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름 11장
게으름과 친숙한 그대에게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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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박힌 광경: 게으름으로부터의 교훈
마음에 박힌 광경: 게으름으로부터의 교훈
내가 보고 생각이 깊었고 내가 보고 훈계를 받았노라
네가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누워 있자 하니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
마음에 박힌 광경
마음에 박힌 광경
본문 말씀은 히브리어 성경에서 직역하면 ‘내가 붙잡았고, 내 마음을 두었고, 내가 보았으며, 한 교훈을 취하였노라’ 입니다. 여기서 특별히 주의해서 살펴야 할 것은 한글 성경에서는 보고라는 단어가 두 번 나오는데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그것이 각각 다른 단어라는 점과 주어를 거듭거듭 반복하며 진술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언어적으로 볼 때 앞에서 나온 복어는 뒤에서 나온 복어보다 훨씬 강한 의미입니다. 이것은 지혜 없는 자의 밭과 게으른 자의 포도원 광경이 세월이 많이 흘러도 쉽게 지워지지 않을 만큼 강렬하게 마음에 찍혀 사진처럼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즉, 그것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가슴에 새겼다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그 다음에 다시 나오는 복어는 단순하게 눈으로 보았다는 의미입니다. 지혜자에게 이 밭과 포도원의 황폐한 광경은 적지 않은 충격이었던 것 같습니다.
지혜자에게 남긴 인상이 강렬했음은 그가 계속 내가라는 주어를 반복 사용한 것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주어가 꼭 필요하지 않은 곳에까지 계속하여 주어를 사용한 것은 자신이 보고 생각하고 느낀 바를 강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밖과 포도원을 지나간 사람이 이 제자 한 사람뿐이었을까요?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지나갔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나간 사람 모두가 그곳의 광경에 충격을 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아무런 메시지도 발견하지 못하고 그곳을 지나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반드시 다음 두 가지 경우 중 하나일 것입니다.
부지런하고 성실해서 부주의함의 문제에 있어서 자유로운 사람이든지 아니면 그 밭의 주인과 똑같이 게으르고 부주의해서 그 황폐한 광경이 전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객관적인 시선으로 자신을 살펴야 똑같은 광경을 보고서도 사람들은 각기 다른 생각을 하며 돌아섭니다. 밭을 보고 자신은 게으르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돌아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호된 꾸지람을 받고 돌아서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을 결정하는 것은 그가 어떤 삶을 살아온 사람인가 하는 것이지만 여기에는 그것과 함께 한 가지 중요한 요소가 더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신을 정직하게 인식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우리가 가진 자기 인식은 하나님의 평가나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다를 때가 많습니다. 자문16장2절 자기 자신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 책을 읽고 이런 생각을 하는 분들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 책은 나보다는 우리 남편이 읽어야 하는데 이거 우리 형한테 하는 소리네. 물론 그런 생각이 틀렸다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돌아보지 않고 무조건 남을 향해서만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향한 평가는 맞지 않을 때가 너무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라우디게아 교회를 향해서 하신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효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내 공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계시록 3장 17절 당시 라우디게아는 안약의 산지로 유명한 곳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인삼 하면 개성이 떠오르듯이 로마 시대에는 누구나 안약 하면 라우디게아를 떠올렸습니다. 이처럼 라우디게아는 안약의 명산지였기 때문에 돈을 아주 많이 버는 부자 동네였습니다.
