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 백성의 세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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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 백성의 세계관 이해와 필요성

히브리서 11:1–3 NKRV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사랑합니다! 꿈사땅 2026년도 첫 번째 예배에 오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이제 여러분들과 1년 동안 “하나님 나라 백성의 세계관”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우리 삶에 가깝고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려고 한다. 하나님 나라 백성의 세계관을 6글자로 말하면 무엇인가? 그렇다. “기독교 세계관”이다. 기독교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이성이나 경험으로 검증되어야 하는 인본주의적 세계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구성되는 신본주의적 세계관이 되어야 한다. 기독교 세계관은 또한 성경의 문자에만 매달리는 세계관이 아니라 성경에서 말하듯이 하나님의 창조에서부터 시작해서 인간의 타락과 그리스도의 구속과 재림으로 연결되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다. 또한 그리스도가 정신적, 영적, 자연적, 물리적 요소가 포함된 모든 것의 주인되심을 인정하는 세계관이 바로 기독교 세계관이다.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세계관이 있다. 하나님의 약속인 언약을 지키는 세계관그것을 파괴하는 세계관이다. 세상의 세계관은 진화론의 원리 위에 세워졌고 기독교 세계관은 성경의 원리 위에서 세워진 것이다. 예를 들어 기독교 세계관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예술은 단순히 자연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는 것이 아니라 현재 타락한 세계보다 더 높은 세계를 보여주고, 창조와 회복의 의미를 보여주고 하나님이 원래 의도하셨던 세계의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기독교 세계관은 성경이라는 안경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고, 성경이라는 잣대를 가지고 세상을 판단하고, 성경이라는 기준을 가지고 판단한다. 성경은 단지 도덕책이나 일반적 정보를 담은 교과서가 아니다. 성경은 우리로 바른 세계관을 세우고 그 세계관 위에 참된 삶과 문화를 세우도록 하는 하나님의 계시이다. 더 나아가 불신자들의 세계관을 지적하고 판단하는 계시의 말씀이다. 그래서 성경은 모든 것을 말하지 않지만, 인생의 모든 것에 관한 원리를 말씀하고 있다. <웨스트민트서 대요리문답>에서 성경은 ‘믿음과 순종의 원리’라고 말하고 <소요리문답>에서는 성경은 “하나님에 관하여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를 가르치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의무를 가르친다”라고 말한다. 여기 믿음이란 바로 기독교 세계관을 말하는 것이고 순종과 의무는 그 세계관 위에 세워지는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을 의미한다.
모든 사람의 삶이 종교적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의 중심에 어떤 종류이든 믿음이 자리 잡고 있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도 일종의 믿음이다. 모든 삶의 모습은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그 믿음과 연계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단순히 기독교 세계관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세계관 역시 마찬가지다. 어느 누구도 믿음 없이 존재할 수가 없다. 그 믿음의 대상이 그리스도이든, 다른 무엇이든 간에 나름대로 믿음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중심이 되는 믿음은 그 위로 여러 겹들의 껍질들이 싸이게 된다. 예를 들어, 중심이 믿음이라면 하나님을 믿든지 믿지 않든지 간에 다음 껍질은 “하나님의 존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라는 종교적 질문이나 관점이라 할 수 있고, 그 다음 껍질은 “우리는 우리의 행위에 책임을 져야 하는가?”라는 현실적인 질문 또는 관점이라 할 수 있고, 그 다음은 “세상을 아름답게 풍요롭게 만들자”는 문화적, 정치와 경제적 관점이 할 수 있고, 그 다음 껍질은 TV드라마를 보면서 자신의 삶을 즐기는 모습일 수 있다. 이 여러 껍질을 우리는 여러 문화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고 여러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세계관이 어떠하든 간에 그 중심에는 소위 믿음 또는 전제가 있다. 기독교 세계관은 성경의 하나님을 인정하는 믿음이 그 중심에 있고 그 외의 세계관은 하나님을 부인하는 믿음이 그 중심에 있다. 그 두 중심 밖으로 나타나는 세계관의 현상들 가운데는 겉으로 보기에 같은 모습이 있음을 우리는 인정한다. 그러나 그런 겉으로 봤을 때 같은 모습은 사실 진정한 의미의 공통점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런 겉으로 보이는 모습들은 당연히 각 중심들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기독교 세계관의 틀이라 할 수 있는 창조, 타락 그리고 구속에 관해서 생각해보자. 존재하는 모든 것, 즉 인간, 자연, 문화, 생각, 이성, 경험, 사랑, 미움, 죄, 은혜, 구속 등 존재하는 모든 것은 태초에 있었던 하나님의 창조에 의해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세계관 역시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이 개념이 없이는 무의미한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 없이는 어떠한 것도 존재할 수도 없었고 의미의 시작도 불가능하다. 다른 말로 말하자면 하나님을 인식하기 전에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으면 인식 자체가 안 된다는 것이다. 어떤 것을 생각할 때 처음부터 의미가 있어야 하는 차원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생각해야 한다. 이 창조주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는 분이시고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분이시다. 창조주 하나님은 인간이나 세상 어떠한 것에도 의존하는 분이 아니시다. 스스로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계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인간이나 세상과 연결되어야 의미를 얻게 되는 분도 아니고, 자신의 존재의 근거를 인간이나 세상에서 찾으실 필요가 없으신 분이다. 그렇기에 어떠한 세계관이나 어떠한 사상이나 어떠한 토론도 의미가 있기 위해서는 먼저 반드시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해야만 한다. 