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시는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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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본문 해설

누가복음 15:20–24 NKRV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오늘 우리가 살펴보게 될 탕자의 비유는 신약 성경에 나오는 가장 유명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 비유는 평화로운 한 가정의 이야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집 주인인 아버지는 큰 부자였고 그의 슬하에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 가정의 평화는 둘째 아들의 뜻 밖의 요구로 깨어졌습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 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누가복음 15장 12절
아버지가 엄연히 살아 계신데 유산을 물려 달라고 하는 것은 당시로서는 엄청난 불효였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마치 아들이 아버지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과 매우 흡사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당신이 죽었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이 죽었다고 칩시다.”

1) 집을 떠난 탕자

그 아버지는 무슨 뜻에서 인지 순순히 둘째 아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그 아들은 물려 받은 재산을 모두 처분하여 재물을 가지고 아버지를 떠났습니다.
그에게는 꿈이 있었습니다.
평생 살면서 아버지의 간섭을 받았던 가정을 떠나 머나먼 나라를 여행하는 것이었습니다.
탕자는 이제껏 익숙하게 살아왔던 누추하기 짝이 없는 시골을 떠나 화려한 도시에서 살아보고 싶었습니다.
먼 이국 땅에서 새롭게 펼쳐지는 삶은 그에게 기적과 같은 행복을 안겨다 주었습니다.
그에게는 젊음과 재물 그리고 무엇보다 그것을 즐길 수 있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세월이 흘렀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허랑방탕하게” 세월을 보냈습니다.
수입이 없이 쓰기만 했으니 재물은 나날이 줄어만 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수중에 단 한 푼의 돈도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급기야 탕자는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릴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마침 그 나라에는 그 나라 전체의 큰 흉년이 들어서 거지와 다름 없이 궁핍하게 되었습니다.
할 수 없이 그는 그 나라 사람 중 하나에게 붙어 살게 되었고, 그 사람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습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돼지는 부정한 동물이었기에, 그는 가장 천하고 수치스러운 일을 하며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 나라에 닥친 큰 흉년은 가축조차 굶주림을 피할 수 없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탕자는 그 당시 짐승의 사료로 사용되던 쥐엄열매 라도 먹어서 배고픔을 면해 보고자 하였으나 그것마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드신 이 비유에는 두 전망이 함께 있습니다.
가깝게는 당시 하나님을 멀리 떠나 방탕하게 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앙과 비참함을 깨우치기 위함이었습니다.
또한 멀리로는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인 우리에게 하나님을 떠난 삶이 얼마나 불행한 것인지를 깨닫게 하려는 의도에서 였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있으십니까?
아버지의 집에서 행복한 삶을 살고 있으십니까?
아니면 그 집을 떠나 낯설고 먼 곳을 방황하고 있으십니까?
(음악) 나 주를 멀리 떠났다 이제 옵니다
주님의 집에 거하는 행복을 누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집으로 돌아감

