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부흥을 향한 갈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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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본문해설
I. 본문해설
원하건대 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 주 앞에서 산들이 진동하기를
불이 섶을 사르며 불이 물을 끓임 같게 하사 주의 원수들이 주의 이름을 알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로 주 앞에서 떨게 하옵소서
주께서 강림하사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두려운 일을 행하시던 그 때에 산들이 주 앞에서 진동하였사오니
주 외에는 자기를 앙망하는 자를 위하여 이런 일을 행한 신을 옛부터 들은 자도 없고 귀로 들은 자도 없고 눈으로 본 자도 없었나이다
[1. 하나님의 영광을 목격한 자의 시선]
이사야서의 주제는 하나님의 영광의 신학이다. 이사야는 선지자로서 소명을 받을 때에 비범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고 자기가 얼마나 추루한 죄인인지를 깨달았다(사 6:5).
그러나 이사야가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을 깨닫고 자기가 끔찍한 죄인임을 알게 된 바로 그 지점에서 선지자로 부르셨으니 이는 하나님의 시각에서 자신과 이스라엘을 정확히 보게 된 사건이었다(사 6:8).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심판의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하도록 부름을 받았으나 하나님은 그들의 강팍한 마음 때문에 선지자가 전하는 바를 깨닫지 못할 것이라고 예고하셨다(사 6:10).
이사야는 자신이 쓴 선지서의 마지막 부분에서 하나님께서 분명히 심판자로서 임하실 것이나 회개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서는 자비와 사랑과 은총을 베푸실 것을 약속하셨음을 말한다(사 63:7).
더불어 선지자는 주의 거룩한 땅을 짓밟아 더럽힌 이방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구한다(사 63:15).
그러면서 하나님의 법도와 믿음의 길에서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이켜 다시 거룩하신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하늘로부터 임하는 부흥을 달라고 간구한다(사 63:17).
II. 하늘을 가르고 임하시는 주
II. 하늘을 가르고 임하시는 주
이에 이사야 선지자는 자신이 받은 말씀의 마지막 부분에서 부흥을 구한다. 선지자는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마음과 하나님의 영광을 갈망하는 그 사이에서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하나님께서 이 땅에 친히 임하시는 부흥을 간구한다.
원하건대 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 주 앞에서 산들이 진동하기를
불이 섶을 사르며 불이 물을 끓임 같게 하사 주의 원수들이 주의 이름을 알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로 주 앞에서 떨게 하옵소서
그러면서 이사야는 일찍이 어떤 선지자도 표현하지 못했던 강력한 문체로 하나님이 주시는 부흥, 아니 하나님 자신이 이 땅에 친히 강림하시는 비상하리만치 탁월한 영적 회복의 역사를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기도로써 간구한다.
지난 시간 나누었던 두 가지 기도 제목을 잠시 상기하고 세 번째 기도 제목을 나누고자 한다.
첫째로, 주의 이름을 알게 해달라고 간구한다(사 64:2). 이사야 선지자는 영적으로 잠들어 있는 이스라엘과 그들의 원수인 이방의 백성들이 모두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알게 해달라고 간구한다.
여기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이란 그분의 존재와 성품의 탁월성을 가리킨다.
이는 하나님의 존재에 있어서 그 어떤 피조물과도 비교될 수 없는 초월적 절대자시라는 뜻이며 또한 성품에 있어서 인간과는 달리 도덕적으로 완전하시다는 의미다.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깨달을 때 거기에는 그 깨달음에 합당한 반응이 반드시 뒤따라온다.
창조주이시자 절대자이신 하나님의 존재에 있어서는 자신이 지극히 미천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의존성을 갖게 된다.
도덕적으로 탁월한 하나님의 성품에 있어서는 자신이 도덕적으로 비참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어 두려움음 갖게 해준다.
우리는 피조물이요 죄인됨의 깨달음 속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된다.
둘째로, 하늘을 가르고 심판해 달라고 간구한다(사 64:2-3). 이사야 선지자는 당시 절망적인 영적 상황을 보면서 심장이 터질 것 같은 비통한 마음을 가지고 특별한 기도를 드린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것은 이스라엘에게서나 이방인들에게서나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불붙는 아픔을 느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주 기도를 통해 상황을 바꾸고자 하지만 종종 하나님은 기도하는 과정을 통해서 기도자를 바꾸고자 하신다.
그런데 기도자를 바꾸는 기도는 매우 특별해야 한다. 일상적으로 드리는 기도, 마음이 실리지 않은 습관적 언어의 반복으로는 결코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
쇳덩어리 같은 마음이 불 같은 성령의 감화와 열렬한 기도에 힘입어 온전히 녹아내려 버려야 한다. 그리고 자기가 철저히 깨어지는 경험을 통해서만 기도자는 새 사람으로 변화된다.
특히 이사야 선지자와 같이 하나님께서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는 강력한 부흥을 간구하는 사람들은 기도하기 이전에 먼저 자신이 온전히 그분의 뜻에 합당하게 변화되도록 자신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봉헌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그의 기도에는 힘이 있었고, 삶과 일치되었기에 신령한 능력으로 충만하였다. “하나님이 함께하는 한 사람. 그가 바로 부흥을 위해 불쏘시개처럼 쓰실 사람이다.”
이러한 일에 대하여 한국 교회사에 길이 남을 웅변과 같은 하나의 실례가 있다. 그것은 원산 대부흥의 사건과 이어서 일어난 그 유명한 평양 대부흥이다.
