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219 금요기도회: 야고보서 1: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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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도 저희를 금요기도회 자리로 부르시고, 한 주의 치열한 삶을 마무리하게 하셔서 이렇게 불러모아 주시니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지난 한 주동안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주일에 들은 말씀을 가지고 살고자 발버둥 친 저희들을 위로하여 주시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복이라는 것을 경험할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이 시간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나아갑니다. 길 가에 뿌린 씨가 아닌 좋은 땅에 뿌린 씨처럼 저희의 마음 밭에 말씀을 심고 이것이 잘 자라 풍성한 열매가 맺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도 함께하실 줄 믿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함께 읽을 하나님의 말씀은 야고보서 1:19-27 입니다. 제가 봉독하도록 하겠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반갑습니다. 금요기도회에 나오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이제 어느덧 내일이 되면 12월 말이 됩니다. 이제 2025년도 10일여 정도 밖에 남지 않았는데, 남은 한 해동안 지켜주신 하나님, 그리고 내년에도 우리에게 풍성한 은혜를 부어주실 하나님을 기대하며 이 자리로 나아가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말씀을 먼저 듣고 함께 기도하면 좋겠는데요. 오늘 말씀은 야고보서 1장으로 믿음과 행위가 일치가 되어야 한다는 것에 대한 야고보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이런 경험이 있으십니까? 아침에 기분 좋게 집을 나섰는데, 누군가가 툭 던진 말 한마디 때문에 온종일 기분을 망치거나 잠자리에 들어서까지 그 말이 머릿속을 맴돌아 괴로웠던 적 말입니다. 반대로, 절망 속에 있던 나에게 누군가 건넨 “고생했어, 잘하고 있어”라는 따뜻한 한마디가 있다면 다시 살아갈 용기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중 한 명은 “우리가 귀가 두 개이고 입이 하나인 이유는, 말하기보다 듣기를 두 배 더 하라는 뜻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인 야고보서의 핵심도 바로 우리의 말과 언어에 대한 말씀입니다. 야고보는 우리 몸에서 가장 작지만, 우리 삶에서의 신앙의 방향을 결정짓는 가장 강력한 핸들인 ‘혀’와 ‘말’을 우리가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지침을 줍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언어 습관이 하나님을 믿는 것과 연결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그 말씀의 언어를 우리의 말로 나타내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먼저 오늘 본문 19절부터 보시면 야고보는 우리의 신앙을 이렇게 나타내길 권면합니다.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에 비해서 큰 장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인터넷 속도입니다. 인터넷 속도는 가히 우리나라를 따라올 수 있는 곳이 없을 정도로 한국은 인터넷 강국입니다. 야고보는 바로 우리나라의 인터넷 속도와 같이 듣는 것에 있어서는 속히 할 것을 권면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말하고, 성내는 것은 이와 반대로 느리게 할 것을 권면합니다.
바로 야고보는 우리에게 ‘속도 조절’을 하라고 말합니다. 왜 그럴까요? 지혜는 듣는 데서 오고, 후회는 말하는 데서 오기 때문입니다. 특히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서로의 이야기를 먼저 들어주어야 함을 뜻하고 있습니다. 상대방의 말 속에 담긴 아픔과 진심을 끝까지 듣기도 전에 상대방이 이럴 것이라는 나의 판단이 앞서고 그것을 말로 나타내는 순간, 오해가 생기고 상처가 생길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나의 의견을 관철시키고 싶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기 보다 내 의견을 더 말하고 싶어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말에 대하여 오늘 본문은 독특하게 ‘말하기를 더디 하는 것’과 ‘성내기를 더디 하는 것’을 연결합니다. 말하는 것과 성내는 것이 어떤 관계일까요? 이 둘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길래 야고보는 이렇게 연결시켜 이야기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우리의 삶에서도 경험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우리가 화가 날 때 바로 말을 내뱉으면 그 말은 아주 날카롭고도 독이 묻은 화살이 되어 상대방의 가슴에 꽂히게 됩니다. 단순히 말을 하는 행위이지만, 그 말은 굉장한 영향력을 가집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야고보는 말에 대하여 아주 더 근원적인 문제를 지적합니다. 2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여기서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의로운 삶의 기준을 뜻합니다. 즉, 우리가 말을 함부로 하고 분노를 말로 쏟아내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지 못하고 거룩을 무너뜨리는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말을 조심하는 것에 대한 야고보의 권면은 단순히 도덕적이고 예의의 차원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야 한다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가장 본질적인 모습을 말하고 있습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야고보는 화가 나는 것을 부정하고 있지 않습니다. 인간이기에 분노를 통제하지 못하고 성낼 수 있음을 야고보도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 화를 성급하게 말로 나타내는 것을 피할 것을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말의 신속함과 통제되지 않은 인간의 감정인 분노의 폭발을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인간의 분노로 결코 성취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잠시 멈춤으로 분노를 막을 것을 야고보는 권면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분노, 그리고 우리의 분노를 말로 표출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냥 꾹 참아야 하는 것일까요? 야고보는 문제의 시작을 우리에게서 시작하지만, 해결 방법은 우리에게서 출발하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 않고 외부로부터 무엇인가 주어져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21절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21절은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하며 20절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하는지 교회를 향해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복음과 율법에 대하여 오해할 수 있는 것은 “복음은 은혜이고, 율법은 우리를 억압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오해입니다. 하지만 야고보는 아주 놀라운 선포를 합니다. 우리가 들은 말씀, 즉 우리를 새 생명으로 태어나게 한 그 ‘복음’이 우리 마음에 ‘심겨진 율법’이 되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21절에서 야고보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한 번 듣고 사라지는 소리가 아닙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예언했듯이, 하나님께서는 새 언약을 우리 마음에 기록하셨습니다. 우리 안에 들어온 복음은 이제 우리 내면에서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으로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야고보는 23-24절에서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 사람을 “거울을 보고 금방 자기 얼굴을 잊어버리는 사람”에 비유합니다. 우리가 아침에 세수하고 거울을 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얼굴에 묻은 얼룩이 있다면 닦아내고 매무새를 고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25절은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들여다보다’라는 것은 대충 훑어보는 것이 아니라, 허리를 굽혀 아주 자세하게 살피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듣는 것은 하나님이라는 거울 앞에 서서 내 영혼의 민낯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시간입니다. “아, 내가 어제 그 사람에게 너무 말이 심했구나”, “내 말투에 교만이 섞여 있구나”, “내 입술에 독이 있지는 않은가?”, “내 말이 누군가를 죽이고 있지는 않은가?”를 살피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혀를 통제하기 위하여 재갈을 물리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내 혀를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우리의 말과 성내는 것을 통제하는 것입니다.
