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그리스도와 구원 사건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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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메시아 사상과 예수 그리스도

A. 역사적 예수를 부인하는 사람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생애와 존재에 대해 땅 위에 글씨를 쓰신 것 이외에는 그 어떤 기록도 생전에 남겨두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에 의해 복음서가 기록된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최소한 30년 가까이 지난 후의 일입니다. 따라서 후대의 성경의 기록을 대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에 관한 기록의 정확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여지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누가복음 1장에 보면 예수님에 관한 일을 기록하려고든 사람들이 많았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하려고 했고 그런 기록들이 많이 유포되어 있었다면 사실에 대한 왜곡 또한 많았을 것입니다.
(01:05) 그래서 참된 신앙에서 이탈한 어떤 사람들은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의 기록을 사실적인 것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성경의 기록을 그의 원래의 모습이 아닌 초대교회 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신앙적인 희망의 반영으로 보았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비사실적이고 신화적인 기록이라고 말합니다. 성기록의 사실 여부는 규명할 수도 없거니와 성경을 통해서는 역사상 실제로 존재했던 예수님의 참모습을 아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즉 성경의 기록 가운데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간절한 소망을 덧입혀서 신화적인 이야기를 다 걷어버려야 역사적 실제가 토출될 것인데 그것은 불가능한 작업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01:59)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모습을 부인하는 사람들의 이러한 생각에는 부활의 경험이 제자들의 객관적인 사고 체계를 모여드렸을 것이라는 의혹이 배경에 깔려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함으로써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아라고 신하게 된 제자들이 이전에 예수님과던교의 미한 흔적을 더듬으면서 예수님이 사으로 존재하시던 예수님 이상의 존재이기를 그래서 그한 희망들이신 태로 존재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성이라고 보는 이천여 시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이러한 주장은 공공연히 제기되었고 유포되었으며 전해져 왔습니다. 부활과 메시아 사상. 그런데 그들의 주장에 대하여 우리는 이러한의 갖게 됩니다.
(02:59) 제자들이 단지 예수님의 부활 사건에 대한 경험 하나만을 가지고 예수님이 성경에 약속된 메시아라고 생각했겠는가? 그러나 많은 학자들이 부활만으로는 메시아 사상을 갈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 근거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당시 유대인들의 메시아 사상 속에는 부활 사상이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메시아라는 개념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그들이 예수를 만났고 그 어 후 비로소 메시아에 대한 개념이 생겨 난 것이 아니라 이미 유대인들에게 메시아에 대한 사상이 있었습니다. 구약 성경이 기록되고 그 후 신학 성경이 기록될 때까지 약 400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성경의 메시아 사는 계속 발전해 왔습니다.
(03:59) 그리고 이것은 유대인들의 보편적을 가지고 있었던 사상이었습니다. 메시아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기름부음 받는 자라는 뜻인데 이것을 히라로 옮기는 것이 그리스도스 곧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기름부음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택하신 세 인물 즉 왕과 선지자 제사장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믿는 메시아는 단순한 왕이나 선지자보다 훨씬 더 뛰어난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위해 무엇인가 중요한 일을 할 수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지자들이 부활의 사건을 경험하므로 예수님이 메시아로 고백했다는 주장의 중대한 문제는 당시 유대인들이 메시아 사상 속에서 부활 사상이 없다는데 있습니다.
(04:56)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메시아는 뛰어난 존재는 하지만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메시아의 죽음에 대해서는 인정하지만 부활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논리적으로 볼 때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 어 메시아의 부활 사상이 없는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면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메시아이시다라고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당시에 유대인들의 사상 속에 메시아의 부활하는 아는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당시 유대인들의 메시아 사상이 예수님에 맞지 않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메시아 사상은 성경에 계시되어 있는 메시아 사상을 정확하게 예세한 것이 아니라 절제의 자신들이 민족의 이스과 만 관계가 있는 메시아였습니다.