1903년 원산 대부흥의 사건은 후일 1907년 평양 대부흥의 불쏘시개가 되었다. 하디 선교사의 공개적 회개는 그 당시 서양인 선교사로서는 전례가 없는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 사건을 계기로 조선인들에게는 개인의 죄에 대한 공개적 자백이 부흥 집회의 자연스러운 한 흐름이 될 수 있었다.
1907년 1월 2일(수요일)-1907년 1월 15일(화요일)까지 약 2주간에 걸쳐 그 유명한 평양 대부흥의 계기가 있었다. 그것은 이름하여 평안남도 도사경회였는데. 장대현 교회에서 열렸다.
이게 왜 수요일부터 시작됐냐 하면은 1월 1일 날은 신년 하례식이 있잖아. 그걸 마치고 그 다음에 평안 남도 각처에서 이제 평양까지 오려면 시간이 걸리잖아. 그렇게 해가지고 이제 수요일날 그래놓고 이제 일요일 일요일에도 아예 자기네 교회를 가지 않고 거기서 모여서 사경회를 했던 거죠.
오전에는 지식의 수준에 따라 초급, 중급, 고급반으로 나누어 성경 공부를 하고 오후에는 노방 전도를 하였으며, 저녁 때는 저녁 집회와 기도회 등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때는 마침 평양에 있던 신학교가 방학 중이었기에 교수 선교사들이 각반을 나누어 열심히 가르쳤다. 장대현 교회의 집회가 시작된 후 열흘이 지났다. 그러나 하늘은 마치 교회를 솥뚜껑으로 덮어놓은 것 같은 답답함으로 가득하였다.
사경회 시작 후 약 열흘이 지난 1월 12일(토요일) 선교사 윌리엄 블레어(1876-1970)가 고린도전서 12장으로 설교할 때 약간의 은혜가 있었으나 다음날 다시 냉랭해졌다. 그리하여 선교사들은 1월 14일(월요일) 정오에 특별한 기도회를 가졌다. 그들의 마음은 한결같은 다짐으로 모두 하나가 되었다.
그들은 비록 서로 바라지는 않았지만 한마음이었다. “오늘 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지 아니하며 우리는 끝장이다.”
드디어 사실상 마지막 집회 일인 1월 14일 저녁 시간이 되었다. 그날 밤 마지막 집회가 끝나면 이튿날 폐회 예배를 드리고 모두 흩어질 참이었다.
그날 마지막 저녁 집회 설교자는 선교사 윌리엄 헌트(1869-1953)였다.
당시 기독교계는 1905년 을사늑약을 두고 선교사들과 국내 지도자들 사이에 심각한 균열 현상이 생겨났다.
장대현 교회 많은 청년과 지도자들은 기독교 신앙이 나라를 구하기 위한 구국운동으로 이어지길 간절히 원했다.
그리하여 일부 과격파들과 민족주의자들은 교회가 적극적으로 의병 활동이나 무력 투쟁을 지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에 반해 선교사들의 입장은, 본국의 지시를 따라 철저한 정교분리의 원칙을 고수하였다.
한일 합방이 1910년도에 있기 전에 먼저 외교권을 박탈하고 그다음에 통감부를 설치하지. 조선총독부의 전신이지. 그런데 이걸 늑약이라고 하는 이유는 뭐냐면 강제로 맺은 조약이라는 뜻이야. 그래서 왕의 도장도 안 찍히고 그냥 어거지로 만든 말하자면, 그 억지조약이라고 했다는 거죠.
그리하여 선교사들은 설교와 권면을 통해 “일본 사람들에 대한 미움을 버리라 혹은 권세 잡은 자들에게 순복하라”는 메시지를 전했는데 이는 한국인 성도들에게 커다란 배신감같이 있을 수 없는 반감을 갖게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윌리엄 헌트 선교사는 최근 자신이 사냥을 즐기다 실수로 총이 오발되는 바람에 자신의 손가락을 다치는 사건을 겪는 것을 예화로 들면서 말했다.
“손가락 하나 다쳤을 뿐인데 그 아픔 때문에 온몸이 열이 나고 밤새도록 쑤셔서 한숨도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지금 우리 교회가 그렇습니다. 우리가 다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형제 한 사람이 미워하고 죄를 지으면 그것은 그 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의 몸 전체가 병들고 아파서 죽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서로 반목하는 것은 바로 우리를 스스로 쏘아서 상처를 입히는 것 같습니다.”
이 설교가 끝난 후 집회장은 눈물바다가 되었다. 이것은 정확한 역사적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적으로는 여전히 무엇인가? 결정적인 장벽이 여전히 무너지지 않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설교후에는 미국 북장로교 파송 선교사인 그레엄 리(1861-1916)가 기도회를 인도하였다.
그는 당시 장대현 교회의 담임 목사로서 평양 신학교의 교장이던 동료 선교사 사무엘 마펫과 함께 평양 선교를 주도하고 있었으며 길선주를 발굴하여 장로로 세운 인물이기도 했다.
1907년 1월 14일 마지막 저녁 집회 후에 기도회가 이어졌습니다. 기도회의 인도자로 나선 그레암 리 목사는 집회 분위기가 무겁고 영적인 싸움이 치열하다고 판단하여 “참으로 기도하고 싶은 사람만 남고 나머지는 집으로 돌아가라”고 공식적으로 알렸다.