결국 탕자는 굶주려 죽을 지경이 되어서야 비로소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방탕한 길을 가다가 인생의 벼랑 끝에서야 비로소 아버지의 집에 사는 것이 행복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돌이키면서 후회하는 마음으로 진솔하게 고백합니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일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눅 15:17)
이때 그는 지난 날 자신의 과오가 마치 영상의 필름처럼 스쳐 지나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이제껏 있었던 자신의 어리석음과 세상 사랑의 허망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두 가지 면에서 변화 되었습니다.
첫째, 죄에 대해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에게 있어서 이제껏 살아 온 가운데 경험한 가장 큰 변화였습니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눅 15:18)
이는 탕자가 신앙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이 아버지의 집을 멀리 떠나 허랑방탕하게 산 것이 바로 죄였으며 그 죄는 하늘의 하나님과 이 땅의 아버지를 거역한 것이라는 고백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 사는 것은 그냥 불편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죄입니다.
우리는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함께 살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도록 그렇게 운명지어진 사람들입니다.
둘째로 겸비하게 되었습니다
이제껏 탕자는 아버지의 집에서 법적인 아들로서 모든 것을 누리며 사는 것을 당연한 권리처럼 여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아버지께 감사하는 마음이라고는 티끌 만큼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큰 불행의 고통을 통해 그것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의 특권인지를 분명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겸손해 졌습니다.
“지금부터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눅 15:19)
탕자의 생각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지긋지긋한 아버지의 집은 자기 같은 죄인에게는 너무나 과분한 가정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무런 애정도 없고 자기를 속박하는 것만 같았던 아버지가 사실 자기와 계속 머무르고 싶은 아빠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음을 돌이킨 탕자에게는 머나먼 타국에 한시라도 머물러 있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한때 자신이 탐닉했던 환락의 도시는 속히 탈출해야 하는 심판받는 소돔과 소모라 성 같이 되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정든 집으로 돌아가서 아버지와 함께 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추후의 망설임도 없이 고향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이 이야기는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지금 여기서 말씀을 듣고 있는 당신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야기 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들을 당신의 형상으로 지으셨습니다.
그 수많은 사람 중 당신을 창조하셨습니다.
스스로 죄를 짓고 하나님을 멀리 떠났지만 자신의 힘으로는 결코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아버지께로 스스로 돌아올 수 없는 불구가 된 여러분들을 다시 온전케 하시기 위해서 여러분들을 부르십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났던 불순종과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 자기의 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게 하셨습니다.
이제껏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그분이 우리의 가족이 되시기를 원하십니까?
방황과 굶주림과 허무한 인생의 끝자락에서, 삶보다 죽음을 생각하게 되는 절망적인 현실에서 결단을 하십시오.
이렇게 하나님과 아버지께 돌이킨 탕자처럼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갈 때입니다.
지금 그렇게 결단하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3) 기다리시는 아빠

