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어지지 않는 사랑
Notes
Transcript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서론
서론
사랑하는 중등부 여러분, 사랑하는 사람에게 깊이 실망해 본 적이 있으십니까?
우리는 흔히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가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실망할 일도 없습니다.
기대가 없으니 상처받을 일도 없지요. 우리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하고,
잠 못 이루게 하는 상처는 언제나 내가 가장 사랑했던 사람,
내가 끝까지 믿어주었던 그 사람에게서 옵니다. 그래서 사랑이 깊을수록,
그 배신감이 주는 상처의 깊이도 깊은 법입니다.
오늘 본문의 요셉이 마주한 밤이 바로 그런 밤이었습니다.
가장 행복해야 할 정혼 기간, 결혼을 앞둔 그 설레는 시간에 들려온 약혼녀의 임신 소식.
그것은 요셉의 인생을 지탱하던 모든 줄을 끊어놓기에 충분했습니다.
당시 율법은 명확했습니다. 배신에는 응징이 따릅니다. 부정한 것은 잘라내야 공동체가 거룩해집니다.
요셉에게는 그럴 권리가 있었고, 세상의 상식대로라면 그는 분노하며 소리를 질러야 마땅했습니다.
손에는 율법이라는 날카로운 돌을 쥐고, 당장이라도 그 배신의 대가를 치르게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아주 기이한 장면을 보여줍니다. 모든 것이 끊어져야 마땅한 그 순간, 요셉은 멈춰 섭니다.
분노가 치밀어 오르지만 소리치지 않습니다.
당장이라도 관계를 끝장낼 수 있는 칼자루를 쥐고 있지만, 휘두르지 않습니다. 대신 그는 "조용히 덮고자" 합니다.
여러분, 이상하지 않습니까? 배신감에 치를 떨면서도, 왜 그는 완전히 놓아버리지 못했을까요?
무엇이 그 분노의 밤에 요셉의 손을 붙잡고 있었던 것일까요?
세상의 논리로는 설명되지 않는 힘.
가장 약해 보이고,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지만, 결국은 요셉의 분노보다 더 강하게 버티고 있었던 '그 무엇'이 그 밤에 있었습니다.
1대지 : 사랑은 실망의 자리에 '자비'로 찾아옵니다.
1대지 : 사랑은 실망의 자리에 '자비'로 찾아옵니다.
먼저 오늘 본문 19절 말씀을 봅시다.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여기에 아주 독특한 단어가 하나 등장합니다. 바로 '의로운 사람’이라는 표현입니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의로운 사람', 은 어떤 사람입니까?
잘못된 것을 보면 지적하고, 죄를 지은 사람은 벌을 받게 하고, 옳고 그름을 명확하게 가르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세상이 말하는 '정의'입니다.
그 기준대로라면, 요셉이 취해야 할 '의로운 행동'은 무엇입니까?
배신한 마리아를 율법의 법정 앞에 세우는 것입니다. "이 여자가 부정을 저질렀다"고 고발하고,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고, 돌을 던지는 것이 당시 율법이 말하는 '정의'였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오늘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기에, ‘저를 드러내지 않았다’고 합니다.
오히려 그 허물을 덮어주고, 조용히 그녀의 생명을 보호하는 방식을 택합니다.
도대체 이것이 어떻게 의로움이 됩니까?
여기서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진짜 '의'의 비밀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의 의는 죄인을 잡아내어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쌍히 여겨 살려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다른 말로 '자비'라고 부릅니다.
사랑이 없으면 율법은 사람을 찌르는 칼이 됩니다.
당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 그리고 유대인들에게 율법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에게 율법은 '거룩함을 지키기 위해 쌓아 올린 높은 담벼락'이었습니다.
그 담 안에는 의인들만 있어야 했고, 죄인은 반드시 밖으로 쫓아내야 했습니다.
그들에게 마리아와 같은 '흠 있는 존재'는 공동체의 거룩함을 위해 즉시 도려내야 할 암덩어리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들은 죄를 덮어주면 율법이 무너진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손에는 언제나 날카로운 돌이 들려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달랐습니다.요셉의 의로움은 '죄인을 잘라내는 칼'이 아니라, '상처를 꿰매는 바늘'이었습니다.
