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의 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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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요셉의 순종

본문: 마태복음 1장 18-25절

찬송: 126장 천사 찬송하기를

말씀의 문을 열며

대림절의 마지막 주일을 맞이한 오늘, 우리는 아기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며 네 번째 촛불을 밝혔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마주한 본문은 이 기다림이 마냥 낭만적이거나 고요하고 평온하기만 한 것은 아님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오심은 때로 우리 삶의 가장 단단하고 익숙한 부분을 깨뜨리는 ‘거룩한 파열음’으로 시작됩니다. 그래서 칼 바르트 목사님은는 복음을 가리켜 “인간의 세계에 수직적으로 떨어지는 폭탄”과 같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 요셉에게 찾아온 첫 번째 성탄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평범한 약혼 기간, 행복한 미래를 꿈꾸던 요셉그의 일상에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개입이 마치 ‘위기’처럼 찾아옵니다. 오늘 우리는 요셉의 내면 깊은 곳으로 들어가, 그의 고뇌가 어떻게 위대한 순종으로 바뀌어 ‘임마누엘(Immanuel)’을 낳게 되었는지, 그 영적인 여정을 함께 걸어가 보고자 합니다.

1.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뜻이 충돌할 때가 있다.

본문 19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마태복음 1:19 NKRV
19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본문은 요셉을 가리켜 “의로운 사람(δίκαιος, 디카이오스)”이라고 소개합니다. 여기서 ‘의롭다’는 말은 단순히 법을 잘 지키는 준법정신이나 융통성 없는 깐깐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의 문맥에서 이 단어는 율법의 엄격함(Torah)과 타인을 향한 따뜻한 자비(Chesed) 사이에서 균형을 잃지 않는 인격적인 성숙함을 뜻합니다.
요셉은 약혼녀 마리아의 임신 소식을 들었을 때, 율법의 규정대로라면 그녀를 공개적인 재판에 넘겨 수치(deigmatisai)를 주고 돌로 치게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것이 당시의 ‘정의’로 보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가만히 끊고자” 했습니다. 이것은 요셉이 할 수 있는 가장 깊은 배려였습니다.
우리 한번 요셉의 입장이 되어 봅시다. 요셉이 선택한 이 침묵은 속이 편해서 가만히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상식적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안 가고, 가슴은 타들어 가는데,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 몰라 밤잠을 설치며 겪는 깊은 ‘가슴앓이’의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 왜 우리 집안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납니까?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런 부끄러운 일을 당해야 합니까?” 우리도 살다 보면 이런 순간이 있지 않습니까? 자녀 문제로, 혹은 믿었던 사람에게 당한 오해로 가슴이 먹먹해져서 하나님 앞에 엎드릴 수밖에 없는 그런 시간 말입니다.
요셉이 겪은 이 고민의 시간은 결코 헛된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20절을 보면 ‘이 일을 생각할 때에’라는 말이 나옵니다. 여기서 ‘생각하다’는 말은 단순히 머리를 굴리는 것이 아니라, 솟구치는 화와 억울함을 꾹꾹 눌러가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마음을 다스리는 상태를 말합니다.
요셉은 자기 감정대로 섣불리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멈추어 섰습니다. 바로 이 ‘거룩한 멈춤’이 우리의 믿음을 증명합니다.
세상은 당한 대로 갚아주고, 내 목소리를 높여야 이긴다고 가르치지만, 성경은 하나님 앞에서 잠잠히 기다리는 자가 이긴다고 말씀합니다. 내 판단이 백번 옳다고 느껴질 때, 내 입에서 억울한 말이 터져 나오려 할 때, 일단 멈추어 서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다리는 것, 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진짜 의로움입니다.
우리가 이 가슴앓이의 시간을 견디며 멈추어 설 때, 비로소 하나님은 그 틈 사이로 비밀을 속삭여 주심을 듣게 됩니다. 그 비밀을 들을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 성령을 통해 새 창조가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함께 20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마태복음 1:20 NKRV
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가슴을 치며 고민하던 요셉에게 하나님은 꿈속에서 천사를 보내 말씀하십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무서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데려와라. 그 아기는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다.” 천사는 이 일이 사람의 실수가 아니라, “성령으로 된 것(ek pneumatos hagiou)”이라고 선언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단어가 있습니다. 18절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genesis)”**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게네시스’는 창세기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즉, 마태는 지금 요셉에게 일어난 이 일이 단순히 한 아기가 태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죄로 망가진 세상을 다시 고치시기 위해 시작하신 ‘새로운 창조’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셉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요셉아, 이것은 네가 걱정하는 그런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태초에 흙으로 사람을 빚으셨던 그 하나님의 손길이, 이제 죄로 죽어가는 인류를 다시 살리려고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신 것이다.”
이 말씀을 듣는 순간, 고민에 빠졌던 요셉의 영적인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자신의 좁은 생각과 상식의 감옥에 갇혀 있을 때는 ‘집안 망신’으로만 보였던 사건이, 하나님의 안경을 쓰고 보니 ‘인류를 살리는 영광스러운 사건’으로 바뀐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깨달음의 은혜입니다.
특히 21절에 아기 이름을 ‘예수’라 하라 하셨는데, 이 이름은 ‘여호와가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로마의 압제와 가난, 그리고 끊임없는 죄책감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이 너희를 구원하신다”는 선포는 죽어가는 사람에게 생명수를 주는 것과 같은 소식이었습니다.
우리 삶도 그렇습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내 눈앞에 닥친 고난을 내 시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으로 다시 보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은 이해할 수 없는 아픔이고 고생일지라도,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을 만져주셔서 깨닫게 하시면, 그것이 나를 빚으시고 우리 가정을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손길임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겪는 문제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보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두려움을 떨쳐낼 수 있습니다. 가슴 아파하던 요셉은 이제 더 이상 고난의 피해자가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가 시작되는 현장을 지키는 영광스러운 목격자로 변화되었습니다.
우리도 요셉처럼 영광스러운 목격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3. 요셉의 순종을 통해 위대한 일을 이루셨습니다.

