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부르심과 중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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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부르심과 중생 그리스도에 의하여 성취된 구성은 인간에게 적용됨으로써 실현되는데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구속 사역을 인간에게 적용하는 순서를 두고 두 가지 입장으로 나누어집니다. 한 가지 입장은 구석의 적용의 출발점을 인간에게 두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구속을 적용함에 있어서 구원의 이르는 믿음을 먼저 다름으로써 인간의 반응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구속이 인간에게 적용된다고 보았습니다. 또 다른 입장은 인간이 구원에 이르는 신앙을 갖기 전에 하나님께서 성령님의 역사를 통하여 선도적으로 일하심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을 적용하게 하신다는 입장입니다.
(00:55) 이것은 성경적 변해입니다. 이렇게함으로써 우리가 우리의 구원을 말함에 있어서 일체 하나님을 높이며 우리는 다만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입어 용서받은 죄인들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게 됩니다. 1. 부르심, 구원과 관련하여 부르심을 말할 때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구원을 받아들이도록 죄인들을 초청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위로 적 정의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이 은혜로운 초청의 주체는 삼일체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그럴 때는이 은혜로운 부르심의 주체가 성부로 묘사되기도 하고 성자로 나타나기도 하며 또 성령으로 제시되기도 합니다. 인간의 구원을 위한이 부르심은 통상적으로 외적인 부르심과 외적 부르심으로 나누어 설명됩니다.
(01:49) 네. 어 외적인 부르심 첫째로 외적인 부르심입니다. 외적인 부르심은 구원받지 못한 죄인들에게 그리스도의 구원을 선포하고 제시하여 사와 영생을 얻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믿도록 설득하는 진실한 권고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죄인들을 믿도록 초청하는이 외적인 부르심은 인간을 통하여 특히 신자들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신자들이 불신자들을 믿음으로 초청하는 행위가 구원을 위한 외적인 부르심이 되기 위해서는 다음 세 가지가 반드시 제시되어야 합니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죄인들을 구속하시는 방법이 복음적인 사실로 제시되어야 하고 또한 사람들에게 죄에 대한 회개를 촉구하고 그리스도를 믿도록 촉구하는 초이 담겨야 하며 마지막으로 그렇게 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이 약속되어 있다는 사실이 제시되어야 합니다.
(02:51) 따라서 우리 교회에 함께 갑시다. 믿음생활을 시작합시다. 권유는 외적인 부르심으로 충분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믿는 바를 정확하게 전하여 우리의 전도가 충분한 외적인 부르심이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B. 내적 부르심. 둘째로 내적 부르심입니다. 내적 부르심은 효력이 있는 부르심으로서이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반드시 구원을 얻게 된다는 점에서 유효한 부르심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상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외적인 부르심과 내적인 부르심으로 나누기는 하지만 사실이 두 가지 부르심은 하나입니다. 전도의 말씀이 매적 부르심을 통하여 전해지고 성령의 내적 부르심으로 그 말씀이 죄인의 마음에 역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03:47) 이 내적 부르심은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는이 부르심이 도덕적인 설득의 방법으로 죄인의 마음에 역사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창조의 원인임을 밝히고 밝히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천지가 창조된 경우가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그러나 구원을 위한 부르심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창조적인 방법으로 죄인들의 의식 세계를 초월해서 역사하지 않으시고 내적 부르심을 통하여 자신들이 죄인이란 사실을 보여 주시고 그를 통하여 구원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시는 것입니다. 둘째는이 내적 부르심은 인간의 의식 세계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죄인들의 마음에 그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게 된 것 자체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의 결과이지만 그 부르심의 음성은 무식 중에 영혼 안에 이루어지는 부르심이 아닙니다.
