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107 수련회 첫째날 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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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12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13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1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16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18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
내 안에 예수님의 흔적을 발견하자
내 안에 예수님의 흔적을 발견하자
갈라디아서 6:11-18
청년부 설교 | 약 1시간
서론: 흔적이 말해주는 것들
서론: 흔적이 말해주는 것들
여러분의 몸에는 어떤 흔적이 있나요? 어릴 때 넘어져서 생긴 무릎의 상처 자국, 수술 후 남은 흉터, 혹은 친구들과 장난치다가 생긴 작은 상처... 우리 몸에는 저마다의 이야기를 담은 흔적들이 있습니다.
흔적은 단순한 자국이 아닙니다.
흔적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무엇을 겪었는지, 어떤 사람인지를 말해줍니다.
군인의 몸에 남은 상처는 나라를 위해 싸웠다는 것을 증명하고, 어머니 손에 박힌 굳은살은 가족을 위해 평생 수고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지금 어떤 흔적으로 자신을 증명하며 살고 있나요?
스펙으로요? 학벌로요? SNS 팔로워 수로요? 연봉으로요?
우리 시대는 끊임없이 '너는 무엇으로 너를 증명할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이력서를 채우고, 자격증을 따고, 더 좋은 조건을 갖추려고 애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증명합니다.
그는 자신의 학벌이나 업적이 아니라, '예수의 흔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선언합니다.
본문 배경: 위기에 처한 갈라디아 교회
본문 배경: 위기에 처한 갈라디아 교회
본문을 깊이 이해하기 위해 먼저 이 편지가 쓰인 상황을 살펴보겠습니다.
갈라디아서는 사도 바울이 AD 48-55년경에 기록한 것으로, 현재 터키 중부 지역에 해당하는 갈라디아 지방의 여러 교회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이 교회들은 바울이 직접 세운 교회들로, 대부분 이방인 그리스도인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바울이 떠난 후, '유대주의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이 교회들에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가르쳤습니다.
'진짜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면 할례를 받아야 한다. 유대인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 이것이 그들의 주장이었습니다.
쉬운 말로 하면 이렇습니다.
'예수 믿는 것? 좋아.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뭔가 더 해야 해. 더 갖춰야 해. 그래야 진짜야.'
어딘가 익숙하지 않나요? 오늘날에도 우리는 비슷한 소리를 듣습니다. '믿음? 좋지. 그런데 뭔가 더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
더 많이 봉사해야 하고, 더 많이 헌금해야 하고, 더 경건하게 보여야 하지 않을까?'
바울은 이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에서 그는 '다른 복음은 복음이 아니다'라고 단호하게 선언합니다.
그리고 편지 전체를 통해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복음의 핵심을 변호합니다.
오늘 본문은 그 편지의 마지막 부분으로, 바울이 자신의 손으로 직접 큰 글자로 쓴 결론입니다.
첫째, 거짓된 자랑을 분별하라 (12-13절)
첫째, 거짓된 자랑을 분별하라 (12-13절)
바울은 먼저 유대주의자들의 진짜 동기를 폭로합니다.
12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12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한다'는 말은 '겉으로 좋게 보이려 한다'는 뜻입니다.
현대인의 성경은 이 부분을 "겉으로만 좋은 인상을 주려는 사람들"이라고 번역합니다.
당시 유대교는 로마 제국에서 합법적인 종교로 인정받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가 메시아'라고 믿는 기독교는 점점 유대교와 분리되면서 박해의 대상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유대주의자들이 할례를 강조한 이유 중 하나는 기독교를 유대교의 한 분파처럼 보이게 해서 박해를 피하려는 것이었습니다.
13절은 더 신랄합니다.
13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바울은 유대주의자들의 위선을 지적합니다. 그들은 율법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정작 자신들은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진짜 목적은 할례받은 이방인의 숫자로 자신들의 업적을 자랑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시말해 개종시킨 사람의 숫자, 할례받게 한 사람의 숫자로 자신의 종교적 권위를 세우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이 아니라 자기 자랑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적용
오늘 우리에게 적용
그러기에 우리 각자도 한번 생각해 봐야 한다.