여러분, 혹시 '애착 인형'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아이들이 하도 만지고 끌고 다녀서, 솜이 터지고 눈알이 빠지고 천이 너덜너덜해진 인형 말입니다.
남들이 보기엔 어떻습니까? "야, 그거 더럽다. 냄새난다. 이제 그만 버리고 새것 하나 사자." 이것이 세상의 상식입니다. 낡고 고장 났으면 버리는 게 합리적입니다.
하지만 엄마는, 그리고 그 인형을 사랑하는 아이는 절대 그 인형을 쓰레기통에 버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엄마는 밤에 그 더러워진 인형을 가져다가 씻기고, 터진 옆구리를 바늘로 한 땀 한 땀 정성껏 꿰맵니다.
솜을 다시 채워 넣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돈이 없어서입니까? 아닙니다.
그 인형에는 '사랑'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낡았다고 버리는 것이 아니라 고쳐서 쓰는 것입니다. 터진 곳이 있으면 꿰매어 주는 것입니다.
오늘 요셉의 마음이 꼭 이와 같습니다. 세상은 마리아를 향해 "율법을 어겼으니 버려라. 돌로 쳐라"라고 소리칩니다.
그것이 그들의 정의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마리아라는 존재가 '배신'이라는 상처로 너덜너덜해졌을 때, 그녀를 버리는 대신 자신의 '침묵'과 '자비'로 그 터진 틈을 꿰매어 주기로 결심합니다.
비록 자신의 가슴은 찢어질지언정, 상대방의 인생이 완전히 파괴되는 것은 막아주려 했던 그 마음.
그것이 바로 '자비'입니다. 사랑이 있기에 자비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의 모습을 돌아봅시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누군가를 '손절'하고, "너는 틀렸어"라고 말하며 관계를 쓰레기통에 버리듯 내던지지는 않습니까?
나의 옳음을 증명하기 위해, 누군가의 터진 옆구리를 더 후벼파고 있지는 않습니까?
기억하십시오.
사랑은 너덜너덜해진 영혼을 꿰매어 다시 살게 합니다. 누군가의 실수와 잘못 앞에, 비난의 돌을 내려놓고 침묵의 바늘을 드는 것.
그것이 바로 성탄을 기다리는 우리가 보여주어야 할, '가늘지만 끊어지지 않는 사랑'의 첫 번째 모습입니다.
2대지 : 사랑은 불안을 붙드는 '가늘지만 끊어지지 않는 힘'입니다.
2대지 : 사랑은 불안을 붙드는 '가늘지만 끊어지지 않는 힘'입니다.
사랑하는 중등부 여러분, 요셉이 마리아를 끊어내지 않고 품기로 결심한 결정적인 계기는 무엇이었습니까?
오늘 본문 20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꿈에 천사가 나타나 말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잠에서 깨어 즉시 순종했습니다.
우리는 이 장면을 보면서 흔히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니, 천사가 꿈에 나타나서 저렇게 확실하게 말해주는데 누가 순종 안 하겠어? 나라도 하나님이 꿈에 나타나면 당장 순종하지.
내게는 저런 기적을 안 보여주시니까 내가 확신이 없는 거야."
여러분, 정말 그럴까요? 정말 계시가 확실하면 우리는 순종할까요?이것은 우리의 큰 착각입니다.
냉정하게 한번 비교해 봅시다. 요셉이 받은 계시는 고작 '꿈'이었습니다. 꿈은 깨고 나면 희미합니다.
"이게 개꿈인가, 진짜 하나님의 뜻인가?" 헷갈리기 쉽습니다.
아주 가늘고 불확실한 선입니다. 반면에 지금 우리가 받은 계시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꿈보다 더 확실한, '성경 66권'을 손에 들고 있습니다. 심지어 우리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알고 있습니다.