그리고 그 때문에 그들은 스스로를 부유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라우데게아 사람들을 눈 먼 자라 하시며 오히려 그 안약을 그들 눈에 먼저 바르라고 하셨습니다. 계시록 3장 18절 그들이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보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믿는 것만큼이나 위험한 것은 없습니다.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자신에게 관대해지기 쉽다는 약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늘 자신에게 엄격하도록 의지적으로 노력해야 하고 객관적인 기준으로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자신의 게으름을 재는 시금석 그럼 우리가 하나님 앞에 부지런한 사람들인지 게으른 사람들인지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신의 변명에 영향을 받지 않고 객관적으로 그것을 평가하고, 싶은 분들께 저는 이런 방법을 권하고 싶습니다. 사람들이 게으른 것을 볼 때 적절한 분노가 솟아나는가 하는 것을 자신의 게으름을 재는 시금석으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사실 부지런함에도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감화를 입은 것에서 비롯된 부지런함과 타고난 부지런함입니다. 타고난 부지런함에는 영혼과 육체의 모든 것을 포괄하는 균형이 없으며 그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신의 행복에 필요한 의무들에 있어 성실하고 부지런한 것입니다. 그것은 자아가 깨진 데서 온 부지런함이 아닙니다. 저희 아버님은 매우 부지런한 분이십니다.
지금은 연로하셔서 예전과 같지 않지만 일평생 저는 4시 30분이 넘은 시간에 아버님이 주무시고 계시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 믿고 은혜 받으시기 전이었는데도 말입니다. 제가 새벽 기도에 가기 위해 일어나 보면 아버님은 벌써 깨어나셔서 라디오를 듣고 계시곤 했습니다. 정말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부지런한 분이 이셨지만 그것은 타고난 그분의 성품이셨지 하나님께로부터 큰 감화를 받은 결과는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큰 감화를 받고 그로 인하여 분투하며 부지런히 사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게으른 삶을 보며 거룩한 분노를 느낍니다. 이것은 매우 정당하고도 바람직한 감정입니다. 게으르게 사는 사람이 낭비하고 있는 시간과 능력은 그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뿐 아니라 우리가 아는 다른 사람들도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게으름의 영역은 자고 싶을 때까지 자는 것이나 자신의 의무를 방치하는 것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당한 방법으로 적게 노력을 들이고 크게 수확을 얻으려고 하는 모든 시도들도 하나님 앞에서는 게으름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고자 분투하는 삶과 열정을 지닌 사람들에게 이런 사람들의 삶에 대해 적절한 혐오감이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주일날 공 예배에 나오지 않은 사람들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면 거의 대부분 죽는 시늉의 대답이 나옵니다. 회사 일이 바쁘고 직장에서 구조조정에 칼바람이 일고 몸은 몸대로 아프고 구구절절 고되고 힘든 사연들입니다. 사실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시험과 염려, 그리고 방탕의 유혹이 많은 세상 마지막 때에는 더욱 믿음으로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게으름이 이러한 환경과 손잡고 우리를 믿음에서 멀어지게 하지 않도록 말입니다. 경험의 양보다는 해석과 적용의 능력이 중요하다. 제자는 풀과 가시덤불로 뒤덮인 게으르고 지혜 없는 자의 경작지를 보고 교훈을 얻었습니다. 사실 무엇인가를 배우는 데 가장 좋은 것은 스스로의 경험으로부터 깨달음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나 때때로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교훈을 소유하는 것이 너무 많은 비용이 들 때가 있고 윤리적으로나 신앙적으로 그 경험을 할 수 없도록 차단되어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간접 경험을 통해서 지식을 얻기도 합니다. 그러나 직접 배우는 것이 가장 좋은 것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이 게으름의 문제도 그 해악을 깨닫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직접 바닥까지 내려가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직접 죄에 완전히 짓밟히고 성경이 예고한 대로 최악의 빈궁을 경험하며 핍절한 상태가 되면 게으름이 얼마나 해를 주는 것인지를 스스로 절절히 깨닫고 각성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미 성경에 다 나와 있는 결론을 체험해 보기 위해서 그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는 건 너무나 어리석은 일입니다. 지혜 없는 사람은 위험한 약을 한 동이 다 마시고 그 맛에 고개를 갸우뚱 갸우뚱하다 죽어 가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입에 살짝만 대 보고도 위험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 멀리합니다.