우리는 때때로 신앙을 '겉으로 보이는 것'으로 증명하려 합니다. 교회 출석 횟수, 봉사 시간, 성경 읽은 양, 기도 시간... 이런 것들이 물론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것들이 나의 신앙을 '자랑하기 위한 도구'가 된다면 문제입니다.
SNS에 교회 사진을 올리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이 '나 이렇게 신앙생활 잘하고 있어'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새벽기도에 나가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나 새벽기도 하는 사람이야'라고 인정받기 위한 것이라면 점검해 봐야 합니다.
유대주의자들의 문제는 외적 형식 뒤에 숨은 진짜 동기였습니다. 박해를 피하려는 두려움, 실적으로 자랑하려는 욕심.
우리도 우리의 종교적 행위 뒤에 숨은 진짜 동기를 점검해야 합니다.
내가 이것을 하는 이유가 정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인가? 아니면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는 것인가?
혹은 '이 정도는 해야 그리스도인이지'라는 종교적 강박인가?
거짓된 자랑을 분별하라는 것은 결국 우리 마음의 동기를 점검하라는 것입니다.
겉으로 좋아 보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진짜입니다.
둘째, 오직 십자가만 자랑하라 (14-15절)
둘째, 오직 십자가만 자랑하라 (14-15절)
유대주의자들의 거짓된 자랑을 폭로한 후, 바울은 자신이 자랑하는 것을 선언합니다. 14절입니다.
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이 말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당시 십자가가 어떤 것이었는지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는 로마 제국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처형 방식이었습니다. 로마 시민은 십자가형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십자가는 노예, 반역자, 최악의 범죄자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가장 잔인하고 혐오스러운 형벌'이라고 불렀고, '로마 시민의 눈과 귀와 생각에서 멀리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십자가를 '유일한 자랑'이라고 선언합니다. 이것은 당시 상식으로는 충격적인 말이었습니다.
마치 오늘날 누군가가 '나는 빨간 줄이 그어진 전과 기록이 내 유일한 자랑입니다” 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왜 바울은 이렇게 말했을까요?
바울에게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이 가장 완전하게 드러난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지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화해했습니다.
십자가에서 우리의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세상이 수치로 여기는 바로 그것이 바울에게는 구원의 능력이요, 자유의 선언이요, 새 창조의 시작이었습니다.
보통은 전과 기록을 숨기고 싶어한다. 하지만 바울은 그것을 드러낸다.
왜냐하면 그 죄패에 적힌 죄목은 내가 지은 것인데, 그 형벌은 예수님이 대신 받으셨다는 사실이 너무나 감격스럽기 때문이다.
그그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이 말은 바울과 세상 사이에 십자가가 있다는 뜻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바울은 세상에 대해 죽었고, 세상도 바울에 대해 죽었습니다.
더 이상 세상의 가치관, 세상의 기준, 세상의 인정이 바울을 지배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십자가로 인해 세상으로부터 자유해졌습니다.
15절은 이것을 더 명확히 합니다.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음받은 것만이 중요하니라."
메시지 성경은 이 부분을 이렇게 번역합니다. "할례를 받았느냐 안 받았느냐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전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느냐입니다."
'새로 지음받은 것'이라는 표현에서 '새로(καινός, 카이노스)'는 단순히 시간적으로 새롭다는 뜻이 아닙니다. 질적으로 완전히 다르다는 뜻입니다. '지음받다(κτίσις, 크티시스)'는 창세기의 천지창조에 사용된 단어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완전히 '새롭게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적용
오늘 우리에게 적용
청년 여러분, 세상은 끊임없이 자랑할 것을 요구합니다. 어느 대학 나왔어? 어디서 일해? 연봉이 얼마야? 뭘 가지고 있어? 세상은 이런 것들로 사람의 가치를 매깁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기준에 맞추기 위해 숨 가쁘게 달립니다.