그러자 900명의 교인들이 떠났고 집회장소에는 약 600명의 신자들만이 남아서 기도회를 이어갔다. 시간이 흘러 기도회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그때 장대현 교회 수석 장로인 길선주가 강대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리고 그 누구도 예상하지 않을 수 없었던 뜻밖의 고백을 했다.
“저는 아간과 같은 자입니다. 나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집에 은혜의 복을 내릴 수 없습니다. 저는 친구 김준형이 죽어가면서 유산을 정리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이를 실행하는 과정에서 당시 미화 약 100불을( 그 당시에 어느 정도 가치가 있었는지 커다란 기와집 두 채를 살 수 있을 정도의 돈이 지금으로 따지면 얼마쯤 될까? 한 30억에서 40억 정도 되는 돈이지.) 편취하였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속였고 친구를 속인 도둑입니다. 내일 아침 날이 밝는 대로 그 돈을 친구의 미망인에게 돌려주겠습니다.”
이 말을 마친 후 그는 바닥에 엎드려 처철하게 통곡하기 시작했다. 이때 그 자리에 있던 600명의 회중은 엄청난 충격과 함께 하늘이 열리며 임하시는 성령의 강력한 임재를 체험하였다.
훗날 당시 상황에 대해서 윌리엄 블레어 선교사는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다.
“마치 누군가가 지붕을 걷어낸 것처럼 모두 하나님 앞에 발가 벗겨진 채 서 있는 느낌이었다.”
또한 길선주 장로의 죄 고백 이후에 그레함 리 선교사가 전체 회중들에게 통성 기도를 요청하였을 때 거기 있던 600여 명의 회중들을 일제히 열렬하게 기도하기 시작했다. 같은 기도였지만 아까와는 다른 영적인 힘이 강력하게 느껴지는 기도였다. 그때 그 기도의 현장을 목격한 당사자로서 블레어 선교사는 자신의 선교 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기도의 소리는 마치 커다란 파도 소리 같았고 떨어지는 폭포수 소리와 같았습니다. 그것은 혼란스러운 잡음이 아니라 형언할 수 없는 비탄의 화음을 이루며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이날 밤 성령의 역사는 기쁨과 환희가 아니라 두려움과 고통으로 나타났다. 사람들은 마룻바닥에 몸을 던지고 주먹으로 바닥을 치며 통곡하였다. 그들은 그들은 마치 자신들의 영혼이 찢겨나가는 것과 같은 고통을 경험하였고 어떤 사람들은 죄책감으로 너무나 괴로운 나머지 몸을 비틀며 데굴데굴 구르기도 하였다.
그레함 리 선교사는 처음에 이 광경을 목격하고는 너무나 놀랐으며 이것이 ‘혹시 마귀의 장난이 아닌가’ 하여 그러한 행동들을 제지하려 했다. 그러나 곧 그것이 “하나님께서 거기 모인 자들의 죄를 수술하시는 거룩하고 두려운 장면임을 깨닫고 그 광경에 압도되어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하였다.
지극히 열렬한 기도가 점차 잦아들게 되었을 때 집회에 참석한 자들은 스스로 견딜 수 없다는 듯이 한 사람씩 줄지어 강대상 앞으로 나와서 자신의 죄를 공개적으로 자백하였다.
그것은 단순히 일반적인 의미에서 “죄를 지었습니다”라는 수준의 내용들이 아니었다. 살인과 강도, 간음과 축첩, 선교사들에 대한 미움 등 끔찍한 죄악들이 낱낱이 줄지어 토설되었다.
그 당시 교인들이 강대상으로 나와서 죄를 회개하던 광경에 관하여 블레어 선교사는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다.
“사람들은 마치 총에 맞은 듯이 뒤로 넘어가기도 하였고 어떤 이들은 숨이 막힐 듯한 죄책감의 고통을 이기지 못해 땅바닥에 쓰러져 의식을 잃기도 했다. 어떤 남자는 기도하다가 너무나 격렬하게 몸을 치며 통곡한 나머지 탈전하여 기절했다.”
그레함 리와 블레어 선교사는 새벽 2시가 되어서 더 이상 자신의 죄를 고백하러 강대상으로 나오는 사람들이 없음을 확인하고 성도들을 진정시켜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때까지 자리를 뜨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성도들은 너무나 많이 울어서 통통 부은 눈으로 깜깜한 평양에 늦은 밤거리를 걸어서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놀라운 일은 이튿날 1907년 1월 15일 화요일에 일어났다. 다음의 이야기는 윌리엄 블레어가 쓴 자신의 책 『한국의 오순절 대부흥』과 선자교사 조지 맥퀸(1873-1941)의 선교 보고서에 근거한 것이다.
그것은 진정한 부흥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경험하고 난 성도들의 인격과 삶에 맺힌 윤리적 열매였다. 그 열매는 아주 구체적이었는데. 크게 네 가지로 나타났다.
첫째로는 훔친 돈과 물건의 반환이었다. 블레어 선교사의 요리사는 아침에 일찍 찾아와서 고백했다. “제가 선교사님 부엌에서 설탕과 밀가루 등을 몰래 빼내 가져갔습니다. 그 값을 변상하겠습니다.”
