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그리스도의 속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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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언약관계 A 성경의 언약 사상 인류의 대표로서의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관계가 깨지고 말았습니다. 의무를 위반해서 관계가 깨졌다는 것은 이전의 관계가 있었으며 거기로부터 의무가 주어졌다는 사실을 전제로 합니다. 따라서 여기에서 우리들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언약 관계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언약이라는 말은 정확한 번역이 아닙니다. 우리 말에서 언약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언약하는 자에 의한 일방적인 약속의 의미가 강하기 때문에 계약이라는 말이 더 나은 번역입니다.
(00:53) 그러나이 역시 우리 문학권에서는 성경이 말하는 언약의 의미를 정확히 전달해 주지 못합니다. 계약은 대부분 대등하거나 대등할 수 있는 쌍방 사이에 맺어지는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언약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언약의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전해 주신 계시를 담은 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계시를 전하실 때 그 시대 사람들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그들이 살고 있는 시대의 문화를 이용하십니다. 모세오경이 기록되던 주던 15세기 경중군동 지방에는 종주권 조약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한 나라의 제우와 그에 의하여 책된 책된 공신 사이에 체결되는 언약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01:44) 따라서이 계약은 말이 계약이지 동등한 처지에서 이루어지는 계약일 수 없었습니다. 큰 나라를 다스리는 높은 왕이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들을 불러 그들에게 자기가 점령한 땅의 일부를 어서 맡깁니다. 그리고 그들에게이 그 지역을 작은 나라의 왕처럼 다스리고 재판하고 세금을 거두는 권난을 줍니다. 그리고 그로 하여금 자기에게 신하의 의무를 다하도록 맹세하게 하는 언약 체결의 의식입니다. 따라서 그 계약 관계는 대등한 관계일 수 없고 다만 그러한 계약 관계로 불러드림을 받는 것 자체가 봉신으로서는 말할 수 없이 영광스러운 특권일 뿐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 사이에 맺어진 시내산 언약이 바로 그러한 계약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02:38) 그 계약의 구조는 문헌을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대체로 일곱 개의 부분으로 이루어집니다. 첫째로 발개인이 명치된 계약의 전문입니다. 둘째로 역사적 선입니다. 당사자들의 만남과 유대에 관한 고백이 담긴 부분입니다. 셋째로 의무조항입니다. 그 의무조항에는 대출로 왕이 의탁한 고난에 내역, 세금 증수와 상납에 관한 조항, 전쟁시, 군사적 지원에 대한 담보, 충성의 의무 등입니다. 계약 문서의 성소관과 공개적 낭독에 관한 규정입니다. 다섯째로 증거와 증표들입니다. 여섯째로 계약이 지키고 위반하는 경우에 따르는 축복과 저주들입니다. 마지막으로 계약 체결의 의식들에 관한 내용입니다.
(03:33) 계약이 체계될 때 많은 증인들이 보는 혀서 커다란 짐승을 반으로 쪼개 벌려 놓아서 피가 낭자하게 흐르는 사이로 제우와 각 성의 통치권에 위임받은 봉신이 함께 그 피를 밟고 짐승 사이를 지나갑니다.이는 만일 누구든지 약속을 어기면 이와 같은 죽음을 당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시 그 지방에는 이러한 풍습이 있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러한 그런 문화에 깊이 젖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그를 선택해서 열국의 아비로 삼으시고 그의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게 하고 많은 사람이 그를 통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아브라함이 그것을 믿었다고 기록합니다.
(04:28) 그러나 처음 하나님의 약속을 받게 되었을 때 그가 얼마나 깊은 믿음의 사람이었는지를 분명 믿음의 사람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당시 아브라함은 메스포타미아에서 아버지와 함께 살았고 그의 아버지는 우상을 만드는 일을 하던 사람들입니다. 그곳에서 사람들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신들을 섬기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섬기던 신들의 공통점이 두 가지가 있었는데 하나는 인간에게 재물을 얻기 얻어먹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걸리는 존재였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일관성 없고 도덕성도 없이 없기 때문에 신뢰할 수 없는 신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곳에 살았던 아브라함이 여호와라는 불을 만났지만 그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시고 이제껏 자기가 만났던 수많은 신들과는 완전히 다른뿐이라는 탁월한 인식을 갖기는
(05:32)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짐승을 잡으라고 하시고 달라진 짐승 사이로 불러 지나가심으로서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지킬 것이며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저렇게 죽임을 당하겠다는 의지를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아브라함의 마음속에이 언약의 신실성에 대한 강력한 인상이 지켰을 것입니다. 따라서이 언약은 죽기까지 준수해야 되는약이며 이것이 바로 성경의 언약 사상입니다. B. 구원과 새 언약. 특별한 인간의 구원과 관련된 언약에는 하나님 그리스도 성령 혹은 그리스도를 대표로 하는 인간과 함께 맺는 세 가지 종류의 계약적 성격을 언약이 있습니다. 첫째 행위 언약입니다.
