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죄의 기원과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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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죄의 기원 : 한 사람의 죄
I. 죄의 기원 : 한 사람의 죄
오늘날 인간이 겪고 있는이 세상의 악과 고통은 영혼의 죽음이라는 질병의 상태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죽음의 질병은 죄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담과 맺으신 언약과 관계가 있습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후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 명령을 내리십니다. 첫째로, “생육하고 번성하여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것이고, 둘째로,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18)
우리는이 첫 번째 것을 문화 명령 혹은 노동 명령이라고 부르고 두 번째 명령을 종교 명령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후자인 종교 명령은 단지 일방적인 명령이 아니라 계약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조건과 약속을 가진 계약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언약’이라고 부릅니다. 언약의 내용은 바로 동산 중앙에 심어 놓은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것이었으며 그 언약에는 약속과 형벌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언약을 어기면 죽음의 형벌이 있고, 언약을 지키면 영생을 누리면서 하나님과 친교 속에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명령하신 실과가 달린 나무는 보통 나무였습니다. 19) 그 나무의 굳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나무에게 의미를 부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에덴동산에서는 악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선과 악을 대비해서 알게 된다는 것은 곧 악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악은 바로 아담의 범죄를 통하여 인간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하게 한 상태가 된 것이며, 또한 그 결과였습니다.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어기고 불순종하게 되면 그러한 결과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들은 선악과와 관련하여 흔히 이런 생각을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에서 선악과를 만들어 놓으셨는가? 선악과가 없었다면 인간의 범죄도 없었을 텐데...”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는 이렇게까지 생각합니다.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으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못하게 좀 말리셨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나 선악과를 거기에 두신 것이 범죄 원인이 될 수 없습니다. 하와가 그것을 보고 유혹을 받았던 것은 이미 자신 안에 하나님께 대한 의존의 관계를 이탈하려는 불순종의 의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유혹은 우리 안에 없는 무엇인가 악한 것을 집어넣을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 안에 이미 존재하는 것을 이끌어낼 뿐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기 전에 이미 그들 안에 그렇게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을 가졌을 때에 늘 보던 선악과가 이전과는 다른 의미를 가지고 그들에게 다가왔습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 3:6)
만약에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온전히 의존하면서 그 언약에 충실하고자 하였다면 하나님께서 동산 중앙에 두신 선악과는 오히려 은혜의 수단이 되었을 것입니다.
온 천하를 지으신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께서 그 아름다운 세계를 인간에게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대신하여 피조 세계를 통치하고 있었기에 인간은 언제든지 자기가 하나님이라 착각을 할 수 있었습니다. 아담은 우리같이 죄가 있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죄로부터 완전한 상태도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그에게 얼마든지 불순종할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20) 선악과가 동산중앙에 있었던 것 자체에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졌다면 그 선악과는 하나님이 누구이시고 자신에게 지정된 지위가 무엇인지를 알게 해주는 은혜의 수단이 되었을 것입니다. 온 땅을 하나님처럼 다스리다가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과 앞에 이르면 그들은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아아, 그렇다. 내가 이 온 땅을 다스리고 있지만 나를 비롯한 이 세상의 창조주는 하나님이시고 나는 그분의 손으로 지음받은 피조물뿐이다.” 만약 아담과 하와가 매일을 그렇게 선악과 앞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달으며 살았더라면 선악과는 시험의 도구가 아니라 은혜의 방편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두 사람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하나님께서 금하신 나무의 실과를 따 먹었습니다. 21) 그리고 그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는 죄가 물밀듯이 들어왔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까지 미친 것입니다. 아담이 범죄한 결과가 왜 우리에게까지 유전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당합니다. 아담은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그 이후에 태어날 모든 인류의 대표자로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기 때문입니다. 22)
우리는 이것을 성경의 대표 사상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항의하고 싶을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 그 선악과 맛이나 봤나? 그런데 우리가 왜 아담이 먹은 선악과 때문에 죄 중에 태어나서 이 고생을 하고 살아야 하는가?”
그렇다면 저는 다음과 같이 반문하고 싶습니다. 만약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더라면 지금 우리의 형편은 어떠할까요? 아담은 동산 중앙의 선악과를 보고, 뱀의 유혹을 이기며,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 마음을 지키며 애를 썼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하나님과의 언약에 순종했다면, 우리는 먹고 싶은 선악과를 먹지 않기 위하여 참은 적도 없고, 유혹을 이기려고 애를 쓴 적도 없는데 한 사람 아담의 순종의 덕으로 영생을 누리면서 살게 되었을 것 아닙니까? 우리는 아무 공로도 없이 그 영생을 누리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대표 사상입니다.