훔친 물건을 주인에게 돌려주는 행렬이 이어졌다. 물건이 없어졌으면 돈으로 갚았고 심지어 몇 년 전에 훔친 물건이나 주인조차 기억하지 못한 사소한 물건까지 들고 와서 사죄하는 일이 줄을 이었다. 길선주 장로도 약속한 대로 그날의 횡령했던 돈을 즉시 갚았다.
둘째로는 상인들의 정직 운동이었다. 당시 평양의 기독교 상인들 중에는 중국 상인과 거래하며 도량형 (말,되, 저울)을 속여 부당이득을 취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부흥 집회에서 회개한 조선 상인들은 이튿날 중국 상인들을 찾아가 고백했다. “내가 이제껏 저울을 속여 당신에게 손해를 끼쳤습니다. 차액을 돌려드리겠습니다.” 이 말을 듣고 많은 중국 상인들은 “조선 야소교 교인들이 미쳤나 보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셋째로는 갈등하던 인간관계의 화해였다. 당시 사회적으로 억눌려 있던 며느리들이 시어머니에게 불효하며 대들고 위협했던 죄를 회개하였다. 또한 시어머니들도 며느리를 학대한 죄를 회개하였다. 갈등하던 가족들 간의 놀라운 화해가 이루어졌다.
어떤 성도는 자기에게 빚진 자를 찾아가서 말했다. “내가 당신을 미워하고 모질게. 빚을 독촉했던 것을 회개합니다. 이제 빚은 안 갚아도 좋으니 꼭 예수를 믿으십시오.” 그리고는 그 사람 앞에서 빚 문서를 찢어버렸다.
넷째로는 사법기관의 업무 마비였다. 부흥에서 하나님을 만난 성도들 중 많은 사람들이 경찰서에 가서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자수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평양 지역을 관장하고 있던 한 경찰서장이 기독교 인사에게 한 말을 통해서 잘 드러난다.
“당신네 교인들 때문에 우리 업무가 엉망이 되었소. 도둑들이 제 발로 경찰서를 찾아와 훔친 물건을 내놓고 자수하는 바람에 유치장이 꽉 차버렸단 말이오... 지난 몇 달 동안 일어난 변화가 우리가 경찰력을 총동원하여 몇 해 동안 해온 것보다 더 낫소”
이사야 선지자는 말한다. “...주의 원수들이 주의 이름을 알게 하시며 이방나라들로 주 앞에 떨게 하옵소서”(사 64:2). 이것은 거룩한 부흥을 강구하는 선지자의 동기를 보여준다.
그것은 원수들과 이방 민족들이 주의 이름을 알게 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정확히 알고 떨며 회개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마땅히 그분을 경배하게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거룩한 인격의 특징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기를 갈망하는 것이다.
매일매일 하나님과 교회를 위하여 섬기며 살아가는 일은 마땅히 일상적으로 해야 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결코 그것만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온 세상 사람들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엎드려 경배하지 않는 것이 우리에게는 천추의 한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마음의 커다란 고통과 눌림이 되어야 한다(롬 9:1, 고후 11:28).
이것이 바로 이사야 선지자가 그러한 현실을 뒤집어 엎을 수 있는 하나님의 임재, 지상적 강림을 갈망한 이유였다. 이것이 바로 부흥을 간구하는 순수한 동기다.
부흥. 그것은 단지 교회의 성장을 위한 것도 아니고 결코 어려운 주의 일을 쉽게 실행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
나는 지난해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가진 국제적인 단체의 대표와 간부들을 만난 적이 있었다.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해야 할 심각성에 대해 그 단체의 관계자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던 중 나는 깜짝 놀랐다. 목사님 이스라엘 인구 중 15%만이 신의 존재를 인정합니다. 85%는 불행하게도 철저한 무신론자 들입니다.
나는 모두 이스라엘 사람들이 뜨겁게 신앙생활 하지는 아니할지라도 최소한 85% 정도는 신의 존재를 인정할 줄 알았지만 실상 너무나 달랐다. 정말로 충격이었다.
이런 선교적 상황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가. 소득 수준이 높을수록 종교에 대해 무관심해진다는 것이다. 결국 세속적으로 번영하면 번영할수록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그래서 지금도 뜻있는 사람들은 유대인에 대한 선교적 사명감을 에 불타서 치열하게 선교를 하고 있다. 그런데 투입된 인력과 비용에 비하면 성과는 괄목할 만하지 않다.
이때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야말로 친히 하늘을 가르고 이 땅에 강림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의 부흥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 일이 있기 전 먼저 자신을 기도의 제물로 드려야 한다. 그리고 제물이 되기 위해서는 죽어야만 한다. 우리가 그분의 애통하시는 마음에 참여하며 함께 가지고 큰 통곡과 많은 눈물로 부흥을 위한 피 끓는 기도를 드려야 한다.
아직 육신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도 못한 이사야 선지자도 그들이 하나님을 모르는 것에 대하여 그토록 가슴이 찢어질 정도로 애달프게 울부짖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분의 어떤 사랑을 우리에게 주셔서 영광스러운 구원에 이르게 하셨는지를 아는 우리가 조국 교회와 이방 나라의 부흥을 위해 애끓는 기도를 어찌 드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C. 주님을 앙망하게 하소서
C. 주님을 앙망하게 하소서
주 외에는 자기를 앙망하는 자를 위하여 이런 일을 행한 신을 옛부터 들은 자도 없고 귀로 들은 자도 없고 눈으로 본 자도 없었나이다
셋째로, 이 일을 위해 우리는 주님을 앙망하여야 한다. 부흥은 하나님께서 홀로 행하시는 거룩한 역사를 보여준다. 참된 부흥일수록 거기에는 어떤 인간적 요소가 섞여 있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 홀로 이 일을 시작하지 않으신다. 거기에는 반드시 먼저 거룩하신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들이 있고 하나님은 그들을 사용하셔서 일하신다.