(05:54) 메시아가 오는 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로마의 정치적인 압재 아래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보과 경제적인 착취 아래에서 살아가고 있는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관심은 죄로부터의 구원이 아니라 정치의 압재로부터의 해방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구원도 자신의 생각과 여왕에 부흥하는 것이야만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말구에서 나시고 나사렛에서 자라신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이 마음에 그리고 있는 메시아상과는 도저히 어울릴 수 없는 것도 바로 구원에 관한 생각의 차이였습니다. 그 시대의 정신을 그대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가지게 하였고 그러한 구원에 대한 견해 천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06:57) 어울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은 자기들의 시대에 메시아 대망사상에 심취하여 있었습니다. 역사적으로 그들의 메시아 신앙은 구약 성경이 아니라 후기 유대교회 메시아 대망 사상에 뿌리를 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위경인 솔로몬의 시편 같은 데에 기초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믿는 메시아는 다윗의 자손으로서 왕으로 오실 메시아였습니다. 그들에게 메시아는 이방인들을 몰아내신 후에 거룩한 백성의 나라를 굳게 세우실 뿐으로 기대되었습니다. 거기에 이방인들은 결코 용납되지 않으며 영광을 복한 예루살렘의 찬란한 위험을 보기 위하여 많은 이방인들이 멀리서부터 되어 있었습니다.
(07:47) 바벨론 포로 시대 이후로 흩어진 유대인들은 손에 손을 잡고 영광을 회복한 그 나라로 돌아올 것으로 기대되었습니다. 그 메시아는 공평하고 지혜로우며 강하고 죄없는 왕으로서 하나님 한 분만을 의지할 자였습니다. 성경에서 예고하고 있는 고난받는 메시아 사상이 그들에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난당하고 죽는 메시아에 대한 사상은 결코 없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하는 바와 같이 모든 인간들을 위해 고난을 당하시고 그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죽는 메시아는 그들의 신앙에 결코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에 계시는 동안 당신이 육적 이스라엘과만 관계가 있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08:38) 오히려 육적 이스라엘보다 영적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중요하게 보셨습니다. 그분은 이방 여인에게까지 당신의 은혜를 베푸시면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의 은혜가 민족을 초월하고 이스라엘 밖에까지 전파될 것임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당시에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메시아 사상과는 맞지 않는 분이었습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적그리스도의 투쟁, 부활, 온 세상의 심판주가 되시는 것 등에 대해서 가르치셨는데 유대인들이 당시 사상에 의하면 그러한 일은 메시아의 일이 아니라 메시아보다 훨씬 뛰어난 하나님의 일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제들 역시 그 시대에 태어났고 기독교 신앙이 무엇인가에 대해 명한 이해를 가지시기 전까지는 그 시대의 평균적인 유대인들이었습니다.
(09:37) 따라서 그들의 부활 사건 하나를 보고 예수님이 메시아인 것을 믿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당신은 아 유대가 노마에 모두 점령되어 노마의 집회 피고가 받으며 살았습니다. 세금을 강탈당하고 노마 황제를 성계하였습니다. 노마가 다 민족을 위해 융화 정책 아 종교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광령을 베푼 것은 사실이지만 실시적으로 그들에게 율법은 더 이상 법적 구성력이 없는 순수하게 신학고소하는 문서가 되어 버렸습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노마치아에서 발혀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에 의해서 엄청난 수치여 부끄러움이었습니다. 이러한 시대 상황에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있던 꿈은 노마의 지배로부터 해방되고 꿈에도 그리웠던 다리 시대의 영광을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10:43)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이 세상에서 영원히 이루고 싶으셨던 나라가 바로 그런 나라였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에 되어 너희는 예루살렘을 떨어지 말고 기다리라고 말씀하시자 그들은 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입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메시아스 모습은 전혀 유대 민족주의적인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더군다가 어 더군다가 창카를 들고 노마의 대항에서 해방의 나를 앞다기기 위해 온전사 온 온 전사처럼 사신 생애는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들이 생각하는 메시아와는 편안약에 다른 생애를 가사하신 예수님이 단지 부활하셨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분이 메시아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11:46) 부활과 예수님의 가르침 그러면 도대체 제자들은 무엇 때문에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그분이 메시아이심을 믿게 되었을까요? 부활하신 사실도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확신시켜 주었지만 그것보다도 더 강력한 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예수님의 가르침의 진실성을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는 동안에 가르쳐주신 가르침이 진실이었고 그 가르침이 하나님의 교이었다는 것을 믿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들에게 그분이 메시아라고 하는 사실을 확신하게 만들어준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살펴보야 할 것이 있습니다.