(06:25) 이것은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으로 행위를 담보로 했다고 하여 행위 언약이라고 부릅니다. 행위 언약의 당사자는 하나님과 아담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하나님이 금하신 것을 범함으로 말미암아 그 관계가 깨뜨려졌고 그 결과로 인간은 죽음이라는 질병에 걸리게 되었으며 영적으로는 하나님을 대적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처음에 인간과 언약을 맺으신 행위 언약 안에서 인간에게 거룩한 복종을 위한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 계명은 결코 무거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능히 그 계명을 지키며 살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부여받았고 반듯한 내면의 질서 가운데서 쉽고 즐겁게 그 계명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07:13) 그러나 그들이 범죄함으로 타락하게 되었을 때이 언약은 깨어졌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그 거룩한 복종 안에서 계명을 능히 준수하게 해주는 모든 아름다운 힘과 능력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이 이 상황 속에서도 율법은 여전히 거룩하고 의로우며 좋은 것이었습니다. 그 안에 있는 계명 역시도 정의롭고 거룩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인간이 그것을 지키는 것이 가능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계명은 더 이상 즐거운 것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거스르며 사는 것이 그의 본성에 포합하는 바가 되었습니다.이 이 모두 죄로 말미암아 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07:58) 따라서 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에 복원 없이 인간이 근본적으로 회복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여기로부터 두 가지 언약 구속 언약과 은혜 언약이 나옵니다. 둘째 언약은 구속 언약입니다. 스가랴서 6장 13절에 보면 평화의원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 사이에 인간의 구속을 위한 이루어집니다.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깨어진 관계를 다시 평화롭게 만드는 것에 대한 의논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논이 인간의 구속을 위한 언약을 가져온 것입니다. 구속 언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먼저 하나님은 성자에게 사람의 몸을 입혀 성으로 잉태해서이 세상에 태어나시게 하시고이 세상에 신안에 그와 함께하시며 고난을 받고 죽으시면 그를 다시살려내셔서 만왕의 왕 만주의로 만드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08:59) 그리고 성자 예수님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비난 인간의 몸으로이 세상에 오셔서 인생의 고통을 다 당하시고 율법 아래 복종하시며 인간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 하나님은 성자께서 성부의 뜻을 행하고 지상에서 그의 사역을 감당하시도록 능력을 주실 것을 동의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구속 언약은 성부, 성자, 성령 사위 하나님이 모두 함께 참여하신 언약입니다.이 언약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인간과의 깨어진 관계를 고치고 다시 화평한 관계를 맺고 인간이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09:48) 이러한 내용으로 계약의 성격을 언약이 이루어졌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속의 언약을 따라서 그것을 이행하시기 위해이 땅에 내려오신 것입니다.이를 가르쳐서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구속 언약은 은혜 언약의 기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 째로 인간의 구원과 관련한 언약은 은혜 언약이라는 것입니다.이 이 언약의 당사자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선택된 백성들과 하나님이십니다.이 언약을 은혜 언약이라고 부르는 것은 처음 아담과 맺은 행위 언약과 대칭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행위의 언약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유지되기 위해 행위로 담보로 하였지만 은혜 언약은 행위를 담보로 한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표현한 것이었기에 이것은 은혜 언약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10:49) 인간의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그들의 죄를 보지 않으시고 넘어가 주시는 특별한 호위를 베푸른 일란으로서 은혜 언약이 주어지게 된 것입니다. 은혜 언약은 은혜 언약의 약속은 나는 너희와 너희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이 약속은 신구약 성경 전체에서 가장 으뜸이 되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내가 너희 열조에게 준 땅에 너희가 거하여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그 언약을 옛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 옛날 약속 곧 구약이고 새로운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 새 약속곧 신약입니다. 들어 의미에서 보면 성경 전체의 요점이라고 부르는 요한복음 3장 16절도 바로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고 하는 가장 근본적인 약속의 실현 과정에서 나타나는 작은 약속이라고 불러도 과연 과언이 아닙니다.
(11:54) 은혜의 언약은 구원받은 자에게 영적인 힘의 공급을 약속하고 있다는데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님이이 하나님이이 세상에 인간들을 통치하시는 두 방법이 방법은 율법과 은혜입니다. 그들은 그들 중 어느 하나의 지배 아래 있게 마련이며 둘 모두에 속하거나 어느 하나에 속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 예. 하나님께서는 은혜 언약 안에서 구원받은 자들이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계명을 따라 거룩한 삶을 살 수 있게 하십니다. 따라서 은혜의 언약 안에 있는 자는 누구라도 단지 권능과 힘의 부족 때문에 그들에게 요구되는 순종을 실천하기에 실하는 자가 없습니다. 왜냐면 그의 신한 능력으로 생명과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12:49) 물론 이렇게 능히 순종할 수 있게 하는 은혜의 강점들은 하나님이 지정하신 특별한 은혜의 방편들에 의해 그들에게 역사하게 됩니다. 만약 그들이 그한 은혜의 방편에 참여하거나 활용하기를 소홀리 한다면 그들이 비록 은혜 언약 아래에 있을지라도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 수 없습니다. 새로운 은혜의 언약은 인간이 단지 그 언약 아래 있다는 이유만으로 저절로 부패한 본성을 거슬러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게 된다고 약속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주의깊게 그리고 부지런히 은혜의 방편에 참여하고 활용하며 복음의 원리를 따라서 살아간다면 은혜의 언약에 속한 자로서 아무도 복음의 계명을 순종하는 힘과 능력을 공급받음에 실패하는 자가 없을 것입니다.
(13:42)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하신 말씀을 기억해 보십시오. 그분이 씌어주는 멍에는 쉽고 그분이 지어주는 짐은 가볍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요한 사도는 말합니다.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다. 바울 사도도 말하였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네. 그리고 은혜 언약에는 두 가지의 요구가 담겨 있습니다. 물론 은혜 언약은 계약 자체가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요구되는 행위에는 행위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선도적으로 그 계약을 주도하시고 우리에게는 그 아름다운 은혜의 언약을 적용하는 것이이 언약의 특성이기 때문입니다.