그래서 부흥을 어디든지 나갈 수 있는 기차에 비유한다면, 기도는 부흥이라는 그 기차를 달릴 수 있는 철로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들의 목숨을 건 간절한 기도가 바로 부흥이 달려갈 철길이다.
이처럼 1907년 평양 대부흥의 도화선이 되었던 길선주장로는 원래 관성교 곧 관성제군을 섬기는 도교의 한 분파에서 종교활동을 하던 사람이었다.
관성교는 삼국지에 나오는 영웅 관우를 단순한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 충성심과 의리를 관장하는 최고의 신으로 모시는 종교다.
관성제군은 곧 관우. 장군을 신으로 숭배하는 사상이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들어온 시기는 1592년 임진왜란에 파병된 명나라 군인들을 통해서였다.
이 종교가 처음에는 국가와 왕실, 군인들을 중심으로 전파되었으나 19세기 이후에 조선 후기로 갈수록 민간으로 깊이 파고들어서 관성교라는 형태로 발전을 거듭했다.
특히 고종 황제는 왕권 강화와 국가 수호를 위해 관우를 신으로 모시는 신앙을 적극 검증하고 그때까지 관우를 관왕에서 황제인 관제로 격상하였다.
이 무렵 중국에서 옥추경, 각세진경, 명성경과 같은 도교 경전들이 대거 유입되어 민간에 널리 퍼지면서 관성교는 더욱 대중적으로 파고들었는데 길선주가 이 종교에 심취한 것도 이때였다.
길선주는 1869년 평안남도 안주근 후장면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그에 부친 길봉순(1836-1905)은 무관 출신으로 안주 지역에서는 꽤나 덕망 있는 유지였다.
이처럼 유복한 가정환경 때문에 길선주는 생계에 대한 염려 없이 글공부와 종교적 구도 생활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는 비상하리만치 총명하여 4살 때 부터 한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7세 때 이미 『동몽선습』, 『통감』 등을 떼었을 정도였다.
그리하여 10대 시절에는 사서삼경을 비롯한 유교의 모든 경전을 통달했다. 그는 11세 어린 나이에 7살 연상의 아내와 결혼하였는데 어린 나이에도 가장으로서 품위와 위엄을 갖추려고 노력하였다고 한다.
그는 진리에 대하여 알고자 하는 갈급함이 매우 커서 산속에서 기도로 밤을 꼬박 새우기도 하였다.
또한 밤을 새워가면며수만 번씩 옥추경의 주문을 외우기도 하였다.
길선주는 친구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여 호방하고 의리가 있는 사람이었다.
길선주가 관성교에 심취하게 된 동기는 진리에 대한 관심 외에 육체적인 것도 있었다. 그는 10대 후반부터 원인 모를 병악함으로 고생하였는데 종교를 통해서 병도 낫고 불로장생하고자 하는 열망이 매우 강했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산신 기도를 드렸으나 만족하지 못하다가 마침내 19세 때 당시 평양의 유명한 도인이었던 김치구를 찾아가 관성교에 입문하였다.
김치구는 그에게 관성교의 핵심 경전인 옥추경을 가르쳐 주었고 주문을 외우는 수련. 신의 힘을 빌려 초인적 능력을 발휘하는 차력술. 단전호흡을 통해 기를 운영하는 법을 배웠다.
그 시기에 길선주는 깊은 산속에 들어가서 21일, 49일, 100일 기도를 드리는 등 치열하게 수행 생활에 매진하였다.
그는 건강을 완전히 회복했고 그리스도께로 회심하기 전까지 평양에서 “길도사”로 불릴 만큼 상당한 도력을 갖추게 되었다.
길선주에게 최초로 직접적으로 대면하여 복음을 전해준 사람은 선교사가 아니라 절친한 친구이자 도교 수련의 동반자, 곧 같은 도반이었던 7살 연상의 김종섭이었다.
김종섭은 원래 한학자이자 열렬한 도교 수행자였으나 1895~96년 사이에 새무엘 마펫 선교사를 만나 먼저 기독교로 개종했다.
1896년 어느 날 길선주가 28세이던 때에 도반 김종섭이 그를 찾아가 참으로 심각하게 말했다.
“이보게 우리가 지금까지 불로장생을 위해서 도를 닦았지만 그것은 다 헛된 것일세. 나는 이제야 참된 길을 찾았네. 예수를 믿어야 참된 구원과 영생을 얻을 수 있다네.”
그러면서 그는 길선주에게 마펫 선교사에게서 받은 기독교 서적 두 권을 내밀었다. 한 권의 책은 『이도여론』이라는 책이었는데. 그것은 당시 유교와 기독교를 비교하여 기독교의 우월성을 설명한 책자였다.
그리고 또 다른 한 권의 책은 당시에도 이미 세계적인 고전이 된 영국의 청교도 설교가 존 번연(1628-1688)이 쓴 『천로역정』이었다.
