣어두는 유물처럼 “있기만 하면 되는 장식품”처럼 두지 않으시고, 말씀은 공동체가 어깨에 메고, 삶 속으로 지고 들어가야 하는 중심으로 세우십니다.
3. 그러면 10:9가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레위는… 분깃이 없으며 기업이 없고”
여기서 “분깃”과 “기업”은 똑같은 말이 아닙니다. 분깃은 주로 동산과 관련된 몫이고, 기업은 부동산과 관련된 상속 재산에 가까운 개념으로 구분됩니다. 분깃과 기업이 없이 오직 종교적인 직무에 전념하도록 하셨고, 하나님이 48성읍과 십일조로 거처와 생필품을 공급하신다고 연결됩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문장이 나옵니다.
“여호와가 그의 기업이시니라.” 여호와의 거룩한 일을 하도록 구별된 레위인들이 그 봉사의 직임에 충실할 때, 하나님이 친히 그들의 생계를 책임져 주시는 분이 되신다는 의미로 풀립니다.
여러분, 여기서 메시지가 아주 분명해집니다.
말씀은 “있다”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은 “보관”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은 공동체가 메고 살아야 하는 중심입니다.
여러분, 이게 레위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말씀은 공동체의 중심이고, 하나님은 그 말씀을 섬기는 질서도 세우시고, 그들을 책임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10:11이 이렇게 끝나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일어나서 백성보다 먼저 길을 떠나라…”(10:11)
하나님은 돌판을 다시 새겨 주시는 것으로 끝내지 않으시다. 회복된 언약을 품고, 이제는 다시 출발하게 하시다. 언약은 기억으로만 남지 않다. 언약은 길 위에서, 삶 속에서 드러나기 시작하다.
하나님이 언약을 다시 새겨 주셨으면, 이제 끝이 아니라 출발입니다. 하나님이 관계를 회복시키셨으면, 이제 제자리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회복을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시는 회복은 “과거로 돌아가서 다시 똑같이 사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다시 출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핵심은 “마음”(12–16)

이제 본문이 질문 하나로 들어갑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10:12)라는 질문에서 시작합니다.
여기서 모세는 규례를 잔뜩 늘어놓지 않습니다. 핵심만 말합니다.
Deuteronomy 10:12–13 NKRV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경외하고, 사랑하고, 섬기고, 순종하라… 그런데 이 모든 말의 중심에는 하나가 있습니다.
마음입니다.
그래서 10:16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여러분, 이 표현이 좀 세게 들릴 수 있습니다. “할례”라니, “목을 곧게”라니, 말이 어렵고 딱딱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지금 하려는 말은 아주 현실적입니다.
우리는 겉으로는 얼마든지 신앙인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저도 어렸을 때 신앙 좋은 사람, 믿음 좋은 사람은 오래 앉아서 기도하는 사람인 줄 알다. 그래서 오래 기도하면서 “이러면 믿음 좋아 보이겠지?” 생각했던 적도 있다. 교회학교에 있으면 아이들이 순수하게 하나님을 믿지만, 한편으로는 달란트를 더 받으려고, 칭찬을 더 받으려고, 말씀 암송도 잘 ‘보이려고’ 하는 마음이 들어갈 때도 있다.
예배 자리에 있고, 찬송도 하고, 아멘도 하고, 교회 용어도 잘 알고, 신앙 경력도 길 수 있지만, 마음이 하나님께 붙어 있지 않으면, 사람은 결국 어딘가에 또 붙습니다. 금송아지 사건이 그랬죠. 겉모습만 붙잡고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면, 결국 우상을 섬기는 그 자리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겉모습을 더 크게 만들라”가 아니라, “마음에 할례를 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겉은 그만 꾸미고, 속을 정리하라.” “하나님을 밀어내고 내가 주인 되려는 그 고집을 잘라내라.”
특별히 “목을 곧게 하지 말라.”하는 말은 쉽게 말해 고집입니다. 하나님 말씀 앞에서도 안 굽히는 고집을 이야기합니다. 사람이요, 하나님 앞에서는 겸손한 척하는데, 실제 삶에서는 “내가 맞다”만 붙들 때가 있습니다. 그게 목이 곧은 겁니다. 하나님이 지금 그걸 건드리시는 겁니다.