(14:29) 하지만이 언약을 받을 때 요구되는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믿음입니다. 언약과 언약의 내용을 믿고 새 생활을 시작하는 것. 이것이 은혜 언약의 요구였습니다. 그러나이 믿음을 은혜 언약의 실질적인 조건이라고 이해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그것은 마치 누군가가 자신에게 선물을 주는데 자신을 내민 공로로 선물을 받았다고 이야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둘째로 요구되는 것은 순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본래 인간을 절대적인 의존의 관계 속에서 살도록 창조하셨고 그 관계 속에서 순종하며 살기를 기대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다시금 원래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는 인간으로 순종하면서 살도록 부르신 것입니다.
(15:22)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즉시 순종하기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전을 변화시키고 새생명의 원리를 심으심으로 영혼의 상태를 놀랍게 바꿔 놓으십니다. 그러나 거듭난 신자 안에는 여전히 부패한 성품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기 때문에 지속적인 은혜 안에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은혜 받고 성령으로 충만해지면 우리 안에 남아 있는 부패성을 극복하면서 그것들이 아무리 문제가 안 될 정도로 이기면서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중생을 통해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축복할 수만 우리가 계속해서 성령의 은혜를 희빙어서 성화의 삶을 살아가고 순종함을 순종하는 삶을 살아갈 때 그 형상은 계속 시키고 더 찬란하게 빛나게 됩니다.
(16:15) 인간은 죄와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원인을 상실하였습니다. 그는 이제 예전에 가졌던 창조의 신성한 영광의 충만한 특들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도록 다스리며 살고귀한 위치도 상실하였습니다. 그가 비록 좁은 의미에서는 하나님 닮은 형상을 모두 잃어버렸지만 아직도 남아 있는 영혼의 기능 때문에 넓은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형성을 지었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석은 바로 인간 안에 있는 이러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성화를 통하여 그것이 더욱 원래의 형성을 회복하고 그 창조의 영광의 충만함을 드러내며 드러낼수록 우리는 원래 하나님께서이 세상에 창조하셨던 인간의 모습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게 됩니다.이
(17:19) 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의 한시적 방편 제사 우리는 이제 잠시 행위 언약을 깨뜨린 아담에게로 다시 시선을 돌리고자 합니다. 그것을 살펴스도의 속죄가 왜 필요한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대표로서의 아담은 하나님과 세운 언약을 파괴하였습니다. 한 사람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죄가이 세상에 들어왔고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으로 돌이키기 위해서는 깨뜨려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시켜야 했습니다. 그리고 범죄한 인간에게 하나님은 한시적으로 남아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제사입니다. 언제부터 제사라는 방편이 주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아담의 타락 이후 즉시 제사제도가 주어졌다고 봅니다.
(18:10) 그래서 아담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고 그 아버지로부터 가인과 아벨이 제사를 배웠기 때문에 아벨와 가인의 제사드리는 이야기가 나온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이치적으로 정확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관계를 깨뜨린 인간들을 기처분하지 않으시고 그들과 교통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제사라는 제도가 필요했고 제사를 통해 인간들은 하나님 앞에 것입니다.짐승의 짐승의 희생이 반드시 동반되었습니다. 곡식으로 드리는 제사가 있었지만 그것은 반드시 피 있는 제사와 함께 드리는 것이었기 때문에 피없는 제사는 없었다고 말해도 무방합니다. 이렇게 범죄한 인간은 짐승의 성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데 여기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있어야 했습니다.
(18:59) 첫째는 순종의 요소인데이는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규례대로 제사를 드려야 했다는 뜻입니다. 둘째는 믿음의 요소인데이는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그 제사에 믿음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계신 것과 제사를 드리는 자신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하나님을 만나는 은총을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셋째는 재물의 희생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이 제사 제도는 범죄한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한시적인 방편일 뿐이고 인간의 죄 문제를 단번에 영원히 해결할 영원한 방편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 비영원한 방편 그리스도의 속죄 그리스도께서는 대사장이신 동시에 희생제물로이 세상에 오셔서 유래가 없는 제사를 드렸습니다.
(19:52) 당신 자신의 몸을 재물로 가지고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가서 하나님과 범죄한 우리 사이에 영원한 중제자가 되어주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죄 있는 자의 희생으로는 죄인들의 죄를 속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는 죄 없으신 하나님이셔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은 성경에서 흠없는 재물 흠없으신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묘사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참 하나님인 동시에 참 사람으로 사람의 몸으로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한 재물이 되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또한 사람이셔야 했습니다. 완전히 하나님이시기만 했다면 하나님은 죽을 수가 없는데 죽지 않고는 속죄를 위한 제사를 드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20:46) 따라서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신 동시에 참 사람의 몸으로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한 재물이 되셨습니다. 빌립보서는 예수님이 신적인 존재이셨지만 하나님의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다는이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비록 죽으셨지만 영원히 죽을 수 없었던 이유는 그분이 죽을 수 있는 사람의 몸을 입었지만 그분의 본체가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속죄는 완벽하고 영원하고 최종적인 효과를 가져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율법의 도움이나 짐승을 잡아 죽이는 제사의 도움은 필요 없었 것이 되었습니다.