(12:33) 첫째로 예수님의 가르침은 당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사고의 틀에는 맞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실 때 나타난 일들에 대한 기록을 보면 이한실이 드러니다. 선물가의 여인 이야기입니다. 한 여인이 물을 기르러 왔는데 예수님께서 그 여인과 물에 대해 한참 이야기하시다가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에 대해 이야기하자 그 여인은 자기에게 그것을 좀 달라고 합니다. 이제 더 이상 남의 눈을 피해 물을 기르러 오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여기면서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생수가 하나님의 은혜이며 영생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지만 그 여인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13:18) 또 다른 하나는 니고데모의 이야기입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 예수님께서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종교를 지도하는 공의회의 의원인이 사람의 반응은 실로 당황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만큼 예수님의 가르침이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둘째로 그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지식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옳지 않은 지식들로 가득차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그들과 달리 잘못된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창, 기생, 세리와 같이 이스라엘의 공동체 속에서 소회되었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비교적 잘 알아들었습니다.
(14:07)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항상 설교하신 후에 사람들을 다 돌려보내고 제자들만 모아놓고 다시 말씀을 풀어 가르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어느 때에는 너무나 명백하게 인자가 자기 몸을 많은 사람의 속물로 주기 위해 왔다고 당신이 받으실 난에 대해 명하게 말씀하시도 전혀 못알아들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 총체적인 체계를 세울 수가 없었습니다. 부분적으로는 알고 있었으나 또 부분적으로는 몰랐습니다. 셋째로 부활을 통해 예수님의 가르침의 진실성을 확인하였다는 사실입니다.
(14:53)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지 4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들은 이전에 기적을 경험하기는 했지만 사람이 죽었다가 예수님처럼 살아난 것을 본 일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모습을 보고 그들이 내린 결론은 하나님께서 살리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비로소 예수님의 가르침이 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성령 강림 사건을 통해 빛을 환하게 비춰 주시자 예수님의 가르침의 의미가 생각나면서 자신들 속에 있었던 어그러진 유대주의 사상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게 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결국은 부활 사건을 통해 예수님의 가르침이 진실이라는 사실을 충격적으로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15:41) 이 예수님의 자기 계시을 알리심 이제 우리는 여기서 아주 중요한 문제를 다루게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어떻게 자신을 사람들에게 알려주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자신을 구원자로 가르치였습니다. 예수님이 당신이 어떤 분인가 가르쳐 주신 가장 명료한 성경 구절이 바로 본문의 말씀입니다. 인자온 것은 성경을 받으려함이 아니라 돌이려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에 대소물러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이 오신 것을 어 섬기고 고난을 받고 우리를 대신하여 죽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기 자신에 대해 이해하 이해가 어떤 것인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성경 구절입니다.
(16:37) 둘째로 예수님이 자기를 가르칠 때에는 항상 인자라고 지칭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호칭을 많이 있었습니다. 주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그러한 호칭의 성경이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것은 모두 예수님을 믿고 신앙을 가진 사람들 또는 사탄이 예수님을 지칭한 것뿐인지 예수님은 자신에 대해서 그렇게 호칭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면 인자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여기에 예수님이 자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당신을 어떤 존재로 가르쳐 주셨는지에 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인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신을 지칭할 때 한 사람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항상 그 사람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7:41) 이것은 내가 바로 그 인자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이 문제를 불기 위해서 구약의 빛을 받아야 합니다. 인자라는 표현은 다니엘서 시편 등 여러 곳에서 흩어져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인자라고 소개할 때 그냥 인자라고 하지 않으시고 정관사를 붙여서 그 인자라고 소개하신 것은 구에서 말하는 인자가 바로 그 어 자신인 것을 보신 것입니다. 구약의 구약이 애매하게 사람의 아들이라고 명시했던 그가 바로 자신을 가르킨 것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당신 자신을 그 인자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삐 삐 인자 그 사람의 아들. 이제 우리는 인자에 대하여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살펴봄으로써
(18:44) 인자에 대한 논의를 보다 구체화시키고자 합니다. 첫째로 인자는 신적인 존재입니다. 우리는 다니엘서에서 인자 같은이가 구름을 타고 온다는 묘사를 만나게 됩니다.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쪽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 이성경 9절에서부터 항상 계신이는 의심할 여지 없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다니엘은이어서 인자 같은 이에 대해 말합니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전능하신 하나님의 보좌가 있고 거기에 이끌려 나아와서 백성들을 대표해서 하나님께 아 인자 같은이가 구름을 타고 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구름을 타고 온다고 표현할 때 그는 하나님과 같은 신적인 존재입니다.