그가 처음 복음을 전해주었을 때 길선주의 반응은 냉담함과 분노였다. 길선주는 김종섭에게 화를 내며 쏘아붙였다. “형이 서양 귀신에 홀렸구먼 우리가 10년 넘게 닦은 도를 버리고 오랑캐 종교를 믿다니.”
그러나 김종섭은 포기하지 않고 “이 책들을 한 번만 읽어보게” 라며 간곡히 부탁하고 돌아갔다. 그 후로도 김종섭은 수시로 끈질기게 찾아와서 “나를 봐서라도 그 책들을 한 번만 읽어보게” 라고 간청하였다.
길선주는 김종섭의 끈질긴 간청과 지적 호기심 때문에 때문에 두 권의 책을 읽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는 그 두 권의 책을 읽음으로써 관성교에 깊이 젖어 있던 그의 정신세계에 뜻하지 않은 균열이 찾아오게 되었다.
길선주는 『천로역정』을 읽으면서 기독교도가 멸망의 도시를 떠나 천성을 향해 가는 여정에 깊이 매료되었다. 왜냐하면, 그동안 세상을 떠나 도교 속에서 자신이 추구하던 구도의 여정과 너무나 흡사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19세기에 중후반에 활동했던 중국 청나라의 기독교 학자인 장한(1810-1876)이 쓴 또 다른 책인 『이도여론』의 한문판을 읽으면서 기독교의 하나님이 이도 곧 공자와 맹자의 도인 유교나 자신이 믿는 도교의 신보다 더 근원적인 존재임을 논리적으로 설득력 있게 전개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길선주는 지적으로 어느 정도 기독교에 설득되었으나 마음으로는 두려움과 번민으로 가득 차 약 1년의 시기를 보내게 되었다.
그때 길선주는 심적으로 갈등이 너무나 극심한 나머지 신경쇠약에 걸려 죽을 것 같은 정도의 고통을 겪었다.
그의 마음을 지배한 것은 깊은 두려움이었다. 만약 자신이 예수를 믿으며 지금까지 섬겨온 관성제군이 진노하여 자기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수시로 엄습했다.
결국 길선주는 산에 들어가서 기도도 하였지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 기도의 대상이 수시로 바뀌는 웃지 못할 모순을 경험했다.
그는 산속에서 “관성제군이시여 흔들리는 저를 붙잡아 주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하다가 문득 “하나님이시어 나에게 참된 도를 알게 해주소서”라고 열렬히 기도하였다.
그 후 김종섭은 도교와 기독교 사이에서 갈 바를 정하지 못하고 탈진할 정도로 괴로워하던 길선주를 데리고 가서 새무얼 마펫 선교사와 만나게 해주었다.
그 첫 만남은 길선주가 회심하기 수개월 전엔 1897년 초 평양 넓다리 굴에 있던 마펫 선교사의 사랑방에서 이루어졌다.
이 첫 만남에서 길선주는 10년이 넘게 도를 닦은 조선인 도인과 서양 선교사 간의 치열한 진리의 문답을 보여주었다.
그의 질문은 날카로웠다. 당신들이 말하는 하나님과 우리가 믿는 유교나 도교에서 말하는 상제가 같은 존재입니까? 다른 존재입니까? 만약 같다면 왜 내가 굳이 서양 종교를 믿어야 합니까? 또한 사람이 죽으면 영혼은 어디로 가며 사람이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는 이치는 왜 도대체 무엇입니까?
폭포수처럼 계속되는 질문에 대해 마펫 선교사는 유창하지는 않았지만 진실한 한국어로 하나씩 차분하게 답변을 했다.
선교사는 논쟁에서 이기려고 하기보다는 성경을 직접 펼쳐서 하나님의 말씀을 보여주면서 인간의 죄,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등 복음의 핵심을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마펫은 길선주의 눈빛에서 진리를 향한 뜨거운 갈망을 보았고 따라서 선교사는 그를 매우 정중하고 인격적으로 대우하였다.
길선주는 마펫의 답변을 듣는 과정에서 논리적 완벽함보다는 그 선교사의 인격과 확신에 찬 태도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리고는 스스로 이렇게 생각했다. “저 서양 사람의 눈에는 거짓이 없다. 자기가 믿는 신에 대한 확신이 가득하다.”
이 만남을 통해 길선주는 일단 서양인에 대한 막연한 반감을 거두고 기독교가 알아볼 가치 있는 종교로 인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두 종교 사이에 확실하게 갈 길을 정하지 못하고 방황하던 길선주는 극심한 신경쇠약이 점점 더 악화되는 것을 경험하면서 심적으로 육체적으로 피가 마르는 고통에 심히 시달렸다.
그리하여 더 이상 인격적으로 정신적으로 던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한계를 경험한 길선주는 “살든지 죽든지 오늘밤 끝장을 보겠다”는 각오로 목숨을 건 마지막 담판 기도를 드리기로 결심한다.
1897년 8월 15일 늦은 밤부터 새벽까지 길선주의 목숨을 건 처절한 기도가 계속되었다. 기도 장소는 평양에 있는 자신의 집 건넌방이었다.
그는 무릎을 꿇고 부르짖었다. “지존하신 하나님이시여. 당신이 정말로 살아계신 신이시라면 지금 제게 증거를 보여주시옵소서. 제 마음의 괴로움을 없애주시고 저를 만나 주십시오. 만약에 오늘 밤 응답이 없다면 저는 내일 아침 다시 관성교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날 새벽 1시경, 길선주의 간절한 기도가 절정에 도달했을 때 강력한 성령의 불같은 임재의 체험을 하였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나타났다.