(21:40) 언제든지 그리스도께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한 속죄 재물이 되신 십자가를 믿고 바라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속죄와 관련하여 세 가지 사실을 염두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예. 첫째로 그리스도의 속죄가 하나님께 만족을 드렸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의 반역으로 말미암아 언약 관계가 파괴되므로 피해를 입은 당사자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속죄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누구림으로써 그분의 마음을 인간에게로 돌이키도록 만들어 드린 효과가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속죄는 이러한 역할에 있어서 하나님께 만족을 드렸고 그래서 하나님은 이러한 유화를 기초로 인간들을 유화시하실 수 있었습니다.
(22:27) 둘째로 그리스도의 속죄는 대리적인 속죄였다는 사실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인간은 죄를 지을 능력은 있지만 그 죄를 갚을 능력은 없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모한 형벌을 받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계획을 망가뜨리고 창조주 하나님을 대적한 결과를 보상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죄에 대하여 지불할 수 있는 최고의 값은 기껏해야 죽음이고 지옥에서 영원한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어떠한 동정과 사랑도 베풀지 아니하고 엄격한 의로 그것을 요구하셨더라면 인간은 그런 방식으로 자기의 죄값을 치어야 했을 것입니다.
(23:11)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대리자로 세우셔서 죄인들이 받을 벌을 대신하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난은 대리적인 속죄였습니다. 셋째로 그것은 그리스도의 순종을 통하여 이어졌다는 사실입니다.를 우리를 위한 속죄는 그리스도의 순종을 통하여 이루어졌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율법 아래 태어나셔서 죄인들을 구원하실 목적으로 율법을 지키신 것을 능동적인 순종이라고 한다면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구속하실 목적으로 당하신 십자가의 죽음은 피동적 순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이 두 가지 순종이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것임에는 분명합니다. 즉 능동적인 순종이 피동적인 순종을 포함하고 있고 피동적인 순종이 능동적인 순종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24:04) 3. 속죄의 동인.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죽이심으로 범죄한 인간을 위해 속죄하도록 한 힘. 속죄의 동의는 무엇이었 무엇일까요?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우리는 그 답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이 문제를 다름에 있어서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주목한 나머지 마치 성부 하나님은 죄인 인간을 파멸하려고 애를 쓰시는 분인데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막아 주신 것으로 묘사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사랑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25:02) 아버지께서 성삼위로서 존재하시게 된 경리는 하나님 자신이 그러한 상위의 교통을 통하여 당신 자신을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삶이 사이에 무슨 불이치나 갈등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올바르게 판단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이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한 허목적이 되신 것 자체가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서 비롯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속죄의 동인과 관련하여 우리는 중대한 논쟁을 만나게 됩니다.이 논쟁은 크게 둘로 나뉘어지는데 아설적 필요론과 결과론적 절대적 필요론 그것입니다. 첫째로 나서적 필요는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석제하기 위해 꼭 예수님을이 사에 보내 보내어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실 필요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단지
(26:06) 하나님께서 그것을 기뻐하셨기 때문에 그것을 선택하셨고 우리는 그것을 믿음 뿐이라고 말합니다. 아고스티뉴스나 토마스 아크라스 같은 교부들이 이러한 교회의 생 생각을 같이 하는 이들입니다. 둘째로 결과적 결론적 결과적 절대적 표론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자기 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하실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견행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성품과 법칙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이런 비유를 들어 봅시다. 어느 나라든지 가장 중대한 죄는 반역죄이며 반역자에 대한 형벌은 곧 죽음입니다.
(27:05) 그런데 왕의 아들이 반역을 일으켰고 반란군은 모두 후벌되고 아들만 남았습니다. 그때 아들은 왕인 아버지를 향해 용서와 선처로 호소할 것이며 왕은 자신의 권한으로 아들을 살려둘 수입 있습니다. 아들의 반대가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왕의 고난에 달린입니다. 그런데 왕은 내 아들을 죽여라도 어쩔 수 없다라고 합니다. 왕에게 그 아들을 살릴 힘이 없었어가 아니라 큰 목적과 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살릴 수는 있는데 그렇게 안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이 모자라서 못하신이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신의 성품과 모순내는 일은 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못하시는 것으로 묘사하니 또한 하나님은 법칙을 정해 놓으셨고 두 개의 법칙이 충돌를 일으킬 때 하나님은 그 일을 하지 않으십니다.
(28:07) 그것은 바로 성경적인 사상입니다.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거룩한 공의의 성품과 긍휼히 여기시는 사랑의 성품입니다. 인간이 범죄했을 때 그들을 긍휼히 여기신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은 저희를 용서해 주고 구원해 주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러나 하나님께서 범죄한 인간들을 다루실 때 하나님의 하늘에 있는 천사들로 내려다 보내고 온 땅에 있는 피조물들도 바라봅니다. 그래서 거룩한 공의의 성품상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이 세상에 보내셔서 그 아들로 죄인들을 대시하여 벌을 받게 하심으로써 당신의 거룩한 공의를 만족시킬 드리고 죄지은 인간들은 공로 없이 용서하게 하심으로심으로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당신의 사랑을 만족시키는 것입니다.
