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대신 나를 지킨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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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서론
선택의 기준 – 복음인가, 나인가
선택의 기준 – 복음인가, 나인가
우리의 인생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오늘 저녁 무엇을 먹을지 같은 사소한 선택부터,
침묵할 것인가 말할 것인가,
편한 쪽을 택할 것인가 불편하더라도 진리를 택할 것인가 하는 선택까지
우리는 매일 수많은 갈림길 앞에 서 있습니다.
문제는 그 선택의 순간에 우리가 무엇을 기준으로 선택하느냐입니다.
복음을 선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나를 지키는 선택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오늘 본문은 그 질문을 우리에게 던집니다.
갈라디아서 2장에서 베드로는 믿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복음을 몰라서가 아니라
복음 대신 자신을 먼저 지키는 선택을 했습니다.
본론
본론
1. 복음보다 자신을 지킨 선택 – 베드로의 외식
1. 복음보다 자신을 지킨 선택 – 베드로의 외식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의 문제는이방인을 차별한 행동 이전에,
복음보다 자신의 입장과 안전을 먼저 지킨 선택이었습니다.그 선택이 외식이 되었고, 결국 공동체를 흔들었습니다.
교회안에 직책 직분을 가지거나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반적 직책과 직분과 마찬가지로 책임이 주어지는 자리 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망각 하면 오늘 13절에 결과가 나타 나게 됩니다.
베드로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다른 유대인들에게 당할 핀잔 같은것이 두려워 그들을 멀리 합니다.
베드로는 이방인 들이 죄인이 아닌것을 알고 있습닌다. 복음안에서 은혜안에서 구원받는 자라는것을 알며 자신도 그러한 자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다른 유대인들은 아직 이방인을 죄인으로 봅니다. 그러한 유대인들에 시선이 두려운겁니다. 베드로는..
베드로 율법어긴 죄인들과 어울리네 민족에 배신자네 어쩌고 저쩌고 하는 소리들이 두려운 겁니다. 그래서 그자리를 떠낟고 베드로와 함께 하던 유대인들도 베드로와 함께 자리를 뜬겁니다. 그러다 옆에 있던 바나바도 자리를 뜬겁니다.
한 사람의 권위자가 직책 직분자가 복음을 부끄러워 하듯 다시의 일신을 선택 하니 다른 자들도 그와 같은 선택을 합니다.
베드로는 보내심을 받은 사도라는 권위를 받은자 였습니다.
2. 권위의 자리와 책임 – 한 사람의 선택이 남기는 영향
2. 권위의 자리와 책임 – 한 사람의 선택이 남기는 영향
권위의 책임은 아직 믿음이 연약한 자들에 대한 책임 입니다. 말씀을 복음을 맡은자의 책임 입니다.
본래는 말씀이 권위 인것이고 그 말씀을 전하는 베드로에게 말씀의 권위가 덧입혀진 것이며 주어진 것입니다.
사람의 행위를 보지않는것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베드로가 복음보다 자신의 일신을 위해 처신을 위해 두려움때문에 외식하였다고 해도 유대인들과 바나바는 복음을 따랐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연약합니다. 언제든 유혹 당할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로 모인것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돕기 위해서 입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바나바는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으나 연약함이 없던게 아닙니다. 여러분 성경에 믿음이 충만한 사람도 복음이 아닌 자신의 일신을 생각하게 된겁니다. 베드로의 행동에 영향을 받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서로를 위해 삼가하며 조심해야 합니다. 스스로 복음을 지켜나가는 것이 말씀을 지켜나가는 것이 교회를 지켜나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 모두 말씀의 권위를 받은자 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에게는 책임이 있습니다. 말씀을 살아낼 책임이 있습니다.
3. 외식이 만드는 분위기 – 은혜 위에 기준이 세워질 때
3. 외식이 만드는 분위기 – 은혜 위에 기준이 세워질 때
인생은 수많은 선택에 연속입니다. 오늘 저녁은 뭘먹을지 내일은 어떤 옷을 입을지 이런 사소한 선택부터 웃을지 화를낼지 감정의 선택까지 많은 선택앞에 놓입니다.
그많은 선택중에 복음과 다른것 사이에서 선택을 두게 된다면 우리는 말씀을 복음을 선택해야 합니다.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베드로는 사도로써 말씀을 전하는 복음을 전하는 말씀의 권위를 위임 받은 자였습니다.