그런데 바울은 말합니다. '나는 오직 십자가만 자랑한다.'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십자가를 자랑한다는 것은 '나의 무능함과 그리스도의 충분하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나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나는 스스로를 의롭게 할 수 없습니다.
나는 스스로 가치 있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나를 구원하고, 의롭게 하고, 가치 있는 존재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세상은 이렇게 않는다. 이런 사람은 세상속에서 인정받지 못한다.
세상은 '나도 뭔가는 있어야지', '내 노력도 좀 인정받아야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복음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너의 노력으로는 안 된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미 다 이루어졌다.
십자가를 자랑한다는 것은 또한 '세상의 기준으로부터 자유해지는 것'입니다.
바울이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말한 것처럼, 십자가는 우리를 세상의 가치관에서 해방시킵니다.
더 이상 세상이 정한 성공의 기준, 세상이 요구하는 자랑거리에 매달리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정체성은 스펙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여러분의 가치는 연봉이 아니라 십자가의 사랑으로 결정됩니다.
여러분은 이미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유일한 자랑입니다.
셋째,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살라 (17절)
셋째,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살라 (17절)
바울은 편지를 마무리하면서 강렬한 선언을 합니다. 17절입니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흔적'으로 번역된 헬라어 '스티그마타(στίγματα)'는 매우 의미심장한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당시 여러 맥락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첫째, 노예의 낙인을 가리켰습니다. 도망친 노예나 범죄를 저지른 노예에게는 주인의 표시가 몸에 새겨졌습니다. 이 낙인은 '너는 이 주인의 소유다'라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건 과거 우리나라에도 마찬가지였다. 도망치다 잡히 노예의 얼굴에 불로 지지거나 먹물로 글자를 새겼다. 그래서 누가 보더라도 그 사람이 누구에게 속한 사람인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둘째, 군인의 문신을 가리키기도 했습니다. 로마 군인들은 자신이 섬기는 장군의 이름이나 표시를 몸에 새겼습니다. 이것은 충성의 표시였습니다.
셋째, 종교적 헌신의 표시였습니다. 어떤 신전에 헌신한 사람들은 그 신의 표시를 몸에 새겼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예수의 흔적'은 무엇이었을까요? 고린도후서 11장에서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위해 겪은 고난을 나열합니다.
고린도후서 11:18에서 바울은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한다.
18 여러 사람이 육신을 따라 자랑하니 나도 자랑하겠노라
22 그들이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냐 나도 그러하며
23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26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바울은 이 흔적들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것이 자신의 정체성을 증명한다고 선언했습니다.
유대주의자들은 '할례'로 자신의 정체성을 증명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예수의 흔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증명합니다. '나는 예수님의 사람이다. 이 흔적이 그 증거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는 말은 최종적인 권위의 선언입니다.
'내 사도직을 의심하지 말라. 내 복음을 의심하지 말라. 이 흔적이 모든 것을 증명한다.' 노예의 낙인이 '이 사람은 이 주인의 것'이라고 증명하듯, 바울의 흔적은 '나는 예수님의 것'이라고 증명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적용
오늘 우리에게 적용
청년 여러분, 여러분의 삶에 예수님의 흔적이 있나요? 물론 우리 모두가 바울처럼 매를 맞고 감옥에 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외적인 박해의 흔적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삶에는 분명히 흔적이 생깁니다.
예수님의 흔적은 복음 때문에 감수한 불편함일 수 있습니다.
정직하게 살기로 했기 때문에 놓친 기회, 주일을 지키기 위해 포기한 것들,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해 감수한 손해...
예수님의 흔적은 세상 가치관과 다르게 살아서 받는 낯선 시선일 수 있습니다.
'왜 그렇게까지 해?', '너무 유난 떠는 거 아니야?'라는 소리를 들어본 적 있나요? 그것도 흔적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흔적은 내면의 변화일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분노했을 상황에서 참게 되었다면, 예전에는 용서할 수 없었던 사람을 용서하게 되었다면, 예전에는 불가능했던 사랑을 하게 되었다면... 그것이 성령께서 새기신 예수님의 흔적입니다.