아담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은 개인이 아니라 온 인류의 대표자로서 맺은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해보면 성경의 대표 사상이 전혀 부당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23)
사도 바울은 이러한 사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5:12) 인간의 유죄 여부를 판단하는 율법이 기록된 것은 주전 15세기인 모세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아담 이후로부터 모세 시대에 이르기까지 율법이 기록되지 않았던 때에도 인간들은 죽었습니다. 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아담의 죄에 기초해서 인간들을죄가 있다고 보셨음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24)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개인의 문제일 뿐 아니라 이후에 태어날 온 인류의 문제기도 하였습니다. 특별히 종교명령에서 구체화된 언약을 통하여 모든 인류의 대표자가 된 아담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은 범죄는 온 세상에 죄가 물밀듯이 밀려와 가득하게 만들어버리고 말았습니다. 25) 마치 홍수 때에 제방 둑이 터지면서 엄청난 흙탕물이 삽시간에 밀려 들어와 한 동리를 모두 물바다로 만들어 버리는 것과 같이 온 세상이 밀려 들어온 죄의 영향 아래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II. 죄의 결과
II. 죄의 결과
이렇게 죄가 세상에 밀려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두 가지 결과가 일어났는데 첫째로 관계에 있어서이고 둘째로 인간 자신에 있어서입니다. 우선 죄는 관계의 파괴를 가져왔습니다. 그것은 네 가지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의 파괴, 사람과의 관계의 파괴, 자연과의 관계의 파괴, 자아와의 관계의 파괴가 바로 그것입니다.
A. 모든 관계의 파괴.
A. 모든 관계의 파괴.
첫째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목적을 따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존재로 이 세상에서 살고, 온 창조 세계를 하나님의 대리인처럼 영광스럽게 다스리며 하나님을 기뻐하는 지위를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참으로 인간으로서 살아가게 하는 하늘 자원이 공급되는 통로가 막혀 버리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혼의 생명이 박탈된 죽음의 상태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영혼의 죽음의 상태는 악과 고통을 가져왔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고통이 생기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신 자기 방식대로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완고한 습관이 생겨났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희미하게 인식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사는 창조시의 본성을 거의 잃어버린 것입니다.
둘째로, 사람과의 관계가 파괴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아담과 하와 두 사람의 관계에서 제일 먼저 나타났습니다. 그들이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하기까지 두 사람 사이에는 어떤 갈등도 없었습니다. 다만 하와가 먼저 선악과를 따먹고 그것을 아담에게 주어서 먹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범죄한 후에 두 사람 사이에 골 깊은 갈등이 생겨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은 연유를 물었을 때 그는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셔서 함께 하신 이 여자가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26) 부부가 될 때에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왔던, “이는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라” 27)라는 고백은 이미 사라져 버렸습니다. 아담에게 하와는 이미 함께 있어서 괴로운 존재가 되었던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인간관계가 파괴되어 가는 역사는 그의 처음 자손들의 이야기에서 나타납니다. 두 사람이 낳은 아들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이는 첫 살인자가 되었고, 아담과 하와는 처음으로 죽음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그리고는 가족과의 이별을 경험하는 첫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관계의 파괴는 아담의 후손에게도 이어졌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그러한 죄는 그 후손들에게 예외없이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 주위를 돌아보십시오. 마땅히 사랑해야 할 사람 사이에서도 조차도 진정한 화목을 찾아보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사람들 사이에는 갈등과 분쟁이 그치지 않고, 이제는 그러한 관계의 깨어짐에서 오는 고통이 인간의 보편적인 경험이 되어 버렸습니다. 치열한 생존 경쟁으로 인하여 이러한 관계의 깨어짐은 이제 자신의 행복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과정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욕망과 욕망의 충돌은 끊임없는 분열를 낳았고 이러한 욕망이 나라와 나라 사이에 확대되면 비참한 전쟁과 살육 그리고 테러로 이어집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한 인간이 사회에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깨뜨리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따로 훈련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좋은 관계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많은 교육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사회는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많이 노력하지만 그 효과는 너무나 미미합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를 보십시오. 매일 들려오는 무시무시한 살인과 폭력, 더러운 추문에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놀라지도 않습니다. 이러한 폭력과 불결한 소문은 이미 청소년들과 어린아이에게까지 보편화되고 있습니다. 어린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에 경찰권을 가진 교사를 배치하자는 의견까지 개진되는 학교폭력과 어린 가슴에 피멍이 들게 하는 왕따 행위들이 보편적인 문화 현상이 되고 있습니다. 아아,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상의 모습과는 얼마나 다릅니까? 서로 의지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한 형제로서 사랑하며 살아가야 할 사람들이 얼마나 서로를 미워하고 헐뜯는지 보십시오.이 모든 죄로 말미암아 깨어진 인간들 사이의 관계를 보여줍니다.
셋째로, 자연과의 관계가 파괴되었습니다. 아담이 범죄하기 전에는 자연으로 인한 피해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산사태나 홍수가 나서 사람들이 죽고, 가뭄으로 인간과 식물들이 고통당하는 일 같은 것은 더욱 더더욱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모든 자연과 인간은 완전한 조화와 상호 작용 속에서 살아갑니다.