창조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의 의미는 하나님과 그의 계시를 의존할 때 발견된다. 심지어 불신자들의 삶과 신념과 생각 자체도 의미 있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들이 비록 하나님을 믿지 않고 대적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삶과 신념이 의미 있기 위해서는 할 수 없이 하나님을 인정해야만 한다. 혹 의식적으로 인정하지 않더라도 무의식적이라도 인정해야 모든 것이 의미 있게 된다. 의미를 찾을 방법이 따로 없기 때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가 모든 의미와 모든 존재를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만약에 성경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이 창조주 하나님이 아니라 일반적 신이라고 한다면 굳이 창조주 하나님을 전제하거나 인정할 필요가 없다. 이성이든지, 경험이든지, 논리든지, 직감이든지 어떤 방법으로든 나름대로 세계관을 만들어서 자신들의 삶을 살 수 있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이 피조된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신 분이라고 한다면 그 분을 전제하지 않고는 의미를 발견할 길이 없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성을 통하여 한 사실의 의미를 찾고자 할 때 그 이성의 의미는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또한 이성을 통하여 절대 신을 증명하고자 할 때 그 이성의 의미는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이러한 이성의 의미를 이성에서 찾을 수는 없다. 이성의 의미를 찾을 길이 있다면 굳이 성경의 하나님을 전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길이 없기에 성경의 하나님을 전제할 수밖에 없다. 만약 성경의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셨다면 모든 사실들은 하나님과 연결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창조물은 보기에 좋은 것만 아니라 그 창조물이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인간 역시 알게 모르게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인간은 하나님을 모른다고 말할 수 없다. 물론 머리로는 혹은 의식적으로 하나님을 모른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머리로 또는 의식적으로 하나님을 모른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머리로 앎에 차원뿐만 아니라 도덕적, 윤리적 차원에서도 하나님을 모른다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법을 어기며 죄를 지었을 때 자신을 하나님을 몰랐고 또 하나님의 법에 대한 의무가 처음부터 없었다고 말할 수 없다. 또한 무죄라고 할 수 없고 하나님의 심판이 잘못됐다고 말할 수 없다. 하나님의 창조는 모든 피조물로 하여금 하나님의 계시를 떠나 살 수 없게끔 만들었기 때문이다. 인간 스스로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하나님의 계시를 떠나살 수 없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구분이 확실히 그려져 있다. 즉 피조물인 인간이 자신의 검증 절차를 통해 창조주 하나님을 창조주로 만들어주고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섭리와 계시를 통해 피조물은 하나님을 알고 또한 하나님께 다가갈 수 있고 또한 그의 은혜로 택함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타락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감사하지도 않게 만들었다. 인간은 하나님의 온전한 형상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고 타락 이전처럼 행동하거나 생각할 수도 없게 되었다. 타락은 인간으로 하여금 더 이상 창조주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지식을 얻고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려는 마음을 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타락된 상태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시며 인간은 피조물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오히려 창조주와 피조물의 구분을 더욱 확실하게 할 필요가 생겼다. 타락한 인간의 모습은 로마서 1장 21-25절에 잘 나타나 있다
로마서 1:21–25 NKRV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타락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하지도 못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타락은 윤리적 타락이었지만 사실 지식적 타락이기도 하다. 타락된 상태에서 진리를 논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깨닫지도 못하는데 무슨 진리를 논할 수 있는 것인가? 스스로 똑똑하다고 지혜 있다고 말하지만, 맹인과 같은 모습이다. 또한 이 사실 조차 깨닫지도 못한다. 물론 타락한 인간들은 짐승처럼 되어 버린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도 이성도 사용하고 지식의 능력이 있다. 단지 문제는 그들의 방향이 틀렸다는 것이며, 그들이 의미하는 바가 달라졌다는 것이면서 일관성이 없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학이 진리라고 생각하지만, 과학은 시대마다 추구하는 이론들이 달라진다. 진리는 변하지 않는 것인데, 세상의 사람들은 변하는 것을 진리라고 착각하며 그것을 추구한다. 그러나 타락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이성의 능력을 가지고 지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모두에게 주신 은혜 때문이다. 하나님이 오래 참으신다는 사실과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타락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인간 이성의 능력 자체를 인정하여 이성으로 하나님을 찾고 진리를 찾고자 하는 것은 정말 의미없는 일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이 모두에게 주신 은혜를 가지고는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을 찾을 수도 믿을 수도 없는 것이다. 모두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뭐라고 부르는가? “일반 은총”이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서 진리를 발견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계속적으로 일관성 있게 유지하지는 못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의존하고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즉 타락한 인간이 어느 정도 지식을 또는 진리를 소유할 수 있었던 것은 분명 알게 모르게 하나님을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타락한 인간의 이해 능력은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불안정한 것이고 의지할만한 것이 아니다. 