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손의 용기

사도행전 강해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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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야손의 용기

본문: 사도행전 17장 1-9절

찬송: 461장 십자가를 질 수 있나

말씀의 문을 열며

우리는 흔히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능력으로 하늘에서 뚝딱 하고 역사를 만드신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사람’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위대한 계획을 받아낼 믿음의 사람이 있을 때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사도 바울은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도자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바울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잘나서가 아닙니다. 바울이 쓰러졌을 때 그를 일으켜 세운 아나니아가 있었고, 아무도 바울을 믿어주지 않을 때 그를 변호해준 바나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읽은 사도행전 17장 은 바울의 선교 여정 가운데 하나님께서 숨겨두신 보석 같은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로 야손입니다. 바울이 낯선 땅 데살로니가에 이르렀을 때, 그곳은 우상이 가득하고 황제 숭배가 강한 험지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곳에 바울을 위해 야손이라는 사람을 예비해 두셨습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는 소란스러운 세상 속에서 바울을 지켜내고 초대교회의 불씨를 살려낸 야손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원하시는 참된 용기가 무엇인지 함께 묵상하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휘포데코마이의 용기

오늘 본문 7절을 보면 유대인들이 야손을 고발하며 이렇게 소리칩니다. “야손이 그들을 맞아들였다!” 여기서 ‘맞아들였다’라는 말은 단순히 손님이 왔으니 문을 열어주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헬라어 성경을 보면 ‘휘포데코마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아래로’라는 말과 ‘받다’라는 말이 합쳐진 단어입니다. 즉, 누군가를 내 지붕 아래로 깊숙히 받아들여서, 그 사람의 모든 안전과 생명을 내가 책임지겠다는 결단의 언어입니다.
당시 데살로니가는 로마 황제 가이사를 신처럼 섬기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와서 “가이사가 아니라 예수가 우리의 진정한 왕이다”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러니 바울을 집에 들이는 것은, 자칫하면 반역죄로 몰려 집안이 풍비박산 날 수도 있는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다른 곳을 알아 보십시오.”라고 말하며 문을 걸어 잠갔을 것입니다.
야손이라고 두려움이 없진 않았을 것입니다. 그에게도 지켜야 할 가족이 있고, 땀흘려 일궈놓은 삶의 터전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서슬 퍼런 감시 또한 무서웠을 것입니다. 어쩌면 문을 열어주기기 직전까지 수만 가지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을지도 모릅니다. ‘이 문을 열면 내 평온한 일상은 끝이다.’, ‘내가 이 사람을 들이면 우리 가족이 위험해질 수도 있다.’ 이런 생각 왜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야손은 그 두려움보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더 크게 보았습니다. 그는 인간적인 계산기를 내려놓았습니다. 이것이 내게 이익이 될까, 손해가 될까를 따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을, 그리고 그가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자기 삶 가장 깊은 곳으로 모셔들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우리는 종종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계산기를 두드립니다. ‘이 봉사를 하면 내 몸이 힘들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직분을 맡으면 내 시간이 뺏길 수도 있다’고 계산합니다. 하지만 손님이 찾아 왔을 때 내 형편이 넉넉하고 편안해서 모시는 것이 아닙니다. 불편함을 감수하고 문을 활짝 열었을 때, 그 손님이 복덩이가 되어 우리 집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진짜 용기 있는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을 통해, 혹은 상황을 통해 내 문을 두드릴 때, 계산하지 않고 “아멘!”하며 내 삶의 안방을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야손이 바울을 영접한 것은 한 사람을 영접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영접한 것이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용기가 바로 이것입니다. 몸이 조금 고단하고, 상황이 여의치 않아도, 주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에 문을 두드릴 때 활짝 문을 여는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저와 여러분이 모두 주님의 말씀을 내 삶의 가장 귀한 손님으로, 더 나아가 내 삶의 주인으로 모셔 들이는 '휘포데코마이'의 용기를 가질 때, 우리 가정과 교회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이 됩니다.