자연과 인간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는 면에서 동창생인 셈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받은 자연과 인간은 하나의 세계를 형성하고 서로 교통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온 이후로는 인간이 자연을 전적으로 자신의 존재와는 상관없는 존재로 생각하고 자신의 존재를 위하여 얼마든지 파괴하고 짓밟아도 좋은 정복자의 마음을 가지고 마구잡이로 파괴하며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그러한 악한 행동은 창조의 섭리에 의하여 인간들에게 그대로 부매랑 되어서 고통스러운 환경으로 돌아왔습니다. 결국 인간과 자연 사이에는 아름다운 공생과 조화의 관계가 아니라 끊임없는 고통과 갈등의 관계가 상존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자연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 속에서 과연 만물을 임금처럼 다스리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까? 창세기 1장에 나오는 ‘다스린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라다’입니다. 28) 여기서 이 단어는 성경에서 왕이 제국을 다스리는 것을 가리킬 때 자주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인간은 자연을 자신의 사랑스러운 신민처럼 대해 주지 않았습니다. 얼마든지 파괴하고 착취할 대상으로 여기며 폭군적인 자세로 자연을 대하여 그리고 자연으로부터 돌아오는 고통을 당합니다. 이 모두 죄가 가져오는 결과입니다.
넷째로, 자아와의 관계가 파괴되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흔히 나타나는 현대인의 자기파괴적 성향에서 잘 나타납니다. 귀신들림을 경험하고 다중인격을 체험하는 경우는 차치하고라도 인간 안에 심각한 자기 분열적 증상들은 바로 이러한 자아와의 관계가 파괴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정신병적인 자기 학대나 열등감 같은 것들도 이러한 사실을 입증합니다. 이러한 일은 그 사람이 살아오고 또한 살아가는 환경과 깊은 관계가 있지만 어떤 때는 외부의 원인이 없이도 비정상적인 정신적 혼란 속에 빠져서 자기 안의 통일성을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그리고 심하면 정신 분열 증세를 동반하기도 합니다.이 모든 것은 죄로 말미암아 파괴된 자아와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B. 죄책과 오염
B. 죄책과 오염
이처럼 한 사람의 범죄는 피조물인 인간에게 있어서 모든 관계의 파괴를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창조 세계를 홍수처럼 뒤덮은 죄의 영향력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사람, 자연 그리고 자아와의 관계의 파괴 못지 않게 더 엄청난 결과를 인간은 자신 안에 짊어져야 했습니다. 범죄의 당사자인 아담은 물론 그 이후로 태어날 모든 인간은 자신 안에 죄의 심각한 결과를 물려받게 되었으니 죄책과 오염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이 둘을해서 원죄 Oringinal Sin 혹은 물려받은 죄 inherited sin 라고 부릅니다.
첫째로, 죄책이라고 하는 것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져야 하는 책임입니다. 즉, 형벌에 떨어뜨리는 죄에 대한 인간의 사법적인 책임이 죄책입니다. 29) 둘째로, 오염이라고 하는 것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존재하게 된 선천적이고 도덕적인 부패성입니다. 아담이 모든 인류의 대표로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으므로 이후에 출생하는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원죄 곧 죄책과 오염을 숙명적으로 타고나게 된 것입니다.
아담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은 그를 흙으로 빚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서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을 그렇게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아담의 후손부터는 결혼을 통해 인간의 생육법을 따라 출생하도록 하였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생육법을 통해 태어난 모든 인간은 아담에게 자신의 육신적인 출생의 기원을 두게 됩니다. 30) 그리고 하나님은 인류를 대표하는 머리로서의 아담과 언약을 맺으셨기 때문에 아담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야기된 죄책과 오염은 그의 후손인 우리에게 그대로 물려졌습니다.
죄책이 아담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인류의 책임이라면 오염은 곧 타락한 인간 안에 물려받은 죄된 본성입니다. 이는 두 가지 성격을 갖는데 그것은 우리의 본성과 관련하여 선천성을, 그리고 우리의 행위와 관련하여 전체적인 부패성을 특징으로 합니다. 31)
첫째로, 선천성이라는 것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본성적으로 오염되는 것 말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영적 선 spritual good 도 가지고 있지 않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들은 흔히 인간을 이해할 때 잘못된 교육이나 나쁜 환경과 같은 후천적인 요인이 사람의 도덕성을 오염시키는 원인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 인간은 선천적으로 그러한 부패성을 타고납니다. 마치 고양이의 쥐를 죽이고자 하는 본성은 훈련을 통해 획득된 것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듯이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적대감과 거리감도 바로 그러합니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태어날 때부터 인간은 하나님을 대적하며 살고자 합니다. 그리고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기를 싫어하고 스스로 거절합니다. 이처럼 인간은 선전적으로 죄의 오염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둘째로, 전적인 부패성입니다. 이러한 도덕적 부패성은 다시 두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할 수 있는데 인간의 전적 타락과 전적 무능입니다. 먼저, 전적 타락은 인간의 성품 전체가 타락해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려고 하는 의지가 없는 것을 말합니다. 다음으로 전적 무능이란 순종하려고 마음을 먹어도 순종할 능력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이처럼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대로 내버려두면 저절로 소생하여 다시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살 수 있는 온전한 인간이 되는 것은 되는 경우는 결코 없습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교육을 잘 받아서 훨씬 더 도덕적인 사람이 되고 어떤 사람은 악한 환경에서 자라서 더 흉악한 범죄자가 되기도 합니다. 이처럼 교육과 환경에 의해서 상당한 부분은 개선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개선은 본질적인 것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안에 있는 타락성이 발전해서 인간을 하여금 더 많은 외적인 악행에 빠지지 않도록 제지할 뿐입니다. 이것이 절망적인 상태에 있는 인간 영혼의 본질을 고쳐 주지는 못합니다. 32) 따라서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에게는 하나님 앞에 선한 것이 있을 수 없고, 다시 스스로의 힘으로 창조주 하나님의 요구에 부합하는 인간이 될 수 없고, 그 자리로 돌아갈 수도 없습니다. 결국 인간은 이러한 죄의 결과로 말미암아 참으로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인간이 될 수 없게끔 되었습니다.