(19:39) 예수님께서 당신의 재림과 관련해서 말씀하실 때 구름을 타고 오신다고 말씀한 것도 바로 구약에 나오는 인자 같은이가 곧 당신이심을 암시하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후 승천하실 때에도 구름을 타고 올라가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됩니다. 이것은 결국 예수님이 신적인 존재 곧 하나님이심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둘째로 그러면 왜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표현하지 않으셨을까요?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던 하나님의 아들 사상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무엘 하서에서 우리는 이런 구절을 만나게 됩니다. 내 수이서 조상들과 함께을 때에 내가 내 몸에서 날 내 씨를 내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20:40) 이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당시 다윗을 축복하시면서 이후에 이어질 다윗의 왕에 대해 말씀하시는 장면입니다. 이것은 국지적으로는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성취되었고 우주적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영적인 이스라엘을 만들고 영적인 이스라엘의 왕이 되심으로써 그 왕위가이 세상에 있는 어떤 것에 의해서도 흔들리지 않고 영원까지 계속될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이 구절을 근거로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전통이 생겨났습니다. 그들은이 말씀을 단순히 육적으로만 이해했던 것입니다. 다윗의 위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태어나는데 그가 이스라엘을 튼튼하게 지켜주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정치를 잘해서 이스라엘을 부강하게 할 것이며 온 외적의 친입으로부터 자기들을 안전하게 보호해주는 용사와 같은 훌륭한 인물일
(21:45)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이 그 당시의 하나님의 아들 곧 신자 사상입니다. 따라서 만약에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사람들에게 알리셨다면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하나님의 아들 사상의 근거에서 예수님이 이스라의 지도자가 되어서 무력과 뛰어난 정치적 능력으로 이스라엘을 부한로 만들고 수많은 나라를 창칼로 복속시켜서 그들로 하여금 자기네들에게 조공을 치러 오게 하는 시대의 영광을 제언할 그 하나님의 아들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이야기하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다면 유대인들은 즉각적으로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못된 사상에 예수님을 꾀어 맞추려고 했을 것입니다.
(22:44) 그렇게 되면 상황은 예수님이 그들이 가진 사상을 잘못된 것이라고 설득하셔서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자신을 그 인자라고 소개하셨을 때 그 의미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렇다. 내가 바로 구약에서 말하고 있는 그 인자다. 그러므로들을 귀 있는 자 사람은 들어라. 셋째로 우리는 언약 속에서 예수님의 당신을 인자로 지치한 신뜻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특별한 사람들만이 아니라 백성들 전체가 하나님의 아들들로 불려졌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언약 관계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어 그것은 모세를 대표로 해서 율법으로 맺은 언약 관계입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모세가 낭독하면 이스라엘 백성은 아멘 하는 마음으로 맹세에 참여하였는데
(23:50) 그전에 피를 뿌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생을 의미하기 때문에 피를 뿌리는 것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죽도록 지킬 것이며지키지 못하면 죽음을 당해도 좋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불순종함 그 언약을 파괴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당신의 선지자를 보내서 하나님의 법을 법으로 돌아오라고 외치게 하셨지만 그들은 선자들의 피어린 외침을 비웃기나 하듯이 더 악을 행하고 불순종하며 자기 속에 좋은 대로 살아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이 언약을 파괴한 육적 이스라엘 백성들을 멸시하시고 멸하시고 새로운 영적인 이스라엘을 만드실 것을 작장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새로운 이스라엘을 만들 때 언약의 대표자가 바로 그 인자인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어 자기
(24:56) 백성들을 다 끌어앉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언약을 받을던 것처럼이 인자가 자기 자신을 통하여 이루어질 영적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러 모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인자라고 말씀하셨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것을 알려 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새 이스라엘을 반드시 만드시는 방법은 당시 백성들이 생각던 것과 같이 창를 가지고 주변 나라를 정보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인자가 택하신 백성들의 머리가 되셔서 그들의 모든 질문을 짊어지시고지고 대신 고난과 형벌을 받고 죽으심으로써 그들로 새 백성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셨을 때 그분은 목자 아 목자 이른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무리들을 보시면서 그들을 다 당신께로 이끌어서