즉, 뭔가를 경험하고 깨닫는 일에 있어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경험의 양이 아니라 그것을 해석하는 지적인 판단 능력과 그것을 자신의 삶에 적용하는 능력이라고 는 것입니다. 성경은 악을 행하면 얼마나 공고해지는지 시험해 보라고 하지 않고 그것을 경계하라고 말씀합니다. 이 자문의 지혜자가 지혜자인 것은 다른 사람의 일을 자기의 일인 것처럼 생각하고 경계해서 거기에 빠지지 않도록 애썼기 때문입니다. 알다시피 이 지혜자는 솔로몬 왕입니다. 그는 왕이었기에 밭을 갈 일도 포도원에 가서 김을 매일 줄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게으른 자의 밭과 지음, 자의 포도원을 통해 자기의 삶의 태도에 관한 실질적인 교훈을 얻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먹고 살 일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왕과 같은 신분의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저마다 생계를 위해 열심히 일해야 할 터전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본문에 나오는 밭과 포도원은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난날들을 돌아보십시오. 우리의 눈물과 수고로 인해 풍성한 열매가 가득해야 마땅한 일터가 우리의 게으름으로 인해 열매는 없고 거친 풀과 가시덤 불만 가득한 밭이 된 적이 있지 않습니까? 도대체 언제까지 고개만 갸우뚱거리며 게으름의 해학을 조금씩 조금씩 맛보고 계시겠습니까? 사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하나님을 위해 정말 제대로 살아볼 시간은 짧아집니다.
게으른 자에게나 충성스러운 자에게나 시간은 동일한 속도로 흘러가기 때문입니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영원 속으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 하나님과의 관계는 우리 삶의 뿌리입니다. 그런데 게으름은 그것을 갉아먹으려 합니다. 게으른 욕구를 따라 사는 육체의 정욕이 그 일을 돕습니다. 옛날 이야기 중에 황금알을 낳는 거위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거위는 매일 하나씩 황금으로 된 알을 낳아 죽었는데 주인은 한 번에 많은 황금알을 얻기 위해서 그 거위를 죽이고 맙니다. 거위의 뱃속에 수천 개의 황금알이 있을 줄 알았던 것입니다. 결국 그 주인은 욕심으로 인해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소중한 그 위를 잃고 말았습니다. 하루하루 사는 것이 너무 분주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돌아볼 시간이 없는 그리스도인들을 보면 그 거위 주인이 생각납니다. 아무리 욕심이 나고 아무리 사정이 급해도 침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해 마음을 바치는 경건 생활입니다. 우리가 밭에 상추를 뜯어 먹을 때도 잎만 뜯어야 그 다음을 기약할 수 있지 뿌리에까지 칼을 대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루 중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도하고, 묵상하고 말씀 보는 시간은 그 하루의 삶의 뿌리이며 절대 침범해서는 안 되는 시간인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성공과 자기의 욕심을 위해 이 시간을 쓰는 것은 순간의 욕심으로 황금알을 낳는 그 위의 배를 가르는 사람과 똑같은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제일 바보 같은 사람은 다른 일에 너무 바빠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해 쓸 시간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늘 자원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요. 창조주를 잇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며 자신을 구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잇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잠시 동안 스스로 하나님을 떠나 자유롭게 산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상은 하나님 안에서 누리던 자유를 버리고 세상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싫증이 게으름과 손잡을 때 때때로 우리는 끊임없이 노력하는데도 성화의 생활에 진전이 없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것은 죄에 대한 사랑을 놓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살아서는 갈등만 계속 느낄 뿐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갈등이 영혼으로 하여금 싫증을 느끼게 만들어 육체를 게으름에 빠뜨리고 맙니다. 영혼의 싫증과 육체의 게으름이 손을 잡으면 모든 신앙적인 선한 목표들이 사라집니다. 죄의 물속에 빠진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어떻게든 그 물속에서 나와 거룩이라고 하는 땅으로 올라가고 싶은데 등에 멘 가방이 너무 무거워. 도무지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 가방 안에는 금이 가득 들었기 때문에 버리려니 망설여집니다. 그래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갈등만 하고 있는데, 체력의 한계로 점점 지쳐 물에 빠져 갑니다. 그리고 앞으로 헤엄쳐 나가지도 못하면서 왜 이 힘든 일을 하고 있나 회의를 갖게 됩니다. 바로 그때 게으름이라는 커다란 연자 메톨이 그 사람의 목에 매달립니다.