그가 간절히 기도하는 중에 방 안에서 청아한 휘파람 같은 소리가 들리더니, 공중에서는 총소리 같은 커다란 굉음이 들려왔다. 그 후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길선주야. 길선주야. 길선주야.”
그 소리에 놀라서 눈을 뜨는 순간 천장에서 붉은 기둥 같은 불덩어리가 내려와 그가 있는 방 안을 대낮처럼 환하게 비췄다. 잠시 후 그 불덩어리가 가슴을 뚫고 들어오는 듯하더니, 온몸이 불타는 것처럼 뜨거워졌다.
이때 길선주는 등골이 빠질 것 같은 고통과 함께 그동안에 억눌렸던 죄책감이 터져 나왔다. 길선주는 방바닥을 치며 통곡하기 시작했다. 그는 방안을 구르며 통회하면서 하나님을 찾았다. “아이고 하나님 제가 죄인입니다. 제발 저를 살려주십시오.”
한참 동안 울며 회개한 후 길선주의 마음속에 있던 관우에 대한 두려움과 온갖 번뇌가 씻은 듯 사라지고 놀라운 평화와 말할 수 없는 기쁨이 찾아왔다.
그 순간 길선주는 깨달았다. 자신이 그토록 두려워했던 관우가 이제는 아무것도 아닌 한낱 우상 덩어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날이 밝자마자 길선주는 자신이 10여 년 동안 생명처럼 아끼던 옥추경을 비롯한 도교의 서적들, 부적, 그리고 관우의 위패 등을 마당에 쌓아놓고 모두 불태워 버렸다.
이 소각 사건은 평양성 안에 큰 뉴스거리였다. 그 소식을 들은 시민들은 길도사가 미쳐서 곧 신벌을 받아 죽을 것이라고 수군거렸다.
그러나 길선주는 오히려 더 건강하고 환한 얼굴로 거리에 나타나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 시작하였다.
길선주는 회심한 다음 해인 1898년 마펫 선교사에 의해 평신도 지도자인 영수에 임명되었고 동시에 조사(전도사)로서 임명되어 활동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그의 나이 34세에 한때 도반이던 김종석과 함께 평양 장대현 교회 장로로 선출되어 장립을 받았다.
1903년, 34세에 평양 신학교 제1회 입학생으로 들어갔고 4년 뒤인 1907년 38세 졸업을 한 후 첫 사역지로 선교사 그레암 리의 뒤를 이어 평양 장대현 교회 담임 목사가 되었다. 이는 한국인이 세운 교회의 첫 번째 한국인 위임 목사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길선주는 60대가 넘어서도 쉬지 않고 전국을 순회하며 부흥회를 인도하였다. 그의 생애 동안 약 1만 7천 회의 설교를 했고 약 380만 명에게 복음을 전한 것으로 추산된다.
1919년 독립선언문에 민족대표 33인 중 기독교 대표로 서명하여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눈이 거의 보이지 않는 시각장애와 지병인 고혈압에 시달리면서도 설교 사역을 계속하였다.
1935년 11월 26일 평안남도 강서군 고창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던 길선주는 마지막 날 새벽 기도회 설교를 마친 후 축도를 하려고 강단에 서 있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다.” 는 말을 남기고 곧 거기서 쓰러졌다.
그는 곧바로 숙소를 옮겨졌으나 오전 9시경 성도들이 부르는 찬송가 “잠시 세상에 내가 살면서 항상 창송 부르다가”를 들으며 66세를 일기로 하늘나라로 부름을 받았다.
그것이 바로 죽는 순간까지 복음을 전하다간 한국 교회의 영적인 거목의 마지막이었다.
이처럼 하나님은 절망 중에서 당신의 얼굴을 간절히 찾고 갈망하는 이에게 당신이 친히 임재하시는 부흥을 부어주신다.
적용과 결론
적용과 결론
산기슭을 오르던 농부가 목덜미 뒤로 흐르는 땀을 닦으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햇볕이 내리쬐는 맑은 하늘이었다.
그는 이 더운 날에 물지게를 지고 오르막길을 오르기를 수십 번, 한나절이 지나고 있었다.
그는 산등성에 있는 자신의 논에 모내기 할 물을 길어 나르는 중이었다.
하늘만 바라보며 천수답 농사를 짓는 그에게 모내기천에 비가 오지 않는 것은 고문과 같은 것이었다.
결국 그는 계곡 아래 비탈길을 걸어 내려갔다. 가뭄에 개울물도 말라가고 있었다.
그 물도 시원치 않아. 그곳을 바가지로 소리를 내며 물을 긁어. 담고는 물지게로 산등성이를 타고 날라 자신의 논에다가 부었다.
하루 종일 물지게를 졌더니, 어깨에 살이 벗겨져. 피가 비치는데 논바닥은 물을 부은 흔적만 남을 뿐이었다.
그러나 두어 마지기의 천수답에 가족의 생계가 달렸기에 그는 포기할 수 없었다. 이태 전 양식이 없이 지내는 겨울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물지게를 지고 한 걸음 걷다가 하늘 한 번 쳐다보고, 논바닥에 물을 부으면서도 푸른 하늘에서 구름을 찾았다.