설교를 듣고 말씀에 은혜받고 감탄만 하고 교회 문을 나서는 순간, 주차장에서 차가 막힌다고 바로 우리 입에서 욕설을 내뱉는다면 우리는 거울을 보고도 얼굴의 얼룩을 닦지 않은 사람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진짜 믿음은 설교를 듣는 것만이 아니라, 문을 나서서 내 혀를 어떻게 통제하느냐도 포함됩니다.
복음은 우리가 이제 마음껏 살아도 된다는 방종을 허락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은 그 말씀이 내 안에서 새로운 ‘삶의 기준’이 됩니다. 거울을 보고 내 얼굴의 더러운 것을 닦아내듯, 내 안에 심긴 말씀이 내 입술을 다스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비난하고 싶을 때, 나 안의 ‘심겨진 말씀’이 작동하여 나에게 말합니다. “멈추어라. 그것은 내가 너를 사랑한 방식이 아니라.” 이것이 바로 복음이 우리 내면에서 율법으로 작용하는 방식입니다. 우리 안에 말씀이 있을 때 말씀은 우리가 죄를 범하지 못하게 율법의 역할을 하여 죄를 알려주고, 죄를 미리 방지하게 만들어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옥죄는 규칙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를 죄와 상처로부터 자유롭헤 하는 생명의 법입니다. 남을 험담하는 말, 비난하는 말에서 자유로워져 사랑의 말을 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복을 누리게 됩니다. 25절을 다시 보십시오.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즉 “행복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복음은 이전에 내가 살았던 방식에서 벗어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게 만드는 것이며 우리의 자발적인 마음으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26절은 우리에게 아주 큰 도전을 주는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하고, 성경을 많이 알아도 내 혀를 통제하지 못하면 그 종교적 열심은 ‘0점’이라고 야고보는 가르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우리 삶의 진짜 예배, 진짜 경건은 모습은 이 두 가지라고 가르칩니다.
내 혀가 남을 공격하거나 교만하지 않도록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 입 혀에 재갈을 물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27절에서 말하듯이 말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고아와 과부처럼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실질적으로 돌보며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상대방을 공격하는 방식으로 말을 할지라도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오히려 약자를 지키기 위하여 말과 행위를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이처럼 서로를 향해 건네는 말이 하나님의 거울이 비춰본 정결한 말이 되어야 합니다. 내 안에 심겨진 복음의 말씀이 우리의 혀를 주장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행하는 일에 복을 받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참된 복은 물질적 풍요로움과 명예가 아닌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는 삶이 참된 행복이라고 가르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야고보는 오늘 말씀을 통해 아주 엄중하고도 확실하게 가르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라면,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의 혀를 통제하고 내 분노를 표출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위한 말을 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때로는 상대방의 행동이 잘못됐을 때 잘못됐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것이 비난하는 언어가 되어선 안될 것입니다. 더구나 상대방의 흠을 잡아내고 흉을 보는 언어는 더더욱 해선 안될 것입니다. 우리의 언어는 세상과는 다르게 분노의 언어가 아닌 복음의 언어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혀를 통제하는 것이 아닌 매주 우리에게 주어진 설교와 성경 읽기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통제해야 합니다. 이러한 삶을 살 때 오늘 말씀은 우리를 행복한 사람이라고 가르칩니다.
오늘 이 말씀을 기억하시면서 야고보가 가르치는 듣기는 속히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상대방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것도 해야겠지만, 우리가 더더욱 귀 기울여야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 우리 마음에 말씀을 심고, 그 말씀을 삶으로 살아내는 복음에 합당한 우리 새순교회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오늘 이 말씀을 두고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이 시간 오늘 말씀을 두고 함께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에서 야고보는 우리를 향하여 하나님을 믿는 것은 반드시 행위와도 연관되어 있다고 가르칩니다. 특별히 오늘 말씀은 우리의 말과 언어가 그래야 함을 가르칩니다. 우리의 말과 혀를 말씀으로 통제하여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으로 사용하지 않으면 진정한 경건이 아닙니다. 우리에 심겨진 말씀이 율법이 되어 우리를 통제하고 삶으로 말씀을 나타내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 시간 함께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야고보가 권면한 것처럼 우리가 말씀을 들었다면 그 말씀이 우리의 말과 행실을 통해 나타나도록 기도합시다. 신실하고 경건한 성도는 교회에서만이 아니라 삶에서도 나타내는 성도입니다. 이 일을 우리와 우리 교회가 나타낼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그리하여 우리 교회가 서로를 보듬어주고, 서로를 위해 말을 사용하는 복된 교회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그리고 우리 교회의 말씀이 바르고 정직한 말씀이 될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바른 말씀이 바른 행실을 만들어냅니다. 우리 교회가 이러한 교회가 될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이 시간 이 기도제목을 놓고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