(26:03) 자기와 함께 있게 하고 싶은 간절한 소망을 가지셨습니다. 바로 그 소원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유리하고 고생하는 영혼들의 죄를 위해 대신 형벌 받으시고 십자가에 고난을 당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처음이 세상에 등장하셨을 때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이 이 선포는 예수님 예수님 당신이 역사 속에서 나타나신 것과 하나님 나라가 오는 것이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선포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 인자이신 예수님을 통해 구원받는 무리들이 생겨나는 것으로부터 시작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3. 십자가와 파기된 언약 관계. A 십자가 종교적 음모. 이제 우리가 살펴볼 것은 예수님의
(27:06) 십자가 사건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고 외치셨는데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는 백성들이 있어야 했습니다. 비록 하나님 나라가이 세상의 왕국과는 다르지만 그 나라 역시 영역과 주권과 성으로 이어지는 나라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주권은 다스리시는 창조주 하나님께 있고 영토는이 세상과 하늘나라이고 백성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얻은 무리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나라의 백성들을 모으시 있어서도 그들의 죄가 문제였습니다. 인간은 이미 하나님께서 꿈꾸시던 기대를 따라서 살 능력도 없고 살 수도 없을 정도로 타락했기 때문에 모종의 조치를 취하지 않고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로 만드실 수가 없었습니다.
(28:00) 따라서 예수님은 그들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셔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백성들을 위해 그들의 죄를 신지시고 죽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구속이며 그 일을 위하여 대속하시는 방법이 바로 십자가였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필이면 십자가였을까요? 십자가의 죽음은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유대인들이 고안해 낸 아주 치밀한 선택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고 싶어하던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되풀이하였던 질문이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인가? 내가 메시아인가? 그때마다 예수님의 대답은 항상 모했습니다. 그러나이는 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예수님이 비겁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저들이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도저히 답을 하실 수가 없으셨던 것입니다.
(28:57) 메시아는 맞는데 그 사람들이 생각하는 메시아는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항상 그들의 질문에 모하게 반응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계속해서 내가 메시아인가 하고 질문한 이유는 내가 메시아이다라는 대답을 듣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 때문에 계속해서 예수님을 퇴근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종교적인 음모가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메시아는 왕이라는 말과 동의어입니다. 메시아는 곧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주기 위해 온 왕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처음부터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나사렛에서 난 그 젊은이가 자신들이 꿈에도 그리던 메시아 정인 용사로서의 구원 어 자일 수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29:57) 그런데 백성들이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라다니 어 따라다니는 것입니다. 따라서 유대 중계사들에게 예수님이 위협적이고 귀찮은 존재였습니다. 자신들의 중개적인 체계를 허물들이고 예수님의 가르침이 자신들의 가르침과 연관이 있다는 거 어 연관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없애 버리고자 그 방법을 모세가 하였습니다. 그리고 가장 쉬운 방법이 예수님부터 자신이 메시아라는 대답을 얻어내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메시아라고 하는 것은 곧 자신이 왕이라는 것이므로 예수님은 노마에 대한 반역자로 몰아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책 힘을 빌려서 예수님을 죽인다 해도 예수님을 따르는 백성들로부터 비난을 받을 여지가 있었습니다.