(29:10) 이것을 결과적 절대적 표론이라고 합니다. 4. 속죄의 범위 그리스도께서 대리적인 속죄를 통하여 드린 만족이 모든 사람을 구원얻게 할 것을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그 자체에 있어서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모자하지 않다는 사실은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바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대신하여 죽으셨을 때 모든 사람들을 구원할 목적으로 그렇게 하셨는가 혹은 선택한 자들만을 위하여 그리 하셨는가에 대하여 여러 의견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전자를 가리켜 보편 속죄론이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대신하여 죽으신 속죄의 대상이이 세상 모든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29:57) 그러나 그들은 주장하기를 비록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이처럼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속죄하셨지만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아니고 실제적으로는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만 속죄가 적용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대하여 말할 수 없는 모독을 안겨줍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시고 그리스도께서 직접 그들을 위하여 속죄를 이루신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을 구원하실 수 없었다는 논리가 성립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구원하고자 하는 자를 실제로 구원하실 수 없었다는 진술은 교리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속죄하신 사람들이 실제로 구원받지 못한다면 그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그들은 이러한 잘못된 교리를 주장할 때 그 근거로 여러 성경 구절을 제시합니다.
(30:49) 그중 대표적인 것이 요한복음 3장 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나이 구절은 세계를 구성하는 개계인 전부를 가르키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에 대응하는 세계의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음을 가르키는 것입니다.이는 요한복음 자체의 조술 목적이 이방 세계의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려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분명해집니다. 그들은 또한 성경의 종종 긴장하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다는 구절을 근거로 합니다. 아유 죄송합니다.
(31:42) 죽으셨다는 구절을 근거로 이러한 주장을 제기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모두 군 모든이 언제나 수학적인 모두를 가르키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서 모든 모두의 사용은 세무어적 용법의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특히이 용법에서 보면 모두는 수학적인 모드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말하고자 하는 사상을 강조하는데 사용되기도 합니다. 성경에서도 어떤 때는 특정 분류 전체를 가르키기도 하고 어떤 때는 모든 종류의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을 지시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또한 복음을 통하여 구원이 보편적으로 제공되는 것은 곧 그리스도의 속죄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임을 입증한다고 주장합니다.
(32:29) 그러나 복음을 통하여 모든 사람을 구원로 부르는 것이 곧 그리스도께서 그를 그리스도께서 그들 모두를 위해 죽으셨다는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복음을 통한 구원총이 고적인 것은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하신 사람들을 모으신 하나님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모든 사람을 위한 보편적인 것이라는 의미는 그리스도께서 아담의 후손들 중 하나님이 택하신 자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이 됩니다. 그러면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주심으로 가져오려고 했던 속가 일부로 돌아간 것을 의미합니다. 경건하고 식한 총도 존 오의 지적과 같이 그러한 생각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가치를 선상시킬뿐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 능력 그리고 완전하심에 대한 신성보독적인 생각이 아닐 수
(33:33) 없습니다. 오, 속죄의 본질. 이제 우리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그리스도의 속죄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로 옮겨지게 됩니다. >> 그런데 안타깝게도 >> 그 >> 서님 >> 예. 예. >> 소리가 안 들리네요. >> 아, 소리가 안 들려요. >> 예. 제 소리 들리세요? >> 네. 네. >> 아, 예. 소리 >> 소리 소리 안 들리세요? >> 이제 들리네요, 목사님. 그러니까 >> 아, 그래요? 어, 다시 읽을까요? 네. 5 속죄의 본질. 이제 우리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그리스도의 속죄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로 옮겨지게 됩니다. 들리시나요? 예.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속죄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명쾌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너무나 소수입니다.
(34:29)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서 속죄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 하나씩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속죄는 번질적으로네 가지 희생, 유화, 화목, 구속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A 희생 첫째로 희생입니다. 영어 표현을 살펴보면 희생은 제사라는 말로 쓰입니다. 왜냐하면 제사 자체가 희생적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희생은 무엇입니까? 자기가 죄를 지어서 거기에 대한 정당한 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잘못했는데 그것을 뒤집어쓰고 자기가 대신 고통을 당하거나 죄의 대가를 지불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제사가 이와 유사한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 제사장 앞에 재물을 가지고 나아가서 그 위에 손을 얹고 기도하면 그의 죄가 짐승에게 옮겨가는 것입니다.
(35:25) 그 자리에서 헌제자의 죄를 증가받은 짐승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피를 낭자하게 흘리면서 죽는 것입니다. 짐승이 그 사람의 죄를 대신지고 죽음으로 받아야 할 형벌에서 헌제자를 구해주는 것. 이것이 희생의 의미입니다. 그 희생의 효과로 잠시 동안이라도 그 사람이 지은 죄의 값을 재물이 된 짐승이 대신 치른 것으로 간주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속상이라고 부릅니다. 히브리서는 그리스도의 속죄에 대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장례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36:18) 제사제도의 핵심은 죄의 증가에 있는데 죄를 지은 사람이 따로 있고 형벌받는 물이 따로 있는 것입니다. 그물에 대해 하나님께서 진노하시고 하나님의 진노를 받고 죄를 모르는 짐승이 죽게 되는데 그 희생의 혜택은 죄를 지은 인간이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제사를 통해 죄인의 죄를 속상하는데 히브리서의 기자는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합니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기억하십시오. 짐승의 피도 일시적으로 남아 우리의 죄를 속해서 우리로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그분의 은혜를 입게 만들 수 있었습니다.