이렇듯 죄책과 오염을 물려받게 됨으로써 인간은 이제 벗어날 수 없는 두 가지 죄와 결별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첫째는 바로 죄책과 오염으로 구성되고 있는 원죄이고 둘째는 그 부패한 본성 때문에 실제로 짓게 되는 실행죄 actual sin 입니다. 인간은 원죄의 뿌리와 거기로부터 자라나는 실행죄로 말미암아 끊임없이 자신을 죄의 영향 아래 속박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죄로 말미암는 영혼의 죽음의 질병으로 인하여 끊임없는 악과 고통을 경험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절망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때로는 스스로 죄짓는 것을 옳지 않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의지적으로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언제나 그러한 생각과 의지의 힘은 영혼 속에 흐르는 죄의 경향성이 가진 강력한 힘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이 행하는 모든 행동과 말 그리고 생각 속에서 이처럼 결별하지 못하는 죄의 경향성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갈 수 없는 인간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계속해서 범죄함으로 인하여, 물려받은 원죄의 실행죄가 더하여져서 인간 안의 오염은 점점 더 악화되어 갑니다. 이것은 곧 영혼의 죽음이라는 질병 현상이 점점 더 절망적인 상태로 발전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늪에 빠진 사람이 거기서 헤어나려고 애를 쓸수록 점점 더 깊이 빠져들어 가게 되듯이 인간도 절망적인 처지가 되었습니다. 거기에는 어떠한 희망도 없고 더욱이 그 희망을 인간 자신 안에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떠난 이 세상의 마지막 때를 비관적으로 묘사합니다. 그때가 되면 세상이 점점 더 악해지고 타락해서 서로 사랑해야 할 기본적인 관계들이 모두 파괴되는 한편 자연으로부터 오는 재앙을 두려워하며, 자기를 상실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을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금수와 버러지보다 못한 형상과 바꾸면서 살아가는 죄악된 삶이 보편화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34) 그리고 이미 그런 시대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환경을 개선하고 교육을 시키고 돈을 많이 벌고 복지 제도를 개선하면 인간이 행복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공상일 뿐입니다. 인간의 모든 악과 고통의 궁극적인 원인이 되는 영혼의 죽음이라는 질병을 치료하지 않고는 어떠한 소망도 없습니다. 타락한 인간과 세상 안에 있는 어떠한 것도 이러한 소망을 줄 수 없습니다. 오직 외부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은총의 빛이 인간을 그 절망적인 상황에서 구출하지 않는 한 전적으로 아무 소망도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III. 죄인을 향한 은총.
III. 죄인을 향한 은총.
A. 구원의 은총이 나타남
A. 구원의 은총이 나타남
범죄한 아담과 하와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총은 하나님의 구원으로 나타납니다.
(25:43) 따라서 구원이란 앞서 말씀드린 절망적인 영혼의 죽음이 죽음의 상태로부터의 구추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화목하고 생명적인 관계를 다시 회복하여 창조 목적을 따라 존재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신 앞에서 범죄한 인간들에게 베푸시는이 구원의 은총은 두 가지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1. 육체의 죽음을 유보하심 첫째로 죽음을 유보하신 것입니다. 아담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기고 선악과를 먹었을 때 그것은 이미 범죄에 대한 형벌을 자초한 것이었습니다. 그 범죄에 대한 대가는 바로 죽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에 모트타무트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히브리어법 가운데에서 필연을 나타내는 강조용법입니다.
(26:38)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분명한 심판 의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말하는 죽음은 영혼의 죽음뿐 아니라 육체의 죽음도 포함하는 전 존재적인 죽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그 명력을 어김으로 언약 관계를 파괴하였습니다. 따라서 그는 즉시 죽어야 했습니다. 사실 그가 범죄하는 그 순간에 그의 영혼은 죽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영혼의 죽음은 곧 그의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의 영적인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죄는 즉각적으로 그런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의 영혼뿐 아니라 육체도 즉각적으로 죽어야 했습니다.
(27:23) 그런데 하나님은 죽으리라고 말씀하실 때 육체의 죽음과 관련지어서 이것이 발생하는 시간은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은총이 나타났습니다. 범죄하자 영혼에는 즉시 죽음이 찾아오게 하셨는데 육체는 죽음을 유보해 주셨습니다. 생하도록 창조된 존재의 특성에 비춰본다면 허무하도록 짧은 기간이지만 그래도 얼마간 그 육체를 살려 두신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죽은 영혼을 가지고 육체로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상황이 찾아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은총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범죄한 인간에게 육의 죽음을 유보하시는 것이 왜 은총이 됩니까? 그것은 이렇게 설명될 수 있습니다.