(30:54) 많은 백성들이 예수님의 어 선자로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비난을 불식시킬 방법으로 선택한 것이 바로 나무에 매달아 죽이는 것입니다. 나무에 매달려 죽은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는 자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게 되면 두 가지 목적을 동시에 성취해야 하는 것입니다. 절제로 자신들이 종교적인 입질를 불안하게 하는 예수라는 존재가 없애 버리는 것이고 둘째로 그를 따르던 백성들을 하여금 예수님이 하나님께 저 하나님께서 저한 인간이었다는 어 생각을 하게 만들고 그에게 침뱉고 돌아서게함으로써 예수님을 따르지 못하게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31:46) 예수님이 결코 메시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백성들에게 확시키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의 목적이 있기 때문에 그들이 적극적으로 십자가를 택했던 것입니다. 성경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합니다. 그들이 다시 소리지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게 하소서. 빌라도가 이르되 어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하니 더욱 소리 질러지르되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 비육적 이스라엘을 패하심.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의 신문 과정에서 또 하나의 주목할 만한 장면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 예수님을 신문하던 빌달라도에게 예수님에 대한 유죄판를 종용하며 외치는 장면입니다.
(32:35) 그들은 일치하게 외쳤습니다. 우리에게는 가이사에는 왕이 없습니다. 유대인들의이 발라은 한편으로는 빌라도를 협박하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육적 이스라엘이 선택된 백성들로서 하나님과 맺었던 모든 관계가 끝났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발언은 먼저 빌라도에게 이런 협박이 됩니다. 내가 만약 예수를 살려주면 스스로 왕이라고 자칭하던 사람을 살려주는 것이 로마를지는 것이다. 그러나 보다 주목해야 할 사실은이 발언이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가 완전히 끝났음을 자신들의 입으로 선언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누구입니까?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왕은 가이사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33:20) 그러므로 유대인들의이 발언은 이제 육적 이스라엘의 껍질은 깨뜨려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새 이스라엘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옛 언약이 끝나고 그 순간에 새로운 언약의 피흘림이 일어나서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초대 교회의 사도들과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사건이 일어났다고 생각한 것도 바로이 같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믿음으로 속죄함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그 무리들은 영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하나님의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들이 되는 것입니다.
(34:05) 그래서 비록 죄악된 세상에서 살지만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주신 은혜를 따라서 하나님께 의존하고 순종하며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아가는 무리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의 관계와 순종 관계를 떠나 독립을 선언하고 하나님을 떠나 살던 인간이 이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금 주님께 속하고 싶어 하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부활 사공학의 다름 A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경험한 이들은 이제 그분의 부활의 사건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거나 직접 그 죽음을 목도한 자들이 이제 다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서 그들은 죽음과 다시 사심 사이에 논리적인 간격을 메워야 했습니다.
(34:59) 제자들은 그것이 환상일 것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환상이 아니라 정말 예수님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자신의 눈에 생생이 보이고 심지어 못자고까지 그대로였습니다. 예전에 그 음성으로 죽기 전까지 가르치셨던 것과 같은 연장 선상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치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문으로 들어오실 수 있고 벽을 통과하실 수도 있으십니다. 시간에 계실 수 있지만 그것을 좋아할 수 있는 분이시었습니다. 공간 안에 나타낼 수도 있었으며 또한 공간에 메이지 않을 수도 있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은 분명한 사실인데 그것을 경험한 사람들은 자신의 육적인 고정관념을 이것을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35:54) 그래서 그들에게 예수님의 부활 자체가 어마어마한 충격으로 와 닿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비로소 그들을 두 가지 사실을 확인하게 됐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의 죽음이 자신의 죄로 인한 저주가 아니었음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동에 나셨고 성결의 영혼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니라. 제자들은 하나님께서 먼저 예수님을 인정해 주시고 하나님께서 그분을 인정해 주셨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부활을 통해 깨닫게 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나무에 매달려서 죽였습니다.
(36:49) 그리고 신명기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이것은 하나님 앞에 저주를 받은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십자가의 형벌을 통해 하나님이 하나님이 하 아 예수님이 하나님의 형벌을 받고 죽으셨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그리 그러나 제자들이 보기에는 예수님에게는 죄가 없었습니다. 아마도 그들에게는 이런 의문이 있었을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의로우신 예수님을 나무에 매달아 주께 허락하셨을까? 예수님이 죄없으신 분이라는 신앙적인 인식과 그가 나무에 못 박혀 죽은 것은 하나님의 저주일 수밖에 없다는 신학적인 사실에서 그들은 커다한 혼란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그들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37:44) 그리고 그렇게 부활의 사건을 경험하고자 경험하고 나자 예수님은 결국 어 하나님께 저주받아 죽으신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 그러나 어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때에도 그들은 다음 질문에는 정확한 답을 찾지 못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죽으셔야 했을까? 물론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한 후 그들이 그분의 죽음의 의미를 확실하게 알게 된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한 가지 사실이 분명해졌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죽음은 예수님 당신 자신의 죄로 인해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서 죽으신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충격적으로 경험한 이들은 하나님께서 살리신 것을 신했습니다.