질문을 던져봅시다. '내 삶 어디에 예수님 때문에 생긴 흔적이 있는가?' 만약 어디에도 없다면, 우리는 정말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 것인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반드시 흔적을 남기기 때문입니다.
넷째, 모든 믿는 자 안에 있는 예수님의 흔적
넷째, 모든 믿는 자 안에 있는 예수님의 흔적
여기까지 말씀을 들으면서 이런 생각이 드는 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대단한 사람이니까 예수님의 흔적이 있지.
나는 그렇게 대단한 믿음을 가진 것도 아니고, 복음을 위해 고난받은 적도 없는데... 나에게도 예수님의 흔적이 있을까?'
저는 확신을 가지고 말씀드립니다.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는 예수님의 흔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특별한 사람만의 특권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은 모든 자녀에게 주어진 은혜의 표지입니다.
성경이 이것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1.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흔적
1.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흔적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 고백은 바울 개인의 특별한 경험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모든 믿는 자의 영적 현실을 선언한 것입니다.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헬라어가 완료 수동태로 되어 있습니다.
쉽게 말해 이것은 과거에 일어난 사건이 지금도 지속적인 효력을 가진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순간, 우리의 옛 자아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습니다. 이것이 가장 근본적인 '십자가의 흔적'입니다.
여러분, '나는 바울처럼 대단한 일을 한 적이 없는데...'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순간, 우리 모두는 이미 십자가 사건에 참여한 것입니다.
이것은 감정이나 느낌의 문제가 아니라, 영적 사실입니다.
2. 새로운 피조물이 된 흔적
2. 새로운 피조물이 된 흔적
고린도후서 5장 17절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그리고 오늘 본문 갈라디아서 6장 15절도 같은 말씀입니다.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음받은 것만이 중요하니라."
주목할 점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에서 바울은 '흔’적(17절)보다 '새 창조'(15절)를 먼저 언급합니다.
왜냐하면 새 창조가 더 근본적인 흔적이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피조물' 으로 번역된 원어의 의미는 창세기의 천지창조처럼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전혀 새로운 것을 창조하셨다는 뜻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 자체가 예수님이 내 안에 역사하신 흔적입니다.
아직 변화가 많이 느껴지지 않더라도, 씨앗이 심어진 것은 사실입니다.
3. 성령이 내주하시는 흔적
3. 성령이 내주하시는 흔적
고린도전서 6장 19절입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안에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로마서 8장 9절도 보겠습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바울의 흔적은 외면에 있었지만, 성령은 내면에 거하십니다.
'전'으로 번역된 헬라어 '나오스'는 성전의 지성소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가장 거룩한 장소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은 모든 믿는 자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예수님의 흔적입니다.
바울에게는 몸의 상처가 있었고, 우리에게는 마음 안에 계신 성령이 계십니다. 성령은 우리가 느끼든 못 느끼든 계십니다.
이것은 약속에 근거한 사실입니다.
4.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은 흔적
4.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은 흔적
에베소서 1장 13-14절입니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 성령은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인치다'라는 헬라어 '스프라기조'는 소유권과 보호를 표시하는 봉인을 의미합니다.
고대에 왕이 문서에 인장을 찍으면 그것은 왕의 권위와 보증을 나타냈습니다.
성령의 인침은 '너는 하나님의 것이다'라는 소유권의 표시입니다.
바울의 흔적이 '나는 예수님의 종이다'를 외적으로 보여줬다면, 성령의 인침은 '너는 하나님의 자녀다'를 영적으로 확증합니다.
이것은 취소될 수 없는 하나님의 서명입니다.
5. 성령의 열매라는 흔적
5. 성령의 열매라는 흔적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갈라디아서 5장의 성령의 열매는 6장의 스티그마타와 연결됩니다.
열매는 나무의 본질을 드러냅니다.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열리고, 포도나무에서 포도가 열리듯이,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사람에게서는 성령의 열매가 맺힙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흔적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완벽하지 않아도 됩니다. 열매는 시간이 걸립니다.