마태복음 1:24–25 NKRV
24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25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깨달음은 곧바로 결단과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여기서 “행하여(epoiēsen)”라는 동사는 요셉의 순종이 머릿속의 관념이나 감상에 머물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요셉은 즉시 마리아를 아내로 데려왔습니다. 여기서 ‘잠에서 깨어 일어났다’는 것은 단순한 기상이 아닙니다. 어둠과 고뇌의 밤을 지나, 하나님의 빛 안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는 선포입니다. 그는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날이 밝자마자 마리아를 데려왔고, 아기가 태어나자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라고 선포하며 아버지로서의 책임을 다합니다.
당시 사회에서 아이의 이름을 지어준다는 것은 그 아이를 자기 자식으로 공식적으로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요셉이 아기에게 ‘예수’라는 이름을 붙여주는 순간, 그는 세상의 비난과 수군거림, 평생 따라다닐 오해를 모두 자기 몫으로 받아들이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나사렛 같은 작은 동네에서 “요셉이 제정신인가? 남의 아이를 자기 아들이라고 하다니!”라는 소문이 났을 때, 요셉이 겪어야 했을 수모가 얼마나 컸겠습니까? 하지만 요셉은 그 비난의 화살을 대신 맞기로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함께하시는 하나님(임마누엘)’을 모시는 사람의 위대한 용기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기 위해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낮고 천한 말구유로 오셨듯이, 요셉 또한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 자신의 평판과 안락함을 기꺼이 포기했습니다.
이처럼 우리 삶에 하나님을 모셔 들이는 일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릅니다. 나의 자존심, 내 고집, 내가 손해 보기 싫어하는 마음을 내려놓는 ‘거룩한 손해’ 없이는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손해 볼 때, 하나님은 그 자리를 주님의 영광으로 채우십니다.
칼 바르트 목사님은 이와같은 모습을 보고 “하나님은 인간 없이도 일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분이지만, 우리 인간과 함께 일하기로 기쁘게 결정하셨다.” 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혼자서도 세상을 구원하실 수 있지만, 굳이 요셉 같은 평범한 목수의 순종을 기다리셨습니다. 요셉이 아침에 일어나 마리아를 데려오는 그 발걸음이 없었다면, 우리는 오늘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요셉이 자기 고집을 꺾고 “예, 주님. 제가 그 짐을 지겠습니다”라고 응답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우리 곁에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요셉의 순종이 바로 하나님이 이 땅으로 걸어 들어오시는 징검다리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일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내 계획을 내려놓고 말씀에 “예”라고 답할 때, 우리 가정과 교회에 하나님의 나라가 구체적으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말씀의 문을 닫으며

사랑하는 우리 성도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요셉의 여정을 함께 걸어보았습니다. 그는 타들어 가는 가슴으로 고민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눈이 뜨였으며, 마침내 자기 고집을 꺾고 순종했습니다. 요셉의 위대함은 대단한 능력이 아니라, “내 생각보다 하나님의 뜻이 더 옳습니다”라고 고백하며 자신을 내려놓은 겸손함에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내가 대단한 일을 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화려한 업적이 아니라,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며 묵묵히 내게 맡겨진 짐을 지는 순종입니다. 이번 대림절, 우리 모두 요셉처럼 두려움을 내려놓고 순종의 자리로 나아갑시다. 억울하고 힘든 상황 속에서도 “주님, 주님의 뜻이 선하심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우리의 작지만 진실한 순종을 통해,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이 우리 가정과 일터에 임마누엘의 평강으로 가득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거둠의 기도

참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
오늘 말씀을 통해 의인 요셉의 고뇌와 그 너머에 있는 위대한 순종을 묵상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막막한 상황이 우리 삶을 뒤흔들지라도, 내 상식과 자존심을 앞세우기보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잠잠히 기다리는 믿음을 우리에게 허락하여 주옵소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인 우리와 함께 일하기로 결정하셨다는 그 놀라운 사랑 앞에, 우리도 세상의 시선보다 하나님의 명령을 더 무겁게 여기는 용기를 갖게 하소서. 내가 조금 손해 보고 억울할지라도 주님의 나라가 우리 가정과 일터에 임한다면 그것을 기쁨으로 여기게 하옵소서. 잠에서 깨어 즉시 순종했던 요셉처럼, 우리도 삶의 모든 순간에 하나님을 모셔 들이는 거룩한 통로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헌금기도

하나님 아버지, 죄로 인해 망가진 우리 삶 한가운데 임마누엘의 소망으로 찾아와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오늘 우리는 요셉이 자신의 권리와 미래를 하나님께 드렸던 것처럼, 우리에게 허락하신 귀한 예물의 일부를 구별하여 주님께 드립니다. 이 물질이 드려지는 곳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그 '새로운 창조'의 역사가 일어나게 하옵소서.
헌금자
우리가 드리는 것은 단순히 물질의 일부가 아니라, 우리 삶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이며, 하나님의 뜻에 동참하겠다는 순종의 결단입니다. 요셉의 순종이 메시아가 오시는 통로가 되었듯이, 우리가 드리는 이 예물과 헌신이 어두운 세상에 빛을 비추고, 상처 입은 영혼들을 치유하는 거룩한 징검다리가 되게 하옵소서. 드린 손길마다 하늘의 신령한 복과 땅의 기름진 복으로 채워주시고, 무엇보다 하나님과 늘 동행하는 임마누엘의 기쁨이 평생에 끊이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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