요셉이 받은 것이 희미한 달빛이라면, 우리가 받은 것은 대낮의 태양 같은 확실한 계시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순종하지 못합니까? 왜 우리는 여전히 머뭇거리고, 계산하고, 두려워합니까?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증거가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꾸 "확신을 달라", "증거를 보여 달라"고 요구하지만, 요셉이 그 가늘어 보이는 꿈 한 조각을 붙들고 자신의 인생을 걸 수 있었던 진짜 이유는, 그가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순종은 의지력의 싸움이 아니라, 사랑의 표현입니다.
믿음은 사랑 없이는 작동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바탕에 깔려 있지 않으면, 아무리 큰 기적을 보여줘도 인간은 순종하지 않습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을 보십시오. 불기둥과 구름기둥을 매일 보고도 불순종했습니다.
그러니 사랑하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우리를 붙잡고 끊지 못하는 사랑에 몸을 맡기십시오
그럼 사랑이 순종의 이유가 될 겁니다.
3대지 : 성육신은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믿어주신' 사건입니다.
3대지 : 성육신은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믿어주신' 사건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셉이 말씀에 순종하여 마리아를 데려왔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23절을 보십시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기적, 성탄이 임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본문의 가장 깊은 신비와 마주하게 됩니다.
요셉이 사랑을 통해 자비를 베풀고 순종한 것도 놀랍지만, 더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온 우주의 왕이십니다. 그런데 그분이 이 땅에 오실 때, 가장 높고 안전한 왕궁을 택하지 않으셨습니다.
천군 천사의 호위를 받으며 오지도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하나뿐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누구의 손에 맡기셨습니까?
바로 '사람'의 손입니다. 배신감에 밤새 뒤척이던 요셉, 연약한 시골 소녀 마리아. 실수하고, 넘어지고, 언제 마음이 변할지 모르는 불완전한 인간의 품에 하나님은 당신의 생명을 '믿고' 맡기셨습니다.
이것이 성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어드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믿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매번 하나님을 실망시키고 배반하는 우리 인간을, 하나님은 "그래도 나는 너희를 포기하지 않는다", "나는 너희를 믿는다" 하시며, 당신의 전부인 예수님을 우리 손에 쥐어주셨습니다.
저는 이 본문을 묵상할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하나님, 저 같은 사람이 무엇이기에 저를 믿고 이복음을 맡기십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자격이 있어서 믿어주는 사랑이 아닙니다.
그저 사랑하시기에 믿어주시는, '무조건적인 신뢰'입니다.
이토록 엄청난 신뢰를 받은 우리가, 어떻게 다시 미움의 길로, 불순종의 길로 갈 수 있겠습니까?
나를 믿어주신 그 사랑에 압도될 때, 우리는 비로소 진짜 성도로 살아가게 됩니다.
사랑하는 중등부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에 압도되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죽음에서 건지기 위해 그 죽음에게 직접 스스로를 내어주신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에 압도되십시오
성탄은 그 사랑을 아는 사람들이 누리는 기쁨의 축제 입니다. 사랑을 기억하고 있는 기쁨의 축제 입니다.
성탄절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 사랑의 마음이 여러분과 저의 마음에 가득하길 바랍니다.
결론
결론
세상은 배신 앞에서 돌을 들어 심판하라고 소리치지만, 요셉은 사랑으로 그 돌을 내려놓았습니다.
진짜 의로움은 상처를 헤집는 칼이 아니라, 터진 틈을 꿰매는 자비이기 때문입니다.
소음 같은 세상 속에서도 우리가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에 순종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은 오직 '사랑'뿐입니다.
우리를 믿고 찾아오신 아기 예수님처럼, 이제 여러분도 누군가를 다시 믿어주는 '거룩한 모험'을 시작하십시오.
이 대림절, 하나님이 내려주신 그 가늘지만 결코 끊어지지 않는 사랑의 줄이 여러분을 다시 살게 할 것입니다.
기도
기도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 오늘 우리는 배신과 아픔의 밤에도, 비난의 돌을 드는 대신 침묵의 사랑을 선택했던 요셉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가늘어 보이는 사랑의 줄을 통해, 우리를 찾아오신 '임마누엘'의 기적을 바라보았습니다.