셋째로 기다리시는 아빠 입니다.
탕자는 허랑방탕한 길 끝에서 심한 굶주림과 외로움 그리고 허무와 고통을 경험했습니다.
방탕했던 둘째 아들은 마음을 돌이켰어요.
아버지를 떠난 곳에서는 어디서도 행복을 얻을 길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용기를 내었습니다.
비록 거지꼴이 되었고 아무 것도 아버지께 내세울 것이 없었지만 용기를 내어 그 모습 그래도 아버지 계신 집으로 돌아가기를 결심했습니다.
왜냐하면 변함없는 사랑으로 자기를 기다리고 계신 아빠가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머나 먼 길을 우여곡절 끝에 배고픔과 싸우며 돌아왔을 때 누추한 몰골을 한 채 저 멀리서 걸어오는 탕자를 먼저 발견한 것은 아버지였습니다.
“… 아직도 거리가 먼 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눅 15:20)
아버지의 집을 멀리 떠나 환락에 빠져 있는 동안 탕자는 아버지를 잊었습니다.
그러나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는 하루도 잊지 않았어요.
매일같이 동구 밖으로 나아가 집을 떠나 간 아들이 자기에게로 돌아오기만을 손 꼽아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아직도 두 사람 사이에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었건만 인자한 아버지의 마음 안에 불붙는 사랑이 아들을 알아보게 하였습니다.
오늘 성경에 “측은히 여겨” 라고 번역되어 있는 이 구절이 그리스어 성경에서는 에스프람크리스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원어적으로 “창자에 이르기까지 감동을 받다” 라는 뜻입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인간의 영혼의 자리가 창자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이 단어를 문화적인 맥락을 고려하여 등가 번역을 한다면 이렇게 될 것입니다.
“아버지가 그를 보자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파서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흔히, 탕자의 비유라고 불리는 이 아름다운 이야기의 주인공은 돌아오는 아들, 곧 회개하는 아들이 아닙니다.
이 이야기 속에서 빛나는 주인공은 기다리시는 아버지 입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가정을 떠나 방탕한 길로 가버린 아들을 어른이 아니라 보호와 돌봄이 필요한 아이로 여기고 바라보며 “기다리시는 아빠” 입니다.
이렇게 두 사람은 뜨겁게 포옹함으로써 변화된 아들과 원래 있던 아버지로서 재회하였습니다.
자신이 하나님과 아버지에게 큰 죄를 지었기에 도저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일컬음을 감당할 수 없다고 고백하는 자기의 둘째 아들을 위해 아버지는 종들에게 말합니다.
(눅 15:22-23)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여기서 “좋은 옷”을 입히는 것은 신분의 상승을 의미하는 것이고,
손에 가락찌를 끼워 주는 것은 법적 권한의 부여를 뜻합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손에 끼는 반지에 도장을 새겨 그것으로서 재산권을 비롯한 그 집안의 법적 권리를 행사했기 때문입니다.
탕자는 후일에 받을 유산의 분깃을 이미 받았고 다 써버렸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의 손에 가락지를 끼워 줌으로 둘째 아들이 아직도 여전히 유산 물려 받을 수 있는 친아들임을 공개적으로 선포한 것입니다.
탕자는 아버지의 재물을 허비하고 불효와 방탕으로 가문의 명예에 먹칠을 했습니다.
그리고 빈털터리 되어 아버지 신세를 지기 위해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이런 쓸모 없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분에 넘치는 대우를 해줬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무엇 때문에 아버지는 이 비루한 아들에게 이처럼 놀라운 대우를 해주는 것일까요?
이에 대해 아버지는 말합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 하더라” (눅 15:24)
죽은 줄로만 알았던 둘째 아들이 뜻밖에 다시 살아왔을 때 그를 사랑하는 아버지의 마음에 충만했던 그 기쁨과 사랑하는 충만한 환희를 무엇으로 비교하겠습니까?
여러분은 스스로 자신이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알고 계십니다.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영혼을 가진 사람임을 알고 계시기에 지금도 하나님을 멀리 떠나 방황하는 여러분들을 애타는 목소리로 부르고 계십니다.
(예화)
갈라디아서 2장 20절 간증 짧게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만물들 위에 뛰어난 지성과 의지를 주셔서 그를 만물들의 영장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어떤 피조물 보다도 더욱 더 하나님을 많이 의지하며 행복하게 살아가도록 만드셨습니다.
인간에게는 동물에게 없는 뛰어난 지성을 가지고 있기에 인간은 의미를 미처 파악하지 못하는 인생의 허무와 절망, 고독과 외로움을 알게 하셨습니다.
고독은 선택한 외로움이고, 외로움은 선택하지 않은 고독입니다.
인간이 고독을 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가치 있는 것을 찾기 위해 스스로 외로움을 선택한 것입니다.
소설가 이외수씨는 작품 활동을 할 때 스스로를 감옥에 가두곤 했죠.
이게 인간이 다른 짐승과는 다른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인간은 모든 만물 중 최고로 뛰어나기 때문에 그래서 오히려 아빠와 같은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지 않고는 살 수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양떼로 비유하시는 것을 자주 발견하실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인간을 그 많은 짐승들 중 유독히 양 떼에 비유하셨을까요?
양은 온순하기는 하지만 고집이 있는 짐승입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이사야 53장)
양은 초식동물로서 누군가를 공격할 수 있는 신체적 특징이 아무것도 없는 짐승입니다.
그래서 양은 태어날 때부터 인간 가까이에서 인간의 돌봄을 받으며 선한 목자의 인도를 따라 살게끔 창조하신 동물입니다.