(04:48) 오히려 그것은 성령을 위하여 인간의 이해와 총명을 향하여 전해지며 그래서 죄인들의 마음을 설복하여 의지적으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는 인격적인 감안을 동반합니다. 셋째는이 내적 부르심은 반드시 죄인을 구원에 이르도록 인도한다는 것입니다.이 이 내적 부르심의 유효한 작용에 의하여 죄인들은 자기를 자기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며 신앙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일을 통하여 구원의 주인이신 그리스도와 교통하게 되며 하늘 나라를 위협으로 받게 할뿐 아니라이 땅에 사는 동안에서 사는 동안에도 영생을 힘입어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도록 만들어 주며 영광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05:39) 네.이 이 중생 인간을 거듭나게 하시는 중생은 새생명의 원리를 인간 안에 심으시고 영혼의 주도적인 성향을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영생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리니고데모의 반응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06:31)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내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A 중생의 필요성.이 이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지만 영적으로 볼 때 그들은 오직 두 부류로 나니다. 영적으로 거듭난 사람과 거듭나지 못한 사람입니다. 영원히 구원하시는 성으로 말미암아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마음에 부패함으로 인해 자신 안에 있는 어두운 성을 드러냅니다. 이런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의 생명을 소홀이 여깁니다. 본성적으로 사람의 힘이나 도덕적인 능력은 하나님의 일들에 대해 의심을 합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선생이던 니고데모가 중생을 이해하지 못한 것도 바로이 때문이었습니다.
(07:19)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의 이성을 가지고서는 하나님의 일들을 수행할 수도 없고 아들일 수도 없습니다. 중생하지 못한 사람의 마음 모든 사람은 거듭나지 못한 상태에서 출생하게 되고 영적으로 죽어 있는 상태에서 태어납니다. 겉으로는 살아 있으나 속사람은 죽어 있어 하나님께 대한 적대감과 신령한 일과 지식에 대한 방과 무직 가운데 태어납니다. 그래서 성경은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이 혼송적으로 부패하였다고 서론하는데 이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사람의 생각은 부패하여져서 마음이 캄캄해졌고 소용이 되었으며 그 결과 인간은 허탄한 일에 매진하게 되어 매진하게 되고 무지와 어리석음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08:16) 째로 사람의 의지와 정서는 부패해졌습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선한 일을 위해서는 의지가 나약해지고 무력해졌으며 이기적인 자기 사랑에 있어서는 쓸데없이 고집이 세어져서 왕고하게 되었습니다. 셋째로 그의 심은 완전히 죽은 상태가 되어버렸습니다.이 이 중생하지 못한 사람의 영혼 겁나지 못한 사람은 본성적으로 하나님과 영적인 것에 대하여 어둡고 캄캄한 상태에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모르고 >> 아 죄송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모르고 자신이 온 의지의 중심인 양 자기의 즐거움만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렇게 창조의 목적을 입탈한 채로 존재하고 사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09:14) 어둠나지 못한 사람들은 이러한 영혼의 어둠의 상태에서 갇혀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인간은 영혼의 어둠으로 말미암아 본성적으로 죄에 빠져 있고 정서도 커다한 무질서 아래에 놓이게 되어 심령은 저속한 정령으로 가득차고 다락 이전에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셨던 순수하고 깨끗한 본성의 빛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에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사는 여기서 영혼의 능력에 대하여 새 단어를 사용하면서 설명하고 있는데 그것은 생각과 총명과 마음입니다.