그러나 농부의 슬픈 눈에 들어오는 것은 서럽도록 푸른 하늘뿐이었다.
땅거미가 어스름할 때 농부는 어깨에 흐르는 피를 닦으며 언덕을 내려왔습니다. 주름으로 굵게 패인 볼에 흐르는 눈물을 투박한 주먹으로 훔치면서 말이다.
이튿날 아침 일찍 다시 물지게를 지고 집을 나오려는데 순식간에 바람이 불면서 하늘 가득 먹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이윽고 온 땅이 컴컴해지더니, 천둥소리와 함께 소낙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농부는 환호성을 질렀다. 비가 온다. 비. 비. 비...
모처럼 시원한 빗줄기가 수정발처럼 산하를 드리웠다. 1시간이 넘도록 장대 같은 소낙비가 쏟아지고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맑게 개었다.
농부는 자신의 논을 찾아 언덕을 뛰어 올라갔다. 자신의 논마다 가득 고인 물은 모내기를 하기에는 너무나 차고 넘쳐서 아랫논으로 물길을 터주어야만 했다.
오늘날 우리는 비 오기 전 농부와 같이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 많이 애쓰지만 열매는 적고 지혜를 동원하지만 우리 앞에 있는 결과는 우리를 슬기롭다고 말해주지 않는 것 같다.
교회가 전하는 불변의 복음을 변화하는 사회가 쉽게 받아들여 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는 대다수의 교회에선 폭발적인 성장이 아니라 원래의 규모를 유지하는 일도 벅차게 느껴질 정도로 복음 사역은 벽에 부딪히고 있다.
우리는 효과적인 복음 사역과 교회의 성장을 위하여 많은 방법들을 강구하지만, 선교적인 상황도 만만하지는 않다.
무엇보다 조국 교회 안에서 죄를 책망하고 사람을 중생하게 하는 성령의 역사가 사라지고 있다.
인간 심령의 본질적인 변화가 없고 또 그런 변화를 기대조차 하지 않는 문화 현상으로서의 기독교가 대중화된 채 소비되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거룩한 은혜의 방편들은 앙상하게 형식만 남은 채 많은 성도들이 신령한 은혜 속에서 거룩한 삶을 살게 하는 도구로서의 역할을 못하고 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결여된 형식적 예배. 세상의 즐거움과 자기 만족을 찾기에 골몰한 것처럼 느껴지는 교회 생활이 일반화되고 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세상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복음의 능력을 구제나 사회사업으로 대신하려는 목회 방향 같은 것들은 조국 교회의 목회가 얼마나 피상적인지를 보여준다.
우리에게는 특별한 부흥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하늘을 열고 부어주시는 거룩한 은혜의 소낙비가 필요하다.
교회를 다시 부흥의 능력으로 무장시키고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방편들이 찬란하기를 바라며 사람을 근본적으로 고치고 교회를 새롭게 하실 쏟아부으시는 그분의 긍휼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부흥이다.
교회의 역사는 오늘날 같이 서럽도록 하늘이 푸르른 날에 부흥의 단비를 내려 주시던 기록들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그렇게 영광스러운 부흥의 소낙비가 내리기 전에 항상 대다수 사람들은 생각지도 못했던 위대한 하나님의 일을 기대하며 간구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놀랍게 다가올 거룩한 부흥의 서막을 알리는 한 조각의 구름이었다. 어쩌면 이 설교를 듣고 있는 당신과 내가 그런 위대한 일의 도구가 될 수 있다.
나는 이제 부흥에 관한 한 편의 시를 읽음으로써 설교를 마치고자 한다.
부흥이 오지 않아도 우리는 항상 하나님을 섬길 것입니다.
한 편의 설교로 수많은 죄인들을 거꾸러뜨릴 수 있는 능력이 없어도
수많은 사람이 일시에 회심하는 축복이 없을지라도
우리는 진리와 양심을 따라 설교하고 가르칠 것입니다.
우리가 파송한 선교사들이 1년에 단 한 사람밖에 구원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기도하며 후원할 것입니다.
부흥이 오지 않아도 우리는 전도할 것입니다.
하루 종일 지체들과 함께 온 동네를 발이 부르트도록 전도하러 다녀도
단 몇 사람의 결신자조차 못 얻는다 할지라도
우리는 죽는 날까지 그 일을 계속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울면서 그 일을 할 것입니다.
서럽도록 하늘이 푸른 날에는 부흥의 소낙비를 내려 주시도록...
위의 설교를 준비할 때 주경신학적 관점에서 무엇을 알아야 할까요?
위의 설교를 준비할 때 성경신학적 관점에서 무엇을 알아야 할까요?
위의 설교를 준비할 때 역사신학적 관점에서 무엇을 알아야 할까요?
위의 설교를 준비할 때 조직신학적 관점에서 무엇을 알아야 할까요?
위의 설교를 준비할 때 실천신학적 관점에서 무엇을 알아야 할까요?
위 설교를 위해 교양학문적 소양(도서관 십진 분류법을 기준)으로 무엇을 알아야 할까요?
이 설교문을 듣는 청중들에게 기대할 수 있는 변화를 디모데후서 3장 15-17절 말씀을 근거로 답변해 주세요.
설교문을 바탕으로 PPT 슬라이드를 제작해 주세요.
설교문을 바탕으로 설교 나눔을 위한 질문지를 만들어 주세요.
설교문을 1000글자로 요약 정리해 주세요.