그래서 인간을 양으로 비교하신 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 때 그 때에만 행복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은 씩씩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제 힘으로만 씩씩하게 살아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떠난 방탕입니다.
바로 이 아름다운 비유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멀리 떠난 여러분을 향한 가슴 찢어지는 아픔과 눈물 섞인 사랑의 마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이렇게 보여주신 하나님 아빠의 사랑 앞에서 어떻게 반응할지 결정해야 합니다.
이것은 누가 대신해 줄 수 없는 현재적 실존으로 여러분 각자가 내려야 할 결정입니다.
아무로부터의 보호 없이 탕자는 기나긴 방황 속에서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홀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당신도 결단해야 합니다.
이 시간 나는 하나님의 심정으로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멀리 떠난 어둡고 비참한 길에서 돌이켜 행복과 기쁨이 있는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오십시오.
바로 지금 여러분 자신의 실존을 걸고 앞으로 가야 할 바를 결단하십시오
먼저 이제껏 하나님께서 당신을 얼마나 많이 사랑하셨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은 하나님 때문에 태어났고 모든 것을 누렸고 그 많은 위기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더욱 큰 불행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당신은 행복하십니까?
당신은 지금 어느 길에 서 있으십니까?
아버지의 집을 멀리 떠난 환락의 도시 한복판입니까?
아니면 쥐엄 열매 찾아야 하는 굶주림으로 가득찬 돼지 우리간 입니까?
아니면 오늘도 당신이 돌아오기를 눈물로 기다리고 계시는 동구 밖입니까?
영원한 사랑이신 우리 하나님께는 돌아오기에 너무 이른 시간도 너무나 늦은 시간도 없습니다.
복음을 듣게 된 지금 아버지의 집을 멀리 떠나 방탕하게 살아가고 있는 비천한 자신의 영혼의 처지를 깨닫게 된 지금 이순간이야말로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기에 가장 좋은 시간입니다.
저는 한 때 불신자로서 하나님의 집을 멀리 떠나 살았던 탕자의 후예로서 여러분에게 분명히 증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떠난 그곳은 거기가 어디든지 우리를 행복하게 해 줄 어떤 생명이나 사랑도 없습니다.
오직 가시와 엉겅퀴일 뿐이고, 그 속에서 아무리 몸부림쳐도 벗어날 수 없는 방황과 고통 뿐입니다.
열심히 뿌리고 가꾸어도 돌아오는 것은 굶주림 뿐입니다.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굶주린 영혼인데 그 영혼을 끌어안고 행복할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므로 이제껏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멀리 떠나 가슴 아프게 했던 죄를 회개하십시오.
회개하는 죄인을 하나님께서 기빠하십니다.
아무리 걸레 같은 삶을 살았어도 주님께 돌아가기만 하면 아빠이신 하나님은 그 추악한 옷을 벗기시고 성도의 거룩한 옷을 입히십니다.
당신 자신의 힘으로는 결코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당신 자신의 공로로서는 결코 그토록 지은 큰 죄를 사함 받을 수 없습니다.
그동안 하나님께 입힌 손해를 계산할 수도 없습니다.
다시 의로워 질 수도 없습니다.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려는 순간 여러분의 양심은 소리 지를 것입니다.
너가 어떻게 감히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느냐?
너에게는 그만한 공로가 없다!
그때 우리에게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오직 그의 십자가 공로를 의지함으로 진실하게 회개함으로 우리는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당신의 모든 죄를 위해 십자가에 대신 못박히셨던 예수를 생각하세요.
그러므로 당신은 도저히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던 오래된 탕자의 생활에서 거룩한 성도의 생활로 돌이킬 수 있으며 버림 받아 마땅한 더러운 죄인에서 사랑받는 아름다운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 말씀을 통해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의 큰 사랑을 알게 되었을 때 여러분들이 진심으로 회개할 때, 그때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은 여러분의 영혼과 마음에 물 붓듯이 부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돌아가고자 하는 죄인들에게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십자가 그 사랑 간주~)

결론

우리 반주를 들으면서 모두 눈을 감아 봅시다.
여러분 중 아직 하나님을 믿지 않으셨던 분 계시나요?
또한, 믿는다고는 했지만 신앙에서 미끄러져 멀리 떨어져 계셨던 분들 중에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다시 돌아오고 싶은 분 있다면 조용히 일어나 주세요.
당신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매달리신 그리스도를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매달리셨던 그리스도의 모습에 이제껏 하나님을 미워하고 그분께 반항하였던 당신의 비참한 모습을 포개십시오.
그리고 이렇게 함께 고백해 봅시다.
기독교는 고백의 종교예요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릅니다
제가 하는 기도를 따라 이 시간 자신의 입술을 열어 고백합시다.
“하나님 내가 탕자입니다.
내가 당신의 품을 멀리 멀리 떠났습니다.
그리하여 불신앙과 방탕 속에 불행하게 살았습니다.
나는 아무런 공로가 없습니다.
하지만 날 위해 대신 죽으신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믿습니다
예수님의 공로를 기억하여 제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이제부터 영원토록 당신의 품에서 살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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