침묵의 용기

오늘 본문을 보면 두 가지 모습이 아주 대조적으로 나타납니다. 5절을 보면 유대인들과 시장의 불량배들은 “시기하여 떼를 지어 소동하게” 합니다. 그들은 시끄럽게 소리 지르고, 사람들을 선동하고, 거짓말을 퍼뜨립니다. 이것이 세상의 방식입니다. 세상은 힘을 과시하기 위해 목소리를 높입니다.
야손은 이들에게 끌려갔습니다. 억울하게 읍장들 앞에 섰습니다. 그런데 성경 어디를 봐도 야손이 읍장들 앞에서 “내가 억울하다.”, “저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이다.”라고 맞서 싸우거나 소리를 질렀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야손은 침묵했습니다. 이 침묵은 할 말이 없어서 가만히 있는 비겁함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소란스러운 세상의 소리에 똑같이 맞대응하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가질 수 있는 거룩한 평정심이었습니다. 야손은 말로 싸우는 대신 행동으로 보여주었습니다.
9절에서 야손은 ‘보석금’을 내고 풀려납니다. 보석금을 냈다는 것은, 바울 일행이 안전하게 떠날 수 있도록 자신이 모든 법적, 경제적 책임을 뒤집어쓰겠다는 희생입니다. 야손은 말로 이기려 하지 않고, 자신의 재산을 내어놓고 희생을 감수함으로써 교회를 지켰습니다.
야손의 이같은 모습은 예수님을 너무나 닮았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를 지시기 전, 억울한 모함과 비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털 깎는 자 앞의 양처럼 잠잠하셨습니다. 변명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말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명을 대속물로 내어 놓아야지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음을 분명하게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야손이 지불한 ‘보석금’은 단순한 돈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를 닮은 작은 구속의 사건입니다. 누군가가 대가를 지불해야 분쟁이 끝납니다. 누군가가 손해를 봐야 평화가 옵니다. 야손은 예수님처럼 자기가 손해 보는 길을 택함으로 데살로니가 교회를 지켜냈습니다.
이처럼 교회는 누군가 말없이 흘리는 눈물과, 묵묵히 지불하는 희생의 대가 위에 세워집니다. 지금도 우리 교회 곳곳에는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새벽마다 눈물로 제단을 적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궂은일을 도맡아 하시면서 “나는 무익한 종과 같습니다” 하며 침묵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바로 이와같은 분들이 이 시대의 진정한 야손입니다.
우리는 때로 억울한 소리를 들을 수도 있습니다. 주변이 어수선하고 시끄러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 똑같이 소리를 지르며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세상의 방법입니다. 우리는 야손처럼 침묵의 용기를 선택해야 합니다.
내가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내 자존심이 조금 상하더라도, 교회의 평안을 위해 묵묵히 기도의 자리를 지키는 것, 그것이 진짜 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침묵의 헌신을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말씀의 문을 닫으며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홀로 일하지 않으시고, 야손과 같은 믿음의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야손은 대단한 영웅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계산하지 않고 말씀을 영접한 사람, 그리고 소란스러운 세상 속에서도 말없이 대가를 지불한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에게 야손이 있었기에 데살로니가 교회가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중앙교회에도 이런 야손이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 “제가 아개님에게 야손이 되겠습니다” 이렇게 고백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이런 은혜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시끄럽고 소란해도, 우리 안에 ‘맞아들임의 용기’와 ‘침묵의 헌신’이 살아있다면, 우리 중앙교회는 성령의 능력으로 다시 힘차게 일어설 뿐만 아니라 기도의 능력으로 소망을 누리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시대의 야손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그 용기 있는 믿음을 통해, 우리 가정이 살아나고 우리 교회가 든든히 서가는 놀라운 역사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거둠의 기도

참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
오늘 말씀을 통해 소란한 세상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던 야손의 용기를 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전심으로 주님을 향하는 한 사람을 찾으신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하나님, 우리는 때로 두려움 때문에, 혹은 내 이익을 계산하느라 말씀을 삶의 가장자리로 밀어내려 했습니다. 주님을 온전히 '휘포데코마이', 맞아들이지 못했던 우리의 연약함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제는 야손처럼 계산 없이 말씀을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시는 용기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세상의 소란함과 비난 앞에서도 맞서 싸우기보다, 묵묵히 희생의 대가를 지불하며 교회를 지켜내는 침묵의 용기를 우리에게 주시옵소서.
우리 중앙교회의 모든 장로님들과 권사님들, 그리고 모든 성도들이 이 시대의 야손이 되어, 서로를 지켜주고 세워주는 은혜의 통로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헌신을 통해 하나님의 교회가 든든히 서고,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일하심이 드러나기를 소원합니다.
우리를 죄에서 맞아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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