그의 선택으로 다른 이들이 영향 받았습니다.
말씀을 살아갈때 우리에게 입혀진 권위가 드러나며. 그럴때 교회가 교회되며 성도가 성도되어 우리안에 이미 주어진 생명이 드러나며 흘러가게 됩니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바울은 이런 베드로를 만났을때 베드로가 복음이 아닌 자신을 택한 것을 꾸짖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은 베드로 당신은 복음안에서 은혜로 말미암아 율법에 메이는 것이 아닌 자유함을 누리면서 당신은 유대인들 에게 이러저런 책잡히는게 두려워서 이방인들과 함께 있던 자리를 피하면 그들에게 율법과 할례를 지켜야 구원을 얻는다는 말을 하는거 아니냐 라는 겁니다.
베드로가 복음 알면서도 자신을 선택 함으로 이방인에게 전해진 구원의 자유가 율법과 할례로 묶이게 되는 상황이 되는 겁니다.
베드로가 나를 위해 한 선택이 베드로와 함께 하던 유대인들과 바나바에게 영향을 주어 외식하는 선택을 하게 하였고
또한 이방인들에게 복음의 자유가 아닌 율법과 전통으로 묶임 당하게 만들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우리에 모습입니다. 대사도 베드로가 자신의 일신 안위 처신을 위해 스스로를 선택했고 성경에서 믿음이 충만 하던 바나바도 그영향으로 외식하는자 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이와 비슷한 장면들을 우리는 쉽게 봅니다.
말로는
“구원은 은혜입니다. 예수님이면 충분합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교회 안에 들어와 살아가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이런 분위기가 만들어집니다.
“그래도 이 정도는 해야 믿는 거지.”
“그래도 이 정도는 살아야 성도지.”
아무도 말로는
“예수님만으로 부족하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행동과 분위기로는
예수님 위에 무언가를 더 얹어야 안심이 되는 신앙을 만들어 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베드로의 외식이 오늘 우리에게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믿음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복음을 몰라서도 아닙니다.
복음 대신 나를 지키는 선택,
그 선택이 쌓이고 쌓여
어느새 다른 사람을 묶는 기준이 되고,
율법처럼 작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외식이란 믿음을 고백하지만, 그 믿음대로 살지 않는 상태입니다. 저 또한 말씀처럼 외식을 하게 되는 선택을 많이 하게 됩니다.
여러분께서도 그러한 순간들이 있으실겁니다.
기독교인이란 무엇입니까?? 말씀으로 살아가는자 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다가와 십자가로 우리를 구원 하셨습니다. 그의 죽으심 으로 죄사함을 받았고 그의 부활로 영생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성령이 우리 에게 오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그리고 성령이 오신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였노라
성령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며 하나님의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승천후 성령께서 오심은
하나님께서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부활로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것으로 우리가 구원 받았다로 끝내지 않습니다.
성령이 오셔서 우리에게 진리를 하나님의 것을 알려주십니다. 말씀을 알려주십니다.
기억하십니까 히브리서에 징계 라는 단어가 등장 하는데 이단어는 가정교육 이며 아버지로써 우리를 자라게 하신 다는 겁니다.
우리는 구원받고 끝이 아니라 천국 가니까 마음대로 산다가 아니라 주님다시 오실때 까지 말씀으로 살아내는 자녀로 자라나게 하신다는 겁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우리는 영원한 사귐으로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을 삼위의 그 관계를 있는 모습 그대로 보게 될겁니다.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하나님의 사랑 십자가의 사랑의 이유 입니다.
온전함 하나되는 관계속으로 침밀함으로 우리가 함께 들어가는겁니다. 그것을 위해 십자가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아들삼으시고 징계 가정교육 해서 우리를 말씀으로 살아가는 아버지의 뜻으로 살아가는 아들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그러한 분들 입니다. 그러니 자신이 아닌 복음을 선택 하십시오 여러분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영원한 것을 아버지로 부터 상속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함께 그 영원한것 영광을 누리길 원합니다. 외식하지 마시고 말씀을 살아내는 우리가 되길 도전합니다.
말씀을 살아낸다는 것은 결국 삼위의 하나님의 그침밀한 관계 가운데 더가까이 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더욱 가까이 살아가는 삶이라는 겁니다.
복음을 선택 한다는 것이 그런 얘기 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선택 하는 것은 자유함을 누리는 삶이 됩니다.