그 마음은 이웃 사랑으로 드러남(17-22)

그런데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마음”은 감정으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10:17부터 모세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선포합니다. 그리고 그 내용이 분명합니다.
Deuteronomy 10:17 NKRV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 가운데 신이시며 주 가운데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은 겉치레나 포장으로 움직이지 않으시는 분임을 들어내면서, 겉으로 통과시키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공의는 차갑기만 하지 않습니다. 10:18을 보십시오.
Deuteronomy 10:18 NKRV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신다”는 말은, 하나님이 약한 자를 그냥 불쌍히 여기기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억울한 일을 풀어 주시고 마땅한 권리를 세워 주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감정적으로만’ 따뜻하신 분이 아니라, 실제로 바로잡으시는 분입니다.
“나그네”도 잠깐 들르는 여행객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 섞여 살지만 보호받기 어려운 약한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좋은 말 한마디”로 끝내지 않으십니다. 떡과 옷, 실제 필요한 것을 주시며 사랑을 현실만들어 가십니다.
여러분, 이게 신명기 10장이 말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말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예배당 안에서만 머물지 않습니다. 마음이 하나님께 붙으면, 그 마음은 반드시 사람을 대하는 방식으로 드러납니다. 특히 약자를 대하는 방식으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19절에
Deuteronomy 10:19 NKRV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
너희도 약한 자리에서 살았던 사람들 아니냐는 말입니다. 너희도 보호받지 못하는 자리에서 울었던 사람들 아니냐는 말입니다. 그러니 너희는 다르게 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나그네 사랑”은 단순한 친절 캠페인이 아닙니다. 언약 백성의 정체성을 보여 주는 표지입니다.
그리고 10:20에서 모세는 이렇게 말합니다.
Deuteronomy 10:20 NKRV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그에게 의지하고 그의 이름으로 맹세하라
여기서 “의지하다”는 말은 그냥 “필요할 때만 찾는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대어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의지하면 삶의 방향이 달라집니다. 말이 달라지고, 선택이 달라지고, 관계가 달라집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다시 새겨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달라붙어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의지하는 것이 약자를 대하는 방식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10:21이 말합니다.
“그는 네 찬송이시요 네 하나님이시라”
여러분, 여기서 “찬송”은 분위기가 아닙니다. 기억이고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실제로 너희를 위해 일하셨다는 기억입니다.
그리고 22절에 칠십 명으로 내려갔던 백성이 별처럼 많아졌다는 이 고백은, 하나님이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라는 증거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우리가 찬송하는 이유도 똑같습니다. “주님이 여기까지 인도하셨습니다.” 이 고백이 있으면, 이제 다음 걸음을 걸어갈 힘도 생깁니다.

결론

이제 신명기 10장은 하나님은 언약을 다시 새겨 주시는 것으로 멈추지 않으시고,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워 길을 떠나게 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길에서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 우리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사랑하시고, 떡과 옷처럼 실제로 필요한 것을 채워 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신명기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있다면, 결국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달라져야 합니다. 사랑이 말로만 머물 수 없고 삶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오늘 하루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랑이 말이 아니라 삶으로 나타나는 귀한 하루 되길 소망합니다.
[ 기도 하겠습니다 ]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우리를 예배의 자리로 불러 주시고 말씀으로 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신명기 10장의 말씀처럼, 깨진 언약을 다시 새겨 주시고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워 길을 떠나게 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찬송합니다.
주님, 우리 신앙이 겉모습으로만 남지 않게 하옵소서.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우리의 마음임을 기억하게 하시고, 완고한 마음과 고집을 내려놓게 하옵소서. 주님을 경외하며 섬기고, 무엇보다 주님께 의지하는 삶을 살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은혜의 주님,
주님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고, 나그네를 사랑하여 떡과 옷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도 그 마음을 배워 약한 이들을 외면하지 않게 하시고, 사랑을 말로만 하지 않게 하시며, 누군가에게 실제 도움이 되는 손길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들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복된 하루되게 하옵소서.
특별히 말씀 위에 서게 하시고, 예배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예배가 되게 하옵소서.
병상에 있는 성도들을 기억해 주시고, 주님의 위로와 치유로 함께하여 주옵소서. 추운 날씨 속에서도 성도들의 건강을 지켜 주시고, 마음이 낙심하지 않게 지켜주시며 각 가정과 일터에도 주님의 평안과 지혜를 더하여 주셔서 주님의 인도를 받는 자녀되게 하옵소서.
오늘도 우리의 찬송이 입술로만 끝나지 않고, 의지와 순종과 사랑의 삶으로 이어지게 하옵소서.
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주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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