예전보다 조금이라도 더 인내하게 되었다면, 조금이라도 더 용서할 수 있게 되었다면 그것이 예수님의 흔적입니다.
작은 변화도 성령의 역사의 증거입니다.
-설태성 선교 담배를 줄인것
6.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되는 흔적
6.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되는 흔적
고린도후서 3장 18절입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변화하여'라는 헬라어가 현재 수동태로 되어 있습니다. 지금도 진행 중인 변화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궁극적 목표입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빚어가시는 것입니다. 완성은 아직이지만, 과정 자체가 예수님의 흔적입니다.
우리는 완성품이 아니라 '작업 중(work in progress)'입니다. 변화의 속도가 느려도, 방향이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다면 그것이 흔적입니다.
바울만의 특권이 아닙니다
바울만의 특권이 아닙니다
정리하겠습니다. 바울의 흔적은 외적이고 드라마틱했습니다.
돌에 맞고, 매 맞고, 감옥에 갇히고...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나는 저런 경험이 없는데, 나에게도 예수님의 흔적이 있을까?'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바울에게는 박해로 인한 상처가 있었지만, 모든 믿는 자에게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흔적이 있습니다.
바울에게는 몸에 새겨진 자국이 있었지만, 모든 믿는 자에게는 성령으로 인치심 받은 흔적이 있습니다.
바울에게는 고난의 증거가 있었지만, 모든 믿는 자에게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 흔적이 있습니다.
바울에게는 사도직의 표지가 있었지만, 모든 믿는 자에게는 성령이 내주하시는 흔적이 있습니다.
바울의 흔적은 눈에 보이는 것이었고, 우리의 흔적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더 영구적입니다.
결론: 내 안의 흔적을 확인하라
결론: 내 안의 흔적을 확인하라
그렇다면 내 안에 있는 예수님의 흔적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요? 몇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첫째, 죄에 대한 민감함이 생겼습니까? 예전에는 아무렇지 않던 것이 이제는 마음에 걸린다면, 그것이 성령의 흔적입니다. 죄를 지었을 때 마음이 불편하고, 회개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그것은 여러분 안에 성령께서 일하고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둘째,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있습니까? 예배드리고 싶고, 말씀 읽고 싶고,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그것이 새 생명의 흔적입니다. 그 갈망이 항상 강하지 않더라도, 그 마음 자체가 성령께서 주신 것입니다.
셋째, 작은 변화라도 있습니까? 조금 더 참게 되었고, 조금 더 용서하게 되었고, 조금 더 감사하게 되었다면, 그것이 성령의 열매의 흔적입니다. 작은 변화도 무시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의 일하심의 증거입니다.
넷째, 넘어져도 다시 일어납니까? 실패해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하나님께 돌아온다면, 그것이 자녀 된 흔적입니다. 탕자가 아버지께 돌아온 것처럼, 우리가 실패 후에도 하나님께 돌아가려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입니다.
청년 여러분, 이제 세 가지를 기억하며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첫째, 거짓된 자랑을 분별하십시오. 외적 형식이나 종교적 실적으로 나의 신앙을 증명하려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마음 깊은 곳의 동기를 점검하십시오.
둘째, 오직 십자가만 자랑하십시오.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십자가의 기준으로 나의 정체성과 가치를 세우십시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셋째, 예수님의 흔적을 확인하고 또 더 새겨가십시오. 이미 우리 안에는 예수님의 흔적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살린 흔적, 성령으로 인치심 받은 흔적, 새로운 피조물 된 흔적이 있습니다. 이 흔적을 발견하고, 날마다 이 흔적이 더 깊어지기를 구하십시오.
바울은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고 선언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선언할 수 있습니다. '나에게는 예수님의 흔적이 있습니다.
비록 눈에 보이지 않지만,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고,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나의 정체성입니다.'
18절의 축복으로 마치겠습니다.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
결국 이 모든 것은 은혜로 시작하고 은혜로 완성됩니다.
흔적은 우리의 노력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은혜 안에 거할 때 자연스럽게 새겨지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여러분의 심령에 가득하시기를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