4. 복음의 본질 – 은혜를 폐하지 말라
4. 복음의 본질 – 은혜를 폐하지 말라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니가 지금 외식함으로 이방인을 율법에 매이게 한것이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똑같이 이방인들과 죄인으로 드러나는게 우리에게 죄가 더해지는 것이냐?? 은혜 결국 그 안에서 사하여지고 의롭게 되는거 아니냐??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율법으로 으로워 지지 못했다 그들은 율법밖에 있던자라 하나님 없이 살아가던 자이며 너희는 율법을 가지고도 율법으로 의로워 질수 없던 연약함 이었다. 그런데 지금 너는 나는 저들과는 다르다는 행위로 외식을 하였고 결국 그것은 율법을 다시 세우는 것이 아니냐? 너는 지금 은혜안에 있는것이냐?? 아니면 율법을 세우는 자가 된것이냐
너의 외식이 율법을 세우게 되었고 그러므로 은혜가 아닌 율법으로 인해 스스로 범법한 자가 된것이다.
이것이 복음대신 나를 택한 선택의 결과 입니다. 그결과는 미련함입니다. 율법이 아닌 은혜 그 사랑안에서 의로워 지며 죄의 삯인 사망이 도말되었는데 지금 다시 스스로 외식 함으로 율법을 세우는 꼴이 되어 율법에 기준앞에 서게 된겁니다.
우리는 모두 스스로 의로워 질수 없던 자들입니다. 하나님에게선 먼자 입니다. 그것이 에베소서의 말씀의 내용중 하나입니다.
그러한 자들이 하나님의 사랑 은혜로 의로워 졌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이며 은혜가 무엇이냐면 나두면 내비두면 사망이결과 인 우리에게 찾아와 두드리신 역사입니다.
예화??
결론
결론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 복음을 선택하는 삶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 복음을 선택하는 삶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바울은 베드로에게 복음을 제시합니다. 베드로가 몰랐던게 아닙니다. 놓치게 된겁니다.
20절 내가 사는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자신의 일신과 안위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리스도께서 사니느 것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복음으로 복음이 내안에 산다는 겁니다.
베드로 니가 선택한 그것이 지금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다 말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 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삶에서 얼마나 많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었다라고 고백하는지 모릅니다. 여러분스스로에게 들이내는 신앙에 잣대 타인에게 들이대는 신앙에 잣대로 고백하는 것이며
여러분은 복음을 선택하십니까 나를 선택 하십니까?? 예전에는 회식 자리에서 술안먹는 것이 복음을 선택 하는 것으로 많이 이야기 되었습니다.
복음은 뭔가를 지키고 안하고 하고의 내용보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리스도안에서 의인 이며 구원받은 자녀 라는 내용입니다.
내가 이러한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입니다. 내가 어떠한 모습인지 어디서 구원받은 건지 원래 어디에 놓여있던 자인지에 대한 올바른 시선입니다.
그래서 나의 행동과 삶과 말로 행위가 강요되는 십자가의 은혜 구원이 아닌 종교적 행위 전통 관습이 전해지고 강요 되고 정죄로 조건으로 작용 하게 되는것을 바로보시길 바랍니다.
갈라디아교회에 율법으로 할례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 하는 말들과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켜야 그리스도인이지”라고 말하는 것들,
이 말들이 어디서 갑자기 생겨난 게 아닙니다.
베드로처럼 복음을 알면서도
복음 대신 자신을 지키는 선택,
말로는 부인하지 않지만 행동으로는 물러난 그 선택들이
교회 안에서 쌓이고 쌓여
마침내 하나의 기준이 되고, 하나의 말이 되고, 하나의 가르침처럼 굳어져 버린 겁니다.
처음에는 누구도
“예수만으로 부족하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예수만으로는 불안해지고,
예수 위에 무언가를 더 얹어야 안심이 되는 신앙이 된 겁니다.
그래서 은혜 위에 조건이 붙고,
복음 위에 행위가 올라가고,
자유 위에 기준이 세워지게 됩니다.
바울이 분노한 이유는
갈라디아 교회가 율법을 지키기 시작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복음 외에 다른 안전장치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이건 갈라디아 교회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 역시
“이 정도는 해야 믿는 거지”
“이 정도는 살아야 구원받은 거지”
라는 말을 너무 쉽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복음 대신 나를 지킨 선택이
교회 안에서 어떻게 교리가 되고,
기준이 되고,
사람을 묶는 율법이 되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