(37:09) 그런데 하물며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예수님의 희생이 어찌 우리를 영원히 죄에서 구속하실 수 없겠습니까? 절 유합니다.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의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죄를 덮운다는 의미이고 또 하나는 마음을 풀어 준다는 의미입니다. 죄를 덮어 준다는 것은 최소한 세 가지 사실을 의미합니다. 첫째는 그품이 죄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그품의 결과는 정결함과 용서라는 사실입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그 덮음과 그 결과가 이루어지는 장소가 하나님 앞이라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등장하는 희생 제사는 바로 이러한 유아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죄를 덮는다는 것은 죄를 없앤다는 말과는 다릅니다.
(38:01) 그런다면 그렇다면 죄를 덮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죄가 있으면 반드시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있어서 죄를 가지고는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우리는 우리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복수의 표현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범죄하는 죄인이 싫어서 복수하는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한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의 반영입니다. 죄는 미워하시지만 죄인을 향해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일관될 것입니다. 죄를 덮는다고 할 때 당연히 덮음의 대상은 죄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죄를 덮을 때 나타나는 효과는 정결해지는 것과 용서받는 것입니다.
(38:50) 그러나 그것은 그가 내용적으로 정결해진 것을 의미한 것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정결한 마음으로 받아 주시고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유화로 말미암아 삶의 마음은 풀어지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전에도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분명히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겼고 그것도 엄청난 부정이었으며 인간의 범인 땅 아래 세계를 완전히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전 우주를 다 망가뜨려 놓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 속에서 이것이 풀어지지 않는데 아들이 사람의 몸을 입고이 세상에 오셔서 죄의 형벌을 대신 받아 고난당하신 것을 보면서 아버지 마음은 미워지는 아픔을 한 인간에 대한 마음이 풀리는 것입니다.
(39:49) 이것이 유아이며 있었기 때문에 우리와 하나님과의 화목이 가능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화목. 셋째로 화목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화목을 이야기하기 전에 화목이 필요하게 된 불러한 관계에 대해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인간의 범죄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뜨려졌는데이 관계의 변화를 우리는 적의와 소원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저기가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죄의 정체는 하나님을 향한 적의 곧 적대감이며이 적의는 하나님을 향한 반감과 대적으로 나타납니다. 여러분은 반감을 가져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청소년 시절에 아버지가 한번 실어지기 시작하면 아버지가 하는 말은 무엇이든지 듣기 싫습니다.
(40:40) 우리가 반감을 가질 때 그것은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하게하기 때문에 그 반감은 우리의 지성, 정서, 의지 모두의 영향을 미칩니다. 범죄한 인간 안에는 바로 이러한 방감이 하나님을 향하여 존재합니다. 그래서 이것은 하나님과 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에 대한 방으로 나타납니다. 대적이라는 죄의 작용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에 있어서 하나님께 대적하려고 합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인간을 향하여 가지고 계신 선한 의지를 대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의 본성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적의를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을 창조하시고 천사보다 높은 지위를 허락하셔서이 땅에 온 마물을 다스리는 통치자가 되게 하신 하나님이 인간에게 무엇을 잘못하셨습니까?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을 그렇게 대하는 것은 매우 부당한 것입니다.
(41:38)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해 가지고 있는 저의는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에 대해 가지고 계신이 적의는 인간 자체에 대한 적대감이 아니라 인간이 가지고 있는 죄에 대한 적대감입니다. 그 죄와 죄인이 결탁되어 있을 때 하나님은 인간에 대하여 거리감을 가지십니다. 이것이 이론적으로는 구별이 되지만 실제적으로는 나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셔도 인간이 죄 가운데 사는 한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없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비유를 하나 들어봅시다. 데이트를 하러 나갔는데 양복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잘생긴 남자가 고속도로에서 차에 치어 진겨진 개의 사체를 들고 예인을 반긴다면 그녀는 그에게 달려가 뜨겁게 안길 수 있겠습니까? 그녀가 원하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혐스러운 짐승의 사체와 떨어지는 것입니다.
(42:36) 그둘이 떨어지기만 한다면 아무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애인에게 달려가서 뜨겁게 안기고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대적하는 사람은 설해서 그 마음을 바꿀 수도 있지만 적대감이라는 감정 자체는 살서 없애버리지 않는 안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 이러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고 또 하나님께서도 인간을 향해이 적대감을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아무리 의롭다고 불러 주셔도 여전히 서로에게 적대감이 있다면 이것은 진정한 의미의 화해가 아닙니다. >> 둘째로 적대감과 함께 소원함이 생겼습니다. 이것은 거리감입니다. 인간에서 거리가 문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43:27) 아담이 범죄하는 후 하나님께서 그를 찾으실 때 그는 하나님이 두려워 숨었습니다. 범죄하기 전에는 그렇게 사랑하던 하나님이 범죄하자 순식간에 두렵고 무서운 분이 부르러 여겨졌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향하여 거리감을 갖는 것은 자기 죄로 인한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인간에 대하여 자기 가지고 계신 거리감은 당신의 거룩한 성품 때문입니다. 인간은 인간을 너무 사랑하지만 당신의 거룩한 성품 때문에 죄인을 향해 거리감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부르시고 고난을 당해 한 편으로는 우리를 향해 거리감을 갖고 계신 하나님의 마음을 얼음만지고 만지시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를 얼음만지셔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44:24) 그런데 여기에 중요한 문제가 되게 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화목을 가져오셨다면이 화목이 누구에 대한 화목인가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정렬하게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키시어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적대감을 풀고 무한한 거래감을 좁혀서 아버지께로 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화목은 부아대입니다. 즉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에 있어서 감과 거리감을 예수님이십가의 죽으심으로 해소시키셨기 때문시켜 해소시켜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먼저 마음을 푸시고 적대감을 해소하시고 거리감을 느껴서 자신의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인간에게 오셨다는 것입니다.