(38:40) 만약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은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왜 그를 살리셨겠습니까? 하나님이 아니면 그렇게 살릴 사람이 없는데 말입니다. 유대인들의 교묘한 조작으로 인해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죽었다는 그들의 말이 상당히 설력 있게 받아들여졌었는데 예수님의 부활은 그것을 깨뜨린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둘째로 부활을 통하여 그들은 예수님이 왜 죽으셨을까 하는 의문에 대한 답을 확인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자신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저주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한 그들은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죽으셨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후에 성이 강림한 다음에 빛을 받아 실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39:25) 그러나 그 전에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하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명려하게 생각이 났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관한들이 떠오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에 그들의 정신세계속에는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지만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다시 살리셔서 그 죽음이 자기의 죄로 죄를 인해 하나님 앞에 저주받은 죽음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셨고 그렇게 죄 없으신 분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셔야 했던 이유는 바로 우리의 죄 때문이었다.
(40:10) 그리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가운데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인간을 구원하셔서 다시 당신의 품으로 불러모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만드시는 하나님의 방법이었구나. 이처럼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가 새로워졌습니다. 그들은 비로서 예수님이 구원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예수님이 자신들과 함께 거하시면서 가르치신 모든 가르침을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깨닫게 되자 예수님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이한 변화를 한 그들이 생명을 외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40:59) 비유일한 구원 방법. 사도 바울은 자신이 사람에게 전한 복음의 기운에 대하여 당같이 말합니다. 내가 받은 것은 먼저 너희에게 전하노니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바 되시다가 성경대로 안에 다시 살아나사 바울이 전수받은 복음은 예수님께부터 직접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초대교회 복음 선포 방식으로 누군가에 누군가에게 전해드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렛에서 태어난 젊은이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었고 그분이 십자가에 죽은 것은 것은 바로 우리 죄 죄를 위한 것이었으며 하나님께서 그분을 죽음에서 다시 살려내셨 살려내셨다. 그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받은 것이었습니다.
(42:01) 그리고 자신도 그 복음에 의해 구원받았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부터 전에 받기는 하였지만 그 복음은 다른 사람에게 사람들의 복음이 아니라 어 바울 자신이 체험한 복음이 되었습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내 복음이라 읽컫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 조국계실에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이러한 복음,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에 대한 체험입니다. 그래서 단지 남에게서들은 복음이에 그치지 아니하고 내 복음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체험이 사라지므로 주님이이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우리를 거룩한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하여 주고 싶으셨던 진리들을 드스럽지 않 것으로 취급하고 썩그려
(43:08) 어 지식들이 복음을 대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 그래서 교회는 이렇게 매마게 되었고 어 영혼들은 목자 일은 양같이 방하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믿었던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모른 채 예배칠석으로 신앙생활을 대신하고 있는 많은 교인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고 다시 창조의 목적에 따라 살라고 예수님께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많은 조국 교회들에게 어 조국 교회들에게는 복음이 날게 되었고 심지어 복음과 화해하지도 않는 사람들이 복음 사역자가 되기도 합니다. 아, 교회 안에 피묻은음 복음의 살린 외침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보다 큰 재앙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조국길을
(44:13) 위하여 기도하시려거든 부대 이것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우리의 모든 것을 다 가져가셔서도 우리에게 복음의 위대한 역사를 주시옵소서.이 이 시대 조국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영광스러운 방식으로 그 복음을 경험하게 해 주시옵소서. 구약의 역사를 해고해 보십시오. 철저하게 죄로 말미암아서 하나님을 멀리 떠났고 하나님의 관계가 모두 파괴된 가운데 불황하게 살아가던 인간에게 일시적으로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었던 제사는 길이 열렸지만 열려 있었지만 어 그것으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궁적인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로부터 자신들을 구원해내는 하나님의 방법이 제시되었습니다.