(28:11) 범죄한 인간을 일정기간 살아 있게 하셨는데 그가 살면서 자손들을 낳았습니다. 그래서 자손을 남기고 죽고 죽기 전에 다시 그 자손이 자손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이 땅에는 많은 인류의 씨가 퍼졌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말씀하신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그 예고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죄 아래 있는 인간들이고 따라서 그들이 단지 육체적으로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으로는이 세상이 창조의 목적을 따라 존재하는 것에 도움을 줄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태어나는 인간들은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원죄와 자신들이 짓는 실행죄들로 인하여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점점 더 창조의 목적으로부터 멀어지게 할 뿐이었습니다.
(29:02)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했던 것도 바로이 때문이었습니다. 범죄한 인간들에게 하나님은 육체의 죽음을 연기함으로써 계속 인류를 번성하게 하시고 그리스도를이 땅에 보내시는 구원 사역을 통해 그렇게 생육된 인간들의 살아 있는 육체 속에 있는 영혼을 죽음의 상태에서 구원하심으로써 그들이 다시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러실 필요가 없었지만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인간으로 하여금 당신께 돌아와 본래의 창조의 목적대로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29:46) 이것은 놀라운 것이며 하나님께서 범죄한 인간들에게 형집행을 연기하신 것은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의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이 이 메시아를 약속하심 둘째로 메시아를 약속하신 것입니다. 메시아라는 말은 원래 히브리어로 마시아인데이는 기름부음 받는 자라는 뜻입니다. 메시아는 기름을 기름부음을 받음으로써 하나님께 구별된 이스라엘 왕들에게 돌려지는 칭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예언된 메시아는 하나님과의 언약 파악 언약과의 언약을 파괴했기 때문에 빠지게 된 절망적인 죄의 질병의 상태로부터 인간을 구원해 내실 뿐입니다. 그 메시아가 인간의 타락 즉시 예고되었던 것입니다. 아담은한테 하나님의 창조하신 모든 육체와 공중의 새와들의 모든 짐승들에게 이름을 붙여 붙인
(30:53) 사람이었습니다. 그 존재의 특성을 정확히 헤아리고 이름이 그 존재의 생각나게 해주도록 이름을 짓는데 탁월한 지성과 통찰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죄 죄가 들어오기 이전이었습니다. 지성은 하나님의 생각을 거울처럼 반향하고 있었고 정서는 하나님의 심정으로 가득찼으며 의지는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복종되어 있었으며 전제가 말할 수 없는 자유왕 가운데 생명이 되신 하나님과 통하고 있었습니다. 아담이 선칼를 따먹음으로 범죄하였을 때 하나님은 여자의 우선이 우손이 태어나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약속을 주십니다. 물론 아담은 우리가 아는 것처럼 예수님에 대한 명대 명하게 알 수는 어 알지는 못했습니다.
(31:50) 모든 것을 알지 못했지만 분명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여자에게 선한 아이가 태어나서 사단의 머리를 깨뜨리고 범 자신을 비참한 상태에서 구출한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모든 마음은 오직 태어날 아기에게가 있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처음 아기를 낳았을 때이 아이의 이름을 가인이라고 지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동치마역을 낳은 첫 아들 가인 이름의 이음이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얻은 아들이었습니다. 그리고이는 아담과 하와가 그 태어난 자신의 구원의 기대를 연결 했음을 보여줍니다. 그 아이가 태어났다는 것에 대해 아담과 하와는 진지하게 영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32:43) 그러나 아담이 첫 아를 낳았을 때는 이미 죄가 들어온 이유였습니다. 자신이 낳은 첫 아들은 잠시 후 자기의 형상과 모양을 담는 어 또 다른 아들을 넓은 들판에서 돌로 쳐서 죽일 살인자였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이미 그것을 간파한 지성이 명민함과 영혼의 통차를 상 통차를 상실하였습니다. 그리고 구원자라고 믿었던 그는 더 처참한 죄의 결과를 몰고 온 살인자의 온조가 되었습니다. 9일 가인의 의해 죽임당한 아벨 아들 아벨의 죽음을 보면서 아담과 하은 처절하게 자신 아 자기들의 죄를 후회했을 것이고 자기들을 에워싸고 있는 범상치 않는 죽음의 어마어마한 세력을 치를 떠는 두려움 속에서 감지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로부터 구출을
(33:47) 받기를 간절히 원했던 것입니다. 메시아에 대한 기다림은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꾸준히 발견됩니다. 남에게 아들 낳고 그 이름을 노아라고 붙인 것을 보십시오. 노아라는 이름은 쉼 안식을 의미합니다. 남맥은 그 아이가 성경에 약속된 메시아이기를 기대했습니다. 자신들을 죄로 말미암아 당하는 고통에서 건져 심을 줄 구원의 약속이 그 아들을 통해서 성취되 있기를 기대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이 모세와 이후의 여인들의 몸에서 태어난 어린 아이들에게로 이어졌습니다. 범상치 않는 아이가 태어날 때마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구원을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34:40) 구약에서 메시아의 출연을 기다리는 신앙은 이렇게 몇면이 이해어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실 메시아가 자신을 구속 하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이 제한적인 교재의 길을 여신 제사제도 이처럼 하나님은 범죄한 인간에게도 은총을 베푸셨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구원의 운청은 그들이 현재적으로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범죄한 인간의 육체의 생명을 연장해 주시는 은총은 즉각적으로 누릴 수 있는 것이었지만 메시아가 오셔서 그들을 영혼의 죽음 상태에서 구원해 주시는 일은 장차 일어날 약속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메시아는 가인도 아니었고 노아도 모세도 아니었습니다.