(45:16) 그렇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나아가게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 때문에 인간을 향해 가지고 계시던 적대감을 예수님이 십자가의 피로 되신 고난을 당하셔서 해소시키시고 거리감도 풀어 주심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목을 가져오게 된 것이니라. D 구속. 넷째로 구속입니다. 구속이라는 표현은 노예 제도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그림 같은 언어입니다. 비율을 들어봅시다. 다섯 명 정도의 대가족이 함께 노예 시장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소망은 한 곳으로 함께 팔려가는 것입니다. 가족이 모두 쇠줄에 묶여 있는데 이미 아빠 노인는 수없이 채찍에 맞아서 온몸에 피멍이 들었고 아이들은 울고 있습니다.
(46:14) 엄마 노예는 눈물을 흘리면서 제발 함께 살게만 해 달라고 예원을 합니다. 그러나 노예상은 한꺼번에 안 팔리면네 사람을 나누어서 팔 용이도 있습니다. 그때 부유하고 깊음이 있어 보이는 한 사람이 마찰를 타고 지나가다가 그 장면을 보고는 그 가족 전부의 몸값을 지불합니다. 그 가족은 부유하고 마음씨도 좋은 주인에게 팔려서 함께 살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할 것입니다. 그렇게 주인의 집에 도착했는데 의외의 일이 벌어집니다. 그 노 가족 모두를 불러서 깨끗하게 씻기고 옷을 입히더니 자신의 권난으로 그들을 자유인으로 해방시켜 준다는 문서를 써서 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우리는 구속이라고 부르며 그때 지불했던 돈을 속전이라고 합니다.
(47:01) 성경은 예수님을 속전이라고 부릅니다. 마귀에게 팔린 를님이 십에 죽으심의 대를음으로 지불하시고를 사신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가리켜 거져얻은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우리 입장에서 본 것이고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막대한 대가를 지불하고 우리를 사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구속의 세 가지 성격을 발견하게 됩니다. 첫 번째는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시려고 했던 사역이 바로 이런 성량이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우리를 성냥하는 대가로 예수님이 생명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냥 죽으신 것이 아니라 비참한 노예처럼 죄에 여사는 우리를 거기에서 구하시려는 철저한 계획을 가지고 자기의 몸을 속전으로 지불하셨던 것입니다.
(47:55) 마지막 세 번째는 구속이 대리적인 것이라는 점입니다. 우리가 직접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대신하신 것이기 때문에 대리적인 성격을 갖습니다. 우리 인간은음 죄는 지었지만 하나님 앞에 그 죄에 대한 대가를 지불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대신 그 죄값을 지불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 구속은 과연 무엇으로부터의 구속일까요? 이것은 율법과 죄로부터의 구속입니다. 첫째로 율법으로부터의 구성입니다. 그것은 다시 세부로 이루어지는데 먼저 율법의 저주로부터의 구속입니다. 에디아서 3장 13절. 오늘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우리를 율법의 저주로부터 해방시키신 것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48:49)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범죄했기 때문에 인간에게 임하게 된 죄의 싹 예수님이 기부하셨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율법이 우리를 저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율법의 저주로부터 구속하신 것입니다. 다음으로 이것은 의식적 율법으로 더의 구속입니다.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령하고 우리로 아들의 명부를 얻게 하려 하십니다. 예수님의 구속을 통하여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제사를 지내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모든 의식으로부터 완전한 자유함을 얻게 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것은 행위의 율법부터의 구석입니다. 이것은 곧 구원을 받은 조건으로서 율법의 의무를 준행하면서 살아야 할 책임이 사라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49:39)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적용된 구원은 우리의 행위나 율법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은혜로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바 사도 바울은 로마서 5장 9절에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이라고 말합니다. 둘째로 죄로부터의 구석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로부터 구속하셨다는 것인데 그것은 다시 두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먼저 신분의 상태에 있어서 이전에 우리는 죄인이었는데 구속의 효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죄인의 신분이었고 죄의 집배 아래에서 죄를 따라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이런 우리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우리를 의롭다 칭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 것입니다.
