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월 2일 금요기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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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로마서 13:11–14 NKRV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2026년이 되고 처음 이 단에 서게 되니까 어떠한 설교를 해야될까? 고민이 많았습니다. 2025년 어떻게 마무리하셨고 2026년을 어떻게 시작했습니까? 맺고 끊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흐르는 시간은 같지만 가시적으로 끝이 있고 새로운 시작이 있기에 나를 돌아보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귀한 기회가 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하나의 구절에 마음에 와서 박혔습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오늘 말씀을 통해서 지난 2025년 1년 동안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 특히, 복음과 반대되는 것.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는 것. 내 정욕대로 살았던 것들. 이러한 것들이 나도 모르게 입혀져 있거든요? 오늘 이 시간 그러한 옷들을 다 벗어버리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는 시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로마서 12장에서는 새로운의 언약의 백성인 교회 또는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믿음이라는 것을 선물로 받은 존재들입니다.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자신의 삶에 새로운 척도, 새로운 기준으로 삼고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현대 사회에는 그러한 일이 거의 없지만 만약 우리가 평민이 었다가 왕이 되었다고 생각해볼까요? 내가 맺고 인간관계, 사회적관계, 사회적지위등등 모든 것은 새롭게 정립이 되어야합니다.
마찬가지로 복음으로 새롭게 태어난 그리스도인들도 모든 것이 새롭게 정립되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복음은 나를, 가족을 포함한 교회 공동체를, 이웃을 심지어는 원수까지도 새롭게 바라보게 만듭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임과 동시에 그리스도인으서 살아내야 하는 삶인 것입니다.
이러한 삶이_우리의 삶이 산 제물로 드려지는 예배 자체인 것입니다. 그러면 로마서 13장은 시각을 더 넓혀셔 우리의 존재를 바라보게 만듭니다. 이 세상에서 또는 세속적인 가치가 주인인 이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첫째,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자로 살아라. (1-7절)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으로 새롭게 태어난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야하는가에 대해서 계속해서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국가의 국민으로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존 스토트라는 분은 교회와 국가의 관계 또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속 국가의 국민으로 살아갈 때 기본적으로 가질 수 있는 4가지 정도의 모델을 제시합니다.
/ 존 스토트 목사님.
4가지 모델
국가가 교회를 다스린다.
교회가 국가를 다스린다.(바티칸, 중세시대)
콘스탄티누스주의 - >국가가 교회에 특권을 주고 교회는 이 특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어느 정도 국가에 순응한다.
협력 – 국가와 교회가 각기 하나님께 받은 고유의 역할이 있다고 생각하고 서로 협력한다.
이 중에서도 사도바울은 네 번째 모델과 완전히 같다고 할 수는 없지만 비슷한 모델을 제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교회를 세운 이유가 있고 교회의 고유한 역할이 있듯이 국가를 세운 이유가 있고 국가와 거기에 지도자들을 세운 이유와 목적이 하나님께 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1차적으로 사도 바울은 국가 권위에 복종하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시지 않은 권세란 없다.” “세상의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왔다.”
“그 권세를 거스르는 것은 하나님을 거스르는 것과 같다.”
우리가 포커스를 “그 권세를 거스르는 것은 하나님을 거스르는 것과 같다.”에 두면 굉장히 혼란함이 가중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 당시만 해도 로마제국은 기독교인들에게 적대적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도저히 이해 될 수 없는 말씀입니다. 이방신을 섬기는 나라를 하나님을 섬기듯 섬겨야한다는 말로 들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3-4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국가의 보편적인 역할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이지 무조건적인 복종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이 생각하기에 국가의 가장 기본적인 역할은 악한 일을 하는 사람을 심판하는 것입니다. 4절에 “칼”이라는 표현이 그 권세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그런 칼(판단)을 가지고 있다면 이 세상은 무법 천지가 되어버릴 것입니다. 그런데 국가라는 체제가 그 그 칼을 가지고 어느 정도의 질서를 잡아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경제와 문화도 모든 시스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체제가 없다면 이 땅에서 살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강자만이 남는 세상이 될 것입니다.
양심의 비춰봤을 때 국가라는 곳이, 또는 위의 권세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1차적으로 복종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올바른 모습인 것입니다. 이것은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하늘의 속한 백성이기 때문에 그 권세 속한 땅에 권세자들에게도 복종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6-7절에 세금에 대한 부분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해야 할 의무를 마땅히 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람들에게 시험 받으실 때 이렇게 말씀 하셨죠.