(10:09) 이 세 가지 모두 영혼의 어둠의 영향 아래 있습니다. A 생각의 어둠움은 생각의 화탄함을 가져왔습니다. 일반적으로 생각은 영혼의 기능을 인도합니다. 헛 생각은 영혼의 안일과 만족관을 추구하고 늘 허탄한 일을 도모합니다. 허탄한 생각은 변화가 많고 지속성이 없고 어 잠시만요 목사님. 네. >> 네. >> 사님 >> 안녕하세요. >> 안녕하세요. >> 아, 네. 우리 174쪽 A번 생각 읽어 가고 있습니다. >> 네. >> 네. 영 예. 영혼의 어둠은 생각의 허탄함을 가져왔습니다. 일반적으로 생각은 영혼의 기능을 인도합니다. 어떤 생각은 영혼의 안일과 만족만을
(11:13) 추구하고 늘 허한 일을 도모합니다. 허탄한 생각은 변화가 많고 지속성이 없고 안정성이 없으므로 혼란하고 무질서한 지옥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에 그들의 마음은 옳게 잘 정돈되어 있었으며 질서와 조화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는 행동에도 질서가 있었고 정상적이었습니다. 생각은 하나님의 의도대로 정당한 목적을 설정해놓고 똑바로 행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시고 자신들은 어떠한 존재인지에 대하여 정확한 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하고 생각이 허탄한 것에 굴복하자 사람들의 존재와 삶은 혼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12:03)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인간의 어떠한 부분도 거룩하신 창조주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생각은 선천적으로 악하였고 존재의 목적과 상관없는 허탄한 것들을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김학 목사님 해 주시고 서기 목사님 해 주시겠습니다. >> 네. 네. 비총명 인간에게 있어서 총명이란 영혼의 영혼에 지도하는 능력 식별하는 능력 판단하는 능력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부지런히 올바르게 사용함으로써 발전하게 됩니다. 총명은 생각으로 하여금 받아들 것과 거부할 것을 잘 선택하도록 도와줍니다. 그런데이 총명도 인간의 마음처럼 부패하기도 하고 새롭게 되기도 합니다.
(12:54) 총명은 성령이 거룩하게 하신 작용 작용으로 새롭게 되고 죄로 인하여 부패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죄와 가까워질수록 총명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입니다. 오직 영원히 성령으로 말미암아 복음의 빛을 받아받음으로만이 인간은 참된 총명을 회복하게 됩니다. 복음의 빛이 없이는 또한 회복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영적 어두움은 오직 복음과 성령의 역사를 통해만 불뭐 물러갈 물러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 시 마음은 실제로 사람이 움직이고 행동하는 본질이며 본체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마음은 의지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존 오이 지적한 바와 같이 빛의 빛은 생각에 의해 받아들여지고라는 것을 적용되게 나타내고 마음은 그 빛을 사용합니다.
(13:55) 사도 바울도 말합니다.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이에서 떠나 있도다. 이것은 거듭나지 못한 삶들이 단지 빛 빛에 대하여 무지한 것이 아니라 왕광하여 반항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아 이것이 바로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의 마음의 상태입니다. 이 어 중생의 본질 인간은 어 소지로 본다면 중생은 재창조한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 창조하신 것과 인간을 거듭나게 곧 중생하게 하시는 것 사이에는 뛰어난 일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세상을 창조하실 때 모든 것을 완전히 지으셨습니다.
(14:48) 인간을 비롯하여 천지 만물이 창조되을 때 모든 것은 하나님이 자신이 계획하신 완벽한 조화와 아름다움 그리고 균정과 탁월함을 따른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모두 하나님의 존재의 영광스러움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모든 만물은 그 존재의 적합한 실체와 자격을 갖게 되었으며 그 존재의 존재 본질의 일체하는 행복과 안식이 가능했습니다. 그 만물들은 모두 서로 연결되었으며 각각의 순전은 서로를 의존하면서 일체하게 하나의 공적인 목적을 향하고 있었으니 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었습니다. 그들의 존재의 실체는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의 영의 아래 있었고 그들의 상호의 관련성과 그들이 각각 존재하는 목적들은 하나님은 무한한 지혜 아래 있었습니다.
(15:48) 하나님이 이렇게 해서 당신을 창조하신 세계를 통하여 무한한 지혜와 능력을 드러냄으로써 온 세계에 당신의 신생의 영광이 충만한 것으로 가득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생명없는 빛물 안에 계획된 그의 영광을 당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신 우리에게도 나누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본성의 목적이며이는 타락한을 통하여 상실되었으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구속으로 다시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이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진실로 진실로 내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중생은 물로 태어남과 성령으로 태어남으로 이루어졌는데이는 죄로부터 정결과 성령으로 말미암은 혁신으로 혁신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16:52) 이 두 단은 중생의 본질을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생이라는 말은 항상 같은 의미로 사용되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 칼빈은 중생을 아주 넓은 의미로 사용하여 영혼의 중생은 물론 회심과 성화를 포함하는 인간 갱신의 과정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칼빈이 사용한 의미의 중생을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중생과 구별하여 신생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볼 때 중생은 이어지는 회심과 생활을 비롯한 인간 갱신의 천 과정에 기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중생의 문제를 다룰 때 다음과 같은 특징들을 염두해 두어야 합니다.