(50:33) 다음으로 영혼의 효과에 있어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은 마음이 잠시 든다 할지라도 그렇게 살아갈 능력이 전혀 없었습니다. 내면의 세계가 죄의 원리에 철저히 얽매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내면의 상태는 마치 능히 달려갈 수 있는 사람을 자리와 팔을 발출로 묶어두고 커다란 추를 매달아서 감옥에 가두어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 중생을 통해 우리를 묻고 있다는 사실을 풀어 주시고 이전과 달리 생명과 성령의 법의 지배를 받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므 이제 우리는 순종하며 은혜의 원리를 따라서 믿음으로 살아가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뜻을 따라 살 수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51:30)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피 흘리고 죽으심으로 우리 안에 이렇듯 놀라운 일들을 이루어 놓으신 것입니다. >> 6. 속죄의 완전성. 이렇게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속죄는 완전한 것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선택하신 사람들을 위하여 이루신 그리스도의 속죄의 완전성의 교리는 로마 가톨릭 교회에 대항하여 주정된 것입니다. 종교 개혁자들이이 교리를 주장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신자가 구원받은 후에 짓게 되는 죄에 대한 형벌의 문제를 다에 있어서 가톨릭 교회의 부당한 견해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세례받기 전에 지은 모든 죄는 세례와 함께 용서되지만 그 후에 지은 죄에 대한 일시적인 형벌은이 세상이나 연혹에서 받아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52:20) 종교 개혁자들도 신자가 구원받은 후에 짓는 죄에 대하여 징계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 성경적인 가르침이라고 믿었지만 세 가지 점에서 가톨릭 교회의 입장과는 달랐습니다. 첫째로 신자의 죄로 말미암은 징계에 대한 해석입니다. 가톨릭 교회는 이것에 이것은 죄에 대한 형벌적 책임이라고 보았고 개혁자들은 이것을 성화의 맥락에서 이해하였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자녀들의 범죄를 징계하시는 것은 그들의 죄에 대한 형벌적 보복이라기보다는 당신의 거룩한 성품을 담게 하시는 성화의 한 방편이라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사상은 다음 성경 구절에서도 명백합니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53:13)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고둔을 만들어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둘째로 신자의 죄에 대한 징계는 반드시이 세상에서 모두 이루어지고 끝나며 죽은 후에 또다시 지상의 죄에 대하여 형벌을 받음으로써 죄값을 청산하게 되는 과정은 없다고 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신자가 지상에서 지은 죄값을 치르게 되는 연 같은 곳은 없다고 본 것입니다. 셋째로 비록 신자가 구원받은 후에 죄를 짓는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속죄는이 모든 죄를 대신하시는 포괄적인 속죄이므로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미사에 의하여 다시 그리스도께서 희생하시는 것 같은 일은 없다고 믿는 것입니다.
(54:07) 따라서 그리스도의 속죄의 완전성을 말할 때 우리는 다음 두 가지 사실을 언급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로 그리스도의 성결은 역사적이고 객관적인 성격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하여 속죄를 이루신 그리스도의 인성과 인격은 영원하며 초장한 적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 되게 인격과 이성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창조하신 것도 그분의 인정에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영원하신 분이없고 용접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태초의 말씀이 계시니라.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54:54) 그가 대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 하나도 그가 없이 된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택한 자 그들을 위한 속죄를 이루신 것은 역사 속에서 이루어진 사건이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언제나 살아계셔서 속죄의 공무와 능력을 가지고 그것을 유효하게 행사하심에 있어서 영원한 분이시지만 석제가 이루어진 것은 역사 안에서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던 것이 역사 속에서 이루어진 사건이었던 것처럼 구원받은 백성들을 위한도 역사 안에서 이루어진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이 역사 속에서 이루어진 속죄 사실을 담고같지 말합니다.
(55:41) 내가 참에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성령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둘째로 속죄는 그리스도에 의하여 충족하게 정결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이 영원하신 것처럼 대사장으로서의 죽음도 또한 영원합니다. 그리고 그걸 영원히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가 되신데 하나 하늘나라에서도 영원히 계속되는 제사장 지에 기초합니다. 그러나이 세상에서 선택한 백성들을 위하여 지불하신 중보자랄의 희생은 그들의 죄를 속하기에 충분한 것이었으며이를 위한 자기 보원의 결과인 속죄도 완전히 종결된 것입니다.이 교육자들이이 성경적인 교리를 강력히 붙들었던 것은 로마의 미사 때문이었습니다.
(56:37) 그것은 사제에 의하여 베풀어지는 미사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실제 희생이 반복된다는 무독적인 주장에 대항하여 성경 교리를 바로 세워야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중보자서 대제사장을 수행하는 것은 영원히 반복되는 것이지만 그 우리들의 죄에서 구원하신는 역사적으로 단번에 충족하게 종결되었음을 기억하여 >> 아들을 보내신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새 언약 아래로 부르셔서 율법이 아니라 믿음을 통하여 의롭다함을 얻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우리의 공로는 아무것도 없는데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감과 거리감을 드시고 우리와 같이 더러운 인간에게 다가오셨습니다.
(57:34)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 그리스도를 보내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하심으로 우리와 같이 쓸모없는 죄인들에게 다가오셔서 뜨겁게 끌어시고 용서의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끊임없이 공급해 주시는 하늘자원을 힘입어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주님이 길을 열어주셨습니다.이 이 놀라운 사랑을 우리가 어떻게 필설로 다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이렇게 치밀한 계획을 가지고 우리 자신은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죄의 사슬로부터 우리를 건져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구원의 객관적인 근거요 사실입니다.
(58:21) 그리고이 구원은 바로 우리의 믿음을 통해 우리의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아 우리가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은 욕망에 눈이 어두워 쉽게 범죄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탁월하고 무한한 지혜로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가장 미련한 방법 같았으나 하나님에게는 놀라운 지혜였으며 또 우리를 향한 사랑이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기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으시면서까지 우리 인간들을 구원하려고 하셨을까요? 우리가 그렇게 가치 있는 존재들입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그렇게 소중한 존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안에 있는 가치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59:12) 그러므로 구원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 죄는 맨 처음 창조의 목적을 떠나 행했던 범죄보다 더 큰 것입니다. 왜냐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신 유일한 구원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믿음으로써 하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모든 속죄는 우리를 위한 것이 되고 우리는 그 속죄로 말미암아 구속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잃어버렸던 창조의 원래 목적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 아멘. 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