비록 타락한 인간이 진리를 안다고 해도 그 지식은 수박 겉핥기에 불과하다. 타락한 인간은 어떤 일반적인 사실에 대해 알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사실이 의미하는 것 또는 그 사실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예를 들어서, 불신자는 사과는 빨갛다는 것은 알지만 사과가 의미하는 바는 알 수 없다. 즉 사과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고 그 사과는 창조하신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고, 곧 사과의 의미는 하나님에게서 발견된다는 것을 불신자는 알 수 없다. 그리고 사과나무가 배나 딸기를 맺지 않고 사과를 맺는지에 관한 것도 알 수 없다. 또한 왜 사과나무가 그 자리에 있게 되었는지도 알 수 없다. 또 다른 예로, 타락한 인간은 ‘친절은 좋은 것이고 불친절은 나쁜 것이다’라는 것은 안다. 그러나 ‘무엇이 좋은 것이고 무엇이 나쁜 것이지’ 구분할 수 없고, ‘좋고 나쁨의 기준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는 모른다. 주어진 사실들 자체만 갖고서는 무엇이 선인지 무엇이 악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통계나 다수의 의견으로 선과 악을 정한다고 해도 그러한 선과 악은 언제든 바뀔 수 있기에 절대적이지 않다.
신자들은 일반적인 지식과 특별한 지식 둘 다 알고 있고 불신자들은 일반적인 지식만 아는 이유는 다른게 없다. 신자가 더 똑똑하고 더 많이 알아서가 아니다. 이런 의미라면 불신자가 더 똑똑할 수 있고 더 많이 알 수 있다. 이들의 차이는 바로 신자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불신자는 받지 않는다는데 있다. 하나님의 계시, 즉 성경 말씀이 특별한 지식을 준다. 일반 은총과 자연은 일반적인 지식을 알려주기 때문에 타락한 사람들도 얻을 수 있는 지식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회개하고 거듭나지 않으면 특별한 지식을 얻을 수 없다. 타락한 후에 거듭나지 않으면 허구적인 세계관만을 가질 수밖에 없다. 쉽게 말해, 알맹이는 없고 껍데기만 있는 세계관만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렇듯이 타락은 인간의 세계관을 형성함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타락을 모르고서는 세계관을 이야기하고 진리를 말할 수 없다. 인간의 타락을 인정하지 않는 불신자들을 향해 기독교 진리가 진짜라고 말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세상을 바로 보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기독교 세계관을 소개하는 것은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에게 그림을 감상해 보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다. 기독교 세계관을 소개해주거나 알려주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이 세상을 바로 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죄인됨을 인정하는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어떤 것도 할 수 없음을 인정하게 하는 것이다. 인정하지 않고서는 결코 기독교 세계관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 바른 세계관을 갖기 위햐서는 예수님의 구원의 은혜를 입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구원은 단지 죽어서 천국 가는 길만을 허락한 것이 아니다. 바른 세계관을 갖기 위한 길이기도 하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을 바로 알 수 있는 길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는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고 한다. 새롭게 창조되고 새롭게 태어난다. 창조주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타락으로 인해 바로 볼 수 없었던 세상을 예수님이 죄에서 구원해주시어 제대로 볼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인간은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는다.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것이다.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피조된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며 그를 영화롭게 하고 감사하고 창조주로 경배하게 된다.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에서 그의 존재를 발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그의 진리를 깨닫게 된다. 이렇게 구원받은 사람들은 일반적 지식만 아니라 특별한 지식도 알게 된다. 모든 지식을 얻지만 겉햝기로 일관되지 않는 것으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그 지식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며, 그 목적이 무엇이며, 왜 얻게 되는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
물론 구원 받은 자들도 죄를 짓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지식의 체계가 거듭나기 이전의 상태로 다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지식 치계나 세계관이 우리에게 달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진리를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죄와 연약함으로 인해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의지하려고 하지만 우리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길과 진리 생명이 주어졌다. 사실 구원은 자동적으로 우리를 지식에서나 거룩함에 완전한 사람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완전한 분이시며 주님의 은혜로 우리는 완전함에 거할 수 있다. 이것을 근거로 우리에게 바른 세계관을 가지도록 해준다. 이것은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이 죄 가운데 있는 것과 완전히 다른 상황이다. 구원 받은 사람들은 자신의 연약함과 죄 가운데서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만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거절하고 하나님 대신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기보다는 자신이 무엇이든지 스스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산다. 이렇듯이 그리스도의 구원으로 인해 서로 적대적인 두 개의 다른 세계관이 만들어진다.