(17:43) 첫째로 중생은 근본적인 변화입니다. 중생을 통하여 인간 속에 새로운 영적 생명의 원리가 심겨짐으로써 영혼의 지배적인 성향이 근본적으로 변화됩니다. 그리고 영혼의 변화는 그의 지성과 정서 의지로 이루어지는 전 인격의 영향을 주어 변화된 삶을 살게 됩니다.이는 하나님께서 창조시의 만물을 통하여 당신 자신의 신성을 드러내신 것처럼 인간은 하나님에 의하여 거듭난 새 본성을 통하여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새 삶을 살게 됩니다. 둘째로 중생은 즉각적인 변화입니다. 중생은 영혼 안에 점진적으로 준비되고 발전되는 개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거듭난 사람과 거듭나지 않은 사람 사이에는 중간 단계가 없습니다.
(18:32)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기 전에 예비적으로 그 마음과 영혼의 역사시기도 하지만 그것이 곧 거듭나지 못한 사람의 영혼의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마치 삶과 죽음 사이에 어떠한 중간 단계도 없는 것처럼 거듭나지 못한 상태와 거듭난 상태 사이에는 중간 단계가 없습니다. 셋째로 중생은 잠재 의식 세계에서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중생은 인간의 지각을 초월하는 은밀한 하나님의 사역으로서 거듭나는 과정을 감지할 수 없고 다만 거듭난 결과가 의식생활속에 반으로써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거듭난 날짜를 알고 있지 않으면 거듭난 사실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그릇된 견해입니다.
(19:24) 다만 영혼의 중생과 회심이 시기적으로 거의 일치하는 경우 회심은 의식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인식할 수 있는 변화이므로 회심하는 순간을 기억하게 됩니다. 그러나 회심의 순간을 기억하는 것이 곧 인간의 죽은 영혼에 대한 성령의 은밀한 사역인 중생의 역사를 감지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 성령과 중생의 특징 특성 저절로 거듭나게 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도 중생은 곧 성령으로 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이는 성경의 교리적 진술과 일치합니다.이는 그는 형통으로나 혈통으로나 육적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미고데모아의 대화 속에서 예수님은 중생은 중생을 육신의 출생과 비교하여 말씀하셨습니다.
(20:18) 그러나이 두 가지는 태어난다는 점에서 유사하지만 중생은 영적인 영향의 문제입니다. 중생을 인간 전체에 대한 재창조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바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리스도 안에 거듭난 사람을 새로운 피조물이라 부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인들을 구원하시는 >> 제 둘게요.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동기는 하나님 아버지의 자비와 말씀에 있습니다. 이러는 하나님의 자비 자비와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되어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대신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중보자가 되신 것입니다.
(21:09) 죄와 형벌 아래 있는 인간들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갈 수 없고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는 본부를 따라 살 수 없는 인간들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죄인을 여기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우리를 위하여 이루신 중보 사역을 연결시켜 우리에게 적용시키는 유효하고 직접적인 원인은 오직 성령이십니다.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거듭나게 되고 이로써 우리의 본성은 회복되고 우리의 죄를 깨끗이 씻어 주셔서 정결하게 하심으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치 아니하고 오직 그의 국휼하심을 쫓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둘째로 중생에 있어서 성령의 역사는 인간의 본성에 적합하게 이루어집니다.
(22:10) 제와 허물로 죽은 인간의 내적 상태와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님은 본질에 있어서 이질적으로 생각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떻게 성령님의 거듭나게 하시는 역사가 인간의 본성과 조화를 잃을 수 있는지를 궁금해야 합니다. 귀신이 들려도 사람이 다중 인격적 증상이 나타나고 두 가지의 이질적인 것이 한 인격 안에 존재한다는 것이 느껴지는데 성령께서 허물로 죽었던 인간에게 역사하실 때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 한 인격 안에 존재하는 혼란을 혼란은 없을까요? 이에대 답은 이러합니다. 죄인을 거듭나게 하심에 있어서 성령님의 작용은 인간의 본성 곧 그 마음과 의지와 성정에 적합하게 이루어집니다.