그러면 그는 제대로 저항 한 번 못 해 보고 죄의 물속으로 가라앉고 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영혼이 싫증을 느끼는 문제에 있어서도 예민하게 스스로를 경계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지금 행하는 일이 옳다는 판단이 들면 열렬함을 갖고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기도하십시오. 열렬함을 가지고 섬김에 있어 순종하지 않으면 이내 순종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파고듭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갈등을 느끼게 하고 그 갈등은 영혼의 싫증으로 이어집니다. 참된 아멘은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하는 것입니다. 설교를 듣거나 진리를 깨닫고 나면 바로 삶을 통해 아멘 해야 합니다. 스스로의 잘못된 부분을 깨달았으면 즉각적으로 그것을 고치라는 것입니다.
좀 더 자자의 위험, 지혜자는 게으른 자의 밭과 지혜 없는 자의 포도원의 모습을 마음에 두고 한 교훈을 취했습니다. 그 교훈은 좀 더 자자, 좀 더 졸자, 좀 더 눕자 하는 것이 인간을 파멸로 데려간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여러분은 반문하고 싶으실 것입니다. 자고 졸고 눕는 것이 죄입니까? 하고 말입니다. 죄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습관적인 것이 되고 나면 인생을 완전히 망가뜨리고 맙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일을 경계함에 있어서 그것이 죄인지 아닌지를 묻지 말고 그것이 궁극적으로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본문은 좀 더 차고 좀 더 졸고 좀 더 눕는 것의 결과를 가난과 궁핍이 밀려오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것도 강도와 같이 예기치 못한 때에 찾아와 밀려오는 군사와 같이 불가항력적으로 자신의 좋은 것을 강탈해 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을 학대하는 삶을 살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게을러지지 말고 의무에 충실하라는 권고입니다. 인간이 잠을 자는 것은 당연하고 피곤하면 졸 수도 있고 힘들면 눕기도 합니다. 문제는 이런 일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과도하게 자거나 졸거나 눕는 일이 나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육체의 게으름과 마음의 부패로 주어진 의무에 충실해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의무를 정확히 인식하고 최선을 다해 열렬한 마음으로 그것을 수행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게으른 사람들은 대부분 그 마음이 이미 하나님께서 주신 의무에서 떠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 가진 의무에 대해서 생각하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무언가를 해 주셔야만 비로소 자신이 그 일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삶이 지속되면 결국 그의 게으름은 패역한 삶으로 이어지고 말 것입니다. 실천을 통해 맛보는 신앙의 진수, 부지런한 삶과 신령한 영성은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무엇인가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에 충실한 삶을 살았을 때는 깨어짐이 풍부합니다. 최선을 다했는데 결과가 안 좋으면 하나님께서 실망하지 않을까? 하고 염려하는 것은 최선을 다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나 하는 생각입니다. 최선을 다하고 나면 결과에 대해 자유해집니다. 그리고 일의 성패를 떠나 감사할 수 있게 됩니다.