(35:31) 그런데 모실 메시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들의 내면은 죄에 의해 억눌림 받았습니다. 그들 역시 제척과 오염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가 믿는 순간에 구원해 주실 때에 계책의 문제는 크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 안에 여전히 오염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동일하게 죄로서 역사하며 하나님과의 생명적인 교재를 가로막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전히 죄를 지으며 살아가는 백성들이 당신을 만나될 수 있도록 기회를 열어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제사입니다. 제사는 죄인들이 거룩한 하나님을 만나는 길로서 주어졌습니다.
(36:14) 그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법이며 그 동인은 바로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출애굽과 함께 계시된 성막의 제은이 제자도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막 제도를 주신 데에는 세 가지 분명한 의도가 있습니다. 첫째는 성막을 통해서 이스라엘 가운데 계시기 위함이었고 둘째는 하나님의 거룩함과 인간들의 죄악에 관해 교훈하기 위함이었으며 셋째는 죄인들이 구원에 이룰 수 있는 유일한 길을 보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이 성막으로 나와서 재물의 손을 얹어 안수합니다. 그렇게 하면이 그 재물이 하나님께 연락되어 헌제자의 죄를 속해지게 되었습니다.
(36:58) 그 사람의 죄가 짐승에게 옮겨지고 그 짐승이 죽음을 당함으로써 하나님은 당신의 진노를 꾸십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죄를 깨끗이 씻어서 그들과 함께 교통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집단적으로 이루어지기도 가고 개인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이 제사는 항상 한시적이었습니다. 제사를 드리는 후 인간은 다시 범죄하게 되고 하나님과 교재는 다시 막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이 계속 대풀이 되는 속에는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죄인들이 부분적으로 남아 당신 앞에 나와서 신령한 은혜의 영향을 받을 수 있도록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제사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율법을 깨닫고 행하게 하시며 기도하게 하심으로 제사를 통해 경험한 은혜의 감격들을 유지하고 발견시켜 나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37:55) 아담이 범죄한 이래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서 어떠한 하늘 자원도 공급받을 수 없도록 인간들이 한시적으로 아마 하나님을 만나고 교재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 4.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인간의 무능 A 세상 자원을 찾는 인간들 마지막으로 우리가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우리는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우리는 영혼의 죽음의 상태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인간의 절망적인 상황을 충분히 살펴보았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이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결혼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간들은 자기의 힘으로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38:44) 따라서 우리는 이런 노력들이 얼마나 헛되고 의미 없는가를 분명하게 밝힐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단지 논쟁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그렇게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확고해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휘어질 것이요 진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되리라이 세상 사람들이 악과 고통에 대하여 생하고 접근하던 방식을 한번 보십시오 그들은 인간의 고통의 궁극적인 원인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도 타나는 증상들만을끊임없이 그한 노력 때문에 세상도 더 좋아지고 자신도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39:38) 그러나 인간 세상에서 경험하는 악과 모든 고통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됨으로써 하늘 자원을 공급받을 수 있는 통로가 막힌 인간 영혼의 상태 때문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되는 하늘 자원이 끊어지자 인간은 영적인 궁핍을 채우기 위하여 땅의 자원을 소유하려고 투쟁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인류의 역사는 뺏고 뺏기는 투쟁의 역사입니다. 하늘로부터 공급이 끊어진 자원을 대체하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은 두 가지 방법으로 이루어지는데 하나는 다른 이에게서 자원을 부당하게 뺏는 것이고 또 하나는 도저히 자원이 될 수 없는 그릇된 것을 자원으로 삼는 것입니다.
(40:24) 그러나 사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삶의 자원을 뺏는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삶의 자원은 내 안에 없으면 다른 사람에게도 없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인간의 힘으로 부족한 자원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처지는 결코 절망적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문명이 발달하고 과학이 발달해도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인간의 비참함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구원은 결코 그러한 세상 자원으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인간 자신 안에는 인간의 악과 고통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성경이 그렇게 인간을 절망적으로 묘사했겠습니까? 성경은 말합니다.