(23:03) 거듭나도록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자격은 인간의 마음을 어떤 열정적이고 감명깊은 인상으로 사로잡거나 성경기록 시대의 기록자들에게 예언적 영감을 주실 때처럼 우리의 몸과 마음을 단순히 수동적인 도구로 삼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영혼에 대한 직접적인 설득을 통하여 인간들 자신의 본성에 대해하거나 배치하지 않으시고 자연스럽게 그들의 마음에 역사하십니다. 성령님의 권능은 인간의 안에 있는 의지에 대하여 완력적인 방법으로 대치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내적으로 비밀스럽게 작용하여 인간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향해 돌아서는 의지를 창조해 내집니다. 즉 인간을 거듭나게 하심에 있어서 성령님은 인간이 의지를 가지고 스스로 자유로이 행동하도록 영혼에 대하여 설득하심으로써 인간의 의지를 움직이셔서 당신의 뜻에 수긍하게 하십니다.
(24:07) >> 성령님께서 주된 인간의 영혼 그 자체보다 어 당신이 창조하신 인간들 안에 있는 영혼의 올리들에 대해 더욱 친숙하십니다. 성령님은 한 때 사람 안에 충만히 거하신 적이 있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비록 인간이 타락하여 죄와 허물로 죽은 자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님에게 있어 인간의 영혼의 원리와 기능은 매우 익숙한 것입니다. 서 성령님께서는 인간을 거듭나게 하심에 있어서 그 원리들을 그대로 보존하시면서 우리의 의지의 자유를 사용하여 사용케 하시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회심과 중생을 효과적으로 이루어내시는 것입니다. 셋째, 중생의 정도로 차이가 있을 수 없습니다.
(25:00) 중생이는 현재 과거 혹은 미래를 불문하고 허물과 죄로 죽었 죄로 말미암아 죽었던 영혼들이 성령의 역사에 의해 다시 태어난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중생의 역사는 외적으로 볼 때 사람마다 매우 다양하게 적용되어 나타납니다. 아주 어린 아이의 경우 말씀을 선포 없이 중생이 이루어지기도 하고 바울의 경우와 같은 강력한 의심을 통반한 가운데 중생을 경험하는 경우도 있고 말씀을 전파하고 그 말씀을들을 때 거듭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든 중생은 그 사람을 거룩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의지를 반영합니다. 어지 못한 사람이 살아나는 환경이나 교육의 정도 그리고 사악함에 있어서 어 서로가 차이가 있지만 그 본성적인 상태에 있어서는 모두 동일한 것처럼 거듭난 삶들도 그러합니다.
(26:01) 거듭난 사람은 그의 성화의 정도에 따라서 거룩함의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이 중생의 정도 차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죄인은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의 유한 역사는 은혜의 능력을 나타 일어납니다. 중생을 통하여 신자 내면을 성령의 은혜로 다스리시고 능력으로 죄를 이기게 하시고 그 안에서 성령과 교통에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변화된 내면에서 비록된 삶을 통하여 그들은 다스리는 성령님의 은혜를 은혜를 드러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신자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은혜의 역사는 창조의 목적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넷째로 중생은 세례에 의하여 효력이 발생되는 것이 아닙니다.