(45:10) 그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외쳤습니다. 이제는 율법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이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갑없이 의었다 하심을 얻는 자 되었느니라. 복음의 내용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인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구원받는 다양한 길을 이야기하지만 성경은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위한 구원 사건을 이루신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지 않고는 누구도 하나님 아버지께나갈 자가 없다고 말합니다.
(46:08) 예수 그리스도의 이외에는 누구도 우리를 구원해 낼 수 없습니다. 예수님 외의 모든 것들은이 땅에 속한 유한한 자원을 가지고 자기를 구원하려는 시도들이기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이 세상적으로 볼 때 뛰어난 학문을 가진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사심 그리고 죽으심과 다시 사심의 의미를 안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사건이 바로 자신의 구원과 직결되는 사건이었음을 확실하게 알았습니다. 과거 자신들이 잘못 생각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고 그분의 구속의 고난을 통해 자신들을 살리신 것임을 깊이 깨닫고 거기에서 이제껏 쌓아온 잘못된 신앙이 모두 무너졌습니다.
(46:59) 그리고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보면서 죽음이라는 질병에 치달리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위한 구원 방법이 바로 그것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이 진리가 청천 병력과 같은 엄청난 충격으로 그들의 지성과 그들의 영혼을 찌르면서 정호의 햇볕과 같이 쏟아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의미가 없었습니다.이 경험에 붙들려서 그들은 자신들의 생명과 바꾸면서까지 예수는 그리스도시다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핍박을 받으면서도 목숨을 걸고 외친 것 역시 이것입니다.
(47:43) 너희가 나무에 못박은 예수님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살리셨으니 그분이 곧 너희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메시아시다.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받으라. 스데반도 역시 죽는 순간까지이 복음을 외치다 갔습니다. 모든 사도들이이 공통된 고백 속에서 생명을 걸고 땅끝까지 복음을 증거하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를 위해 살고 예수를 위해 죽었습니다. 변하지 않는 세상입니다. 오늘 변하지 않는이 세상을 보십시오.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는 세상을 보십시오. 교회는 있어도 교회에 의해 세상이 변화되는 일은 점처럼 일어나지 않습니다. 온기종기 모여서 기분 좋게 규제하며 살아가지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교회를 만들어 놓으신 목적은 그것이 아닙니다.
(48:40) 자기 만족에 빠져서 살라고 여러분을 예수를 믿게 만드시고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자신의 구원을 위한 사건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어떻게 사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도 죽음의 증상이이 세상에 가득합니다. 죽음의 질병에 걸려서이 세상에 있는 돈이나 명예, 사회 구조로도 도저히 볼 수 없는 비참한 증상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고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인간이 참된 목적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마치 불을 향해 나라들은 나방과 같이 죄 아래 모이고 죽음 아래 달려들고 있습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49:34) 하늘에는 천사들을 두어 다스리게 하셨지만 땅에는 사람들을 창조하셔서 당신이 지어 놓으신이 세계를 다스리게 하고 싶으셔서 다른 피조물과는 달리 당신의 형산을 심어 놓으셨습니다. 세상에 어떤 종류의 고통의 시달이든지간에 고통을 하는 세상에 대한 영원히 변치 않는 답은 하나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 위에는 결코 다른 해결의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캄캄한 세상에서 죄 가운데 무죄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명을 거두지 않으시고이 땅에 살려 두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오직 하나입니다. 그들이이 세상에 살아 있는 것이 기쁘시기 때문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복음을 듣고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되어 그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50:38) 주님이 창조하신이 세상을 만물의 영장답게 다스리고 단 하루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다가 죽게 하시려고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입니다. 하나님은이 구원에 있어서 당신이 직접 하시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사랑하고 복음의 기쁨을 아는 우리들을 통해 복음을 전하기를 기뻐하십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그러했던 것이 것처럼 말입니다. 용서받은 죄인들을 인죄인 여러분은 이제이 복음의 간격을 유지하고 밖에는이 세상에 소중한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믿고 옛사람을 끊임없이 십자가에 못박으며 성화됨으로써 하나님께 무한한 기쁨을 드릴 수 있는 그런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 아멘.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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