(41:14)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를 흘리는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함과 같으니라 >> 비 자기를 구원할 수 없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고 인류의 역사는 자기 스스로 잃어버린 낙원을 회복할 수 있다고 믿어온 역사였습니다. 철학의 역사를 비롯한 인류 문명의 역사가이를 위한 노력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42:13) 그러나 그것은 죽음 아래 있는 인간을 그 악과 고통에서 건지기 위해서절하거나 방향을 이탈한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철학자들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기온전 4세기 어 혹은 그 이전에 존재했던 철학자들 말입니다. 그들은 위대한 지상을 소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성적으로 만물을 사유하고 본능과 욕망의 지배를 벗어남으로써 칠타례처럼 엉힌 인간의 고통스러운 현실들을 타게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꿈을 이룰 도시 국가를 세우고자 하였습니다. 인간을 각기 지상의 수과 능력에 따라 여러 부류로 나누고 적절히 사회적인 역할을 부여하는 인간은 악과 고통으로부터 해방된 사회에서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43:13) 그러나 그들은 인류 역사상 가장 높은 자살류를 기록한 불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장치한 현실을 택함으로써 인간을 악과 고통에서 구원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정부를 세우고 정치 세계를 어 체제를 도입하고 그 권력을 한 사람에게 모아 보기도 하고 몇 사람이 나누어 가져 보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특정한 계층이 권력을 독점해 보기도 하고 많은 사람이 함께 공유해 보기도 하였습니다. 직접 모여서 나라를 다스려 보기도 하였고 대표자들을 보아서 정치 권력을 행사하게 만들어 보기도 하였습니다. 인류 역사 속에 발달해 온 모든 정치 체계의 형태는 바로 이러한 노력의 결과입니다.
(44:08) 그러나 인류가 지금까지 마지막으로 도달한 정치 민주 정치 아도 인간의 악과 고통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경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계획과 통제를 지향하는 공산주의 아래도 완전한 자유를 주장한 자유 방임주의 아래도 수동주의 자본주의 아래도이 둘을 결합한 체제 아래도 인간의 악과 고통의 문제는 결코 해결되지 않았고 인간은 결코 나노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인간을 악과 고통이 비참함으로부터 건져내려는 노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자유주의 아래 경제적인 약자와 고통받는 유대 유럽인들에게 공산주의는 인류를 궁극적으로 악과 고통으로부터 건져된 사상처럼 보였습니다.
(45:05) 공선주의는 부위북 빈입핀의 사회적 모순과 경제 구조를 부수고 공동생산 공동 분배를 기본 원리로 세우는 경제 체계를 말합니다. 그러나 지난 세기를 세기 동안 수많은 공산주의 국가들이 그 나라 국민들에게 어떠한 회계착도 제시해 주지 못했을뿐만 아니라 그들의 경제적 고통을 악화시킨 채 무너졌습니다. 이들의 이들 올리기 어 이대 올기가 단지 화상에 불과 한 것이었음을 우리가 부패한 지도자들의 모습을 속에서 확인합니다. 그들의 사상에는 인간에 대한 무지가 깔려 있습니다. 인간이 누구인지에 대해 너무나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마르크스, 앵겔스, 네닌, 스탈린 같은 사람들이 인간이 누구인지를 알았다라면 체제의 변약을 통해 인간이 어 불행해서 구출할
(46:10)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 공간주의 이후에 유럽에서 자본주의 사회와 사회주의가 결핍된 수정 자본주의가 등장하였습니다. 세금을 많이 거두어서도 부자가 없고 굶주리는 사람이 없도록 불고로 나누어 주는 복주가의 한 형태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국지 연금을 받아먹고 정작기를 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종교적 성격을 가진 사상들이 등장하여 한 시대를 휩쓸고 지나가지만 이러한 풍조가 쓰러진 후에 우리는 그것들이 헛된 몸부림에 지나지 않았다는 나았음을 확인할 뿐입니다. 역사를 보십시오. 공상주의 사상은 재정활에서 갑적인 확정에 시달리던 러시아에서 가장 커다한 시험을 실천에 옮겼습니다.
(47:02) 공상주의 현명에 일어난 것입니다.이 세상이 인류를 경제적인 불균등과 정치적인 계급 아래에서 오는 고통으로부터 구원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불러일으켰고 그 결과는 끔찍한 전쟁과로 이어졌습니다.이 이 사장이 기승을 부리는 동안 인류는 미사일에 같은 세계에 가장 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중국의 공산화되어 온 역사를 살펴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중국의 공산화 역사는 곧 기독교 선교 역사를 보는 것 같습니다. 정제적인 약자로 고통하는 인민들에게 해방군이 나타나서 공산주의를 연설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르처럼 살면서 인민과 함께 나누지 않는 것을 참여합니다. 공산주의로 살 것을 투하고 사람들은 그 연설을 듣고 손을 어 들거나 일어서서 자신의 계심을 고백합니다.
(47:54) 그리고 공산주의에 헌신하며 공산주의로 일생을 살 것을 다짐하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날 중국은 어떻습니까? 그때 공산주의자들이 마음에 드리던 그 사회는 중국당 어디도 살아볼 수 없습니다. 다양한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스스로 창조의 목적을 이탄함으로 악과 고통 속에 살게 된 인간들의 몸부림입니다. 인간의 영혼은 공중 동종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일에만 실증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따라 사는 일에도 일시적 실증을 느낍니다. 이때 욕망은 다른 곳으로 방향을 바꿉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종교는 철저히 소망 없는 것들입니다. 어떠한 종교도 인간을 궁극적인 악과 고통으로부터 구할 수 없습니다.