마태복음 22:21 NKRV
이르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그러므로 우리가 2가지 정도의 큰 태도를 가지고 이 세상을 바라보면 될 것 같습니다. 복음으로 새롭게 태어난 하늘의 시민으로서 이 세상 모든 것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국가체제나 믿지 않는 지도자들도 그 하나님의 권세 아래있음을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양심을 가지고 판단(평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부여한 역할을 잘 하고 있으면 지지해주고 그렇지 못하면 반기를 들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사람들처럼 무조건적인 맹신이나 아니면 무조건적인 반대는 옳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허락하신 국가라는 체제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내야하는데 그 목적은 한 가지입니다. “주님만이 왕이시라는 것입니다.” “주님만이 왕이시라는 것을 나타내는 삶을 사는 것이 우리의 그리스도인들의 유일한 목적인 것입니다.”

두 번째,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지지 말라(8-10절)

13: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13:9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13: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개인부터 교회공동체, 이웃과의 관계, 우리가 속해있는 제도 안에서 우리의 삶이 어떠해야하는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부분을 8-9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8절 말씀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13: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8절에서 중요한 표현이 “빚지다.”라는 표현입니다. 헬라어로 “홉헤일로”입니다. 금전적인부부문에서 “의무를 다해야 한다.” 의미를 가지지만 이렇게 해석될 수 있습니다. “직분을 다하다.” “매여있다.” “의무를 지다.”
8절을 조금 반대로 해석하면 “사랑의 빚을 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라는 말씀인데 “사랑의 의무를 다하는 가장 중요하다.” “사랑에만 매여있어라.” 의 뉘앙스로 해석될 수 있는 말씀인 것입니다. “누구에게든지 사랑의 의무를 다하라”고 사도 바울은 로마 교회 교인들에게 우리들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말씀합니까? 남을 사랑하는 자가 율법을 완성하는 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완성자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 하나님 아버지 사랑을 보여주셨고 그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신 그 사랑을 통해서 율법의 요구를 완벽하게 완성하신 것입니다.
13:9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13: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그러나 율법이 완성이 되었다고 율법이 폐기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랑 안에 모든 율법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 모두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완전하신 사랑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 사랑 안에는 모든 행위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행위는 그 사랑에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으로 새롭게 태어난 우리는 되도록 모든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줘야합니다. 그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가족, 교회는 기본이고요. 직장, 친구들 사이에서 믿지 않는 자들 사이에서 사랑의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끝없이 그들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의 목적이며 방향성이 되어야 합니다.
(광장의 기독교_극우적인 가치말하는 그들은 복음이 아닌 어느 하나의 이념을 기준삼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복음은 모두를 살리는 소식인데 그들이 말하는 소리들은 자신들의 반대 있는 자들은 마귀이고 자신들의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같은 교회를 다녀도 자신들이 원하는대로 기도하지 않거나 자신들에게 동의하지 않으면 공산주의자라고 이야기합니다. 복음은 그것을 뛰어넘는 것인데.. 그들은 자유주의와 공산주의 이념 안에 예수님과 복음을 가두고 있음 보게 됩니다.)
앞에 로마서 12장에서 그리스도인들들의 새로운 척도가 무엇이었습니까? “믿음의 척도”가 무엇이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로 우리에게 허락하신 믿음이었습니다. 원수된 우리를, 죄인된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였습니다. 그러한 기준을 따라가는 삶은 “사랑” “예수님의 사랑” 이라는 방향성을 띠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우리의 삶의 실제적인 방향이 예수님의 사랑과 거리가 멀다면 가장 먼저 점검해봐야 할 것은 우리의 삶을 기준 또는 척도입니다. 그 기준이 그 척도 하나님의 은혜,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이 아니면 우리의 삶은 전혀 다른 방향성을 보이기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차를 타고 서울로 가고자 했을 때 일정한 기준이 있고 교통지점이 있습니다. 어디를 통과 하고 어디를 통과했던을 것을 보면 서울로 갈려고 했구나?를 가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분명히 서울 간다고 하는데 영암-순천 고속도로로 빠지면 당연히 안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어이 없는 상황들이 우리 그리스도인들 삶 가운데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믿는다고 하는데 우리의 삶에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사랑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것은 분명히 우리가 잘 못된 기준을 가지고 살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분명한 기준을 가지고 있다면 올바른 길로 올바른 방향으로 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복음이 우리의 삶의 유일한 척도입니다.
그 척도는 사랑의 의무를 우리에게 주어주는 것입니다. 복음을 기준으로 사는 자들의 무조건적인 열매는 분열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세 번째,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삶을 살아라. (11-14 절)

13장을 마무리하는 말씀이면서 오늘 설교의 주제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최종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까?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태도는 어떠해야할까요?