성경에서 크게 주어지는 이야기는 창조-타락-구원의 패턴이 단순히 구원역사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이 패턴은 하나님이 모든 것에 주권자이시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림을 의미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떠나서는 인간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역사에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의 계시가 따랐다. 모세가 썼던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구약의 이야기를 지나 예수님이 오시고 십자가를 통해 구원 사역을 마치시고 승천하신 후에 제자들과 사도들이 신약을 기록하면서 이제 하나님의 구속 역사가 완성됨에 따라 하나님의 계시도 완성되었다. 더 이상 계시가 주어지지 않고 다만 기록된 특별 계시, 즉 성경만이 남게 되었다. 그리고 성경을 통하여 자연과 인간에게 주어진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땅, 하나님의 창조된 세계와 세상을 바르게 해석할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의 창조는 세상 어느 것도 하나님을 떠나서 스스로 존재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전도사님이 흑백 요리사를 보는데 그 재료들이 다 어디에서 났겠는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재료들이 없으면 인간은 아무리 뛰어난 요리사라고 하더라도 훌륭한 음식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을 보게 된다. 인간의 타락 역시 하나님의 다스림에서 벗어났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아무리 하나님을 대적하려고 해도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영역 안에서 대적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구원은 믿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다스림 가운데 있도록 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다스림으로부터 분리된 것이 아니다. 그들 나름의 중립적 영역이 주어진 것이 아니다. 만약 구원이 그들로 하여금 그들 나름이 영역을 허락해 주었다고 하면 그리스도의 구원은 반쪽짜리 구원이 되어 버리고 만다. 예수님의 구원을 믿는 사람들에게 긍정적으로 적용된다고 하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부정적으로 적용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공정한 하나님의 심판이 주어진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알지도 못했고 접하지도 못했다는 핑계를 댈 수 없다. 그리스도의 영역은 모든 영역에 적용된다. 그러므로 기독교 세계관은 세상에 어떤 것도 빠지지 않고 세상 모든 것을 아우른다. 한 영역에 적용되는 세계관이 아니다. 뭔가 우리는 성경에 근거를 둔 세계관이라고 해서 마치 기독교 세계관은 종교적 영역에만 제한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마치 예배드릴 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영역에 적용되기 때문에 성경에 근거를 둔 기독교 세계관은 모든 영역에 적용될 수 밖에 없다. 문화, 경제, 정치, 철학, 역사, 예술, 종교, SNS, 스포츠, 취미 등 모든 영역에 적용되는 세계관이다. 하나님의 다스림이 닿지 않은 영역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에 근거한 기독교 세계관은 모든 것을 아우른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그러니 사랑하는 꿈사땅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성경을 읽을 때 남들이 보이지 않던 영역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것을 보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면서 살아갈 때 당장에는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분명하게 훗날 깨닫게 되는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세상의 가치관이 상식이 되는 사람보다 하나님의 성경말씀이 상식이 되고 기준이 되는 사람은 세상 사는 것도 재밌을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답을 알고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사람들은 성경에서 이미 답을 주어진 것을 부정하고 자신들이 답을 찾아가려고 하기에 어떻게 보면 불필요한 에너지를 열심히 낭비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을 알고 시작하기에 우리는 세상의 답과 원리를 성경에서 바로 찾을 수 있다. 여기있는 여러분은 앞으로 52주간 함께 나눌 하나님 나라 백성 세계관을 나와 함께 배우면서 점점 더 믿음이 성장하고 성경을 기준으로 살아내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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