일이 잘 안 되면 깨뜨려진 마음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을 더 간절히 바라보게 되고 잘되면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일의 성패를 떠나 늘 마음에 부담이 남습니다. 하던 일이 안 되어도 하나님 앞에서 깨어지기가 힘이 듭니다. 왜냐하면, 일이 성취되지 못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특별한 뜻을 생각하기에는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바라는 가난한 마음보다는 내가 왜 그랬을까? 하는 후회가 더 강하게 그를 사로잡습니다. 기독교 신앙이란 실천을 통해서 그 진수를 맛보는 신앙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해야 할 당위성 생활과 말씀, 생활의 필요성, 생화의 길 등을 배우고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진수는 단지 책상에 앉아 그것이 무엇인지 공부할 때가 아니라 구도자적인 추구로 그렇게 살고자 몸부림칠 때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진수는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는 삶 속에서 기도의 진수는 기도를 실천하는 자리에서 맛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게으름은 아예 이러한 실천을 방해하여 신자로 하여금 그 진수를 맛보지 못하도록 합니다. 마치 인공위성이 끊임없이 지구를 돌지만 한 번도 지구와 만난 적이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처럼 게으름은 우리에게서 참다운 신앙이 꽃피지 못하게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라고 하면 기도에 관한 책 읽고 전도하라고 하면 전도 많이 한 사람 데려다가 특강 듣고 거룩해지라고 하면 거룩에 대한 강의에 참석하고 충성하라고 하면 충성스럽게 산 사람들을 데려다 간증 듣는 것으로 위로를 받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남의 신앙을 즐기는 것이지. 믿음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스스로 살아본 만큼 깊어집니다. 삶의 영역을 떠난 신앙은 의무를 저버린 신앙이며 그물을 저버린 신앙은 한낱 영적 유희일 뿐입니다. 맡겨주신 사명에 모든 것을 쏟으라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가 무엇인지 자신은 거기에 충실한지 자문해 보십시오. 충실하지 못하다면 깊이 회개하고 더욱더 그 일에 매진해야 합니다.
시간이 더 필요하다면 사소한 일에 허비하는 시간을 가지고 거기에 투자해야 하고 돈이 모자라다면 돈 가치 있는 일에 쓰고 있는 돈을 절제하여 거기에 쏟아부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있어 시간은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고백할 수 있는 편지지와 같고,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서 춤추고 노래할 수 있는 무대와 같습니다. 우리의 시간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위한 목표 없이 게으르게 살며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주님의 소중한 것에 대한 도적질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자리가 얼마나 귀하고 아름답습니까? 거기에 우리가 그 무엇을 아끼겠습니까? 시간도 건강도, 능력도 거기에 쏟으라고 주신 것인데 우리가 무엇을 망설이겠습니까? 주님을 위해 살 시간이 있기에 행복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렸던 두 강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한 강도는 지옥으로 가고 한 강도는 예수님과 함께 낙원으로 갔습니다. 회개한 강도는 평생 자기 좋을 대로 살았을 뿐 하나님 앞에 선한 일은 한 번도 못 해본 사람이었습니다. 그저 마지막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을 알아보고 그분께 회개하고 자비를 구했을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깨달았지만 자신이 살아온 삶을 생각하니 차마 구원해 달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누가복음 23장 42절 라고 부탁 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믿음을 보시고 그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를 기꺼이 천국 가는 길의 동반자로 삼으셨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께서는 기쁨으로 그를 천국으로 데려가셨겠지만, 그 강도의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일평생 죄만 짓고 살다가 이제 비로소 누구를 섬겨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게 되었는데 안타깝게도 그곳은 목숨이 끊어져 가는 십자가 위였습니다. 그 강도는 얼마나 안타까웠을까요? 이제는 누구를 섬겨야 할지 알게 되었고 그렇게 자신을 들여 봉사하고 싶은 마음도 있는데, 그에게는 남은 시간이 없었습니다. 만약 그 사람에게 며칠간이라도 말미를 주어 주님을 섬기라고 했다면, 그는 뛸 듯이 기뻐했을 것입니다. 그는 아마 자신과 같은 강도를 들을 찾아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고 회개를 촉구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남겨두고 가는 자신의 가족들에게도 복음을 전함으로 주님을 섬겼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 무엇도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 강도보다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입니까? 아직 우리에게는 주님을 섬길 시간이 남아 있고 섬김 받으실 주님도 우리 곁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충성스럽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위해 게으르지 말아야 하며 주님을 위해 열렬하고 부지런히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피 묻은 전투복을 천국의 새마포 옷으로 갈아입을 때까지
해주신 설교문을 바탕으로 PPT 슬라이드 형식으로 요약 및 정리해 드립니다.
제시해주신 설교문을 바탕으로 PPT 슬라이드 형식으로 요약 및 정리해 드립니다. 설교의 핵심 논지와 예화를 중심으로 **[도입 - 전개 - 적용 - 결론]**의 흐름으로 구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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