(26:54) 노마 가톨릭 교회나 누토파중 다수의 교회가 세례 중생의 교리를 따르고 있습니다. 이들은 중생이란 영혼에 다시 태어남이 아니라 증의와 사절까지 포함한 것으로서 세례의 효력이 발생한다고 봅니다. 그러나 중생이는 세례라는 의식에 참여함으로 인해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세례를 받음으로써 거듭나는 것은 죄의 용서를 받고 거듭나는 것이 세례를 받음으로 가능해지고 이로서 죄인의 창조적으로 거듭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의미의 중생은 죄인이 하나님으로 돌아서는 것이며 인간의 본성이 성령의 사역에 의해 하나님을 향하여 열려진 상태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다섯째로 중생과 삶의 개혁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27:51) 거듭났다고 해서 즉시 도덕적인 삶의 개혁이 뒤따르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은 거듭나기만 하면 그 사람의 삶의 모든 부분에서 광범위한 개혁이 일어난다고 생각합니다. 중생이란 사람 안에 새 생명의 원리를 심으시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따라서 중생은 인간의 천 본성을 새롭게 하시는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합리주의와 도덕주의의 영향으로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 신앙의 신령한 특성들을이 세상의 도덕으로 바꾸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개개인이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오늘날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경향을 가진 많은 사람들은 인간의 전 본성을 새롭게 하시는 중생이 없이도 얼마든지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선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신앙을 인도주의적인 관점에서 본 것입니다.
(28:50) 중생이란 인간의 영적인 본성이 성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혁신되는 것입니다. 중생을 통하여 다시 태어난 새로운 피조물은 단지 새로운동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신력한 역사로 말미암아 새로운 기질 새로운 능력 새로운 경향성과 영적인 기능을 갖게 된 사람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신의 성품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거듭난 사람은 바로 이렇게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게 된 자를 가르키는 것입니다. 여섯째로 중생은 열광적인 체험을 동반하는 것이 아닙니다. 중생을 어 죄인을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의 사역은 일광적인 체험이나 황원한 경험 하나님의 음성을 듣거나 신한 경험을 수하는 것이 아닙니다.
(29:44) 이러한 사실은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도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내가 내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내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 다 이러하니라 이에 대하여 존 오에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성령님은 사람들의 정신의 능력을 사용하신다. 악한 영이 사람들의 뭔가 실름하는 것과 같이 성령은 성경을 믿는 사람들의 이성을 사용하셔서 합리적으로 역사하신다. 성령은 우리의 영혼의 능력 위에 강압적인 완력을 가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본성에 알맞게 우리들이 능력 안에서 능력에 따라 역사하신다. 거듭나기를 사모하라.
(30:30) 인간은 겁나지 않고는 하나님의 하나님 자신을 하나님 자신을이 세상에 창조하신 목적을 따라 살 수 없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누구신줄를 알아야 하는데 거듭나지 않는 인간의 본성은 인간의 본성의 이해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이해와 의지들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에 의하여 지배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일은 첫 번째 출생 곧 자연적이고 육체적인 출생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영원히 죽은 채로 태어난 인간은 부분적이고 도덕적인 수선이 아니라 전적이고 영적인 재창조를 필요로 합니다. 이것이 바로 중생입니다.
(31:20) 육체의 삶이 자연적인 원리를 따른 것만으로는 사람이 창조의 원래 목적을 따라 존재할 수 없습니다. 중생은 자연적인 삶의 원리와 함께 초자적인 원리가 심겨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또 자신의 행복을 위하여 인간은 중생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비록 중생이 하나님 홀로 영어 죽은 영혼을 살리시는 성령의 역사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성경은 인간이 중생 여구를 생명처럼 생각하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보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니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32:15) 이스라엘 족속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는 악한 뒤에서 떠나 어찌 죽고자 아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 요나단 에어지는 중생의 사역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단독적인 사역임을 강조하면서도 인간은 거듭나기 위하여 애써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거듭남으로써 주어지는 그 위대한 변화가 구원 얻음 얻으려고 애음이 없이 상당한 수고를 지불함 없이 획득된다는 것은 얼마나 가능성이 적은 추측인가. 그러나 그들은 거듭나기 위하여 수고하지 않는다. 그것을 얻기 위하여 몸부름치지 않는다. 그렇다. 더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거듭나기 위하여 애써야 한다는 것 자체에 대해 생각하지도 않으며 그러나 자신의 상태에 대하여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33:10) 그들이 죽기 직전에 거듭나지 않는다면 그들은 영원한 형벌에 처하게 처하여질 것이다. 아멘. >>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