(48:45) 불교에서는 억압을 두고 흐르는 수많은 윤회 속에서 환상을 아 환상을 거듭하고 점점 더 나아진 존재가 되고 그렇게 함으로 결국은 순수한 니느바나의 경지에 이르게 됨으로써 해탈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가 사라진 상태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지금 창조주 앞에 지은 죄로 말미암아 고통하는 인간의 비참함에 대하여 무슨 도움이 된다는 말입죠. 저는 회심하기 전 한때 프레리드 리체에 심취하였습니다. 그의 책임이든지 읽었고 읽는 것이 무엇이든지 밑줄을 거었습니다. 그의 주장이 무엇이니까 인간이 악과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는 초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49:32) 그러나 그의 인생의 목적 인생의 마지막은 그의 신념의 찬과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188년경 년 말경부터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던 그는 다음에 1월 토론이의 광장에서 졸도하였고 그 후 정신 찬란인 채 독일의 마이바르에서 사망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된 그는 >> 제 눈에 더 이상 초인이 아니었습니다. 염세주의 철학자의 귀족하워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많은 글을 쓰고 지성과 사랑 사이에서 고뇌하였으나 세상에 대한 염증이 그를 고통과 악에서 구할 수 없었습니다. >> 내가 한때 홍모할 만치 심취했던 사람이 있었는데 >> 번트라트 럴셀이었습니다. 어린 시부터 고통하는 인류에 대한 연민이 주는 슬픔에 압 압도당한 채 살아왔다는 말에 관하여 고등학교 시절 그의 책을 원소로 읽는 재미로 자살의 충동을 이기기도 하였습니다. 인류에 대한
(50:36) 깊은 애정 그리고 인간 고통의 원인에 대한 지성적인 분석은 덕뿐 아니라 많은 동시대의 지성인들을 사로잡기에 충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라는 책을 씀으로써 기독교가 고통하는이 세상에 대한 해답을 줄 수 없음을 설파하였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기독교 신앙을 버리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 자신도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했습니다. 수많은 문제를 지적했지만 그는 결국 인류의 비참한 종말을 예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우울한 결론을 내렸습니다. 인류의 모든 수고와 노력 그리고 한낮의 햇빛처럼 밝게 빛나는 인간의 현제적인 능력도 광대한 태양계 소멸과 함께 사라져 버릴 것이다.
(51:24) 인간이 이륙한 모든 위협은 폐허가 된 우지의 전에 묻혀 버리게 될 것이다. 미국이 원자 폭탄을 발명하고 그것을 일본에 투화 미국이 원자 폭탄을 발명하고 그것을 일본에 투화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을 연합권의 승리로 끝냈을 때에 영국의 수상을 지낸 윈스턴 처치를 같은 사람은 핵폭탄 예찬론자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인류 평화를 지켜줄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후로는 앞다투어 핵탄을 소유하게 되었고 결국 인간은 지구를 몇 번이나 파괴할 수 있는 핵무기를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전쟁의 위험이 줄었습니까? 인류는 타락한 이래로 하나님을 떠난 상태에서 악과 고통, 비참함의 문제를 스스로 극복해 보려고 하였지만 결코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52:18)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노력으로 낙원으로의 복귀를 꿈꾸었지만 결코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말합니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의 그룹들과 두루도는 불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하나님이 구원하신다.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의 다양한 시도는 인간의 악과 고통에 대한 >> 네. 제가 >> 궁극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했음이 밝혀졌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들의 궁극적인 희망은 무엇입니까? 여기에는 결론은 인간인 우리 자신 안에는 이러한 악과 고통에 비참한 상태로부터 자신을 구원할 아무 가능성도 없다는 것입니다.
(53:07) 그리고 우리가 이러한 비참한 상태로부터 구원얻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고통스럽게 살다가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죽음 후에 영원한 지옥 형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고통의 궁극적인 원인인 영혼의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아니한다면이 세상에 사는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이것들로부터 궁극적으로 구원받지 못한 채이 세상에서 몇 더 살고 재물을 조금 더 모으고 쾌락을 조금 더 누리고 남보다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치혜한 경쟁을 통해 더 많은 세상이 세상의 자원을 획득하려고 했으지만 그것으로서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비참의 문제가 해결될 수는 없습니다.
(53:54) 왜냐하면 인간의 공함은 하늘 자원에 부족에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를 멀리 떠나 허랑방탕하였던 탕자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남의 나라 땅에서 흉년이 들고 배고프게 되자 돼지를 치는 목부가 되었고 급기 열매를 먹고자 하였습니다. 그의 불행은 짐승의 사료인 그 먹이가 없어서가 아니라 아버지의 집을 떠난 있었습니다. 아버지와의 생명적인 교로부터 이탈된 채 누렸던 행복은 일시적인 것이었으며 그로 말미암는 비참과 고통은 아버지의 집을 생각나게 하기에 충분하였습니다. 하나님부터 공급되는 자원이 끊어진 사람은 들판에 어놓은 풀과 같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54:42)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른나이다. 방금 인바된 풀은 아침에는 살아 있는 것 같으나 그의 운명은 한낮에 지풀하기처럼 마르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이한 처지에 있는 우리 자신을 구원할 어떠한 희망도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구원이 오직 전능하시고 인간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만 올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멘. >>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