13:11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13:1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13:13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13: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확실히 우리는 상황에 따라서 다양한 옷을 입습니다. 때에 따라서는 예절에 맞춰서 꼭 복장을 갖춰야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는 꼭 그 직업에 맞는 옷들도 있습니다. 경찰이나 군인들은 그 활동에 맞는 적합한 복장들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태어난 그리스도인들이 비록 이러한 세상에 살고 있지만 하늘의 속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입어야 옷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옷이 무엇일까? 11절에 사도바울은 말씀합니다.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 너희들이 요즘 상황을 봐서 깨닫는바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 시기가 어떠한 시기입니까? “자다가 깰 때이며 우리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그 날이 가까워졌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 시기가 밤이 깊은 시기라 말씀합니다. 밤이 깊은 시기라는 것은 “방탕한 것 술 취한 것 음란한 것 호색, 다툼, 시기 등등” 죄가 깊고 창궐한 시기라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당시 상황을 보며 마지막 때가 곧 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곧 재림하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의 이야기가 틀린 것입니까? 아닙니다. 사도 바울과 우리는 꽤 긴 시간 차를 두고 서있지만 같은 선상에 서 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께서 곧 오신다고 믿으며 마지막 때를 사모하며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곧 오신다, 곧 마지막일 수있다. 이러한 생각과 믿음은 특정한 때에만 유효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시간에 모든 사람에게 적용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입어야 할 옷이 있습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사람을 옷으로 입는다는 표현이 어색하긴하지만 아마도 이러한 표현은 초기 기독교의 세례식과 관련이 있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옛적 삶의 습성을 벗어놓은 옷속에 떨쳐버리고 새로운 삶의 결의로 새로운 예복을 입었던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새로 갈아입은 그 세례 예복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고 했던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27절
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기본적으로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로 인하여 새사람으로 태어났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조금 더 확대하자면 일회적인 과거의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우리의 삶을 통해 예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 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은 것 그것을 한 순간의 사건으로 끝내버린 것이 아니라 그리고 우리 안에서만 일어나는 추상적인 사건이 아니라 예수님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 삶을 통해서 계속해서 그 안에 의미에 대하여 보여줘야하며 그 새 사람으서 마땅한 실제적인 삶을 살아야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군대에 가면 가장 먼저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세상의 때를 벗기는 일을 가장 먼저합니다. 말투도 바꾸고요. 걸음걸이도 바꾸고요. 기본적으로 한 달 정도 기간을 거치면서 민간인에서 군인의 기본 자질을 갖추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중에서 가장 민간인과 군인을 특징짓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옷입니다. 군복이에요.
군대에가면 군에서 준 옷만 입을 수 있습니다. 더이상 예전에 나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의무복무 기간 동안 그 의무를 다해야 하는데 그 군복이 상징이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5주 훈련 마쳤다고 군복입었다고 끝입니까? 군인이 군이 다워야 하는 것입니다. 늘 전쟁을 준비하는 자들이 군인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는 것은 이제 새로운 사람이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구원 받은 백성이 되었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옷을 입었다고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옷을 입은 자의 의무를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지
예수님께서 3일 만에 부활신 의미는 의미는 무엇인지.
예수님께서 다시 이 땅에 오신다는 것을 전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생명이시며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보여주셔야합니다.
그것이 바로 14절 후반의 이 말씀입니다.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반대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은 자로서 영의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영생의 복음을 전하는 그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 삶 자체로 사랑 자체이신 예수님을 보여주는 삶을 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옷은 우리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는 것은 단순히 내적인 변화에서 끝이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겉으로 그 변화가 열매로 드러나야한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말씀 마무리.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까지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잘 살아내는 것이 우리의 최대 목표이자 목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 부활 승천 이후에 세상은 수 없이 바뀌었고 체제도 경제도 바뀌었습니다. 하지만 바뀌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늘에 속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어진 유일한 의무는 사랑 빚을 지는 것, 사랑의 의무를 다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시대, 어떤 때에든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이 세상을 살아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입니까? 복음으로 다시 태어나셨습니까? 하나님의 자녀입니까?북교동교회 교인입니까? 그러면 나와 우리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어야합니다. 혹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입은 수 많은 가치들의 옷들 때문에 그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가 가려져 있지 않습니까?
오늘 이 시간 그 옷을 벗어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물론 옛사람이 죽고 새 사람이 되었지만 여전히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과 지독한 죄악의 습관때문에 무너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날마다 세상 가치들의 옷을 벗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세상 가치들과 정욕의 옷을 벗는 것을 우리힘으로 할 수 없습니다. 말씀을 사모하고 찬양할 때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이 시간 구하십시오.
이 지독한 정욕의 옷을 벗어버리기를 원합니다.
나의 자녀됨과 그리스도인됨을 희미해지게 만드는 그 옷을 벗어버리를 원합니다.
나를 혼란하게 하며 다른 길로 가게 하는 세상의 가치들을 벗어버리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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