주님, 이 시간 우리의 손을 내려다봅니다. 혹시 우리 손에 '나의 옳음'이라는 차가운 돌이 들려 있지는 않습니까?
사랑하기보다 판단하기에 빨랐던 우리의 강퍅함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간구하오니, 우리에게도 요셉과 같은 사랑을 부어 주시옵소서.
누군가의 허물을 헤집는 날카로운 칼이 아니라, 터진 상처를 꿰매어 다시 살게 하는 따뜻한 자비의 손길이 되게 하옵소서.
세상의 소음이 아무리 커도,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의 세미한 음성을 놓치지 않는 사랑의 귀를 열어 주시옵소서.
우리가 주님을 믿기 전에, 먼저 우리를 믿고 생명을 맡겨주신 그 은혜를 기억합니다.
이 대림절, 그 '믿어주시는 사랑'에 잇대어 우리도 누군가를 다시 믿고 사랑하는 거룩한 용기를 내게 하옵소서.
우리의 영원한 사랑이시며 기적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선교보고
선교보고
벌써 2025년이 저물고 희망찬 2026년이 성큼 다가왔네요. 한국은 눈도 오고 많이 춥다고 들었습니다. 다들 감기 조심하고 있나요?
이곳 도미니카는 일 년 내내 여름이라, 이곳 아이들의 소원 중 하나가 바로 '눈을 보는 것'이랍니다. 저도 한국의 하얀 눈이 참 보고 싶네요. ^^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 덕분에 저희 가족도 이곳에서 건강히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이곳은 12월 19일부터 방학을 시작했습니다. 방학을 맞아 형편이 어려운 도미니카 현지 학교와 아이티 공부방을 찾아가 크리스마스 선물을 전달했습니다.
특별히 '아이티 공부방' 친구들을 위해 기도를 부탁해요.
교회 본당에서 초등학생부터 중학생까지 모든 아이가 함께 수업을 듣는데, 지붕은 있지만 창문은 없는 열악한 곳입니다.
게다가 언제 추방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 살고 있어요. 이 친구들에게 하나님의 평안이 임하도록 꼭 기도해 주세요.
기쁜 소식도 있습니다!예수사랑교회에 학교 선생님이신 '마리아나' 자매님이 새 가족으로 등록했습니다.
다음 주에는 자매님의 따님도 교회를 방문하기로 했답니다. 이번 성탄절 예배는 가까운 이웃들도 초청해서 드리기로 했는데, 은혜롭고 풍성한 교제가 이루어지길 기대합니다.
내년 1월부터는 새로운 한국어 수업을 시작합니다.벌써 3명의 친구가 등록했어요. 한국어 수업을 통해 복음이 자연스럽게 흘러가고 전해질 수 있도록 함께 마음 모아주세요.
대양교회 중등부 친구들! 여러분이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께서 늘 함께하시고 지켜주시길 저도 이곳에서 기도하겠습니다. ^^
기도제목
추방의 두려움 속에 있는 아이티 공부방 친구들에게 평안을 주시도록
새 가족 마리아나 자매님과 성탄절 초청 예배에 은혜가 넘치도록
1월에 시작될 한국어 수업을 통해 복음이 잘 전달되도록
봉헌기도
봉헌기도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 아버지, 오늘 귀한 선교 보고를 통해 하나님께서 도미니카 공화국 에서 어떻게 역사하고 계시는지 듣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복음의 불모지에서 이름도 빛도 없이 헌신하시는 박주창 선교사님과 그 가정을 기억하여 주옵소서.
주님, 이 시간 우리가 선교의 비전에 동참하는 마음으로 정성껏 준비한 예물을 올려 드립니다.
이 예물이 쓰이는 곳마다 죽어가는 영혼이 살아나고, 무너진 교회가 세워지며,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게 하옵소서.
드리는 손길마다 하늘의 신령한 복과 땅의 기름진 복으로 채워 주시고, 우리 또한 보내는 선교사로서의 사명을 잊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